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 I. 서론
• II. 본론

1. 장욱진 작품의 민화 유형
2. 장욱진 작품의 민화적 조형성
3. 장욱진 작품의 민화적 상징성
4. 장욱진의 주요작품 분석

• Ⅲ. 결론

＊이 글은 2014년 11월 29일, 경희대학교 청운관에서 열린 ‘2014 한국민화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옮긴 것입니다.

Ⅰ. 서론

화가 장욱진(1918~1990)은 한국근현대미술의 대표작가로 뚜렷한 작가정신과 독창적인 조형성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모던한 그림세계를 구축한 화가이다.
장욱진은 ‘한국적 소재와 한국적 정감(토속성, 해학성 등)의 표출’, ‘동서양의 이분법을 일탈한 융합적 사고’, ‘독창적 화면구성’, ‘재료의 제한성 탈피와 다양한 표현기법’ 등을 구축한 화가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특히 ‘선만으로 이루어진 간결한 도상형태로써 과거의 서술적인 경향을 극복하거나 번짐의 효과, 여백의 강조, 일획적인 서예풍의 선 등을 활용하면서 스스로 변화에 대한 독창적인 돌파구를 찾은 이로 전통적인 문인산수화, 민화, 벽화의 도상들을 적극 수용함으로 우리의 과거를 하나로 이어주는 독특한 이미지들에 새로운 조형적인 가능성과 의미를 부여했다’¹⁾고 평가받는다. 이런 평가 외에 장욱진 그림의 조형적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민화적 화풍이다. 그의 현존 작품에는 민화적 요소를 함유한 그림이 상당수에 이른다. 상징성, 소재, 색채, 구성 등 내용과 형식에서 민화의 특징으로 삼을 수 있는 요소들이 작품 전반에 나타난다. 이는 민화가 장욱진의 작품세계를 이루는 한 축으로 작용했음을 말해준다. 장욱진은 “사대부가 그리는 전통시대의 문인화에는 상투적인 것이 많고, 오히려 이름없는 민화장(民畵匠)이 그린 민화에서 진정한 장인정신·예술정신을 볼 수 있다”고 역설했다. 실제로 그의 그림은 민화적 요소가 많아 민화의 현대판이라는 평가도 받는다.²⁾
장욱진이 민화를 무척 좋아했고, 평소 화가의 방에도 많이 펼쳐두었다는 이야기는 부인의 증언을 비롯해 익히 알려진 내용이다. 화가의 민화사랑이 각별했던 것은 ‘제자들이 좋은 민화가 생기면 장욱진에게 가져와 보여주었다’³⁾는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이처럼 생활 속에서 보여준 민화에 대한 화가의 관심이 자신의 작품제작에 반영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장욱진의 회화는 일반적으로 작품경향, 시대상황, 연구관점과 방향 등에 따라 시기별로 구분할 수 있다. 예컨대 ‘한국적 이미지(1937~1949)’, ‘이상세계의 반어적 표현(1950~1955)’, ‘본격적인 형태의 단순화(1956~1961)’, ‘추상실험(1962~1964), 추상이후-정체성의 모색기(1965~1972)’, ‘전통회화로의 경향성(1973~1979),’ ‘수묵화적 경향의 절정기(1980~1985),’ ‘다양한 경향의 공존-종합화의 시기(1986~1990)’ 등의 여덟 시기로 나눌 수 있다.⁴⁾ 시기별 구분에서 민화적 요소는 ‘한국적 이미지’를 모색하던 시기의 초기작품(예-1941년의 <봉황>)에 나타나지만, 본격적으로 민화풍이 제작된 것은 전통회화로의 경향성을 보이던 197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1970년대는 <거목>, <수하>, <자전거가 있는 풍경> 등 1950년대 주요 작품에서 보여주던 구성이나 표현기법과 다른 간결하고 대담한 화면구성을 추구했다. 창작활동에서 정신적 고뇌가 심했던 정체성 모색기를 지난 후 소재와 내용적으로 도가적 분위기와 전통적인 경향이 짙어지는 그림들이 등장한다. 1970년의 <풍경>과 1975년의 <호도>와 같은 작품에서 차용된 민화적 요소가 이같은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주요 작품이다.
장욱진의 작품과 민화의 관계성은 이미 드러난 사실이지만, 작품에 표현된 민화적 요소의 조형적 특징과 내재된 상징성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는 미흡한 상태이다. 이에 한국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장욱진의 작품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민화적 요소를 살펴보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유의미한 일이다. 이 점에서 본 논고는 장욱진의 작품세계에 나타난 민화적 요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장욱진의 작품과 민화와의 관계성을 살펴보는데 연구목적을 두고 있다. 연구는 다음의 세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첫째, 장욱진의 작품에 나타난 민화풍을 민화의 유형으로 어떻게 분류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본 논고에서는 민화라는 용어의 타당성보다는 민화가 지닌 특성을 여러 시각에서 분류한 학자들의 견해에 초점을 두고 장욱진의 작품에 나타난 민화적 요소를 분류하는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유형분류는 장욱진의 작품에 나타난 민화적 요소가 지닌 미적가치와 미술사적 의미를 되돌아보는 시작점으로 의미가 있다.
둘째, 민화의 유형분류를 바탕으로, 논고의 핵심발제로 삼은 장욱진 작품에 나타난 민화적 요소를 조형적 특징과 상징적 의미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조형적 특징은 형식, 즉 외형적 측면에 나타난 민화적 요소에 관한 탐구이다. 상징성은 내용, 즉 정신적 측면에서 장욱진의 작품에 내재한 민화적 상징성에 관한 접근이다.
셋째, 조형적 특징과 상징적 특징에서 살펴본 내용을 기준으로 장욱진의 현존작품 중 민화풍의 성향이 강한 작품을 선취하여 조형적 특징과 민화의 관계성을 분석하고자 한다.

1) 정영목 저 『카탈로그레조네-유화』학고재, 2001, 20쪽.
2) 김형국 저 『장욱진 모더니스트 민화장』열화당, 2004, 161쪽 주재인용.
3) 정영목 저 『카탈로그레조네-유화』학고재, 2001, 203쪽.
4) 정영목 저 『카탈로그레조네-유화』학고재, 2001, 9쪽.

Ⅱ. 본론

1. 장욱진 작품의 민화 유형
민화에 관한 분류는 많은 학자와 관련 전문가들의 제시 중 야나기 무네요시, 조자용, 김철순, 김호연, 이우환 등이 구분한 분류가 가장 일반화되어 있다. 민화분류표를 보면 연구자에 따라 분류범주와 종류가 다르다. 민화의 유형은 <표 1>⁵⁾ 민화 분류표처럼 용도와 기법, 재질, 주제 등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민화연구가 중 조자용의 상징별, 화제별 분류가 가장 세분화되었다.
장욱진의 그림을 민화의 유형으로 분류한다면 적합도로 볼 때 일차적으로 이우환의 분류도를 꼽을 수 있다. 장욱진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불교⁶⁾ 및 도교사상과 관련이 있다.

분류자	분류	종류
야나기 무네요시 (1889~1961)	문자민화, 길상과 연관된 민화, 전통적 화제의 민화, 정물민화, 도교에서 비롯된 민화	5가지
조자용 (1926~2000)	순수회화와 실용회화로 대분류. - 상징별 10가지: 수(壽), 쌍희(囍), 자복(子福), 재복(財福), 영복(寧福), 녹복(錄福), 덕복(德福), 길상(吉祥), 벽사(邪), 민족(民族) 등 - 화제별 20가지: 산수화(山水畵), 수석도(壽石圖), 화훼도(花卉圖), 소과도(蔬果圖), 화조도(花鳥圖), 축수도(蓄獸圖), 영수화(靈獸畵), 어해도(魚蟹圖), 초충도(草蟲圖), 옥우화(屋宇畵), 기영화(器用畵), 인물화(人物畵), 풍속화(風俗畵), 도석화(道釋畵), 기록화(記錄畵), 설화화(說話畵), 도안화(圖案畵), 지도화(地圖畵), 혼성도(混成圖), 춘화도(春畵圖) 등	10-20가지
김철순 (1931~2004)	꿈의 민화, 사랑의 민화, 믿음의 민화, 길상의 민화, 깨달음의 민화 - 소재 중심으로 재분류-화조, 산수, 민속, 불교화	5가지
김호연 (?~?)	화조화, 호랑화, 동물화, 산수화, 풍속화, 속신화, 불교화, 윤리화, 장식화 등	9가지
이우환 (1936~)	도교적인 것(십장생, 사신도, 벽사, 신선도 등) 불교적인 것(세속화된 불화, 고승상, 사원벽화 등) 교육적인 것(문자도, 문방도, 백자동화 등) 일상적인 것(화조, 어류, 산수, 풍속 등)	4가지

<표 1> 민화 분류표

장욱진의 작품세계에서 불교적 색채가 강한 작품이 있는 것은 집안 대대로 불교 집안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1933년(17세)에 당대 큰 스님 만공선사(1871~1946)가 계신 충남 예산의 수덕사 견성암에서 6개월간 머물며 몸과 마음을 안정시켰던 경험이 줄곧 그의 삶에서 불교와의 인연을 이어가는 시작점이었다.
장욱진의 불심은 불교라는 커다란 종교의 틀보다는 불교적 가정환경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장욱진의 작품에서 불교적 성격이 뚜렷한 작품은 1970년<진진묘>, 1976년<팔상도>, 1977년<사찰>, 1983년<미륵존여래불> 등이다. 불교는 그의 작품세계에 내재한 다양한 정신사상의 하나로 작용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정영목 교수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

장욱진의 작품세계는 불교와의 관련성은 그리 많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도교의 노장사상에 가까워보인다. 그리고 그 작품세계는 노장사상뿐만 아니라 불교와 전통적인 무속과 민화, 설화 등의 요소가 자전성을 바탕으로 서로 종합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⁷⁾

장욱진의 작품세계는 작품자체의 도상이나 주제보다는 작가적 정신과 삶의 태도로 볼 때 앞서 언급한 ‘불교적인 것’ 이외에 1981년<와유강산>, 노장사상의 성격이 진한 1990년<무위자연>과 다수의 <무제>작품에서 ‘도교적인 것’의 분위기가 풍긴다. 이러한 분위기는 화가 자신을 도인처럼 묘사한 작품들에서 쉽게 확인된다.

가족 간의 사랑과 우애의 메시지를 담아 표현한 많은 그림에서는 ‘교육적인 것’과 연결할 수 있다. 교육적인 것은 장욱진이 실제 교육에 목적을 두고 엄격하게 구분하여 표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소박하지만 분수에 맞게 욕심 부리지 않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보여준 것 자체가 교육적인 것의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교육적인 것에 이어 <가족도>연작을 비롯해 1954년<수하>, 1955년 <자전거가 있는 풍경>, 1956년<모기장> 등 이후 일상의 다양한 모습을 지속적으로 표현한 그림들은 ‘일상적인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일상적인 것은 1990년까지 장욱진 작품세계에서 꾸준하게 표현되어온 주제이다.
이상 언급한 그림과 내용적 특징이 장욱진 화가와 이우환의 민화분류체계를 접목시킬 수 있는 근거이다. 이우환의 분류가 큰 틀에서 장욱진의 민화적 화풍을 분류하는 기준이 되었다면, 실질적으로 장욱진이 민화적 그림에 담고자 했던 세계는 김철순의 분류체계와 추구하는 지향점이 한층 가깝다. 꿈, 사랑, 믿음, 길상, 깨달음은 장욱진 화가가 평생 동안 작품으로 보여주거나 이루고자 했던 세계였다. 실질적으로 그의 작품에서 민화적 성격을 지닌 작품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를 놓고 봐도 꿈, 사랑, 믿음, 길상, 깨달음은 장욱진의 작품세계를 상징하는 핵심어로 삼을 만하다.

2. 장욱진 작품의 민화적 조형성

장욱진의 그림에서 민화적 요소가 등장한 것은 1950년을 전후해서이다. 일본 유학 이후 한국적 정감과 소재에 대한 탐구는 동시대 화가들이 추구하는 공통된 과제였지만, 뚜렷한 자기언어로 한국적 정감을 표출한 화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장욱진은 이러한 극소수 화가 중 자유롭고 꾸밈없는 조형의식으로 주목을 받았다. 1954년에 제작한 <소>는 동물(소, 까치, 닭 등)과 다양한 식물의 소재를 바탕으로 조형적 탐구를 시도한 작품으로 한국적 정감(향토성)이 짙다. 적갈색과 녹색의 보색처럼 강한 색채대비로 전통민화에서 볼 수 있는 화면의 생동감과 주목성을 얻었다. 이 그림은 장욱진이 박물관에 재직하던 시기의 작품으로 당시 민화와 같은 전통미술에 관심이 높았던 화가의 관심도가 드러나 있다. 동물과 자연을 묘사한 방법과 기법, 화면 가득 묻어나는 해학성 등에서 전통미술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장욱진의 작품에서 민화적 요소는 어떤 특정 시기나 작품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작품세계 전반에 배어있는 요소라는 점에 주목할만 하다. 장욱진 그림에서 찾을 수 있는 민화적 요소는 일반적으로 민화의 조형적 특징으로 인식되어온 여러 요소들과의 유사함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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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다시점(多視點)의 표현
민화의 표현 형식 중 다시점은 가장 대표적 표현 형식이다. 민화는 시점이 한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특성이 있다. 전후·상하좌우·고저에 대한 분명하고 일관된 시점이나 작법을 무시했다. 이런 현상은 서양의 투시법과 다른 동양인의 관물태도의 특징이다. 서구의 르네상스 이후 발달된 일점원근법(一點遠近法)과도 다르며 동양화의 원근법인 삼원법(고원, 평원, 심원)과도 다르다. 자연 속에서 인간의 이동시점에 따라 그려지는 시점이동법과도 다르며 인간을 중심으로 사방을 둘러보는 원형시점과도 거리가 멀다.⁸⁾ 굳이 서양화법에서 찾는다면 입체파의 조형원리인 다시점과 유사하다. 주로 정통산수화에 적용되는 시점이지만, 민화에서는 풍경뿐만 아니라 꽃, 나무, 동물, 새와 같은 개별적인 대상물까지도 다시점⁹⁾ 화법을 취하고 있다. 가령 호랑이의 얼굴과 형태에서 앞면과 옆면이 동시에 표현되고, 책거리 그림에서 사물의 겉과 속이, 혹은 좌측과 우측이 동시에 표현된다. 궁극적으로 다시점은 하나의 물체를 완전체로 표현하고자 하는 관물태도이다.¹⁰⁾
이러한 다시점은 장욱진 그림이 지닌 대표적 조형성이다. 그러나 입체파가 사물을 완전체로 인식하는 태도와는 다르다. 장욱진의 관물태도는 하나의 사물을 상하좌우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며 물체의 전면을 묘사하기 위한 표현법과는 거리가 있다. 장욱진은 여러 사물을 하나의 공간에 표현하되 그것을 바라보는 시점을 각각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사찰>(1977)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각각의 물체를 자유롭게 바라보는 시점을 하나의 화면에 그렸다. 뿐만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벗어나 해와 달을 동시에 그린 것도 자연의 변화를 한 화면에서 함께 느낄 수 있게 한 의도이다.
장욱진은 주로 유기적 관계가 있는 사물들을 하나의 화면에 그리지만 이때 사물을 묘사하는 시점이나 표현방법을 반드시 일치시키지 않았다.
가령 식탁이란 작품만 해도 그렇다. <도판 4>에서 보듯이 A와 B의 시점이 다르다. A가 수평적 시점인 반면 B는 수직적 시점이다. 수평과 수직의 시점이 공존하는 구성은 현대미술의 특징으로 꼽지만, 사실상 그 기원은 벽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컨대 기원전 1400년경, 테베의 고분 벽화인 <네바문의 정원>을 보면 어린이 같은 감성은 인간이 지닌 가장 원초적 감성이었음을 증명해준다.¹¹⁾
결국 장욱진의 시점은 허균의 설명¹²⁾처럼 ‘보고 있다’는 식의 서양화의 관물태도보다 ‘보아 간다’는 식의 동양화의 관물태도에 가깝다.

➋ 원근법과 비례감의 상실
민화에서 사물의 크기는 원근법이나 실제의 존재 양태에 따라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리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정해진다. 예컨대 달 속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의 모습이 달을 꽉 채울 정도로 크게 그리고, 나무 아래의 사슴은 쥐처럼 작게 표현하고, 가지 높이 달린 석류가 앞쪽의 봉황 크기만 하게 그려졌다. 이는 그림의 의미를 담아내는 사물의 크기를 그 강조점에 따라 정하기 때문이다.¹³⁾ 이런 조형적 특징은 장욱진의 그림에서도 쉽게 목도된다. 장욱진의 그림은 원근법이 사라지고, 사물 간의 상호비례가 무시되어 있다. 사람이 집보다 크게 그려지거나, 동물(호랑이, 새, 닭 등)이 나무나 산보다 크게 그려진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아이>(1970년) 작품처럼 사물의 비례가 화가의 주관에 의해 자유롭게 결정되어 있다. 언덕보다 큰 아이들과 나무, 아이들보다 작은 집 등 대상의 절대적 크기가 무시되었다. 객관적 비례(현실적 비례)가 아닌 작가의 개인적 해석에 따른 주관적 비례로 표현되어 있다. 비례는 서양미술사에서 객관적 비례와 주관적 비례를 놓고 그리스 로마에서 중세, 르네상스를 거쳐 화가들 사이에 수백 년간 반복적으로 대립했던 부분이다. 따라서 객관적 비례냐 주관적 비례냐를 놓고 미적가치의 우위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현대미술에서 비례는 이미 객관적 비례보다 주관적 비례를 중시하는 경향이 짙다. 작가의 주관적인 시각과 해석으로 표현한 비례인 만큼 작가의 의도가 집약된 결과로 여겨진다. 장욱진 작품에서 보이는 주관적 비례 역시 화가 장욱진이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물간의 관계를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실 장욱진의 그림에서 보이는 주관적 비례가 민화풍의 작품에서만 보이는 조형성은 아니다. 그의 작품 전체에 나타나는 보편적 특징이다. 이는 역으로 장욱진의 작품세계에서 비례는 민화의 중요한 조형적 특징인 주관적 비례를 작품 전체에 적용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주관적 비례는 장욱진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민화적 요소이다.

➌ 입체감과 공간감의 상실
민화는 표현대상을 실재감 있게 그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그림에서 입체감 표현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때 필요하다. 그만큼 시간적 공력도 요구된다. 따라서 비슷한 소재를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민화의 경우는 시간과 표현기술보다는 사물에 담긴 의미를 읽을 수 있는 것에 무게를 두고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수준 정도에 만족한 경우가 많다. 이에 실재감 있는 표현보다 평면적인 형태묘사가 쉬운 방법을 택했다고 보인다. 공간감을 무시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물이 있어야 할 공간에 있지 않거나 사물의 배치가 지극히 작위적이다. 예컨대 물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가 수면 위로 전체모습을 드러낸다거나 서로 어울리기 힘든 동물들이 한 공간에 존재하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같은 민화의 특성은 장욱진의 그림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는 <풍경>과 같은 작품에서 쉽게 확인된다. 패턴화처럼 표현된 사물들에서는 입체감을 느낄 수 없고, 또한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사물들이 낯선 공간에서 흩어져 공간감이 없다. 마치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추구했던 데페이즈망기법처럼 낯선 공간에서 사물과 사물이 만나 새로운 관계성을 획득하는 것과 같다. 입체감과 공간감의 상실은 궁극적으로 사물의 본질에 대한 탐구이자 표현 대상간의 관계성을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다. 장욱진의 작품에서 입체감과 공간감의 상실은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민화적 요소이다.

➍ 대칭구도 사용
민화는 일반적으로 대칭형 구도가 많다. 특히 꽃그림이나 정물화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어떤 경우는 기하학에서 말하는 합도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한 좌우 대칭구도를 보인다. 이러한 대칭형 구도는 정통 회화에서는 찾기 어려운 구도이다. 허균은 민화가 균제형의 구도를 많이 취하고 있는 이유를 그림의 수요가 많을 경우 더욱 쉽게 빨리 그려 공급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았다.¹⁴⁾

장욱진의 그림에서는 중심이 없는 시점과 소재를 좌우 대칭으로 무심하게 배열하는 방식을 취했다. 다분히 민화적이다¹⁵⁾. 그러나 장욱진이 대칭형 구도를 사용한 의도는 민화가 균제형의 구도를 많이 취하고 있는 이유와는 분명히 다르다. 무엇보다 손쉽게 표현해 원활한 수요·공급을 위한 선택 사항은 아니다. 1970년 작품 <풍경>에서 이미 보았듯이 장욱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대칭형 구도는 철저한 조형적 탐구의 결과물이다. 장욱진의 대칭구도는 <아이 있는 풍경> <도판7>작품에서 한층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캔버스 표면조직이 드러날 정도로 물감이 스며들게 표현한 이 작품은 장욱진의 덕소 시절 후반기에 제작한 것으로 수묵담채화같은 느낌을 주는 기법과 더불어 장욱진의 전형적인 대칭구도를 보여준다.
화면 중앙의 집과 아이를 중심으로 상하좌우가 대칭구도로 되어있다. 특히 해, 산, 나무 등이 민화의 도식화된 형태와 비슷하다. 대칭구도는 화면의 안정과 질서를 가져다준다. 건축(예 경복궁)에서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는 조화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데 탁월하다. 좌우대칭 구도는 중심을 이루는 대상을 기준으로 좌우로 같은 크기나 모양, 또는 상대적 사물을 배치하므로 반복에서 오는 안정감과 균형감이 있다. 동시에 통일감도 지닌다. 건축, 회화, 조각 등 모든 조형예술에서 대칭은 비대칭과 비교되는 조형성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이 구도는 자칫 지나친 좌우대칭에서 오는 지루함과 단조로움 때문에 흥미와 재미가 반감될 수 있다. 이러한 단점이 드러나지 않고 대칭구조의 장점만을 부각할 수 있다면 대칭구도가 시각적으로 끼치는 효과는 크다.
장욱진의 대칭구도는 이러한 장점을 유지하면서도 부분적으로 단조로워질 수 있는 요소들을 배제함으로서 생동감이 넘치는 화면을 보여준다.
<도판 8>의 1978년에서 1987년에 그린 작품을 보면 나무를 화면 중앙에 두고 좌우대칭으로 사물을 배치하는 구도가 주를 이루는데, 비슷한 듯 하면서도 각 작품마다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대상의 배치와 조율이 탁월하다. 장욱진은 대칭구도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그에 따른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방법을 나름대로 터득했다고 볼 수 있다.

<도판 8> 좌로부터 우측으로
<풍경> 1978년, 캔버스에 유채, 43.5×29cm, 개인소장
<동산> 1978년, 캔버스에 유채, 33×24cm, 개인소장
<풍경> 1978년, 캔버스에 유채, 26.5×22cm, 개인소장
<풍경> 1978년, 캔버스에 유채, 27.2×16.2cm, 개인소장
<동산> 1978년, 캔버스에 유채, 34×25cm, 개인소장
<까치> 1979년, 캔버스에 유채, 20.2×15.3cm, 개인소장
<나무> 1985년, 캔버스에 유채, 42×32cm, 개인소장
<까치와 아낙네> 1987년, 캔버스에 유채, 35×27cm, 개인소장

➎ 반복성
반복성은 민화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민화에서 똑같은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일종의 심리적 만족감이나 성취의 의지로 작용한다. 하나의 주술적 행위에서의 반복성이다. 즉 같은 형상을 반복적으로 그림으로써 주술적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깊다.
장욱진의 그림세계도 소재와 구성의 반복성이 유독 강하게 나타난다. 해·달·소·개·닭·집·나무 등이 소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소재는 장욱진의 작품세계를 형성하는 실질적 소재로 자연과 인간, 인간과 동물의 공생관계를 보여주는 핵심구성이다. 장욱진의 그림은 소재의 반복과 더불어 전체적인 구성과 구도가 유사한 그림을 반복해서 그린 경우가 많다. 대칭구도에서 살펴본 것처럼 <도판 8>의 작품들을 보면 유사한 소재와 구성의 반복을 볼 수 있다.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장욱진의 그림은 시기별로 비슷한 소재와 구성이 연작으로 반복되거나 때로는 시기를 초월한 소재와 구성의 반복이 나타난다.
반복성은 장욱진 작품에서 중요한 조형적 특징이다. 단, 장욱진 그림의 반복성과 민화의 반복성과 다른 점은 장욱진의 반복성은 주술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행위는 아니라는 점이다. 주술적 효과보다는 자신만의 작품세계 구축을 위한 조형적 탐구과정에서 표출된 반복성이다. 또한 장욱진의 반복성을 늘 새로운 변화를 함유한 반복이다. 같은 소재나 사물, 비슷한 구도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 기법, 시선 등에는 언제나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한 노력들이 보인다. 결과적으로 장욱진의 반복성은 지루함보다는 일관성 있는 작품세계를 유지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3. 장욱진 작품의 민화적 상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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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의 상징적 표현은 서민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희노애락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할 뿐 아니라 그러한 의사소통의 바탕이 되는 공통의 세계관을 매개해 주는 역할을 한다. 부귀다남(富貴多男), 부귀공명(富貴功名), 무병장수(無病長壽) 등 인간으로서의 소박한 바람이 민화에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민화가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동경의 대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다.¹⁶⁾ 이러한 상징성은 우리 민족의 오랜 관습처럼 이어온 주술적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궁극에 상징성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서부터 감상자, 소장자까지 그림을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좋은 의미와 기운을 주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민화에 좋은 상징적 의미를 담고자한 것은 이 같은 연유에서이다. 가령 ‘용’이나 ‘호랑이’ 그림을 정월에 벽사용 세화로 제작하여 새해 아침 문배로 사용한 것은 같은 맥락이다. 장욱진의 작품에서 <호작도> 연작에 비하면 작품 수가 극히 적지만, 용이나 닭 그림도 그렸다는 것에서 장욱진 역시 길상적 의미로 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길상동물 중 용을 즐겨 그렸는데 1988년 용띠해는 특별히 용을 자주 그렸다. 88년이 용해가 된 것을 드문 경사로 치부하는 것은 특히 중국 사람들의 오랜 전통이다. 사통팔달의 말처럼 중국 사람은 ‘8’을 최고의 길수로 치는 그 8이 두 번 겹쳤기 때문이다.¹⁷⁾ 물론, 길상동물을 해당 연도에만 그린 것은 아니다. 제작연도를 보면 1977년은 뱀띠 해(丁巳年), 1978년은 말띠 해(戊午年)였다. 용이나 호랑이 띠 해와는 무관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새해를 맞이하거나 특별한 날 좋은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한 목적에서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장욱진의 사물의 특징을 잡아내는 탁월한 직관력은 의식적으로 그린 작품보다 오히려 뛰어난 생동감을 지녔다.
<도판 9> 역시 유화가 아닌 먹과 매직마커라는 단순재료만으로 표현했지만, 그 표현력에 있어서는 동물의 특징을 최소한 간결한 선으로 자신감 있게 표현해 냈다. 특히 먹으로 표현한 용은 빠른 필치와 역동적인 힘이 느껴진다. 하나의 문자도를 보는 듯하다.
민화의 조형성은 민화가의 시각이나 감각에 의해 자유롭게 변형되거나 첨삭되기도 한다. 어떤 특별한 도상을 반복해서 그리더라도 전체적인 구상이나 구도는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한다. 비슷한 소재로 전혀 다른 느낌의 새로움을 전달하는 것도 민화의 특징이다. 민화가 다른 장르에 견주어 지루함 없이 흥미를 유발시키는 요소를 함유하고 있는 것은 자유로운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민화의 상징성도 마찬가지다. 화가의 개인적 시각뿐 아니라 때로는 지역의 문화적 환경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 상징성이다. 이는 생태적 특징과 연관한 것에서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물고기 중 잉어는 폭포를 거슬러 뛰어넘는 생태적 특성에 착안하여 어려움을 뚫고 입신양명의 길을 통과한다는 상징성을 부여했다. ‘등용문(登龍門)’,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 ‘약리도(躍鯉圖)’ 등이 같은 맥락의 상징성으로 통용된다. 물고기는 떼 지어 다니거나 한꺼번에 많은 알을 낳는 점에서 ‘다산(多産)’이라는 상징성도 지녔다. 장욱진의 그림 중에서 물고기가 등장하는 십장생 그림이 있는데, 여기서 물고기는 십장생이 뜻하는 의미처럼 자손들이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다산의 의미는 다른 소재의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1977년에 그린 <소와 돼지> 작품을 보면 화면을 4단으로 분할 한 다음 제일 위쪽에는 집을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한 단씩 새끼가 딸린 동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소와 돼지뿐만 아니라 보통 한 마리만 그리던 개도 여기서는 어미와 새끼 두 마리다. 암탉이 병아리와 함께 나타나는 조형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지만, 화가는 그게 다산성이나 풍요의 상징임을 염두에 둔 게 분명하다. 실제로 결혼한다고 인사하는 친척에게 병아리를 여럿 거느린 닭을 그려 선물한 것에서 알 수 있다.¹⁸⁾ 아이를 많이 낳아 가족을 이루라는 의미를 작품에 담은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 민화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는데, 그림 속에 그러한 주술적이고 기원적 성격을 담았다는 것은 화가의 작품이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민화와 많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말해준다.¹⁹⁾
장욱진 그림에서 축하와 구복(求福)의 성격을 지닌 그림은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가령 손자의 대학입학을 축하하기 위해 그려준 <어사화>는 과거에 급제한 후 종이 꽃을 머리관(복두)에 꽂고 말에 타올라 당당하게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모습이 전형적인 어사화이다. 그런가하면 조카가 비엔나의 공사관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려준 축하화, 생일을 축하는 그림, 손녀와 갓 태어난 아기를 함께 그려 건강과 형제간 우애를 바라는 마음(눈이 동그란 손녀가 동생을 잘 보살펴주라는 사랑의 메시지)을 담았다. 시집간 딸들의 득남을 위해 사내아이를 그려 넣은 <엄마와 아이>는 그림의 형식보다는 그림에 담은 상징적 의미가 더 깊다. 이 밖에 주술적 의미를 담은 그림도 있다. 자식이 없어 걱정이었던 넷째 딸의 친구에게 그림을 그려 선물했는데, 그 덕이었는지 딸의 친구에게 아이가 생겼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장욱진이 축하의 의미로 다시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것이 <거북이><도판 11>이다. 화목하게 무병장수하라는 의미로 해와 달, 봉황, 거북이를 한 쌍으로 그려 딸의 친구에게 선물했다. 이와 같이 장욱진의 그림에는 행복하고 안락한 삶을 기원한 화가의 마음을 담은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장욱진의 민화풍 작품에 나타난 상징성은 전통 민화의 소재가 지닌 상징성을 담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일단 우화를 바탕으로 한 교훈과 골계미에 무게를 둔 민화의 세계와는 분명히 다르다. 이는 장욱진이 단순히 민화의 조형적 특징을 그대로 답습 또는 모방하기 보다는 꼭 필요한 부분을 차용하여 자기만의 조형언어로 탈바꿈시킨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장욱진은 그림에서 주된 소재로 등장하는 해와 달은 조선의 ‘일월오봉도’에 필수적으로 그려진 소재이다. 해와 달은 조선의 ‘일월오봉도’ 외에도 동아시아 미술에서는 일월도가 일찍부터 등장했다. 중국 호남성 장사에서 발굴된 서한의 무덤인 마왕퇴(馬王堆)의 출토물 중 관의 뚜껑 위를 덮었던 장례용 깃발에는 하늘을 표현한 상단 부분 좌우에 일월이 그려져 있다. 즉 일월 도상은 승천의 세계, 우주를 표현하는 부호였으며 그 의미는 <일월오봉도>에서처럼 왕권을 상징하는 부호로도 발전되었다.²⁰⁾ 그러나 장욱진 그림에서 해와 달은 사람, 동물,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세계의 시간적 질서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해와 달은 왕권과 같은 절대상징을 담고 있기보다는 음양의 조화를 포함한 자연과 인간의 자연스러운 공존세계를 의미한다.²¹⁾
장욱진의 그림에서는 십장생의 종류가 주관적으로 선택되고, 전통민화가 추구했던 것과 다르게 호작도의 의미나 사물의 상징적 의미가 주관적 선택과 해석에 의해 새로운 의미부여로 탄생했다. 이것이 장욱진의 민화풍 그림이 지닌 특징이다.
궁극적으로 전통 민화는 기복과 벽사를 위한 기능적 측면이 강한 반면, 장욱진의 민화풍 그림은 길상적 의미와 더불어 개인의 내면세계를 담은 정신적 측면이 강하다. 장욱진의 민화풍 그림은 삶의 테두리에서 한층 밀도 있게 접근한 주관적 정신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전통 민화의 상징성보다 일상적 체험에 근거한 개인적 바람을 군더더기 없는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하는 작화태도를 고집했다. 장욱진의 작품은 김형국의 평가²²⁾처럼 ‘일상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추구한 세계이다.

4. 장욱진의 주요작품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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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호작도>
한국 미술사에서 화명을 알 수 있는 작품 중 장욱진 화가만큼 호랑이를 많이 그린 작가는 찾기 어렵다. 호랑이와 까치를 소재로 한 현존 작품만으로 볼 때 장욱진 화가가 독보적으로 많다. 장욱진 화가는 1970년 중반 이후 1990년까지 호랑이와 까치가 등장하는 그림을 지속적으로 제작했다. 장욱진이 호랑이를 소재로 한 작품은 기본 모티프를 ‘호랑이가 젖을 물린 아이’라는 민간설화에서 차용했다. 맹수인 호랑이가 아이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젖을 물렸다는 이야기는 황당하지만, 장욱진은 이 이야기에서 호랑이와 아이의 관계를 동물과 인간 사이의 적대관계가 아닌 공생관계로 표현했다. 이는 동양의 자연합일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장욱진 작품세계의 근간을 이룬다. 장욱진은 민화에서 까치와 호랑이를 함께 그린 것과 같이 언제나 호랑이와 아이를 함께 그렸다. 이는 <도판 12>에서 보듯 1975년 이후 장욱진 그림에서 확인된다.
예로부터 ‘호랑이는 삼재를 쫓는다(虎逐三災)’는 벽사기능이 있다고 믿었다. 정월초하루 호랑이가 그려진 문배를 붙였던 것도 행복과 건강을 기원한 염원에서 비롯되었다. 장욱진의 그림에서 호랑이가 종종 등장하는데 대부분 집과 함께 그려졌다. 그만큼 집안, 즉 가족의 안녕을 기원한 화가의 바람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장욱진의 호랑이 소재 그림 중 <호작도>의 가장 보편적인 민화 형식에 가장 근접한 그림은 1978년의 <호작도>이다. 호랑이가 까치를 바라보는 일반적 구도와 달리 까치가 호랑이의 등 뒤에 배치된 것이 다르지만 호랑이의 자세나 구성상으로는 전통 민화에서 보는 호작도에 가장 근접해있다. 이 그림의 단순 구성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최소한의 선과 형태만으로 자신감 있게 표현한 호랑이다. 호랑이의 머리에서 꼬리까지 유려하게 이어진 간결하고 힘 있는 선이 특징이다. 호작도에서 까치는 일반적으로 두 마리가 함께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한 쌍의 새가 부부의 화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장욱진의 그림세계에서 호랑이가 등장한 것은 1975년에 그린 <호도>를 시작점으로 삼을 수 있다. <호도>는 해→까치와 나무→사람→새→호랑이와 아이→산을 직렬식으로 배치하여 자연과 인간, 동물과 자연과의 공생관계를 동화적 분위기로 표현했다. 이 작품과 비슷한 소재와 구성은 같은 해 종이에 매직마커로 그려진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은 장욱진이 지인에게 그림 그릴 종이를 선물 받고 무엇을 그릴까 고민 끝에 <호작도>를 그려 첫째 딸에게 선물한 그림이다. <호도>와 차이점은 소재들을 병렬식 배치한 점이다. 반면, 두 그림의 공통점은 호랑이와 아이가 어울려 놀고 있는 모습과 장죽(長竹)을 입에 문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정겨운 구도이다. 때로는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때로는 정겨운 할아버지의 너그러움이 해학적으로 표현되었다.

민화에는 인간의 원초적 심성을 자극하여 미소 짓게 하는 해학적 요소가 다분하다. 그러나 민화는 단순히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한 것은 아니다. 억지스런 웃음이 아닌 생활상에서 맺어지는 온갖 일들이 분수에 맞고 무탈하게 진행되기를 바라는 절실함이 담겨있다. 따라서 민화의 해학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과정에서 유발되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다. 장욱진의 작품세계는 이러한 일상의 자연스러운 즐거움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민화적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 한마디로 장욱진 그림에서 해학은 시각적 즐거움이 아닌 정신적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따뜻한 미소에 가깝다. 장욱진의 작품에서 해학성은 중요한 특성으로 꼽힌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자화상>을 작가의 해학성의 전조가 되는 작품으로 평가²³⁾하기도 했는데, 해학성은 장욱진 작품의 전반에 깔린 특성이다. 이러한 특성과 더불어 호작도 연작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은 장욱진의 창작태도이다. 유화에서 먹으로 재료의 옮김과 함께 표현의 자유로움을 더해가는 조형적 변화에서 특정한 틀에 안주하지 않은 화가 장욱진의 창조적 열정을 엿볼 수 있다. <도판 13> 의 백자에 그린 <호작도²⁴⁾>는 누구보다 형식(재료)에서 자유로웠던 장욱진의 개성을 만날 수 있는 실례이다.

➋ 닭
장욱진의 그림에서 호랑이 소재와 더불어 등장 빈도수가 높은 소재가 닭이다. <동물가족> 작품처럼 수탉과 암탉이 동시에 그려진 경우도 있지만, 수탉은 화면구성상 중요성을 차지하거나 독립적으로 그려진 것이 많다.
닭 그림은 원래 개·사자·호랑이 그림처럼 정초에 그리는 세화의 일종으로 분류되고 있는 그림이다. 또한 평소 집안 장식용으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닭은 『주역(周易)』 팔괘 중 손(巽)에 해당하는 동물이다. 손괘의 방위는 동남쪽인데, 동남쪽은 여명(黎明)이 시작되는 곳이다. 옛사람들은 닭이 여명에 울면 모든 잡귀들이 달아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잡귀의 통로가 되는 대문이나 다락문에 닭 그림을 붙여 잡귀의 침입을 막았다.²⁵⁾ 이러한 주술적 의미와 더불어 닭의 대표적 상징성은 입신출세(立身出世)와 공명(功名)이다. 닭의 볏(comb)이 관모(冠帽)를 닮아 계관(鷄冠)으로 칭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출세를 의미한다. 공명은 말 그대로 공을 세워 이름이 세상에 떨쳐지는 것을 뜻한다.

민화의 닭 그림으로는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 소장 그림이 유명하다. 섬세한 묘사와 색채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유난히 크고 윗쪽으로 상승하듯 솟아있는 붉은 볏, 턱 밑으로 늘어진 고기수염(wattles)에서 수탉의 위엄과 나이가 느껴진다. 등거리에서 어깨 깃을 거쳐 꽁지 부분의 깃까지 연결되는 곡선이 유려하면서도 섬세하다. 특히 외발로 서있는 수탉의 모습에서 긴장감이 감돈다. 실제 수탉의 생태적 특징을 보면 한쪽 발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발을 옮기는데 그림에서 이 같은 생태적 움직임이 연상된다. 위엄과 절도, 섬세함과 긴장감이 넘치는 스미소니언 수탉에 비해 장욱진의 수탉은 동화적이다. 특히 부리를 다물고 있는 스미소니언 수탉에 비해서 장욱진의 수탉은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가깝다. 목을 앞으로 길게 뻗으며 우는 듯하다. 간략한 선과 색으로 표현한 수탉은 위엄보다는 친근감이 있다. <닭과 아이><도판 14>는 마치 샤갈의 작품을 보는 듯한 초현실적 분위기가 화면전반에 흐른다. 화면전체가 평면적이다. 특히 현실적 색에서 벗어난 수탉의 장식적인 색이 작품전체를 유쾌하게 이끄는 데 한 몫을 하고 있다. 비스듬히 떠있는 초승달 아래로 날아다니는 아이와 현실적 대소 관계 무너진 사물들이 어울려 초월적 분위기가 감돈다.
호랑이와 더불어 가장 많이 그려진 수탉은 기본적으로 길상적 의미를 지니지만, 기법이나 재료에서 간결한 표현과 욕심내지 않은 화가의 마음이 그림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➌ 봉황도
장욱진의 작품에서 민화풍 그림은 1941년 화가가 자신의 결혼을 축하하며 부인에게 선물한 <봉황도><도판 15>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가족의 화목은 부부의 화합에서 비롯된다. 민화의 화조화에서 부부화합의 상징으로 많이 그려지는 것이 한 쌍의 새 그림이다. 한 쌍의 새는 남녀의 화합을 뜻하며, 근본적으로 음양의 조화를 의미한다. 행복한 결혼생활과 화목한 가정을 염원하며 그린 <봉황도>는 금슬 좋은 부부의 백년회로를 상징하는 ‘원앙’으로 더 알려져 있다.
원앙은 암수가 날 때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난다고 한다. 수컷인 원이 오른쪽에서 날면 암컷인 앙은 왼쪽을 지키는 것이다.²⁶⁾ 원앙은 어느 한쪽을 잃더라도 새 짝을 얻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원앙이 부부간의 정조와 백년화목을 기원하는 부부애의 상징으로 사랑받은 연유이다. 그래서 그림이나 장식 문양에서 원앙을 소재로 할 경우 반드시 한 쌍을 그려야 본래의 상징성을 갖춘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장욱진의 그림은 형태나 구성상으로 볼 때 봉황에 더 가깝다. 일반적으로 신혼부부는 구봉침 베개를 함께 쓰는데, 장욱진은 그림을 보면 아홉 마리의 새끼 봉황이 그려져 있다. 아홉 마리 새끼와 봉황 한쌍이 같이 있는 경우는 스미소니언 소장의 <봉황도>에서 나타난다. 장욱진의 <봉황도>의 구성은 <도판 16>에서 보듯이 베갯모에 수놓기 위한 일반화된 밑그림과도 흡사하다.

수침은 베갯모에 수놓인 그림과 무늬에 따라 구봉침(九鳳枕)·학침(鶴枕)·호침(虎枕)·목단침(牧丹枕)·연화침(蓮花枕)·수복침(壽福枕)·난침(蘭枕) 등으로 불린다.
봉황 한 쌍이 일곱 마리 새끼를 거느린 모습을 담은 구봉침에는 다산(多産)의 염원이 담겨있다. 장욱진이 결혼선물로 주었다는 <봉황도>는 봉황이든 원앙이든 그 의미가 평생을 함께할 아내에게 남편이 보내는 사랑의 징표라는 점에서 백년화목을 기원하는 부부애의 상징임에는 변함없다. 이는 일반적으로 민화에 담고자한 서민들의 소박한 바람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장욱진의 그림소재 중 다른 동물과 비교해 뚜렷한 구별이 어려운 것이 닭과 봉황이다. <도판17>는 1979년에 제작한 판화이다. 매직 마커를 토대로 제작한 것으로 형태나 생김새로 보아서는 분명 닭이다. 그러나 화가는 봉황이라 했다. 화가의 말에 근거해서 봉황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점(닭은 목선이 완만하게 그려졌다)과 다리가 닭으로 보기에는 길다는 점과 특히 며느리 발톱(다른 부분을 단순하게 표현한 점에서 보면 며느리 발톱의 유무가 결정적 단서가 되기에는 무리가 있다)이 생략되었다는 정도이다. 만약 화가의 고집대로 이 그림이 봉황이라면 아래의 연작과 앞서 살펴본 <닭과 아이>의 닭도 봉황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닭은 화가에게 닭 그대로의 현실이자, 동시에 닭이 화신해서 봉황이 될 것이란 이상을 함께 바라보았던 셈이다²⁷⁾’라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궁극에 봉황과 닭의 구별을 떠나 매직마커로 그린 연작<도판 18>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완연한 민화풍이 장욱진의 조형적 특징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이다.

➍ 십장생
민화에서는 생명 지속의 의미를 가진 특정 소재를 통해 영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생명 지속의 소망이 담긴 그림 중 대표적인 것이 십장생도이다. 십장생도는 장생불사하는 신선이 살고 있다는 선계의 존재를 믿고, 그런 이상 세계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²⁸⁾
십장생은 도교의 신선사상에서 나타난 도상으로 장수와 영원을 비는 길상화로, 고구려시대부터 등장하여 조선시대 화려한 왕실 미술부터 규방과 민간의 생활에서 회화나 자수로 널리 이용되었다.²⁹⁾ ‘십장생 그림’은 우리 고유의 천신, 일월신, 산악신 등의 민간신앙이 융합된 우리의 독특한 관념체계와 독창적인 도식을 드러내고 있다.³⁰⁾

장욱진의 그림 중 <현대문학> 1985년 1월호의 표지화로 실린 <십장생>은 그대로 민화이다. 둥근 원형의 공간에 거북과 새, 사슴, 그리고 바깥쪽으로 산과 바위, 물, 해 등 십장생을 구성하는 소재들이 등장한다. 특별히 사슴이 그려진 것이 눈에 띤다. 그림의 구성을 보면 화면 중앙의 둥근 원형 안에 사슴, 새(사람형상), 거북 등 동물이 표현되었고, 해, 산, 물 등 자연이 원형을 둘러싼 구성이다. 민화에서 십장생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구복(求福)적인 성격이 강하다. 장욱진의 <십장생>은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그대로 담아 표현한 그림이다. <십장생>을 선보인 매체나 시기로 볼 때, 1985년 신년을 맞이하여 애독자를 포함해 그림을 보는 모든 사람이 한해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하는 바람을 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십장생 그림에는 열 가지 장생물이 한정적으로 고정된 것은 아니다. 십장생은 작가나 지역에 따라 해당종류가 다르기도 하다. 또한 열 가지가 한꺼번에 그려지기도 하지만, 작가에 따라 특별히 몇 가지만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기도 한다. 가령 ‘영지도, 송학도, 백학도’ 등 한두 가지를 선택해서 그 상징성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장욱진도 십장생 중 몇 가지 소재를 독립적으로 그렸다. 거북이, 물고기 등을 따로 그려서 개별적으로 사물의 의미를 강조하고, 동시에 하나의 조형적 탐구로서 완결성도 추구하고자 했다.

▲<도판 20> <무제> 캔버스에 유채, 32×24cm, 1982 (좌)
‘십장생’연작, 매직마커, 먹 1985 (우)

➎ 산수
장욱진 작품에서 산수는 주요 테마 중 하나이다. 장욱진의 화풍을 평가할 때 문인산수화풍을 중요한 조형적 특징으로 꼽는다. 실제 작품에 따라 민화풍보다 문인산수화풍이 장욱진의 작품세계에 차지하는 무게감이 큰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민화에서 볼 수 있는 조형적 특징은 산수를 주요 화제로 삼은 그의 그림에서 충분히 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도판 21>의 1974년에 그린 그림들은 전형적인 민화풍이다. 산은 고구려고분벽화→ 일월오봉도→민화로 연결되는 패턴화된 형태로 그려졌다.

▲ <도판 21> 좌로부터:<무제> 1974년, 캔버스에 유채, 약24×14cm, 개인소장
<원두막>1974년, 갱지에 매직마커, 26.5×18.5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무제> 1974년, 종이위에 매직마커, 26.5×18.6cm, 개인소장

자연을 벗삼아 편안하게 앉아있는 인물에서 삶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화면의 여유로운 여백 역시 민화에서 화면을 비우는 공간구성을 취하고 있다. 비슷한 소재와 구성으로 이루어진 <원두막>과 <무제> 역시 민화적 분위기가 짙다.
올이 굵은 마대 천 위에 그려진 <무제>(좌)와 다르게 <원두막>과 <무제>(우)는 종이 위에 그렸는데 매직마커를 사용하여 색채대비가 강하다. 흥미로운 것은 <무제>의 작품이 종이에 그려진 탓에 뒷면에 그림이 그대로 비쳐 한 장의 종이에 두 개의 그림이 있는 형식이 되었다.
장욱진은 이 같은 현상을 보고 뒷면에 배어 나온 그림에도 서명을 하여 앞면과 다른 또 하나의 그림으로 보았다. 우연한 효과로 얻어진 결과이지만, 앞뒤 구분 없이 보는 즐거움이 더하다.
<도판 21>에 견주어 <도판 22>그림들은 패턴화된 형태에서 벗어나 한층 자유로운 구성의 민화풍 그림이다.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 조형적 요소가 나타난다. 특히 <풍경>(1987년)은 다른 작품들에 견주어 유난히 여백과 강한 색채대비로 그려졌다. 폭포가 흐르는 심산유곡과 그 자연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도인의 모습에서 탈속적 경지가 느껴진다. 특히 다른 작품에서보다 근경에서 자연과 인물을 포착하고 있어 막연하고 추상적인 분위가 아닌 구체적인 현상으로써 이상의 현실화를 보여주고 있다.³¹⁾

▲ <도판 22> 좌로부터
<무제> 1982년, 캔버스에 유채, 32×24cm, 유족소장
<산> 1986년, 캔버스에 유채, 38×22.5cm, 개인소장
<풍경>1987년, 캔버스에 유채, 48.5×24cm, 개인소장

민화가 멋스럽게 보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가진 실력보다 더 잘 그리려 애쓰지 않은 순진하고 소박한 표현, 자유분방하고 치기어린 묘법 속에 숨어 있는 당당함을 들 수 있다. 멋과 기교를 부려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드러내려고 해서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근원적인 것이 문득 관람자의 본성과 상호 공감할 때 멋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민화의 배후에는 따뜻한 인간미와 소박한 성정이 있고, 현대인들의 보편적 관념과 상식을 깨뜨리는 천진하고 자유분방한 붓놀림이 있다.³²⁾ 이러한 민화의 특징이야말로 장욱진 화가의 작품세계와 맞닿아 있다. 그의 작품은 화면구성에서 표현까지 어느 것 하나 억지스러운 것이 없다. 직관적으로 전달되는 느낌대로 꾸밈없이 표현한다.

➏ 기타
장욱진 작품에서의 민화적 요소는 다른 주제나 소재를 다룬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가족’, ‘풍경’ 등 주제의 연작에서 볼 수 있고, 새(까치, 참새, 학 등), 나무, 집, 소, 개 등의 자연과 동물을 소재한 그린 작품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이 밖에도 평소 화가로서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그림에서도 민화적 요소를 볼 수 있다. 소박한 일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문방도(文房圖)에는 민화적 요소가 남아있다. 책거리 그림에 속하는 문방도는 기명도(器皿圖)에서 비롯된 것으로 처음 선비취향의 책과 문방구를 갖추고 학문에 몰두하는 분위기를 돕기 위한 사물들을 그렸던 것에서 출발한다. 작품을 보면 검소하고, 꾸밈없는 일상을 만날 수 있다. 문인적 향취가 절제된 사물묘사와 여유로운 공간 구성에서는 강렬한 원색과 화면을 가득 매운 사물의 묘사를 중시한 민화와는 다른 새로운 민화적 맛을 담아냈다.

5) 윤열수 저 『민화이야기』디자인하우스, 2001, 33-35내용 발췌 재정리.
6) 장욱진의 작품 전체를 놓고 볼 때 불교와 관련된 작품들이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1000여 점에 달하는 작품 중 불교적 그림이 30여 점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장욱진의 작품세계가 불교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유화의 경우 전체 700여 점이 작품 중에서 15점 정도에 불과하다. 이외 먹그림은 확인된 100여 점의 작품 중에서 18점, 매직그림은 83점 가운데 3작품 정도가 불교와 관련된 작품이다. 정영목「장욱진과 불교」,『장욱진 화가의 예술과 사상』태학사, 2004, 84쪽.
7) 정영목 「장욱진과 불교」,『장욱진 화가의 예술과 사상』태학사, 2004, 103쪽.
8) 윤열수 저 『민화이야기』디자인하우스, 2001, 39쪽.
9) 민화의 다시점과 입체파의 다시점은 그 사상적 뿌리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입체파의 다시점 화법이 추구하는 논리적 분석적 태도가 자아 중심의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민화의 그것은 자연과 나를 하나로 느끼고 모든 존재에 영적 생명력으로서의 일체화된 상호교감을 느꼈던 서민들의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다. 허균 저 『허균의 우리 민화 읽기』북폴리오, 2007, 43쪽.
10) 윤열수 저 『민화이야기』디자인하우스, 2001, 39쪽.
11) 변종필 <내마음의 그림-장욱진의 식탁> 아트뮤지엄. 2014. 10월. 게재 글 인용.
12) 허균 저 『허균의 우리 민화 읽기』북폴리오, 2007, 42-43쪽.
13) 허균 저 『허균의 우리 민화 읽기』북폴리오, 2007, 45쪽.
14) 허균 저 『허균의 우리 민화 읽기』북폴리오, 2007, 47쪽.
15) 김미정 「한국 현대미술의 ‘민화’ 차용」한국민화학회, 2014한국민화 학술대회 발표자료 2014. 92쪽.
16) 윤열수 저 『민화이야기』디자인하우스, 2001, 23쪽.
17) 김형국 저 『그 사람 장욱진』김영사, 2006, 281쪽.
18) 김형국 저 『그 사람 장욱진』김영사, 2006, 280쪽. 인용 및 재작성
19) 정영목 저 『카탈로그레조네-유화』학고재, 2001, 203쪽
20) 정형민, 「장욱진의 자연관-그 전통적 기호학을 중심으로」『장욱진 화가의 예술과 사상』태학사, 2004, 126쪽
21) 한편으로 장욱진의 그림에서 해와 달의 공존은 시간이 흐르지 않은 상태이다. 불변의 시간이고, 삶과 죽음이 모두 하나로 존재하는 무시영원의 경지다. 무시영원은 인간이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그 꿈을 버리지 않는 것도 사람의 실존방식이고 진실이다. 장욱진은 그 진실을 정감과 서정으로 그리고 있다. 김형국 저 『장욱진 모더니스트 민화장』열화당, 2004, 148쪽 부분재인용.
22) ‘장욱진의 그림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폭넓은 사랑을 받는 것은 그의 그림에서 일상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일상성과 초월성은 이율배반이고 상반이고 모순이다. 이 모순의 의미는 사람이 성장과정에서 서로 모순된 두 경향이 갈등을 일으키는데 “그 중 하나는 안주의 원리(embeddedness principle)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유아기의 보호된 환경에 남아 있고자 하는 사람 본영의 욕구를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향한 개방성과 이 세상과의 해후에서 일어나는 자아아실편의 초월(transcendenc principle)의 원리다” 김형국 저 『장욱진 모더니스트 민화장』열화당, 2004, 10-12쪽 부분발췌재인용.
23) 오광수, 「한국적 미의식과 이념적 풍경」, 《월간미술》1991년 2월호, 51쪽 ; 정영목 저 『카탈로그레조네-유화』학고재, 2001, 54쪽 재인용.
24) 법당 기금마련을 위해 제작한 작품으로 항아리 반대편에는 나무와 까치가 그려져 있다. 김형국 저 『그 사람 장욱진』김영사, 2006, 100쪽.
25) 허균 저 『허균의 우리 민화 읽기』북폴리오, 2007, 97쪽.
26) 허균 저 『허균의 우리 민화 읽기』북폴리오, 2007, 96쪽.
27) 수탉 그림은 닭이라기보다 봉황이란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꼬리가 마치 민화에 나타나는 봉황새의 꼬리털처럼 아주 길고 화려하다. 길상 동물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김형국 저 『그 사람 장욱진』김영사, 2006, 280쪽.
28) 허균 저 『허균의 우리 민화 읽기』북폴리오, 2007, 30쪽.
29) 김미정「한국 현대미술의 ‘민화’ 차용」한국민화학회, 2014, 한국민화 학술대회 발표자료 2014. 92쪽.
30) 조자용「세계속의 韓民畵」『民畵傑作展』 호암미술관, 1983.4.1. 124쪽.
31) 정영목 저 『카탈로그레조네-유화』학고재, 2001, 176쪽.
32) 허균 저 『허균의 우리 민화 읽기』북폴리오, 2007, 40쪽.

Ⅲ. 결론

현대미술에서 장르 간 경계의 소멸과 새로운 혼합 문화의 등장은 이제 당연한 흐름처럼 인식되고 있다. 현대미술의 다양성은 이른바 주류와 비주류, 순수와 비순수, 고급미술과 대중미술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장르 간 융합이라는 명명아래 새로운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현대 민화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1980년대 들어와 전개된 민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응용, 그리고 조형적 실험은 2000년대에 한층 폭넓은 세대와 시각에서 펼쳐지고 있다.³³⁾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현대민화의 움직임은 전통민화가 추구해온 세계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방향성과 목표에 주목하게 된다. 전통에서 현대적 미감을 찾아낸 것이 민화가 추구해야 할 미적가치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민화가 창작이라는 예술의 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창조적 변화는 필연적이다. 이 점에서 장욱진의 작품에 나타난 민화풍은 민화적 요소를 어떠한 형식과 내용으로 새롭게 탈바꿈 시킬 수 있는지 엿볼 수 있는 실례라고 생각한다.
본론에서 살펴보았듯이 장욱진의 작품에는 ‘다시점(多視點)의 표현’, ‘원근법과 비례감의 상실’, ‘입체감과 공간감의 상실’, ‘대칭구도’와 ‘반복성’ 등 다섯 가지 민화의 조형적 특징이 작품세계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임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장욱진의 그림세계는 평소 일상에서 전통민화에 관한 관심도가 실질적 작품 활동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장욱진의 그림세계는 한마디로 일상적 이야기를 초월적 이미지로 표현한 그림 세계이다.
장욱진의 그림은 치졸미(稚拙美)와 단순미(單純美)가 작품 전반에 나타난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인물, 동물, 자연 등)에는 유아적 시각에서 보는 듯한 순수함, 욕심과 꾸밈없이 솔직한 화법에서 비롯되는 소박함과 진솔함이 작품마다 묻어난다.
장욱진이 작품 제작에서 중시했던 직관력이 그의 작품세계를 이끄는 힘이었다면, 꾸미려하거나 과장하지 않는 자연스러움은 작품을 유지하는 절제미로 작용하고 있다. 지나친 욕심보다 사물의 묘사와 화면구성에서 절제된 아름다움이 주는 단순미는 장욱진 그림에서 버릴 수 없는 조형적 특징이다. 다양한 소재는 물론 유화, 먹, 매직마커 캔버스, 종이, 도자기, 인쇄물 등 재료를 가리지 않은 자유로움은 그의 민화풍 그림과 장욱진이란 화가가 독창적 조형성을 획득할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정한 소재와 반복성 짙은 구성을 즐겨하면서도, 결코 하나의 고정된 틀이나 체(體)에 안주하거나 갇히지 않은 지속적인 변화야말로 장욱진의 작품세계가 지닌 미적가치와 의미일 것이다.
궁극적으로 꿈, 사랑, 믿음, 길상, 깨달음은 화가 장욱진이 평생 작품으로 보여주고, 이루고 싶었던 유토피아였다. 한국근현대미술을 이끌었던 장욱진 화가의 작품에 나타난 민화적 요소를 통해 그가 그리고자 했던 세계가 결코 많은 무명의 민화장(民畵匠)들이 꿈꾸었던 세계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장욱진은 민화가 전통과 현대를 잇고, 창조적 영감을 자극하며, 현대미감을 지닌 미적 대상의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는 근원이 될 수 있음을 작품으로 보여준다. ‘옛것이 모던하다’라고 했던 장욱진의 주장은 현대미술에서 새로움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화가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