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학들이 그려낸 존경의 마음 –
조선의 주자가 되길 원했던 퇴계 이황과 <도산도陶山圖>

<도산도>는 단순한 그림을 넘어 성리학적 상징성의 추구와 실경의 재현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제작자의 학문적 성향이나 신분에 따라 표현방식과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현재 전해지는 도산서원이나 도산 일대를 그린 그림 가운데 겸재 정선의 <도산서원>과 강세황의 <도산도>를 통해 사상적 의미와 미술사적 의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주자학 연구의 본산, 이황의 도산서당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은 말년에 복거卜居를 위한 자리를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본격적인 복거에 앞서 47세가 되던 1546년(명종 1)부터 새로운 거처를 찾았는데 한동안 온계리 남쪽, 영지산靈芝山 북쪽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다. 하지만 인가가 조밀하고 한적하지 못하여 다시 퇴계의 아래로 2~3리 떨어진 동암東巖의 옆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다. 양진암은 이황에게 요양과 독서를 위한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토계兎溪’로 불리는 시내의 이름을 ‘퇴계退溪’로 고쳐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 후 다시 하명동霞明洞 자하봉紫霞峯 아래에 집을 짓다가 완성하지 못한 채 죽동竹洞으로 옮겨왔다. 그러나 죽동은 고을이 좁고 계류가 없어 다시 거처를 계상溪上의 복거지로 옮겼다. 1550년(명종 5) 2월에는 퇴계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그 북쪽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세웠다. 한서암과 계상서당은 이황의 50대의 행적이 깃든 장소이다. 그러나 이곳 또한 이황에게 만족스러운 환경이 되지 못했다. 이황은 계상이 지나치게 한적하고 마음을 넓히기에 부족하므로 도산 남쪽의 땅을 물색하여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에 서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황은 서당 건물의 구조와 규모, 건물의 배치 등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5년만인 1561년(명종 16)에 완공을 보았다. 이황의 거주는 양진암→죽동→한서암(계상서당)→도산서당으로 이어졌다. 계상 한서암에서 10년간을 머물렀으며, 도산서당에서도 말년까지 10년을 보낸 것이다. 도산서당의 완공은 이황이 노년의 안식처를 찾아 오랫동안 꿈꾸어온 계획의 실현이었다.
퇴계 이황이 도산서당을 세운 것은 복거를 위한 건축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퇴계는 이곳에서 학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저술을 통해 주자성리학을 완전히 이해하였고, 강학講學을 통해 제자를 양성함으로써 퇴계학파를 이루어 영남 남인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주자학 연구의 본산 역할을 한 것이다. 퇴계 사후 4년 뒤인 1574년(선조7)에 제자들과 유림에 의해 퇴계 생존시의 도산서당 뒤편으로 서원이 창건되었고 이후 선조로부터 ‘도산서원陶山書院’이란 사액이 내려졌고, 도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47개소의 중요한 서원중의 하나였다.

동방의 주자가 되고자 했던 퇴계 이황

퇴계가 그의 사상적 바탕으로 삼았던 주자는 54세 때인 1182년부터 복건성 무이산에 은거하면서 무이구곡을 경영하였다. 무이구곡의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강론과 저술작업에 평생을 바쳤다. <무이정사잡영병서武夷精舍雜詠幷序>를 지어 무이정사 주변의 경치도 아름답게 묘사해 놓았다. 고려말 주자 성리학의 전래와 더불어 무이산과 무이구곡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해 놓은 《무이지武夷志》가 유입되고 조선의 선비들은 자연스럽게 주자의 무이정사 건립과 이에 따른 정사의 <잡영병서雜詠幷序> 및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棹歌>를 읽게 된다.
조선의 선비들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하면서 한편으로는 주자의 <무이도가>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노력하였다. 구곡시가를 지어 주자의 생각을 따르고자 하는 한편, 구고원림을 지어 주자처럼 살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주자처럼 사는 방편으로 자신의 성리학적 소우주를 설정하고 자신의 은거지를 중심으로 하나의 이상세계를 만들고자 것이다. 퇴계 이황이 계상서당이나 도산서당을 건립한 것도 주자가 무이정사를 지은 것을 본받아 성리학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산에서 보낸 퇴계의 삶은 주자가 무이구곡에서 생활한 것과 흡사한 점이 많다. 퇴계 이황은 실제 가보지 못한 무이구곡을 16세기에 널리 유행한 <무이구곡도>를 통해 감상하였으며, <무이구곡도>를 펼쳐놓고 그림에 대한 깊은 애정을 토로하였다고 한다. “나와 나의 벗들만이 주자의 시대에 태어나지 못했구나”라고 하면서 그 시절에 주자를 모시고 무이구곡 골짜기를 누비며 주자의 강학을 듣고 도리를 깨우칠 기회를 누리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할 정도였다. 따라서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시를 짓고 <무이구곡도>를 감상하고 《무이지》를 읽고 무이구곡을 상상하는 본격적 삶은 퇴계 이황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자를 진심으로 존숭하였던 퇴계 이황이 도산에 복거한 뒤 지은 《도산잡영병기陶山雜詠幷記》는 주자가 무이정사에서 남긴 <무이정사잡영병서>와 유사하다. 거처를 정하게 된 동기, 주변 경물의 선정과 이름을 붙이는 방식을 보면 이황이 주자와 무이정사의 의경意境을 염두에 두고 썼음을 알 수 있다. 이황이 도산서당과 주변 경물에 이름 붙인 것을 보면, 주자가 무이구곡에서 붙인 이름에서 차용한 사례들이 있다. 예를 들면 한서암寒棲庵은 <무이정사잡영병서>의 한서관寒棲館에서 차용했고, 완락제玩樂齋는<명당실기名堂室記> (《주자대전》78권)의 ‘樂而玩之 足以終吾身而不厭’에서 빌려왔고, 암서헌巖棲軒은 <운곡시雲谷詩>(《주자대전》6권)의 ‘自信久未能 巖棲冀微效’에서, 지숙료止宿寮는 <무이정사잡영병서>의 지숙요止宿寮에서 차용하였다. 광영당光影塘 및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는 주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에서 따온 이름이다.

무이구곡도와 도산도의 사상적 동질감

<도산도>는 퇴계 이황을 배향한 도산서원 일대를 그린 그림이다. 도산도를 감상하는 이유는 곧 이황에 대한 공경심과 흠모를 경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도산도와 같은 그림은 성현의 초상화를 첨배하고, 유묵을 완상하며, 시를 지어 받드는 일과 같이 성현을 추념하고 그의 뜻을 기리게 하는 기능을 하는 셈이다. 도산서당에서 은거하던 퇴계 사후에 도산서원이 건립되면서 도산서원은 영남 남인의 사상적 본산이 되었다. 따라서 도산도는 단지 감상의 그림과 다른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고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도산도는 결국 주자를 숭배하고 연구했던 퇴계를 존경하기 위해 그 후학들이 그 사상적 은거지를 그렸다는 점에서 주자의 무이정사를 중심으로 한 무이구곡도와 그 맥이 닿아있는 것이다. 후대에는 도산도와 <무이구곡도>가 한 쌍으로 그려진 경우를 보더라도 도산도와 무이구곡도는 사상적인 동질감의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퇴계 이황은 주자가 무이산에 은거하여 저술과 강론으로 성리학을 발전시켰던 전통에 따라 도산서당을 만들어 은거하였으나, 율곡 이이와 그를 따르는 서인 노론계 사대부들이 <고산구곡도>를 그리는 등 구곡을 경영하였던 것에 비해 퇴계는 주자의 무이구곡이라는 형식적 틀에는 얽매이지 않았다. 퇴계는 <무이도가>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있어 구곡 자체에 성리학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시적 은유를 통해 주자의 뜻을 계승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퇴계는 주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시어를 인용하여 자신의 은거지 주변 경물들에 이름을 짓고 이를 <도산잡영>이라는 시로 남겼던 것이다.
퇴계의 이러한 무이구곡에 대한 관념과 이해는 후학들이 퇴계의 은거지인 도산서원을 그림으로 그릴 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후대에 율곡학파들이 구곡을 경영하며 구곡도를 그렸을 때, 퇴계의 영남 남인들은 도산서원 일대의 경치를 도산도와 같은 실경의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점에 있어서는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회화적 관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즉 율곡학파는 율곡의 조선성리학의 관점에서 회화적으로는 조선의 진경을 그린 진경산수화의 전통을 확립시켜 나갔지만, 주자의 무이구곡도를 본 받은 구곡도라는 의경을 그린 그림에 심취했다는 점에서 정통 서인의 회화관과는 차이가 있다고 느껴진다.
도산도는 현재 10여점 전해지는데 도산도를 그린 의도는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으나 그림을 묘사하는 방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중에서 율곡학파인 서인의 전통을 이은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린 <도산서원>과 남인의 전통을 따른 강세황(1713-1791)의 <도산도>를 통해서 그림 속에 표현하고자 했던 사상과 이들의 화풍을 그림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겸재 정선의 도산도 <도산서원>

겸재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 유란동幽蘭洞에서 태어났는데 유란동은 지금의 청운동 일대로 백악산(白岳山 : 지금의 북악산) 서쪽 아랫동네이다. 백악산 서쪽에는 주로 율곡학파의 맥을 잇는 서인의 영수들이 거주하였고, 겸재도 자연스레 율곡학맥을 이어 진경문화를 꽃 피웠던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 1671-1751)의 아들 6형제를 스승으로 삼고 이들의 학맥과 인맥을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퇴계의 학맥을 이은 남인과는 소원할 듯 하지만 퇴계와 겸재는 외가쪽으로 먼 인척으로 연결된다. 겸재의 외조모 남양 홍씨는 퇴계의 손자 이안도(李安道, 1541-1584)의 외손자인 정랑正郞 홍유형洪有炯의 둘째 딸이었다. 그러니 겸재는 외가를 통해 퇴계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겸재가 <도산서원도>(도1)를 그린 이유를 학맥과 인맥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지만 화풍에서는 서인의 진경문화가 그림 속에 표현되어 있다. 겸재는 스승집안의 천거로 1721년 경상도 하양현감으로 발령받아 부임하게 되자, 그 전별의 자리에서 동문지기인 담헌 이하곤(澹軒 李夏坤, 1677-1724)의 전별시로 송축했다. 시 속에서 도산서원을 그리게 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도산 한 굽이에 퇴계 노인 사셨으니,
시내 위 사립문에 늙은 나무 많겠지.
조만간 자네는 가서 응당 그릴 터,
먼저 한 장 그려내어 내게 붙이게.
[陶山一曲退翁居 溪上柴門老木餘]
[早晩君行應縱筆, 先將一紙寄於余]
《頭陀草》卷八, 送元伯之任河陽

담헌 이하곤은 당대 제일의 감식안이었고 겸재 그림을 애호하는 관계로 우의를 돈독히 하던 관계였다. 겸재가 하양현감으로 발령받은 것을 전별하는 자리에서 진경문화의 사상적 기반이자 조선성리학의 원조이면서 겸재의 외가쪽 조상인 퇴계가 말년에 은거하던 도산서원을 그려달라고 한 것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물론 겸재가 담헌의 부탁에 응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는 <도산서원도>는 겸재가 70세를 전후한 시기에 사용하던 방형백문方形白文 인장을 사용한 것과 이 시기에 보이는 노숙老熟한 화법으로 보아 겸재가 두 차례 경상도 지역 지방관(1721하양현감, 1734년 청하현감)으로 근무하면서 사생해 둔 것을 그린 것이라 판단된다.
<도산서원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퇴계의 <도산기>에 묘사되어 있는 도산서당의 전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도산기>에는 아래와 같이 도산서원을 표현하고 있다.

“정사로부터 신유에 이르기까지 5년 만에 당사 두 채가 대강 이루어지니 거처할 만하게 되었다. ‘당堂’은 세 칸인데 중간 한 칸은 완락재玩樂齋라 부르고 동쪽 한 칸은 암서헌巖栖軒이라 부르며, 합해서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고 현판을 붙였다. ‘사舍’는 모두 여덟 칸인데 재齋·요僚·헌軒으로 갈라서 시습재·지숙요·관란헌이라 하고, 합해서 농운정사라고 현판을 달았다. 당사의 동쪽 구석에 조그만 못을 파고 연蓮을 그 속에 심고 정우당淨友塘이라 이름 지었다. 그 동쪽에 몽천蒙泉이란 샘이 있는데 샘 위의 산기슭을 파서 낮추어 관란헌과 가지런히 하고, 거기에 단을 쌓아 매화·대·소나무·국화를 심고 절우사라고 불렀다. 당 앞에 출입하는 곳을 싸리문으로 가리우고 이를 유정문이라 부르며, 문 밖의 오솔길로 시내를 따라 내려가 천동 어귀에 이르면 양쪽 산기슭이 마주 대하는데, 산문 같은 바위가 있으니 이를 곡구암이라 부른다. 여기서 동으로 몇 걸음 더 나가면 산기슭이 끊기는 곳에 탁영담이 나선다. 그 위에는 거석이 깎아 세운 듯이 여러 층으로 포개 세워져 있어 십여 길이 넘는다. 그 위에 대를 쌓아 만드니 우거진 소나무는 해를 가리며 위의 하늘, 아래의 물 사이로 새가 날고 고기가 뛰놀며 좌우의 푸른 병풍 같은 산들은 물에 비쳐 그림자 흩들거린다. 강산의 경치를 한눈에 다 볼 수 있으니 이름하여 천연대라 하였다. 서쪽 산기슭에도 이와 같이 대를 쌓아 천광운영이라 이름할 작정인데 아마 그 경치도 천연대 못지 않을 것이다. 반타석은 탁영담 가운데 있다. 그 모양이 반타(盤陀 : 안장) 같다 해서 반타석이라고 부르는데, 배를 매어 놓고 술잔을 서로 전할 만하다. 큰물이 날 때는 두 바위가 다 물속에 잠기었다가 물이 빠지고 물결이 맑아지면 다시 드러난다.”

그러면 선면으로 그린 <도산서원도>(도1)를 살펴보자. 과연 겸재의 필력이라 느낄 만큼 도산서원일대를 부감시를 통해 세밀하고 완벽하게 묘사하였는데 이러한 묘사는 한 두 번의 방문으로 이루어낼 수 없는 경지로 보인다. 겸재가 수차례의 탐방과 도산서원과 관련된 문헌을 완벽히 이해한다음 그려낸 진경산수화인 것이다. 겸재 정선의 <도산서원>을 단순히 명승을 그린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겸재를 단지 진경산수화가로만 알고 있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겸재는 사대부화가로서 주역과 성리학에 능한 학자로 퇴계의 학문적 성과를 <도산서원>이라는 그림에 오롯이 담기 위해 그의 학문과 인생을 완전히 습득한 이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겸재가 만든 《퇴우이선생진적退尤二先生眞蹟》첩을 보더라도 퇴계의 학문적 열정과 깊이를 알 수 있다. 퇴계가 도산서당에서 저술과 강론을 하기 전에 계상서당溪上書堂에서 지낼 시절의 그림인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도2)가 수록된 《퇴우이선생진적退尤二先生眞蹟》첩은 퇴계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의 행적을 통해 진경문화의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인 것이다.


표암 강세황의 <도산도>

강세황의 <도산도>(도3)는 발문에 따르면 ‘1751년 이익의 주문으로 <무이도>와 <도산도>를 제작하였다’고 되어 있다.(도4) 성호 이익과 강세황은 근기 남인으로 퇴계 이황을 존숭하면서 이를 계승하는 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는 동질성이 있다.
강세황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 퇴계 문하의 남인이 가지고 있던 <도산도>의 전통을 잘 보여주는 조선중기의 작품인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문순공도산도李文純公陶山圖>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도5) 우선 형식상 첩장으로 꾸며진 이 화첩은 <이문순공도산도>라 쓴 표제에 이어 <도산도>(7면), <도산기陶山記>(16면), <도산잡영>(2면), <무이도산양도첩후발武夷陶山兩圖帖後跋>(2면)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에 장첩된 부분에는 1721년 영남 남인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협李浹이 그의 사돈 정자주鄭字株에게 써준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발문을 통해서 그림의 제작 경위를 알아보자.

정대경(鄭字株, 호:紫海)이 그의 사위 이만굉李萬宏에게 이르기를 “나는 몽선옹(김창석)의 처소에서 주자의 <무이도>와 이황의 <도산도>를 가히 볼 수 있었는데, 이를 받들어 남쪽으로 온 지 5~6년이 되었다. …산남山南에는 문헌이 많으니 기문과 시를 조사해서 구하여, 이 두 그림의 뒤에 덧붙여 두 첩을 만듦으로써 나[정자주]의 뜻을 이루어라.” 굉은 나의 아들인데, 그가 장인의 말을 나에게 전한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감탄하며 말하였다. “참 좋은 일을 했구나! 후[정자주]의 그 뜻이 매우 아름답다. 후인後人이 전인前人을 사모함이 그치지 않는구나!”[후략]

발문의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정자주가 김창석(金昌錫, 1652-1720)으로부터 <무이도>와 <도산도>를 받아서 받들다가 사위인 이만굉에게 시와 기문을 붙여 《무이도산양도첩武夷陶山兩圖帖》을 만들게 하였고, 정자주는 이만굉을 통해 그의 부친이자 사돈인 이협에게 발문을 부탁하여 1721년에 쓴 이협의 발문이 화첩의 마지막에 붙게 된 것으로 이해가 된다. 그러나 김창석은 1720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아 발문은 미리 작성되었다가 1721년에 장첩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발문을 기준하면 1720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산의 표현은 둥근 형태의 토산으로 구성되어 있고 기암괴석이 곳곳에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의 산수표현은 조선시대의 실경으로 보기는 어렵고 무이구곡도에서 보이는 산수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김창석의 <이문순공도산도>는 무이구곡도와 연결을 위해 무이구곡도와 유사한 기암괴석을 조합한 것으로 중국의 산수화풍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산수의 화풍은 무이구곡도의 중국 산수화풍을 따른 것으로 보이나 전체적인 구도는 도산서원 일대의 실경을 표현하기 위해 도산일대를 부감시로서 살펴본 것이다. 이 작품은 영남대박물관의 <주문공무이구곡도朱文公武夷九曲圖>(도6)의 형식과 체제를 따라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즉 <주문공무이구곡도>의 형식을 빌어 도산의 실경을 형상화한 것이다. 특히 <이문순공도산도>에 그려진 도산서원(도7)은 <주문공무이구곡도>의 핵심인 무이정사(도8)에 초점을 맞추어 구성하였다. 이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도산서원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과 건물의 윤곽을 사각형으로 반듯하게 그린 점은 <주문공무이구곡도>의 무이정사 부분과 흡사하다. 붉은색 물감을 사용하여 건물을 묘사한 점도 공통된 특징이다. 한편으로는 건물 등 경물에는 이름을 써 넣어 그림을 이해하기 쉽도록 했다. 이는 강세황의 <도산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도9)

표암 강세황의 <도산도>는 앞에서 설명한 김창석의 도산도와 같은 전대의 모본을 참고하여 그렸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강세황이 실경에 대한 의지가 있었음에도 실제 그림에 있어서는 정선과는 달리 도산서원을 직접 가보지 못한 채 성호 이익이 가지고 있는 모본을 보고 그렸다. 강세황이 직접 실견하지 않고 그림을 그린 것에 대해 성호 이익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은 사람 때문이요. 그 지역 때문이 아니니, 그 지역의 산수가 비슷하거나 비슷하지 아니한 것은 또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강세황의 <도산도>가 도산서원의 모습을 그리기 위한 실경 산수화가 아니라 오로지 이황을 존경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강세황의 <도산도>는 근기 남인의 영수였던 성호 이익이 가지고 있던 <도산도>를 모본으로 삼고 그린 것으로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제작되던 도산도의 전범을 따르고 있다. 강세황은 <도산도>와 <무이구곡도>를 함께 장첩하여 주자와 이황의 도맥道脈을 강조하였다. 이들 그림은 <무이도가>와 <도산잡영> 등에 나오는 시詩에 근거하여 그림 속의 경물에 이름을 기입하여 이황의 은거지를 상세히 묘사하였다. 강세황은 이황의 문하에서 제작되는 도산도의 전통적인 특징을 따랐지만 기존의 지도식 표현과 절파화풍을 배제하고 황공망의 필체를 본받아 완벽한 남종문인화풍을 구사하였다. 이는 실경 산수화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인 실학파 회화관과 문인화가로서 강세황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이황에 대한 존경의 마음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겸재 정선이 그린 <도산서원>의 경우 율곡 이이를 종조로 하는 서인의 입장에서 수차례의 답사를 통해 기행산수화를 그리듯 도산서원 일대의 실경이 세밀하게 표현되었고, 표암 강세황의 <도산도>에서는 이익의 영향을 받은 남인의 입장에서 실학파적인 회화관, 즉 유학자들의 이상향이 그려졌다.
한마디로, 정선의 <도산서원>과 강세황의 <도산도>는 정치, 사회적 배경을 떠나 주자성리학의 대학자였던 이황을 존숭하는 후학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글 이상국((사)한국민화센터 이사장)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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