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폭에 담긴 호랑이의 위용 – 군호도

화폭에 담긴 호랑이의 위용 – 군호도

‘군호도群虎圖’는 단어 그대로 두 마리 이상의 호랑이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주로 위용을 상징하기 위해 ‘호렵도胡獵圖’와 함께 무관들의 거처나 휘장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대를 이어 입신출세하여 무관으로서 왕을 섬기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긴 ‘군호도’를 8월의 한국민화뮤지엄 명품 소장품으로 소개한다.

몇 해 전 서울대공원에서 호랑이에 물린 사육사가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가 보도된 적이 있다. 비슷한 사건은 호주와 미국 등에서도 일어났는데, 새끼 때부터 몇 년간 키워준 사육사나 서커스단의 조련사가 호랑이에게 물려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는 일들은 심심치 않게 전 세계 뉴스를 장식하곤 한다. 사육사나 조련사와 장난을 치려다가 또는 그들이 위험에 빠졌다는 판단 하에 공격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에게 호랑이의 맹수성과 인간에 의해 완벽하게 자제될 수 없는 그들의 본능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그런데 이런 호랑이나 표범을 동물원 우리나 사파리 차를 탄 상태가 아니라 건너 마을에 가기 위해 재를 넘다가 마주쳤다고 생각해보라. 현재는 사라진 야생 호랑이나 표범과 함께 생활했던 우리 선조들에게 그들은 어쩌면 두려움의 대상이자 용맹함의 상징이고 또한 신처럼 엄청난 힘을 소유한 존재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이름난 명소

금강산은 빼어난 경관으로 약 7세기경부터 그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북송의 시인 소식(1036~1101)이 “고려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했을 만큼 절경으로 잘 알려졌을 뿐 아니라 불교의 성지 또는 신선이 사는 영산靈山으로 추앙받아왔다. 금강산 유람은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하여 다양한 문학 및 회화 작품의 주제가 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도 철도의 개설과 함께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및 탐승의 명소로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금강산은 화엄경에 1만 2천 봉우리가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최고봉인 비로봉(1,638m)에서 차일봉을 연결하는 능선을 기준으로 서쪽은 내금강內金剛, 동쪽은 외금강外金剛, 그리고 바다와 맞닿은 해금강海金剛으로 구분한다. 내금강은 여성적이면서도 우아한 절경이 특징적이며, 수려한 계곡과 표훈사, 만폭담, 묘길상, 삼불암 등이 분포되어 있다. 외금강은 남성적인 산세를 가지고 있으며, 해금강은 관동팔경의 하나인 총석정을 비롯해 빼어난 기암과 경관으로 유명하다. 금강산은 그 화려한 경관만큼이나 이름도 다양하다. 삼국시대에는 ‘풍악’ 통일신라시대에는 ‘개골’, ‘상악’, ‘봉래’, ‘금강’으로 칭해졌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현재의 계절별 명칭, 즉 봄의 ‘금강산’, 여름의 ‘봉래산’, 가을의 ‘풍악산’, 겨울의 ‘개골산’이라는 용어가 정착되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조정에 드는 그림

이번 호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작품은 이러한 맹수를 두 마리나 그려 넣은 한국민화뮤지엄 소장의 <군호도群虎圖>이다.(도1) <군호도>는 단어 그대로 두 마리 이상의 호랑이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주로 위용을 상징하기 위해 <호렵도胡獵圖>와 함께 무관들의 거처나 휘장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 작품은 상단에 “부자동조도父子同朝圖”라는 화제畵題를 적고 글귀에 맞게 아비 호랑이와 아들 호랑이가 함께 아침을 맞는 장면을 그렸다. 두 호랑이의 시선은 상단 우측에 위치한 태양을 향하고 있는데 궁중장식화와 민화에서 태양이 임금님을 뜻하기 때문에 화제의 아침 조朝자를 임금이 나라 대신들과 정치를 논하는 조정朝廷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화제의 외연적인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아침을 맞는 그림”이라는 내용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조정에 드는 그림”이라는 내연까지 이어져 해석이 가능하며 대를 이어 입신출세하여 무관으로서 왕을 섬기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화제 좌측에는 정미O일화丁未O日畵라고 쓰여 있는데 O에 해당하는 글자 윗부분이 손상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오른쪽 부분이 벼 화禾자라고 가정하고 벼 화禾변이 불 화火자와 순서를 바꿔 쓴 것이라면 가을 추秋자가 되어 “정미년 가을에 그림을 그리다”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글의 필치를 보아 가을 추秋와 같이 간단한 글자조차 제대로 모르는 사람
이 썼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O에 들어가는 글자는 불 활활 붙을 목炑자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이며 이를 다시 해석하면 “정미년 불이 활활 붙은 날에 그리다”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정미년은 종이의 고조와 호랑이와 소나무를 그린 필치를 보아 1907년 또는 60년 이전인 1847년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필자는 이 작품이 1907년 작이라고 추정하는데 작가가 이 작품을 그린 날을 “불이 활활 붙은 날”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당시 정치·사회적 상황과 연관 지어 설명해보고자 한다.
1907년은 고종 황제(高宗, 1852~1919)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한 해이다. 고종 황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의 압력을 받았는데 7월 7일 이토가 사이온지 긴모치 일본 총리대신에게 전보를 보내 고종 황제의 밀사 파견은 조약 위반이므로 일본이 대한제국에 선전포고를 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이후 7월 10일 일본 정부의 원로대신들이 회의를 열었고 7월 16일 열린 내각회의에서 황제 폐위를 결정했다. 고종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7월 19일 새벽 5시에 황태자 대리의 조칙에 도장을 찍게 된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7월 20일 오전 9시에 일제는 고종의 퇴위와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純宗,1874~1926)의 즉위를 위해 양위식을 거행하였으나 고종과 순종은 이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울 시내 곳곳에서 일본인들을 공격하는 폭동이 일어났고 이완용의 집이 불태워지고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사가 습격당하는 등의 고종 강제 퇴위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즉 1907년의 고종 강제 퇴위는 일제가 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의 국권을 피탈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진행했던 전초작업이었다.

왕에 대한 충성과 시대에 대한 반항 담은 작품

필자는 이러한 정세 속에서 이 작품을 그린 작가가 보통 무관들의 용맹성을 과시하고자 그렸던 <군호도>에 “부자동조도”라는 화제와 “불이 활활 붙은 날에 그린다”는 글을 남겨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에 항거했던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즉, 이 작품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들도 조정에 드나들며 왕실을 비호하는 무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태양인 임금을 바라보는 호랑이 두 마리를 통해 한 왕만을 바라보는 백성의 충성, 폐위된 고종을 위로하는 마음, 그리고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투쟁 심리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는 호랑이가 좌측에 그려진 지조와 절개의 상징인 소나무와 함께 그려지면서 더욱 강조되었다.
작가의 호는 운심雲心이고 우측에 있는 백문방인에는 ‘덕겸사인德謙私印’이 찍혀있는데 당시 활동했던 무관이나 화원 중 덕겸사라는 인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는 사라졌지만 본관이 남아있는 성씨 중에 덕씨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62년부터 1935년까지 살았던 인물 중 종형인 금서 권주환에게 수학하고 기대를 받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자 은거에 들어가 시를 지으며 지냈던 인물로 권병원權柄遠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덕겸’이라고 불렸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가 작품의 추정 연대에 부합하고 당시 시서화일치詩書畵一致의 분위기 속에 그림도 그렸다고 가정한다면 기록상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는 이 작품의 제작자로 가장 가깝게 볼 수 있지만 이에 관련된 자료가 부족하여 좀 더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작품 속 호랑이 두 마리를 살펴보면 아비 호랑이는 호랑이의 줄무늬가 있지만 새끼 호랑이는 표범의 점무늬가 그려져 당시 유행했던 것처럼 호랑이와 표범이 함께 그려진 것이 특징적이다. 현재까지 호도虎圖에 등장하는 호랑이 도상의 변천과 호표虎豹의 습합적 특징에 관한 선행 연구가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군호도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는 부족한 상태인데 이 작품은 비교적 제작 시기가 확실한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기에 앞으로 시기에 따른 도상의 변화를 밝히는 데 있어 유용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본다.
두 마리 호랑이의 도식화된 눈썹과 털의 표현, 그리고 마치 고양이를 그린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인
상적이다. 호랑이의 몸 경계 부분은 선을 따로 그리지 않고 털을 비워두는 것으로 표현하였는데 여러 방향으로 난 복잡한 털과 무늬를 세필로 촘촘하게 표현하면서도 관람자가 호랑이 몸의 구석구석과 포즈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한 작가의 재치와 배려가 돋보인다. 아비 호랑이의 몸은 근육질에 마른 형태로 묘사되었는데 오랫동안 훈련을 받아온 무사처럼 보인다. 그리고 태양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이를 꽉 물고 있는 모습에서 왕에 대한 충성과 시대에 대한 반항을 읽을 수 있다.
광복절이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지난 달 또 한 분의 위안부 피해자인 유희남 할머니의 별세로 이제 생존 위안부 피해자는 40명으로 줄었다. 일본 제국주의에게 나라를 빼앗긴 설움 속에 얼마나 많은 분들이 모진 세월을 견디며 사셔야 했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민화뮤지엄 소장의 <군호도>에 보이는 호랑이의 이를 꽉 물고 있는 굳은 표정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싸웠던 수많은 그들의 모습을 본다. 이 작품을 감상함으로써 고인의 명복을 빌고 우리에게 독립된 자주 국가를 물려주신 그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기리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글 : 오슬기(한국민화뮤지엄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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