8가지 키워드로 정리하는 현대 민화 경향과 스타일Ⅰ

최근 우리 민화화단이 안고 있는 가장 큰 과제의 하나는 민화의 영역을 보다 넓고 다양하게 가꿔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과제의 실현을 위해서는 오랫동안 민화화단의 주류를 이뤄온 전통 재현민화의 맞은편에 전통 민화의 소재와 기법 정신을 바탕으로 작가의 개성과 동시대의 가치를 담은 새로운 민화, 이른바 ‘창작민화’의 줄기를 세워야 한다. 최근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과제에 동참하면서 현대 민화의 경향은 짧은 시간 내에 눈에 띄게 풍부해지고 다양해 진 것이 사실이다.
그 중에는 현대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젊은 작가들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전통 재현민화로 일가를 이룬 중견 작가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민화는 여전히 많은 작가들에게 적지 아니 낯설고 불편한 영역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창작민화가 이미 분명하게 민화화단의 한 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인 한, 이를 현대 민화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월간<민화>는 현대민화의 경향을 많은 작가들과 공유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는 현대 민화의 경향을 8가지 유형으로 분류, 알기 쉽게 이해하는 기획을 준비했다. 그러나 여기서 제시하는 8가지 분류는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상의 분류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 현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여러 작가들의 많은 작품을 텍스트로 사용하고 작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창작활동의 배경들을 가급적이면 상세하게 기술하려고 노력했다. 이 기획은 창작민화가 아직 낯선 작가들에게는 현대민화의 경향에 대한 이해의 기회를, 창작민화에 관심이 깊은 작가들에게는 새로운 시도의 계기를 마련해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 특집은 총 2회로 나누어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 구성, 글 문지혜 기자


1. 사물


작가들은 평범해 보이는 사물 속에서 다채로운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어린 시절 추억과 소망부터 못다 이룬 꿈까지 사물 하나하나에 소중히 불어넣는 순간,
평범했던 일상 속 사물은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열어젖히는 황금열쇠로 탈바꿈한다.

창작의 안테나를 세워라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간단명료한 접근법 중 하나가 ‘사물’이다. 작가들이 특정 사물을 선택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대개 자신만의 염원, 추억 등 마음 속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가장 잘 함축한 소재를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발견은 평소 염두에 두었던 부분에서 비롯되기에 일상 속에서 자연스레 이뤄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일례로, 김민성 작가는 우연히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만든 자수 작품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자수 속 도상을 민화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보자기, 복주머니, 베개 등 전통 규방문화 속 자수는 실제로 수를 놓은 듯 붓끝에서 섬세히 되살아났고 평면에 수놓인 규방공예의 도상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매김했다(도1).
손유영 작가는 단원 김홍도의 <황묘농접도>를 그리면서부터 고양이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황묘농접도>를 모사하는 과정에서 점점 고양이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고양이의 눈동자와 털 하나하나를 그리며 마음도 편안해졌다”고 회상하는 그는 모사에서 시작해 어렸을 적 키워보고 싶었던 동네의 길고양이, 최근 다녀온 해외여행까지 소재의 범위를 점진적으로 확장하며 그만의 테마를 발굴해왔다(도2).
아모레퍼시픽 설화수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활발히 진행 중인 김경희 작가의 작품 세계는 ‘화병’으로 함축할 수 있다. 화병 시리즈의 시작은 책가도 속 화병도를 발견하면서부터인데 “무엇가를 균형 있게 모아 담고, 채워 넣고, 감싸 안은 그릇의 온화함에 매료됐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우리의 달항아리의 넉넉한 포용력이 있는 형태에 따듯함을 느껴 달항아리의 조형미에 민화적 문양부터 에펠탑까지 이국적인 상징물을 접목하며 새로운 실험을 진행 중이다(도3).
이처럼 ‘자신만의 사물’을 발견한 작가들은 일상 속에서 금맥을 캐는 예리한 관찰자들이다. 항상 지나다니던 길목을 걷는다든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모사 작업을 한다든지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면서도 늘 창조적 안테나를 곧게 세운 덕택에 가장 자기다운 소재를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인의 은유법은 그림에도 적용돼

이와 동시에 사물을 활용하기 위해선 낭만적 시인이 되어야 한다. 각 사물들의 물리적 특징과 감각 등을 개인적인 추억이나 바람, 꿈과 함께 통합적인 방법으로 결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호수’라는 은유적 표현은 비단 시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해도 감정으로 인해 마음이 요동치거나 평온할 때의 상태를 호수의 물결로 빗대어 직관적으로 비유한 것처럼, 소재와 작가의 메시지 사이에서 내적 관련성을 파악하는 원리는 그 과정이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문선영 작가에게 ‘베갯모는 사랑이고 추억’이다(도4). 화면 가득 차곡차곡 쌓아올린 베개마다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 가족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담아냈다. 옛날 어머니들이 베갯모에 길상의 문양을 수놓으며 가족들이 꿈속에서라도 평안하길 바랐듯 베갯모를 그려넣으며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심었던 것이다.

정학진 작가에게 괴석은 마음 속 안식처이다(도5). 질박미와 강인함을 갖춘 괴석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미적 조형물이자, 작가가 추구하는 내면의 모습이다. 일례로 <심원의 정원>에 그려진 괴석은 혼잡한 세상 속에서 그의 중심을 굳건히 해주는 안식처이자 꿈의 정원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이지현 작가는 현대 키덜트(Kidult) 문화의 대표 사물인 베어브릭에 현대인의 초상을 대입, 팝아트 디자인과 민화의 모티프를 결합해 독창적 작품을 선보인다(도6). 베어브릭은 현대인의 새로운 안식처인 동시에 자화상인 것. 작품에는 전통 진채의 배채 원리를 활용, ‘이중겹구조’라는 독특한 표현기법을 적용해 눈길을 끈다.
정오경 작가는 왕실의 하사품이자 민간의 생활필수품인 부채를 통해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음에 주목, 작품에 다양한 부채를 그리며 행복과 기원의 메시지를 담아냈다. 최근에는 부채가 없었던 이하응의 원본 초상에 부채를 더하고 흉배와 부채 그림을 화면 가득 클로즈업하는 방식으로 사람과 물건 사이의 관계, 상징성을 함축한 ‘선’ 시리즈를 선보인다(도7).

2. 패턴


비슷한 문양이 반복되거나 특정 형상을 이루며 발생하는 ‘패턴’은
때때로 예측을 여지없이 깨뜨린다는 점에서 고난도의 발상을 필요로 할 때도 있지만, 대개 규칙적인 흐름으로
전개하여 도상 속 의미나 미감을 한층 부각한다는 데서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창작 방식이다.

꽃으로 피워낸 해골

패턴은 여러 개의 선이나 문양 등이 교차·반복되며 화면에 일정한 질서와 형태를 부여한다. 우리는 패턴에서 일종의 규칙, 또는 원칙을 발견하고 다음을 예상하게 되며 그 속에서 고정관념을 깨는 ‘뭔가’를 발견할 때 ‘새로운 발견’을 경험하며 흥미를 느낀다.
이지은 작가는 색색의 꽃, 나뭇잎, 줄기 등을 활용해 우아하게 해골을 형상화한 <꽃길> 시리즈를 선보인다(도8).
심리학자들이 ‘게쉬탈트 쉬프트(gestalt shift)’라고 부르는, 하나의 감각정보가 동일하지 않은 여러 개의 의미를 내포한다는 뜻의 이 현상은 소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높은 감수성을 보여주며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가 그릇에 담긴 채소를 통해 사람의 머리를 형성화한 <정원사> 등을 떠올리게 한다. 이지은 작가는 “해골은 보통 죽음과 연관돼 부정적으로 떠올리는 소재지만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면 해골마저도 아름답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그린 작품”이라며 “그저 그때그때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다. 좋아하는 도상, 갖고 싶은 것 등 마음에 충실한 작품을 그릴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두 가지 이상의 도상이 결합하며 만들어진 패턴은 각 도상이 지닌 본연의 의미를 강조할 뿐 아니라, 애초 도상이 가진 이미지와 완전히 다른 해석이라든지 분위기를 이끌어내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창작 방식이다.

반복적 문양에 담긴 영속성과 간절함

패턴을 응용하기 위한 첫걸음은 우리 주위에 있는 패턴들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평소 사용하는 손수건이나 가방 등에 그려진 문양 디자인부터 나뭇가지에 빼곡히 달린 잎사귀들의 질서정연한 풍경,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구름에서 발견하는 얼굴 모양 등 주변의 패턴을 유심히 관찰해보자. 패턴이 지닌 순서나 형태를 세밀히 들여다보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만의 답을 찾아 패턴을 거듭 경험할 때 그 감각을 체득할 수 있게 되고, 패턴의 원리를 자신의 작품에 적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박영희 작가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나무 위에 이파리들이 잔뜩 매달린 것처럼 새들을 그려넣는다(도9). 새들은 모두 날개를 접고 정지하듯 매달린 모습이다. 이는 불의의 사고로 많은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포함해 힘든 상황에 놓인 다른 사람들을 뜻한다. 한편으로는 희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반복적인 패턴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길상의 의미를 부각한 것. 새를 반복적으로 그려 넣은 이유에 대해 박영희 작가는 “나뭇잎 새들은 보다 나은 삶을 바라는 우리 모두의 꿈이다. 내가 많은 새들을 그려 넣은 이유도 꿈을 이루고자하는 간절함 때문이다. 언젠가는 저 새들이 하늘을 날아오르길 기도한다”고 답했다.

정영애 작가는 모란, 연꽃 등의 화훼를 비슷한 크기로 반복·배치하여 기쁨과 행복 등의 추상적 감정을 시각적인 패턴으로 형상화한다. 일례로 <인연>(도10)에서 그린 연꽃은 수많은 연줄기가 질서정연히 같은 듯 다른 모습으로 리드미컬하게 그려져 있다. 작품에 대한 발상은 한밤 중 듣던 음악에서 비롯됐다. 정영애 작가는 작품에 대해 “라디오에서 가수 이선희의 ‘인연’ 노래가 흘러나왔다. 마침 연줄기 하나를 완성했던 찰나에 사람의 ‘인연’을 빗대어 비슷한 모양으로 여러 개를 그리게 됐다”고 떠올렸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일정 간격을 사이에 둔 연줄기 패턴에서 인연을 읽어내는 순간, 송이 송이의 연꽃은 정다운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시詩가 된다.
이은정 작가는 평면적 도상의 반복으로 전통 모시 베개를 입체적으로 표현했다(도11). 흰색 평행사변형은 베개를 감싸는 베갯보로, 작가는 도상 중간에 여러 색의 색종이를 쌓아올린 ‘누누기법’으로 베개 사이사이에 색동 베개를 집어넣었다. 베갯모에 그려진 정교한 민화 도안은 베갯보라는 일정한 틀 안에서 각각의 문양을 이루며 각도에 따라 평면으로, 또는 입체적으로 감상이 가능하다. 수많은 베개들이 질서 정연히 쌓인 가운데 중간 중간에 얼굴을 내민 가지각색의 베갯모는 관람객들에게 풍성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배영남 작가는 재료에 의한 우연성을 살리면서도 순수한 동심을 표현하기 위해 패턴을 활용했다. 그의 근거지인 안동은 천연염색이 활성화 되어 있어 작가 역시 다양한 염색법을 활용한 독창적인 민화를 제작해왔다. 농담을 달리한 먹물, 감염, 쪽염 등 다양한 재료로 면, 광목, 인견, 비단 등을 염색하고 그 위에 분채, 봉채 등의 안료로 문양을 일정 간격 그려 넣는 방식이다. 일례로 <모란과 노닐다>(도12)에서는 인견에 먹염을 한 뒤 모란이 흩날리는 평화로운 공룡시대를 표현한 작품이다. 배영남 작가는 “천을 물에 적셔서 먹을 먹이는데 이 과정에서 물길을 따라 먹이 번진다. 이 모습에서 태평성대의 의미를 떠올렸고, 행복의 의미와 상통하는 모란을 곁들였다.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공룡시대의 원초적 감수성을 표현하기 위해 아이가 그림을 그린 듯 큰 기교 없는 문양을 반복적으로 배치했다”고 말했다.
서은정 작가는 전통민화가 가진 길상, 기복의 의미를 현대에서도 이어나가고자 한다는 의미로 패턴의 장치를 활용했다. 이같은 맥락에서 <서가의 사계>(도13)에서는 책가도를 큐브 모양으로 변형하여 사방으로 겹겹이 쌓아 나간다. 책의 포갑이 연속배열 되어있는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큐브모양 내부에 들어가는 패턴의 경우 기존 전통 책가도에 들어가는 문양들을 그대로 차용했다. 화폭을 메운 큐브 패턴은 각 폭에 그려진 꽃의 도상과 어우러져 현대적이면서도 세련된 미감을 연출한다.

3. 부분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그림을 구상하기가 부담스럽다면
기존의 그림 가운데 일부분을 추출하여 활용해보자.
전체적인 그림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분위기와
이야기에 힘입어 나만의 스토리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음 속 돋보기를 꺼내들어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 글귀는 창작의 발상 노하우를 응축하고 있다. 특정 작품을 그저 무심히 보던 태도에서 벗어나 각 부분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꼼꼼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발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음 속 돋보기를 꺼내보자. 전통민화 작품 가운데 자신만의 미적 관점이나 메시지 등을 담아낼 수 있는 일부분만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그림에 새로운 변화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윤인수 작가는 책가도에서 꽃병이 있는 부분을 단독 조명했다(도14). 그의 선택으로 인해 책가에 무심한 듯 놓인 꽃병이 화폭 속 주인공이 되면서 분위기는 반전된다. 수많은 기물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꽃병이 그 자체의 형태와 색상만으로도 훌륭한 조형미를 발산하며 다양한 꽃, 서가 내 벽면 색상 등과 어우러져 흥미진진한 변주를 선보인다. 책가도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땐 미처 눈에 띄지 않았던 기물의 특징과 매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안지산 작가는 제주문자도의 상단부를 모티프로 낙원의 정경을 환상적으로 펼쳐낸다(도15). 이 덕분에 전통 문자도에서는 문자들의 부차적인 장식배경에 불과했던 도상들이 작품의 중앙을 당당히 차지하며 각 요소들의 미학을 유감없이 내뿜는다.
김숙경 작가는 고사인물도, 신선도, 백동자도, 요지연도에 학을 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나 동자가 들어있는 그림들을 모티브로 주의초 단청 문양 등 동양의 전통문양과 결합한 소품을 제작했다(도16). “아이의 목소리를 빌어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고자 했다”는 그는 병풍 속 다양한 아이들의 도상을 한국, 중국 등 동양의 전통문양과 덧붙여 화려하면서도 심플하게 그려냈다. 대개 화폭 중앙에 아이들이 주제와 연관된 동작을 취하는 간단한 구성인데 주인공의 역동감 넘치는 포즈와 각 작품마다 한 톤으로 통일된 색감이 메시지를 명료히 전달하고 있다.
나유미 작가는 십장생도나 백동자도 등을 각 폭의 주요 소재인 학, 사슴, 동자 등을 모티브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일례로 <한철 - 동자도>(도17)에 등장한 동자들의 머리모양은 전통 백동자도에서처럼 양갈래로 묶은 모습을 묘사했지만 의복의 경우 한국 전통 청색, 홍색 복식을 착용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수많은 아이들이 저마다의 놀이를 즐기며 뛰놀던 백동자도 속 풍경이 단 한 폭의 그림으로 재탄생하며 한층 차분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자아낸다. 마치 실을 직조한 듯 한올 한올 세밀한 붓질로 완성한 독창적인 채색 방식도 눈길을 끈다.

일부를 통해 전체를 말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전체 가운데 일부분을 추출해 작품을 구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일부분을 통해 전체를 담는 방식도 고려할 수 있다. 십장생도, 일월오봉도 등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기에 관람객들은 도상의 일부분만 보아도 모티브가 되는 옛 민화를 상상, 혹은 유추하며 감상할 수 있다. 물론 민화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 해당 작품에 대한 역사적, 의미적 맥락을 파악하기엔 한계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작가가 취사선택한 각 부분의 조형적 미학만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권선경 작가는 특정 기물이나 글자 등에 십장생도의 소재, 책가도의 문양 등을 한가득 그려넣는 방식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도18). “하나하나의 기물마다 마음을 담듯이” 그렸다고 말하는 권성경 작가의 말처럼 정성스레 그려진 그림마다 소망과 행복을 염원하는 마음이 듬뿍 깃들었다. 십장생도 시리즈의 경우 각 부분컷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한폭의 십장생도가 펼쳐진 듯 도상간 상호연결성을 지닌다는 점도 흥미롭다.

4. 화목


까치호랑이, 화조도, 영모화, 문자도 등 민화에는 여러 화목이 존재한다.
각 화목별로 등장하는 소재나 구성방식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어 특정 스타일을 이루는데
이같은 요소들을 응용해본다면 해당 화목과 비슷한 듯, 새로운 매력의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다.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

상징성이 강한 소재와 카테고리별로 양식적 정형성을 지닌 민화의 특성상 화목畵目 그 자체가 작가만의 양식, 혹은 스타일이 될 수 있다. 조은정 미술평론가는 “책가도, 화조화 등으로 대표되는 민화의 다양한 화목과 강렬한 색채, 평면적 구성 등은 ‘이것은 민화’라는 것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일종의 장르가 되며 현대에 와서 단순 장식화를 넘어 미술의 모티브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실제로 작가들은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화목을 선택해 재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이경미 작가는 문자도가 지닌 유교적 의미와 미감에 주목해 한글문자도를 선보인다(도19). “문자도는 언뜻 보면 색상이나 표현이 단순해보이지만, 그 뜻이 다양하고 교훈적인데다 화려한 색감은 마치 직설법을 연상케 하여 대리만족을 느끼게 한다”는 그의 말에는 문자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엿보인다. 이경미 작가의 한글문자도는 문자도 속 유교적 의미나 길상에의 염원이 한글로 표현돼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가 한층 명확하고, 또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미영 작가는 자개의 영롱한 빛깔을 활용해 자개 십장생도를 그린다. 과거 사슴, 학 등의 도상을 문화재에서 수집하는 과정에서 자개가 지닌 특유의 빛에 주목하게 된 것. 작가는 자개가 지닌 고전적 기품과 맑은 색감을 내기 위해 전통 안료의 색감을 조절하며 자개의 구조색(Structural color)을 구현, 그만의 맑은 색감으로 독창적인 십장생도를 탄생시켰다. 여기에 장석(裝錫, 장식·개폐용으로 부착하는 금속), 경첩 등의 오브제를 부착하여 자개 십장생 패물함을 한층 실감나면서도 신비롭게 제작하기도 한다(도20).

김희순 작가는 화조도의 따듯한 풍경에 심취, 새로운 화조도를 꾸준히 제작하고 있다. 그는 화조도에 주력하는 이유에 대해 “민화 중 화조도를 가장 많이 접했고, 어디에선가 본 듯 정겨운 느낌과 화사한 분위기에 많은 관심이 갔다. 화조도를 통해 보는 이들의 마음에도 행복과 위로를 건네고 싶다”고 답했다. 그는 주요작 <화류동풍> 시리즈에서 사각으로 분할된 구도와 스크래치 기법 등 실험적인 시도들을 거듭함으로써 현대적인 화조들을 다채롭게 펼쳐낸다(도21).

무신도가 무신도가 아니다

작가들은 민화의 각 화목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정의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탈바꿈시키거나 핵심적인 내용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민화의 도상이 지닌 전통적 의미나 형태가 크게 바뀌기도 하는데, 이러한 과정은 스토리텔링 작업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일례로 무신도 부문을 즐겨 그린 정현 작가에게 무신도는 무신도가 아니다(도22). 그만의 작품 스타일이 무신도일 뿐이다. 무속적 요소를 종교가 아닌 창작의 모티브로 받아들인 것. 그림 속 꼭두, 천수관음의 손, 칠성신 등은 신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승과 저승의 매개자나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아니다. 정현 작가는 “내가 그리는 신은 모두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해주고 용기를 북돋우는 친구와도 같은 존재”라고 설명했다. 그의 민화 속에서 영적인 존재는 숭배의 대상이 아닌, 절친한 길동무인 셈이다.

조은희 작가는 책거리로 다양한 풍경을 펼쳐낸다(도23). 책거리 속 책들은 서가와 서재를 훌쩍 벗어나 멋진 경치를 이룬다. 전통 책거리에서처럼 책이 책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겹겹이 쌓인 책들은 고층 아파트, 혹은 듬직한 나무나 우뚝한 탑이 되어 행복과 소망을 노래한다. 그는 최근 책갑의 문양을 나무의 표피에 묘사하는 등 또 다른 책거리의 변주를 시도 중이다.
지민선 작가가 맹호도를 그만의 스타일로 풀어낸 <신단수>(도24) 또한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호축삼재虎逐三災로 대표되는 호랑이 화목의 벽사적 의미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 지민선 작가는 해당 작품에서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신성한 나무인 신단수를 한국의 대표 수목인 소나무로, 호랑이를 신의 계시를 전달받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일종의 메신저로 그려냈다. 호랑이의 두 눈동자에서 탄생의 비밀을 지닌 우주의 신비로움과 경외감이 엿보인다. 지민선 작가는 “송하맹호도를 모티브로 제작했다. 신단수로 한국의 탄생을, 호랑이로부터 벽사의 의미를 표현함으로써 한국인들이 하늘의 뜻을 이어받고 보호를 받으며 복록을 누리는 삶을 기원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김영희 작가는 화조도에 자신의 일상을 담았다. 평소 즐겨 다니는 산책길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꽃과 새로 사계절을 표현했으며, 계절마다 변화하는 화조의 풍경을 봄·여름·가을·겨울을 의미하는 영문의 첫 글자를 형성화하여 새로운 화조 문자도를 완성했다(도25). 화조도의 전통적 소재를 응용할 뿐만이 아니라, 화목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통합적 발상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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