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폭에 담긴 민족의 성산, 옛사람의 이상향 금강산도

(도 1) 정선, <금강전도>, 1734년, 지본담채, 59.0×130.7㎝, 삼성리움미술관

▲(도 1) 정선, <금강전도>, 1734년, 지본담채, 59.0×130.7㎝, 삼성리움미술관

금강산도

우리 문학과 그림에는 금강산을 주제로 한 작품이 여럿 남아있다. 고려 말, 평생 한번만 밟아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불교의 성지로 알려진 이후 금강산은 귀족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일생에 한번은 꼭 다녀오고픈 순례지가 되었다. 이로부터 금강산을 찾는 여행객들의 순례는 끝없이 이어지게 되었고, 중국과 일본에도 그 이름이 전해져 그야말로 국제적인 명소가 되었다. 우리 민족의 정신적, 문화적인 상징이 되어온 금강산 이야기.

민족의 명산名山, 금강산

한반도의 허리 즈음인 강원도의 금강군과 고성군 사이, 동해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금강산은 명산 중의 명산으로 이름이 높다. 험준하여 기세가 강하기로 유명한 금강산은 한반도의 등줄기를 이루는 백두대간이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내륙으로 흘러내려오다 약간 가늘어지고, 다시 한 번 기세를 일으켜 굵은 줄기를 뻗치기 시작하는 반도의 중간 즈음에 형성된 큰 마디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다고 금강산이 유별나게 크거나 높은 산도 아니다. 금강산의 구역은 동서로 40㎞, 남북으로 60㎞, 면적은 530㎢이며 가장 높은 봉우리인 비로봉은 1638m일 뿐이다. 높이로 치자면 백두산과 한라산보다 한참 낮은 것이다. 하지만 동해바다에 바로 닿은 채 우뚝 솟아 있기에 바라보면 마치 지표로부터 4000~5000m쯤 되는 높은 산처럼 솟구쳐 오른 듯이 느껴진다. 금강산에는 뾰족뾰족하게 치솟은 수많은 암봉들이 있어 ‘금강산 일만이천봉’이라 불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다른 산들에서 보기 힘든 이런 지형은 화강암과 편마암이 오랜 세월 풍화작용과 침식작용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다. 또한 금강산에는 깊고 풍성한 골짜기와 기묘한 바위, 깊은 연못과 웅장한 폭포들이 곳곳에 자리해 금강산의 명성을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국 어디를 가도 각 지역을 대표하는 명산들이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산들 중 금강산은 다른 어떤 산과도 구별되는 특이한 산으로 우리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금강산이 가진 수많은 이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금강산은 금강, 개골, 서리뫼, 상악, 풍악, 봉래, 기달, 중향성, 열반 등 10여 개가 넘는 이름으로 불리며, 금강산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들은 국문학사상 하나의 독립된 분야로 다루어져도 좋을 만큼 수가 많다. 전 회화에서도 금강산도는 독립주제로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몇 안 되는 주제에 속한다.
금강산은 언제부터 명산으로 유명하게 되었을까. 금강산이 우리 역사상 중요한 성지이며 문화의 보고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고려시대 말 즈음이다. 불교를 국교로 삼아 신봉하던 고려시대,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즈음 차차로 동해가의 금강산을 불교의 경전인 《화엄경》에 기록된 해동의 성지인 금강산으로 동일하게 여기는 습속이 시작되었다. 화엄경에는 해동의 금강산에 담무갈보살이 만 이천의 권속을 거느리고 거처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금강산의 일만이천 봉이라는 이름이 유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금강산의 특이한 지형과 신비로운 인상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때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곳으로, 때로는 부처가 살만한 영험한 곳으로 여기게 된데서 시작된 일로 보인다. 고려 말 이후 금강산은 평생 한번만 밟으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불교의 성지로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귀족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일생에 한번은 꼭 다녀오고픈 순례지가 되었다. 이로부터 금강산을 찾는 여행객들의 순례는 끝없이 이어지게 되었고, 그 이름은 중국과 일본에도 전해져 그야말로 국제적인 명소가 되었다.
금강산의 명성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다만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의 선비들이 유학적인 명분을 부여하면서 금강산의 의미가 새롭게 각색되었다. 선비들은 금강산을 여행한 뒤 수많은 여행기와 여행시를 남겼다. 그리고 금강산과 그 주변의 관동팔경 등을 함께 그림으로 담아내기 시작하더니 이후 꾸준히 많은 작품들이 제작되며 한국 실경산수화의 중심이 되었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만들어진 금강산 문학과 그림은 차차 중요한 문화유산이 되었고, 금강산은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의 정신적, 문화적인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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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의 이름으로 보는 시대상

금강, 봉래, 풍악, 개골, 서리뫼, 열반 등 금강산은 열 개가 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금강산의 이름이 여럿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어 당연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현상이다. 우선 우리나라에 있는 다른 어떤 산도 그렇게 많은 이름을 가진 산이 없다. 금강산의 이름들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종교, 사람들의 소망과 기원을 담으며 형성되어 왔다.
금강산의 이름 중 개골皆骨(뼈뿐인 산)이나 상악霜嶽(서리뫼, 서리가 내린 듯이 하얗게 보이는 산), 풍악楓嶽(단풍이 우거진 산)은 산의 모습에서 유래되었다. 이 이름들은 금강산이란 이름보다 먼저 존재했다. 금강산이란 이름은 본래 불교의 경전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불교적인 신앙을 배경으로 형성되었다. 고려시대 말, 13세기경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 본래 풍악, 또는 개골 등으로 불리던 이 산은 금강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금강산은 차차로 종교적 성지聖地로 인식되었고 수많은 순례자들이 가고 싶어 하는 명소가 되었다.
금강산의 이름 중 가장 늦게 등장한 것은 봉래산蓬萊山이다. 신선이 사는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로 알려진 봉래산은 금강산의 모습과 분위기가 수려하고 신비하여 붙여진 것으로 조선 중기 즈음, 16세기경부터 사용되었다. 이처럼 여러 이름들이 등장한 이후 조선시대 말, 19세기 이후부터는 사계절에 따라 금강, 봉래, 풍악, 개골로 부르는 관습이 정립되었다.
금강산의 이름이 정해지는 과정에서 눈여겨 볼 것은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금강산이란 이름을 배척하였다는 사실이다. 유학을 공부하고 실천한 선비들은 불교와 관련된 의미를 지닌 금강산 대신 금강산의 경관이나 특성을 시사하는 풍악이나 개골이란 이름을 선호하였다. 그리고 현존하는 금강산의 그림들은 ‘금강산도’라는 이름을 가진 작품보다 ‘해산첩海山帖’, ‘풍악권楓嶽卷’, ‘해악도海嶽圖’라고 하는 명칭이 더 많다. 이는 하나의 작품에 동해가의 승경들과 금강산의 경치를 여러 화면에 나누어 담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고, 또한 금강산이란 이름을 피하려고 한 선비들의 유학적 가치관을 반영한 명칭이라고 하겠다.

꿈에 그린 금강산으로의 여행

금강산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마침내 그곳으로의 여행으로 이어졌다. 금강산 여행이 처음으로 유행한 것은 금강산을 불교의 성지로 여기게 된 고려 말부터였다. 구원의 성소가 된 금강산으로의 여행은 고려시대를 지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한번 이름난 명소가 된 금강산은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남녀노소가 평생 한번은 가고 싶어 하는 곳이 되었다. 또한 그 명성이 국제적으로 전파되어 중국에서 온 사신들도 바쁜 일정을 쪼개어 금강산을 여행하고 싶어 했다. 이처럼 금강산의 명성이 높아지자 많은 사람들이 가보고 싶어 했지만 동해안 멀리 위치한 금강산은 모두가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따라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람이나, 한번 가본 뒤에도 여전히 금강산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차츰 금강산이 그림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또는 금강산에 갈 때 여행의 자료로 삼을 수 있는 역할을 하려는 것도 있었다. 자신들이 본 것들을 기록하여 여행에 돌아온 뒤에도 두고두고 감상하고자 하는 것도 금강산을 그리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선비들은 이러한 작품들을 ‘와유지자臥遊之資’로 삼으려고 한다 하였는데, ‘와유지자’란 누워서 보고 즐기는 자료란 뜻으로 평소에 옆에 두고 늘상 보고 즐기는 작품이란 말이다.
조선후기, 18세기 즈음에는 금강산 여행이 더욱 유행하여 금강산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사람 축에 들지도 못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높은 관리들, 외국에서 온 사신들까지, 아래로는 서민층의 아낙네들까지 평생 한번은 꼭 다녀오고픈 곳이 금강산이었다. 현존하는 금강산에 관한 많은 기록들을 통하여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거의 동일한 여정으로 여행하였다는 점이다. 비교하자면 요즘 여행사들이 국내, 국외를 여행하는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며 그 여행에 동참한 사람들이 방문하는 지점들이 거의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처럼 상투적인 금강산 여행의 여정은 대개 다음과 같다. 예컨대 한양에서 출발하는 경우 한양에서 경기도 영평과 철원을 거쳐 강원도로 들어서고, 강원도의 김화와 회양 등을 거쳐 금강산의 내산內山으로 들어가게 된다. 금강내산의 유명한 명승을 살펴본 뒤, 동해가로 나아가 관동팔경 중 일부를 보고 다시 외산外山으로 들어가 구룡폭포와 만물초, 삼선암 등의 명승을 보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대개 말을 이용한 이 여행의 일정은 평균적으로 20일에서 30일 정도가 걸렸다. 만일 개성이나 평양에서 출발한다면, 금강외산을 먼저 보고, 금강내산을 보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 같은 여정은 금강산 여행을 기록한 문학 뿐 아니라 그림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금강산 기행문과 기행시와 마찬가지로 금강산 그림은 한 장소를 담는 한 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많게는 수십 점, 수십 면에 이르는 대작大作이 되고는 하였다. 현존하는 전통 회화 가운데 금강산과 관련된 작품들은 유난히 대작이 많은데, 이는 금강산으로의 여행에 참여한 뒤 그림으로 그려 소장하였던 인사들이 대부분 지체가 높은 선비거나 관료였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때로는 국왕이 화원을 파견하여 그려오라고 명하기도 하였는데, 조선 초의 세조와 조선 후기의 정조 등이 그러한 경우이다. 이처럼 대규모로 제작된 작품들은 출발지로부터 금강산과 동해가의 명승, 돌아오는 여정까지를 재현하면서, 중요한 명승과 의미 있는 장소를 순서대로 수록하고 있어서 그림을 보면 자연스럽게 금강산과 동해가의 명승을 여행하고, 감상하는 경험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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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산수의 시발점, 금강산도

조선 후기에 유행한 진경산수화는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경치를 재현하였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한 진경산수화를 가장 잘 그리고, 많이 그린 화가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1759)이다. 그런데 정선이 가장 많이 그린 곳이 바로 금강산이다. 정선은 금강산의 전경을 담은 <금강전도>(도1)를 평생 동안 꾸준히 제작하였다. 이 그림은 금강산 여행의 안내서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비록 금강내산을 중심으로 재현하였지만 금강산의 주요한 명승을 한 눈에 보도록 그려내었다. 한편 <풍악총람도>는 가을의 경치를 화사한 채색으로 그린 것이어서 앞의 작품과도 사뭇 달라 보이지만 이 역시 금강내산의 전경을 그린 작품이다(도2).
금강전도가 금강산을 한눈에 보여주는 오랜 전통을 가진 그림인데 비하여 금강산의 명소를 여러 면에 나누어 담는 방식도 유행하였다. 여러 면의 화첩이나 6, 8, 10폭의 병풍, 쭉 이어지는 두루마리 형식에 담겨진 작품들로는 정선의 <풍악도첩>(1711년), 김윤겸金允謙의 <봉래도권>, 김홍도金弘道의 <해산도병>(간송미술관), 김하종金夏鐘의 <해산도첩>(1815년)과 <풍악권>(1865년), 정수영鄭遂榮의 <해산도첩>, 조정규趙廷奎의 <해산도병>(19세기 중엽) 등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려진 작품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19세기부터는 민화작품으로도 대량으로 제작되어 금강산으로의 여행과 이를 그림으로 제작하는 상층문화가 일반 서민들에게도 전파되어 하나의 관습이 된 것을 짐작하게 한다.
금강산 여행을 기록한 작품들에는 금강산으로의 여행의 과정을 보여주는 여러 장면이 재현되었다. 한양에서 출발한 경우 늘 거쳐 가는 철원의 영평팔경, 피금정 등이 자주 그려졌고, 금강산에 가기 전에 금강산의 전모를 보는 지점으로 유명한 단발령에서 처음으로 금강산을 보는 장면을 그린 것이 <단발령망금강도>(도2)이다. 금강내산에 들어서면 유명한 사찰인 <장안사>(도3), 표훈사, 정양사 등을 방문하고 그림으로 재현하였다. 또한 내산의 가장 중요한 골짜기인 만폭동의 너럭바위 장면(도4)과 내산의 팔담八潭 중 가장 고운 자태를 자랑하는 <진주담>(도5), 우뚝 솟아 인상적인 <명경대>바위, 커다란 바위벽에 세 구의 불상이 새겨진 <삼불암> 등 중요한 명소들이 수록되었다. 금강산의 여행은 우선 좀 더 수월하게 오를 수 있는 내산지역이 먼저 여행의 대상이 되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좀 더 험난한 외산도 여행의 코스로 개발되었다. 그림 중에도 여행의 경로가 변화된 것이 반영되어 19세기 이후의 작품에는 금강외산 지역의 명소들이 자주 수록되었다. 외산에서는 금강산에서 가장 웅장한 폭포인 <구룡폭>(도6), 신선경으로 들어가는 듯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옥류동, 금강산 일만이천봉이라는 이름을 대변하는 듯이 솟구친 수많은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만물초>(도7), 삐죽이 솟아오른 기이한 바위인 삼선암 등이 자주 그림으로 담겨졌다. 또한 관동팔경 중에는 동해 바닷가를 따라 여행하듯이 총석정(도8), 청간정, 경포대, 낙산사, 삼일포,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 등이 순서에 따라 실려 있으며, 동해가에 솟은 금강산이라는 의미의 절경인 해금강도(도9) 종종 그려졌다. 그려진 장면들은 곧 여행한 사람들이 거쳐 간 장소들인 동시에 또한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차례대로 구경하는 듯이 느끼게 하였다.
18세기에 들어와 정선은 진경산수화를 정립시키는 과정에서 금강산도를 자주 그렸다. 정선의 화풍은 금강산 그림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정선의 <금강전도>는 많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장면이었다. 18세기 중엽 경 직업화가로 활동하던 김홍도는 선배화가인 김응환에게 금강전도를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을 요구하였다. 김응환은 정선의 금강전도와 유사한 작품을 김홍도에게 그려주었다(도9). 그만큼 정선의 금강산도가 인기가 높았던 것이다.
정선의 <금강전도>와 마찬가지로 금강산의 전경을 한 눈에 보이도록 담은 장면들이 나타난다. 1815년에 제작된 김하종의 <해산도첩> 중 금강내산에 있는 정양사의 헐성루에서 본 경치를 담은 <헐성루망전면금강도>(도11)가 있다. 궁중화가인 김하종이 그린 이 작품에는 서양화법에서 유래된 요철凹凸을 강조하는 기법이 들어가 꽤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정선의 진경산수화풍과는 다른, 서양화풍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기법이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18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정선의 화풍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경을 그리는 화풍이 등장한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다양한 금강산을 그린 작품들을 살펴보면 전통적으로 같은 장소나 대상을 그리더라도 같은 수법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개성과 시대적인 경향에 따라 화풍을 변화시켜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개성과 변화의 추구는 서양회화에서만 보이는 요소가 아니라 우리 전통 회화의 중요한 특징인 동시에 매력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식은 공자孔子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곧 옛 것을 품어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정신을 토대로 형성된 것임을 이해한다면 전통회화가 한층 흥미롭게 느껴질 것이다.

 

글 : 박은순(덕성여자대학교 교수)

 

저자에 관하여

월간 민화

4 comments on “화폭에 담긴 민족의 성산, 옛사람의 이상향 금강산도

  1. 안녕하세요, 민족의 명산名山, 금강산 소제목 내용을 참고하신 책 제목알수있을까요,
    제가 가지고있는 자료가 책복사본인데, 제목이 누락되어있어서 찾고있는중에
    거의 비슷한 내용이라 여쭙습니다. 답변꼭부탁드릴게요,

    내용- 화엄경에는 금강산에 담무갈보살이 만이천의 권속을 거느리고 거처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금강산의 일만이천봉이라는 이름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금강산의 특이한 지형과 신비로운 인상이 사람들에게 때로는 접근하기 어려운곳으로 때로는 부처가 ~~~~(중략)고려말 이후 금강산은 차츰 평생에 한 번만 밟아봐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불교의 성지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고, ~~~~~(중략) 그 이름은 중국과 일본에도 전해져 그야말로 국제적인 명소가 되었다.

  2. 글에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위 내용의 저자가 참고하신 도서의 내용은 저희로서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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