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심孝心을 움직인 그림, 석진단지 이야기

도 1. 유석진兪石珍의 정려비각(전북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 소재)

▲도 1. 유석진兪石珍의 정려비각(전북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 소재)

조선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았던 그림은 무엇일까? 그 후보에 올릴 수 있는 그림 중 하나가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가 아닌가 싶다. 목판에 새겨서 찍어낸 글과 판화이지만, 문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그림으로 구성하여 쓰임을 극대화하였다. 또한 한꺼번에 여러 책을 간행할 수 있어 상당한 분량의 책이 전국에 배포되었고, 백성들에게 효의 실천을 권장하는 윤리교과서의 기능을 하였다. 《삼강행실도》에 실린 일부 그림은 조선 말기에 대중적인 풍속화와 민화民畵로도 그려지는데, 그 과정에 나타난 주요 특징을 이 글에서 알아보기로 한다.

세종의 백성 교화 프로젝트, 《삼강행실도》

1434년(세종 16)에 간행된 《삼강행실도》는 세종世宗이 기획한 백성 교화敎化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당시 김화金和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이 책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 친부親父 살인 사건을 접하고서 충격을 받은 세종은 법률과 형벌만이 능사가 아니라 무지한 백성들을 가르쳐 변화시킬 교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런 세종에게 윤리교과서라 할 《삼강행실도》의 편찬은 최대의 관심사였다. 왕의 의도가 담긴 책이기에 판화의 제작에는 뛰어난 화가들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세종 대라면 단연 <몽유도원도 夢遊桃園圖>를 그린 안견安堅을 비롯한 화원畵員들이 그림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삼강행실도》에 나타난 다양한 장면들은 세종연간의 생활풍속과 삶의 모습들이 어느 정도 반영된 그림으로 볼 수 있다.
1434년에 간행한 《삼강행실도》에는 앞면에 그림을 싣고, 뒷면에 한문으로 된 해설을 붙였다. 세종은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그림을 그려서 싣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림만 보아서는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 알지 못한다. 그림 뒷면의 한자로 된 해설을 읽어야만 그림 속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림은 효행의 일화를 보다 강도 있고, 실감나게 전해주는 기능을 하였다.

유석진의 효행
도 2. 유석진의 정려비旌閭碑

▲도 2. 유석진의 정려비旌閭碑

이 글에서는 《삼강행실도》 가운데 한 폭인 <석진단지 石珍斷指>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석진단지>는 ‘석진石珍이 손가락을 자르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이다. 손가락을 잘라 효도를 했다는 비범한 이야기는 《삼강행실도》에 여러 사례가 나온다.
<석진단지>의 주인공은 조선 초기의 효자로 알려진 유석진兪石珍(1378~1439)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석진이 행한 효행은 병든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약을 만들어 드려 아버지를 회생시켰다는 내용이다. 실존인물의 일화다.
유석진은 기계杞溪 유씨兪氏로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현에 살았다. 《세종실록 世宗實錄》 세종 2년(1420) 10월 18일자에 유석진의 행적이 실려 있다. 전라도 고산현高山縣의 향교 생도生徒 지활池活 등이 유석진의 효행을 현감에게 고하였고, 이것을 전라도관찰사 신호申浩가 나라에 올려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라 한다. 지금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에는 유석진의 정려비旌閭碑와 비각碑閣이 세워져 있다.(도 1, 2) 정려비에는 유석진이 사후死後 사헌부 지평持平의 벼슬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글에서 <석진단지>를 소개하는 것은 최초의 윤리 교과서인 《삼강행실도》에 실렸고, 그것이 민간으로 전해져 백성들을 교화로 이끈 매체가 된 점, 그리고 정조 대의 《오륜행실도》에 다시 실렸고, 조선 말기에는 채색 그림으로까지 그려진 사실을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또한 연폭이나 단폭 형식의 민화로도 그려졌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삼강행실도》에 기록된 석진의 일화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유석진兪石珍은 고산현高山縣의 아전이다.
아버지 유천을兪天乙이 악한 병을 얻어 매일 한 번씩 발작하고, 발작하면 기절하여 사람들이 차마 볼 수 없었다. 유석진이 게을리 하지 않고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하늘을 부르며 울었다. 널리 의약을 구하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 사람의 뼈를 피에 타서 마시면 나을 수 있다”하므로 유석진이 곧 왼손의 무명지無名指를 잘라서 그 말대로 하여 바쳤더니 그 병이 곧 나았다.”

《삼강행실도》에 실린 <석진단지>를 보면, 세 장면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도 3) 먼저, 병저 누운 아버지가 계시고 석진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시중을 드는 장면, 그 다음은 집 울타리 밖에서 만난 행인이 손가락을 잘라 약을 만드는 비방을 알려주는 장면, 그리고 아버지가 계신 쪽에 칸막이를 치고 석진이 단지斷指를 감행하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세 단락의 이야기가 한 폭의 그림에 모두 들어가 있다.
그런데 《삼강행실도》의 장면에는 몇 개의 설정이 따른다. 석진은 아버지가 모르게 단지를 해야 하기에 아버지와 석진의 사이에 가림막이 놓여 있다. 만약 이 가림막이 없다면, 어떤 상황이 될까? 서로가 대단히 불편해진다.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단지를 하는 것은 오히려 큰 불효가 될 수 있다. 또한 병든 아버지는 반드시 가리개 너머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석진의 행위가 아버지를 위한 숭고한 효의 실천임을 독자가 알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석진의 행위가 자해自害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칸막이는 서로의 너머에서 진행되는 불편한 진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설정이다. 해서는 안 될 일과 모르게 해야 하는 일을 독자는 판단하게 된다.
《삼강행실도》에는 이처럼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斷指가 여러 번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매우 엽기적인 행동으로 비칠 수 있다. 과연 이런 행동이 효를 위해 권장되고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일까? 단지는 매우 비현실적이고 맹목적인 행위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삼강행실도》를 간행한 당시에는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도 그것이 부모를 섬기기 위한 행위라면 효행으로 간주되었던 것 같다. 수단과 방법에 문제가 있더라도 그 목적이 부모를 위한 것이라면, 효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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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에서 《오륜행실도》로

《삼강행실도》의 일부 일화들은 정조正祖의 명으로 간행한 《오륜행실도 五倫行實圖》에 다시 수록되었다. 《오륜행실도》는 1434년(세종 16)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와 1518년(중종 13)에 만든 《이륜행실도 二倫行實圖》를 재편집하여 1797년(정조 21)에 간행한 책이다. 손가락을 자른 석진의 이야기도 여기에 다시 실렸다. 그러나 《오륜행실도》의 <석진단지>는 그림의 구성이 이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다.(도 4)
정조 또한 책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림을 먼저 싣고 그 다음에 설명을 붙인 것은 백성들이 그림을 통하여 흥미를 갖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 역시 그림을 본 뒤에 설명을 이해하도록 한 《삼강행실도》의 체제를 그대로 따랐다. 그림은 효행의 이야기에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 ‘石珍斷指석진단지’라고 쓴 것은 《삼강행실도》의 제목 표기방식과도 같다. 앞의 두 글자는 효행의 주인공을 가리키고, 뒤의 두 글자는 효행의 내용을 함축한 키워드이다. 그 아래에는 인물의 국적을 표기하였는데, ‘本朝본조’ 두 글자는 조선을 의미한다.
《오륜행실도》의 <석진단지>는 《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석진의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그린 것이다. 《삼강행실도》에서 석진이 단지하는 장면은 《오륜행실도》에서 좀 더 현실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각색하여 그렸다. <석진단지> 속의 공간은 조선 후기 민가民家의 가옥처럼 등장한다. 초가집과 나무로 엮은 담장, 고목과 장독 등의 표현은 풍속화의 배경 장면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륜행실도》가 《삼강행실도》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3~4장면으로 묘사되는 판화의 그림을 하나의 장면으로 통합하여 그린 점이다. 즉 여러 장면으로 나누어 상황을 설명하는 구성이 하나의 장면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오륜행실도》의 장면에 나타난 경물의 묘사에는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전)의 필치가 뚜렷이 엿보인다. 특히 나무를 그린 묘사에 김홍도의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화법이 나타나 있어 그가 《오륜행실도》의 밑그림 제작에 참여했을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김홍도가 직접 그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김홍도의 화풍이 당시 화원畵員 스타일의 주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채색본 《석진단지》의 특징과 의미

《오륜행실도》의 <석진단지>와 유사한 그림인 채색본彩色本 <석진단지>가 한 점 전하고 있다.(도 5) 1797년(정조 21)에 정조가 《오륜행실도》의 목판삽화본木版揷畵本의 편찬을 명하여 그해 7월에 완성되었다. 이때 만든 삽화본은 전하지 않지만, 이 책의 삽화 작업은 김홍도가 주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 채색본 <석진단지>는 목판본에 채색한 것이 아니라 먹으로 그린 뒤에 담채한 것이다. 정조 때 제작된 목판삽화본과 관련이 있는 그림일 것으로 추측된다.
채색본 <석진단지>의 도상은 《오륜행실도》의 판화와 거의 같다. 여기에 석진이 등장하는 장면은 아버지가 누워계시는 공간과 석진이 손가락을 자르는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다. 시간 차이를 두고 진행되는 석진의 행위를 단계별로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그림을 좀 더 살펴보면, 가옥 안의 아랫방에는 여닫이문이 활짝 열려 있다. 단지를 하는 석진의 모습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 위쪽 방에 석진과 아버지가 함께 있는 장면은 석진이 지어 올린 약을 마신 뒤 아버지의 병이 호전되어 가는 장면을 그린 듯하다. 이곳도 창문을 활짝 열어 그 상황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이 두 장면 가운데 한 장면이라도 빠진다면 석진의 효행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채색본 <석진단지>는 조선 초기의 《삼강행실도》에 실린 단조로운 판화의 형식을 현실감 있는 효자도의 한 장르로 재현한 가상의 풍속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효행을 주제로 한 일화는 《오륜행실도》의 판화에 한정되지 않고, 채색본 <석진단지>와 같이 대중적인 그림으로, 그리고 민화로도 제작되어 서민층으로 저변을 넓혔을 것이다.
채색본 <석진단지>는 일반 민화는 아니지만, 숭고한 효행의 실천을 성찰하게 하는 기능을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런 그림은 서민 화가들의 모방의 대상이 되어 민화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세종 대 이후 5백년이 넘도록 독자의 효심을 움직여온 행실도行實圖 류의 그림들은 오늘날에도 그 가치가 여전히 유효한 그림으로 남아 있다.

 

글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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