圖1. 안견 전칭, 《소상팔경도》, 비단에 수묵, 각 35.2 x 31.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수경의 고전, 소상팔경 & 무이구곡, 그리고 민화

• Ⅰ. 들어가며
• Ⅱ. 소상팔경도
• Ⅲ. 무이구곡도
• Ⅳ. 우리나라 ‘팔경도’와 ‘구곡도’

※ 본 논고는 ‘2015 경기도 미술관 아카데미 인문학 특강’에 수록된 논고를 재편집해 옮긴 것입니다.
이 글은 경기도미술관에서 펼친 ‘팔경과 구곡’의 전시(2015년)의 일반강좌를 위하여 작성한 것이었으나, 민화 산수화의 이해에도 도움이 된다는 요청으로 다듬어 싣게 되었음을 글머리에 밝혀둔다.

Ⅰ. 들어가며

책 소상팔경(瀟湘八景)’과 ‘무이구곡(武夷九曲)’은 우리 산천에 팔경(八景)을 만들고 구곡(九曲)을 짓도록 한 고전의 단서였다. 소상팔경과 무이구곡은 모두 중국에 실재하는 곳으로, 각각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동정호(洞庭湖) 일대와 복건성(福建省)의 무이산(武夷山) 계곡을 말하고 있지만, 이들은 사실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의 왕실에 시와 그림으로 알려지면서 조선시대 내내 시문과 그림으로 재생산된 주제였다. 한국의 ‘소상팔경도’와 ‘무이구곡도’들은 실재하는 중국 어느 장소의 그림이라기보다는, 요순(堯舜)이 살았던 고대의 시간 혹은 남송(南宋)의 대학자로 조선에서 지극히 존경했던 주자(朱子)선생의 생전을 함축하는 시간이었으며 가볼 수 없는 상상의 풍경이었다. 그 풍경에는 우리 선조들의 오랜 동경(憧憬)이 빚은 도덕과 평화의 산수관이 담기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 그림으로 전하는 ‘소상팔경’과 ‘무이구곡’은 선조들이 만든 이상적 산수경이요, 돌아가고픈 마음의 고향이었으며, 우리 산천 곳곳에 ‘팔경’과 ‘구곡’을 다시 탄생시킨 틀이었다.
이 글은 ‘소상팔경도’와 ‘무이구곡도’가 이룬 산수화사(山水畵史)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위하여 마련하였다. 출발지점이 달랐던 ‘소상팔경도’와 ‘무이구곡도’의 집경(集景)이 각각 중국에서 출발한 상황, 전개된 양상을 살피고, 중국의 집경이미지를 한반도의 문인과 화가들이 수용하고 오랜 세월 향유한 역사를 둘러보려고 한다. 이것은 장구(長久)한 회화사의 흐름이다. 이를 엮은 이 글은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숨 가쁘게 달려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 민화(民畵) 산수화의 주된 테마 중 하나가 ‘소상팔경’이요, ‘무이구곡’이다. 민화 산수화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한번 쯤 달려볼 만한 여정이라 생각한다.

Ⅱ. 소상팔경도

＊작품을 클릭하시면 큰 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소상팔경(瀟湘八景)’이란 소강(瀟江)과 상강(湘江)이 만나면서 이루는 너른 물 풍경과 주변 산이 중심이 된 여덟 경치를 말한다. 안개 속에 드러나는 산시(山市)를 그린 산시청람(山市晴嵐), 산사(山寺)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를 뜻하는 연사모종(煙寺暮鐘), 호수에 밤비 내리고 바람이 몰아치는 장면을 그리는 소상야우(瀟湘夜雨), 먼 포구로 돌아가는 돛단배와 강가의 풍경을 그린 원포귀범(遠浦歸帆), 평평한 모래밭에 기러기들이 내려앉는 평사낙안(平沙落鴈), 가을 동정호(洞庭湖) 위로 보름달이 떠오르고 달이 수면을 비추는 동정추월(洞庭秋月), 저녁노을이 물드는 어촌경의 어촌낙조(漁村落照), 눈이 강과 산을 뒤덮은 저녁의 풍경을 보여주는 강천모설(江天暮雪)로 이루어지는 소상팔경은, 북송대에 그 세트가 완성되어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소상팔경’이 팔경으로 결정되어 등장하는 시기는 북송대였지만 동정호 일대가 중국의 시문으로 읊어진 때는 훨씬 이전이다. 그림으로는 오대 화가 황전(黃筌)의 그렸던 기록, 북송 초기의 이성(李成)의 소상팔경도에 부쳐진 시문이 전한다. 특히 송적(宋迪, ?-1074)의 소상팔경도가 동시대인 심괄(沈括, 1031-1095)의 기록으로 전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심괄의 기록에 따르면, 송적은 소상팔경을 잘 그려 이름이 높았으며, 그 그림은 평원산수(平遠山水)였다고 한다.¹⁾ 심괄이 말한 ‘평원’은 북송대 회화이론에서 명시된 삼원(三遠, 즉 고원高遠, 심원深遠, 평원平遠)의 하나로, 측면으로 먼 풍경을 보여주는 기법이다. 심괄의 기록은 소상팔경의 시적이고 감상적인 관점이 송적이란 화가의 이름으로 높은 인기를 누렸던 사정을 말해준다. 송적이 그린 평원산수는 다음 세대의 미불(米芾, 1051-1107)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상의 경관(瀟湘之景)을 들었는가. 동정호 남쪽에 넓고 깊은 층층 바위 천리에 이어지고 하늘이 텅 비어 푸르고 안개 노을이 자욱하다 사라지면서 배의 돛과 모래밭의 새들이 출몰하며 오간다. 물가 대나무와 구름에 쌓인 숲이 늘어지고 아침, 저녁과 사계절의 기후가 한결같지 않다. 이것이 소상의 대관이로다.”²⁾
현전하는 이른 시기 중국작품은 그 다음 시대인 남송대에 제작된 두루마리 형식의 그림들(횡권橫卷 혹은 수권手卷이라 함)이다. 목계(牧谿)와 옥간(玉澗)이라는 이름의 뛰어난 선승(禪僧) 화가들이 그린 소상팔경도가 일본에 전하고 있고, 또한 남송대 왕홍(王洪)의 작품이 미국에 전하고 있다. 선승화가의 작품은 감필(減筆, 붓질을 줄여 그림)과 선염법(渲染法, 먹으로 물들이듯 그림)을 활용한 이른바 선종화법이라 불리는 파격적 방식으로 그려져 있다. 한편 왕홍의 작품(1150작)은 북송대 발달된 수묵산수화의 양식을 반영하여 치밀한 필묵법으로 그려져 있다.
이후 중국은 원대를 거쳐 명대에 이르면서, 소상팔경의 제작이 재탄생되는 전개상을 보여준다. 특히 명대 강남지역의 부유한 문인화가들에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파의 중심인물인 문징명(文徵明)이 화책(畵冊)으로 제작한 소상팔경도가 대표적이다. 이후 오파 후기의 화가군이자 같은 지역 소주에서 활동했던 화가들 진환(陳煥), 이사달(李士達), 심선(沈宣), 성무엽(盛茂燁) 등이 소상팔경을 그렸다. 명대의 소상팔경문화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청대에 이르면 소상팔경도 제작의 요구가 상당히 줄어든 것으로 나타난다. 청대화가의 작품으로는 오력(吳歷)의 소상팔경도가 북경고궁박물원에 전하고 있다.³⁾

한반도의 소상팔경도는 12세기 고려시대의 명종(明宗, 1131-1201) 때, 왕의 명령으로 이광필(李光弼)이 소상팔경도를 그리고 문인들이 시를 썼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서 시작된다. 이 때 그려진 그림은 전하지 않지만, 이인로(李仁老), 진화(), 이제현(李齊賢) 등 고려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시가 전하고 있으며 이 시는 조선시대에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명종이 그리도록 한 소상팔경도는 한반도에서의 소상팔경도 문화의 출범이었다고 믿어지고 있다.

조선왕조로 들어 왕실과 고위관료를 중심으로 소상팔경도의 문화가 펼쳐졌다. 1442년 세종대왕의 셋째아들인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이 남송(南宋) 영종(寧宗)의 소상팔경시를 읽은 뒤 시와 그림의 제작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사연은 현전하는 『비해당소상팔경시첩(匪懈堂瀟湘八景詩帖)』으로 전한다. 정황을 미루어 이 시첩제작 시 안평대군을 위하여 화가 안견(安堅)이 소상팔경도를 그렸을 것이라 판단되지만, 아쉽게도 그림은 전하지 않고 시첩만 현전하고 있다. 우리에게 전하는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안견 전칭작 소상팔경도 화첩이다(圖1). 화첩(畵帖) 형식의 그림틀은 명대의 형식에 근접하는데, 그 화풍은 북송산수화의 양식에서 유전되는 언덕 위 쌍송(雙松), 해조묘(蟹爪描)의 수지법 등이 특징이다. 이러한 화풍의 소상팔경도에 대하여 조선왕실 초기의 관료문인들은 ‘강남(江南, 중국 양쯔강의 이남)’이라는 공간으로 감상하였다. 이후에 그려진 이징(李澄, 1375-1435)의 <소상팔경도> 화첩 8폭도 관료문인들의 섬세한 서정을 반영한다. ‘소상팔경도’를 매개로 하는 강남 산수에 대한 동경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빠르게 유행되었고, 17세기로 접어들면서는 거대한 8첩병풍의 소상팔경도 제작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현전하는 대표작으로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된 8폭 두루마리 그림들(圖2)을 꼽을 수 있다. 원래는 8첩병풍이었으나 현재는 8폭의 축으로 개장되어 전한다. 또한 일본에 조선시대 소상팔경 병풍들이 전한다. 병풍으로 제작된 소상팔경도는 길게 변한 각 폭의 프레임에 맞추어 너른 물풍경을 보여주고자 산수 경물을 삼단으로 나누어 표현하는 변화를 보여준다. 8폭의 병풍으로 그려진 조선의 소상팔경도는 이후 조선후기를 거쳐 근대에 이르면서 더욱 유행하였다.
이후 민화의 범주로 전해지는 소상팔경도들은 그 양이 더욱 많을 뿐 아니라 회화적 조형성의 변화도 실로 무쌍하다(圖3 圖4). 한반도의 소상팔경도 역사 속에서 민화로 그려지는 소상팔경들은 가장 독특한 한국적 산수이미지를 창작하고 향유되는 회화문화로 드러나게 된다.⁴⁾

1)　沈括, 『夢溪筆談』, “度支員外郞宋迪工畵, 尤善爲平遠山水, 其得意者有, 平沙落雁, 遠浦歸帆, 山市晴嵐, 江天暮雪, 洞庭秋月, 瀟湘夜雨, 煙寺晩鐘, 漁村落照, 爲之‘八景’, 好事者多傳之.”
2)　米芾, 「瀟湘八景圖詩 總序」, 『湖廣通志』 卷89.
3)　중국 소상팔경도에 전개에 대하여는, 宋熹暻, 「中國 南宋의 瀟湘八景圖와 그 淵源 硏究」 (이화여대 석사논문, 1993); 박해훈, 「조선시대 소상팔경도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논문, 2007) 참조.
4)　한국의 소상팔경도 제작에 대하여는 安輝濬, 「韓國의 瀟湘八景圖」, 『韓國繪畫의 傳統』 (문예출판사, 1988), pp. 162-249; 박해훈, 위 논문 참조.

Ⅲ. 무이구곡도

‘무이구곡(武夷九曲)’이라는 구곡(九曲)의 이름으로 무이산 풍경이 각별한 의미를 부여받은 것은 남송대 학자 주희(朱熹, 1130-1200)가 그곳에 정착하여 무이정사를 짓고 강학하고 뱃놀이의 시, 무이도가(武夷棹歌)를 지었던 데 기인한다. 중국에서 무이산이 그림으로 그려진 역사를 보면, 무이산은 주희가 그곳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다양한 전설과 굽이 진 계곡경으로 이름이 난 곳이었기에 북송대의 유명한 산수화가 연문귀(燕文貴, 967-1044)가 그렸다는 <무이도(武夷圖)>, <청명상하도>로 이름이 높은 장택단(張擇端 1120전후 활동)이 그렸다는 <무이산도(武夷山圖)>가 문헌기록에 등장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무이구곡’을 명시하는 회화작품은 남송대 주희의 생전에 따로 제작된 것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며, 주희의 사후 원대에 접어들어 ‘무이구곡’을 명시한 회화작품들이 그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등장하는 진중인(陳仲仁)의 <무이구곡도> 9점, 서달좌(徐達左)의 <무이구곡도가도(武夷九曲棹歌圖)>, 방종의(方從義)의 <무이방도가(武夷放棹歌)> 등이 이를 말해준다. 제목으로 미루어, 주희의 무이산 경영과 주희의 시 이른바 ‘무이도가’를 배경으로 그려진 작품으로 보이며 또한 주자학에 관심이 깊은 학자들의 요구로 그려진 것으로 판단된다. 서달좌의 <무이구곡도가도>는 현전하지 않지만, 주희의 ‘무이도가’와 이에 차운(次韻)한 주희의 제자학자들의 시가 적혀있는 그림이라 주자학적 분위기를 본격적으로 전달하는 무이구곡도였다고 할 수 있다.⁵⁾
그러나 중국의 회화사에서 ‘무이구곡도’는 중국의 다른 산수화목에 비하여 그 존재감이 미미했다. 조선시대 무이구곡도가 특별히 사랑받고 풍성하게 제작되었고, 민화에서 소상팔경이나 금강산 그림과 어깨를 겨루며 그려졌던 문화에 비교하자면, 중국의 무이구곡도 문화는 말할 수 없이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빈약이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 학자들이 각별히 재해석하여 존경했던 주자(朱子) 선생이 중국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의 무이구곡도와 구곡도의 양상을 살피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점이다.

한반도의 무이구곡도는 고려말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속에서 잔편이 보이고 15세기 학자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글에서도 간단히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의 회화문화로 정립된 때는 16세기였다.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던 16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주희의 모습과 그의 자취가 서린 공간을 보여주는 무이구곡도 문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무이구곡도>를 여러 점 감상하고 글을 남겼고, 그의 제자들은 더욱 열정적으로 무이구곡도를 애호하여 스스로 직접 그리기도 하였다.
16세기의 조선에서 그려진 <무이구곡도>들을 보면, 족자의 형태로 그려진 것도 있고 긴 수권의 두루마리에 구곡이 나열식으로 그려진 것도 있다. 경북 안동의 운장각에 소장된 <무이구곡지도>는 세로 156센티미터의 족자그림이다. 제작연도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호림박물관의 <무이산도> 또한 축의 양식이다. 비교할 만한 중국그림은 지방지의 판화도인데 실제로 조선에서 그려진 축은 당시 조선에 유입된 중국의 그림을 바탕으로 하였을 것이라 판단된다.⁶⁾ 16세기 작으로 영남대박물관에 소장된 <주문공무이구곡도(朱文公武夷九曲)>는 긴 수권 두루마리이다. 주자의 초상화가 먼저 그려져 있고 이어 무이구곡도가 그려져 있으며, 또한 중국 주자학자들의 찬(讚), 주자 자신의 화상찬 및 무이산에 관련된 글들이 이황의 서체로 옮겨져 있다. 이황의 발문으로 미루어, 이 그림은 1564년 혹은 그 이전의 작품일 수 있다. 그림의 산수경 위에 一曲, 二曲, 三曲 등이 적혀져 있어 아홉 구비의 특성으로 안내한다. 좀더 우수한 수권의 산수화작품은 1592년작 <무이구곡도>로 무관 이성길(李成吉)이 그린 것이다(圖5). 이성길의 작품은 무이산 계곡의 고유 명칭의 바위와 건물을 치밀하게 묘사하면서 눈에 띄게 부각하고자 하였다. 필묵법은이 섬세하고 착실하여, 영남대본보다 작품성이 높다. 영남대박물관본과 이성길의 작품은 모두 아홉 구비를 지그재그식으로 나열하면서 파노라마식으로 보여주고, 또한 무이구곡에 대한 지극한 존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이 무이구곡도를 요청하는 편지글이 그의 문집 『동춘당집』에 실려 있다. “그림을 그려 달라는 요청도 들어 주실 수 있겠는지요? 당초에는 〈소상팔경(瀟湘八景)〉, 〈관동팔경(關東八景)〉 등을 얻고자 하였으나, 마침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를 보니, 이는 예사로운 풍경의 비유가 아니어서 감상하는 흥취가 이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열 폭으로 나누어 작은 병풍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9곡을 나누어 폭마다 1곡의 풍경을 그리고, 주부자(朱夫子)의 〈구곡시(九曲詩)〉 칠언(七言) 십절(十絶)을 각 폭 밑에 1절씩 써넣되, 첫 폭에는 2절을 써넣으며, 맨 앞폭에는 주 부자의 초상(肖像)을 그리고 또 〈자찬명(自贊銘)〉까지 써넣으면 매우 좋을 것 같은데, 형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무이구곡도의 제작은 조선시대 학자들의 주자학에 대한 지극한 애호 속에서 꾸준하게 제작되었다. 18세기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그린 무이구곡도 2점이 각각 수권과 화첩으로 전하고 있다. 강세황이 그린 <무이구곡도> 위에는 주자의 시 ‘무이도가’가 빠짐없이 적혀 있다. 시를 읽으며 아홉 구비 계곡을 따라가도록 안내하는데, 그림 속 강세황의 필선은 소략하고 형태도 엉성하다. 그러나 그 사연이 곡절하여, 조선시대 학자들의 내면에 자리잡았던 무이구곡의 무게를 감지하도록 해준다. 강세황의 기록을 살피면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이 병 중에서 구곡도를 보고자 하여 강세황에게 명하였기에 그린 것이다. 조선후기 손에 꼽을 실학자이며 과학자였던 이익이 아플 때 찾은 산수경이 무이구곡이었고 강세황은 이러한 이익의 내심을 존경하여 무이구곡도를 그렸다. 말하자면 조선시대 학자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잡고 있던 무이구곡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무이구곡의 아홉 구비는 무이도가의 각 곡 시에 맞추어 한 구비씩 단폭으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특히 국왕 정조(正祖)가 주자의 시문을 좋아하여 김홍도(金弘道)가 이를 그려 내놓은 걸작들은 우리 회화사에서 커다란 수확이라 할 만하다. 주자의 「무이도가」 한 구절 ‘월만공산수만담(月滿空山水滿潭)’의 철학적 경지를 그린 김홍도(金弘道)의 <월만수만(月滿水滿)>이 그 중 하나이다(圖6). 「무이도가」 에서 제 4곡을, 주자는 “넷째 구비, 동쪽 서쪽 우뚝한 바위들, 바위에 핀 꽃 울긋불긋 아래로 늘어졌네. 금학이 울음을 그치고 사람은 보이지 않네. 달이 빈산에 가득하고 물이 못에 가득하구나(四曲東西兩石巖, 巖花垂露碧毿. 金鶴叫罷無人見, 月滿空山水滿潭.)”라 읊었다. 여기서의 마지막 구에 ‘월만’ ‘수만’에 대하여 조선중기 성리학자 조익(趙翼)은 일찍이 시구의 아름다움과 충만함 가운데 홀로 선 학자의 모습에서 깊은 의미를 찾았다. 그 의미는 미혹과 사욕을 극복하고 밝은 도가 청정한 경지라 보았던 것이다. 조선후기의 성호 이익도 이 시의 달 밝고 물 맑은 모습에 대하여 자연 속의 도가 쉬지 않고 흐르는 모습이라고 해설하였다. 주자의 시 무이도가 중에서 이 한 수를 뽑아 김홍도는 뱃놀이 모습을 그리기보다는 도(道)가 청정한 경지의 시정(詩情)을 화폭에 담으려고 고심했다. 정조가 이 바른 마음의 경지를 각별히 좋아했기 때문이다. 또한 김홍도의 고사인물도 병풍에 실려있는 <무이귀도(武夷歸圖)>는 무이산 아홉 구비를 모두 거쳐 돌아오는 주자선생의 뱃길을 표현했다. 도가 완성된 단계의 분위기를 표현하고자 김홍도는 특장의 힘찬 붓질로 웅걸한 산천을 그렸다.
이후로 19세기 문인 권직희(權直熙)의 문집 속에 그가 그린 <무이구곡도> 판화도가 있어 눈길을 끈다.⁷⁾ 권직희는 무이도가의 시문으로 무이구곡을 그리워하여 상상으로 그렸다고 밝히고 있다. 1888년작 채용신(蔡龍臣, 1848-1941)의 <무이구곡도> 병풍에는 글씨가 뒤집혀 적혀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병풍 《무이구곡도》(嶺齋 필)에는 무이산 제 2곡의 옥녀봉(玉女峰)이 실로 단장한 머리의 여인의 조선 미인의 모습으로 선명하고 커다랗게 결국은 코믹하게 그려져 있다. 이러한 무이도가의 글씨와 미인형 바위 앞에서 오늘날의 감상자는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되겠지만, 무이구곡에 대한 친숙함이 낳았던 희화화(戱畵化)의 일면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조선시대 무이구곡도 문화는, 앞에서 잠깐 살핀 바와 같이 민화로 분류되는 그림으로도 적지 않게 그려졌다. 이러한 민화의 무이구곡도들에서 주자선생은 소박한 모습으로 친근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김홍도가 그렸던 월만수만이 민화로 변모된 것도 찾아볼 수 있다(圖7).

5)　尹軫映, 「朝鮮時代 九曲圖의 受容과 展開」, 『美術史學硏究』 (1998. 6), pp. 61-91 참조.
6)　청나라에서 판각된 『武夷山志』(19세기)가 비교할 만하다. 판화도로 정착된 역사를 감안하면 중국의 무이산 그림과 조선의 그림과의 연관성을 살필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尹軫映, 앞 논문.
7)　 權直熙, <武夷九曲圖>, 『錦里集』.

Ⅳ. 우리나라 ‘팔경도’와 ‘구곡도’

＊작품을 클릭하시면 큰 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소상팔경’의 ‘팔경’은 계절과 기후의 산수경이 주테마였지만, 특정장소의 팔경을 형성하는 데도 기반이 되었다. 우선 조선시대 꾸준하게 제작되는 ‘사시팔경’(四時八景)류는 소상팔경의 시간표현을 반영한 팔경이었다. 안견(安堅) 전칭작 <사시팔경도> 중 몇 폭은 소상팔경도의 화면과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유사하다. 풍우가 몰아치는 장면은 소상야유와, 달구경은 동정추월과, 설경은 강천모설을 꼭 닮았기 때문이다. 조선전기에는 ‘사시도(四時圖)’류에 대한 감상의 제화시가 눈에 띄게 많다. <추산도>(秋山圖) <설산도>(雪山圖), <동경>(冬景), <춘산>(春山) <운산>(雲山) 등이 있고, 특히 ‘풍우도’(風雨圖)는 인기 있는 화제였다. 서거정이 감상한 팔폭병풍(八幅屛風) 혹은 팔첩병풍(八帖屛風)이란 제목이나 혹은 여덟 수 제화시는 대개 계절경이 그 중심테마이다. 성현(成俔, 1439~1504), 신용개(申用漑 1463~1519) 등의 시문에서도 유사한 양상을 볼 수 있다.⁹⁾ 사시팔경은 내용과 양식을 달리하면서 근대기까지 관통하는 산수화의 주제였다. 조선후기에는 유명시구를 첨가한 ‘시의적 사시팔경도’(詩意的 四時八景圖), 조선말기에는 고사인물이 첨가된 ‘서사적 사시팔경도’(敍事的 四時八景圖)가 그려지는 변화가 나타난다. 시의적 사시경은 이방운(李昉運)의 산수팔폭과 강세황(姜世晃)의 사시팔경이 대표적이며,¹⁰⁾ 조선후기에서 근대로 이르기까지 문사들의 기록에 실로 많이 전하는 8폭산수화들, 특정장소나 특정제목이 없는 팔폭병들이 이러한 류이다. 19세기에도 시적 운치의 산수팔경이 널리 감상되었다.¹¹⁾ 나아가 고사인물의 표현이 혼합된 ‘서사적 사시팔경도’가 근대기까지 유행을 일으켰다. 매화를 찾아 나귀타고 가는 맹호연(孟浩然), 꽃길을 작은 수레로 가는 화외소거(花外小車)의 소옹(邵雍), 국화를 따는 도연명(陶淵明) 혹은 추성부(秋聲賦)로 표현된 독서하는 구양수(歐陽脩)와 그의 동자, 대규를 방문하는 왕휘지(王徽之) 등이 춘하추동의 산수경 주인공으로 첨가되었다.
특정 장소를 부각하는 명소팔경의 문화가 주목할 만하다. 성시(城市)와 같이 문화적 정치적 공간이 명소가 되기도 하고 혹은 절경이 뛰어난 산천의 명승(名勝)이 명소로 부각되기 하였다. 성시팔경은 한양을 그린 <신도팔경도(新都八景圖)>가 14세기 중반 태조가 정승과 관료에게 ‘신도팔경’을 나누어준 기록에서 처음 나타난다.¹²⁾ 그 구성은 기전과 산하(畿甸山河), 도성과 궁원(都城宮苑), 열서성공(列署星拱), 제방기포(諸坊碁布), 동문교장(東門敎場), 서강조박(西江漕泊), 남도행인(南渡行人), 북교목마(北郊牧馬)로 되어 있어, 산천이나 기후의 아름다움보다는 성시의 번창함을 보여주는 주제들이다. 평양(平壤)은 기자(箕子)가 도래한 고도(古都)라 하여 ‘기성(箕城)’이라고 불렸다. 서울역사박물관의 <기성도 8폭병>이 있고, 에밀레 박물관 구장의 <평양시 8폭병>, 일본교토대학총합박물관 소장의 <평양도 8폭병풍>도 목판본 등이 그 예이다.¹³⁾ 한양이나 평양 외에도 정치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지역이 그려졌으니, 정조시대 정조의 특명으로 그린 김홍도 필 <화성춘팔경(華城春八景)과 <화성추팔경(華城秋八景)>은 역작이었다. 현재는 추팔경의 두 점 <서성우렵(西城羽獵)>과 <한정품국(閒亭品菊)> 만이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전하고 있다.¹⁴⁾
조선에서는 15세기부터 문인들이 자신의 공간을 집경도로 그리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퇴계 이황(李滉)의 조부인 이우(李 1469-1517)가 쓴 제화시 가운데 <기성십경도(歧城十景圖)>를 감상한 시가 있다. 기성은 대구 일대의 성산 지역을 말하며, 십경의 소제목은¹⁵⁾ 언동상화(洞賞花), 용도관덕(龍島觀德), 화방수계(花坊修稧), 호암송객(虎巖送客), 장점채궐(長岾采蕨), 팔송답설(八松踏雪), 보매심승(普海尋僧), 달전관렵(達田觀獵), 정연조어(鼎淵釣魚), 견암폭포(見巖瀑布) 등으로 꽃을 본다, 덕을 본다, 심신을 닦다, 손님을 보내다, 고사리를 캐다, 눈을 밟다, 스님을 찾다, 수렵을 보다, 물고기를 잡다, 폭포를 보다 등 학자의 관물(觀物)과 은거가 수양의 행위라는 주제로 엮어진 십경이다. 학자가 주변을 집경한 팔경도는 17세기에 크게 성행한다.¹⁶⁾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17세기의 산수팔경도로는 <동계팔경도(東溪八景圖)>, <죽서팔경도(竹西八景圖)>, <황계팔경도> 등이 있다. ‘동계팔경도’는, 이식(李植, 1584-1647)이 ‘팔경도’를 만들었다고 명시한 그림이다.¹⁷⁾ 장소 중심의 팔경구성을 보여준다. 또한 17세기 주변을 팔경으로 구성하는 문사들의 작업은 이름난 명승지라기보다는 기막힌 경치가 아니지만 살피고 찾아 만든 팔경인 경우가 적지 않은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현전하는 회화작품으로 <영사정팔경도(永思亭八景圖)>와 <사천장팔경도(斜川莊八景圖)>가 대표적이며, 이를 통해 기후감각을 넣어 만드는 소제목과 장소만으로 만드는 소제목의 양상이 공존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명승팔경으로 가면 장소만을 칭하는 것으로 그 양상이 확연하게 바뀌게 된다. 관서지역의 집경문화도 크게 발달하였다. 17세기 후반 함경도 지역의 <최락당팔경병풍도>가 그 예이다.¹⁸⁾
18세기에 이르면 장소명을 칭하는 주변산수의 집경과 명승을 찾는 명승집경 등이 모두 활발하여진다. 18-19세기 문집들에 ‘산수도팔첩’, ‘화병팔절’, ‘산수병팔첩’, ‘제화(병)’의 8수의 산수화에 부친 제화시가 많이 실려 있다. 명승팔경의 대대적 발전은 기록적이라 할 만하다. 특히 ‘팔경은 곧 관동팔경’이라는 글이 나올 만큼, 금강산과 동해안을 위주로 한 ‘관동팔경’은 명승팔경의 대명사로 통할 만큼 대표적이었다. 관동의 ‘팔경’세트의 지목은 적어도 17세기 말에 정착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관동팔경’으로 청간정(淸澗亭), 삼일(三日), 죽서(竹西), 경포(鏡浦), 월송(月松), 망양(望洋), 낙산(洛山), 총석(叢石) 8곳을 제시하였다.¹⁹⁾ 또한 적어도 18세기 전반기에 관동팔경은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18세기 중반에 정간(鄭幹, 1692-1757)은 ‘관동팔경도’를 소개하면서, “그린 이는 누구인지 모르겠다. 이는 곧 나의 선친 지수선생께서 누워 감상하신 흔적이로다”라고 하고 병풍으로 장황하였노라고 밝혔다.²⁰⁾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 1667-1732)의 생몰년을 보면, 이는 18세기 전반 작이다. 규장각에 전하는 <관동십경도(關東十景圖)>는 소론계 문인 김상성(金尙星,1703-1755)이 1748년에 제작을 지휘한 그림으로 풍수(風水)의 양상을 반영한 산수경을 보여준다. 문인화가 허필(許泌, 1709-1761)이 그린 《관동팔경도병(關東八景圖屛)》은, 각 폭에 고려~조선에 걸친 역대 유명한 시를 얹은 점이 특색이다(圖8).²¹⁾ 18세기에 부상하는 관동팔경에의 관심은 18세기 문사들의 금강산 유람의 붐과 병행하는 문화현상이었다.²²⁾ 왕실에서도, 이이순(李頤淳, 1754-1832)은 태조 종묘에 설치한 관동팔경병풍을 기록하였고²³⁾ 정조는 왕실에 펼쳐진 관동팔경도를 기록했다.²⁴⁾ 이렇게 19세기 초에까지 기록되거나 그려진 관동팔경의 양상을 정리하면 청간정(淸澗亭), 삼일포(三日浦), 죽서루(竹西樓), 경포대(鏡浦臺), 월송정(月松亭), 망양정(望洋亭), 낙산사(洛山寺), 총석정(叢石亭), 만경대(萬景臺), 시중대(侍中臺) 등의 10경이 들고난다. ‘관동팔경’의 진행 속에서 금강산팔경도 형성되었다. 조정규(趙廷奎, 1791-1860)의 《해악도팔곡병》(1860)에 장안사, 표훈사, 보덕굴, 삼선암, 구룡연, 삼일포, 문암, 총석정 등 8폭이 그려졌다. 여기에도 혹은 10경 12경으로 더하여져 거대한 병풍이 수없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관동팔경의 병풍들은 금강산 병풍들은 민화(民畵)로 분류되는 회화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圖9).
명승팔경도는 관동팔경 이외에도, ‘관서팔경(關西八景)’ ‘단양팔경(丹陽八景)’ 등이 많이 그려졌다. 관서팔경은 관동팔경의 명성을 획득하지 않았지만 작품이 전해온다. ‘관서팔경’을 확정짓는 문헌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봉산탈춤의 받는 소리에 “서도팔경 구경 가자”며, 황학루, 강선루, 무진대, 약산대, 인풍루, 통군정, 백상루, 연광정을 열거하고 부벽루를 더한 것이 있고, 현전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관서십경도병》 (부벽루, 백상루, 무진대, 약산동대, 강설루, 사절정, 통군정, 인풍루, 황학루, 담담정)이 있다. 관서십경은 대개 누정(樓亭)으로 중심을 이룬 점이 특색이다.²⁵⁾ 서울역사박물관의 화첩 ‘관서십육경’도 누정이 중심이다. 경치를 조망하는 조선시대 누정문화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한양의 일부나 사적 공간의 자연경이 또한 팔경도로 제작되었다. 심사정(沈師正)의 ‘경구입경(京口八景)’ 그리고 정선의 ‘장동팔경(壯洞八景)’들이 대표적이다. 정선의 ‘장동팔경’은 국립중앙박물관, 간송미술관, 그리고 아트스페이스에 전시된 본 등 여러 본이 전하고 있다. 또한 이규상(李奎象, 1727-1799)이 ‘장동팔경’을 그린 그림에 배와(坯窩) 김상숙의 명필을 구하는 글이 전하고 있다.²⁶⁾ 장동팔경은 서촌일대 청계동, 취미대, 청송당, 독락정, 대은암, 자하동, 필운대, 수성동, 청휘정, 백운동, 창의문, 옥류동, 세심대, 종송정 그리고 청풍계 등을 포함하면서 취사선택되었다. 한양 집경 가운데 권섭(權燮, 1671-1759)이 그린 ‘한양진경도첩’의 10면도 함께 주목할 만하다. 이에는 북영, 수문루, 세검정, 사일동 등 한양의 명소들이 포함되어 있다.²⁷⁾
한강(漢江)을 따라가며 구성된 풍경으로 팔경의 세트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정선의 ‘양천팔경(陽川八景)’에는 선유봉(仙遊峰), 양화진(陽花津), 이수정(二水亭), 개화사(開花寺), 소악루(小岳樓), 소요정(逍遙亭), 귀래정(歸來亭), 낙건정(樂健亭)이, 서울역사박물관의 19세기작 ‘남한강실경산수도’의 십경에는 취적대, 성황타, 미상, 의림폭, 두산우탄, 한벽루, 영추헌, 청풍부, 황강서원, 옥계동이 그려졌다. 남한강 10경은 단양(端陽)의 일대를 포함한다. 단양일대를 그린 것으로는 19세기초기 이방운(李昉運)의 《사군강산삼선수석(四郡江山參僊水石)》이 대표적이다.²⁸⁾ 도화동, 수렴폭, 한벽루, 금병산, 부용벽, 도암 석문, 구담, 사인암, 의림지, 영춘북벽 등이 포함된 이 화첩에는, 오늘날 일컬어지는 단양팔경의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의 세 개 바위무더기를 제외한 다섯 장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우리 산천 곳곳이 멋진 곳들은 팔경이 되어 화폭에 담겼던 것을 볼 수 있다.
‘무이구곡’에서 비롯한 ‘구곡’들이 또한 한국 산천 곳곳에서 만들어지고 그림으로 그려졌다. 주자선생을 존경한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자신이 머물렀던 공간에 구곡을 경영하여 노래를 짓고 성현의 풍모를 발휘하고자 노력했다. 제자들은 이러한 스승의 학문적 태도를 존경하여 그림으로 그렸다.²⁹⁾
조선의 구곡으로 가장 많이 그려진 구곡도는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그린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이다.

“율곡 선생 문하에서 배운 선비들이 모두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곳 산수 구곡(九曲)이 완연히 중국 무이(武夷)의 경치와 같다고 여겨 드디어 몇 동지들과 힘을 합하여 주자의 사당을 세웠는데, 산수도 그러하지만 또 평생을 두고 항상 주자를 숭상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³⁰⁾

‘고산구곡’은 황해도 고산군 석담(石潭) 구곡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림이 그린 것은 이이의 노래 ‘고산구곡가’의 내용이다. 고산구곡도의 제작은 17세기 후반 송시열(宋時烈)대에 와서 이루어졌다. 이에 관하여는 17세기 문인 권섭(權燮, 1671-1689)이 자세히 기록한 바 있다. 이이의 「고산구곡가」는 우리말의 시조인데 이를 한역한 한시를 다시 짓고 여기게 차운의 한시를 부치고 다시 다른 학자들의 차운시를 받아 그림 위에 적어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한역시는 송시열이 지었고, 차운시를 부친 학자들은 김수증(金壽增), 김수항(金壽恒), 권상하(權尙夏), 송주석(宋疇錫), 김창흡(金昌翕), 이희조(李喜朝), 김창협(金昌協), 정호(鄭澔), 이여(李畬) 등 쟁쟁한 노론계 학자들이었다. 이들의 고산구곡도 제작은 이이를 중심으로 한 그들의 학통을 세우는 문화행사였으며, 학자 이이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다. 17세기말에 제작되었음직한 <고산구곡도>가 전하고 있다. 이후로 여러 점의 <고산구곡도> 병풍이 제작되었다. 1803년작으로 김홍도, 이인문, 윤제홍 등의 화가의 이름이 병기된 병풍 《고산구곡시화병 (高山九曲詩畵屛)》이 유명하다. 석담의 구곡은 전란으로 모두 무너져서 볼 것이 없다고, 당시의 기록이 전하고 있다. 고산구곡의 그림들은 사실 석담의 실경이 아니라 이이의 시문에 표현된 이이의 모습과 이이가 읊은 시적 정취이다.
고산구곡도가 이후 많이 그려지면서 이미지의 정착도 이루어졌다. 고려대박물관, 홍익대박물관, 영남대박물관, 그리고 건국대박물관 등에 고산구곡도의 병풍이 전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고산구곡도와 무이구곡도가 한 병풍 속에 나란히 함께 그려진 것도 있다.
이후로 전개되는 조선의 구곡도에서, 17세기 제작된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의 존재가 주목할 만하다(圖10). 이 그림은 스승과 학자의 공간으로 구곡을 세우고 기리는 구곡의 문화라기보다는, 한 학자가 스스로 세운 자신의 구곡경을 담아 그리도록 하여 남게 된 실경도이다. 구곡의 경영자는 김수증이다. 김수증은 1657년경 자신의 은거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에 구곡을 만들어 일일이 이름을 짓고 화사 조세걸(曺世杰)을 불러 9곳을 그리도록 하였다. 이 사연은 김수증 자신의 글과 그의 조카 김창협의 글에 전하고 있다.³¹⁾ 이 외에 송시열이 머물렀던 화양구곡도(華陽九曲圖), 권상하가 머물렀던 황강구곡도(黃江九曲圖) 등이 그림으로 그려졌다. 여러 학자들의 자신의 구곡을 만들고 시문을 남겼으나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은 것은 더욱 많다.

9)　申用漑, 「題畵屛八折」, 『二樂亭集』 卷1. “⓵ 蒼崖通一逕, 亭勢斗而孤. 安能眞實地, 著我望平湖 (푸른 산 너른 호수), ⓶ 滄洲是底處, 落雁迷寒沙. 欲問叫舟子, 不顧當如何. (가을 기러기) ⓷ 坐石知幾日, 垂綸猶似初. 煩機今可息, 莫攪相忘魚. (어부 조어) ⓸ 顚風驅急雨, 潑墨前山昏. 何處擁傘子, 嗾驢正斷魂. (험한 풍우) ⓹ 冥冥萬古姿, 鬱鬱煙林好. 指點岡頭人, 寧能向我道. (울창한 숲) ⓺ 靑山來爽氣, 滄海不生波. 拭淨緇塵羃, 扁舟咫尺過 (망망한 물의 어부), ⓻ 疏松兼細竹, 淡月曲欄曲. 我欲追高蹤, 幽蹊不可足. (송죽 숲의 가을달) ⓼ 苦雪四山滿, 尖飆一室寒. 冷魂還不辜, 神會淡相看. (눈 내린 산천) * 번호와 그림내용은 필자가 임의로 삽입
10)　이에 대하여는 민길홍, 「조선시대 당시의도 연구」(서울대 석사논문, 2000) 참조.
11)　意恂(1786~1866)의 『草衣詩稿)』 上卷의 「題山水圖八疊」; 白晦純(1828~1898)의 『藍山集』에 실린 「題畵屛八折 (贈林虞侯)」; 안기원의 『방산집(方山集)』 卷1에 실린 「제산수병팔첩(題山水屛八疊)」 등
12)　『태조실록』 태조 7년 무인(1398) 4월26일
13)　박정애, 『조선시대 평안도 함경도 실경산수화』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4) 참조.
14)　한동민, 「수원팔경의 역사적 전개와 근대적 변용」, 『수원역사문화연구』2 (2012) 참조.
15)　李, 「題岐城十景圖」, 『松齋集』, 卷2.
16)　李尙娥 앞 논문; 朴銀順, 「朝鮮時代의 樓亭文化와 實景山水畵」, 『美術史學硏究』 250 251 (한국미술사학회, 2006) pp.149~186
17)　李植, 「東溪記」, 『澤堂集 別集』 卷11.“아곡(鵶谷)에 본래 기막힌 경치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기록해 둔 바가 있다”고 하면서, 조적대(釣寂臺), 부연(釜淵), 건지산(搴芝山), 송석정(松石亭), 조봉(鵰峯), 승담(僧潭), 구암(鳩巖) 등을 지목하였다.
18)　박정애, 앞책, pp. 172-173 참조.
19)　金昌翕, 「雲根亭記」, 『三淵集拾遺』 卷23.“關東勝槩, 盖有所謂八景者, 皆濱海也. 隨地闊狹, 各一面勢, 而其必以一長擅奇則同.”
20)　鄭幹, 「八景圖屛」, 『鳴集』 卷6, “右關東八景圖. 未知誰氏作, 卽我先師篪叟先生卧遊之餘也. 先生平日, 每以金剛宿債之未償爲恨, 輒揭此圖於壁間, 以寓仁智之樂, 泰山遽頹. 玉磵嗚咽, 胤子一珪甫不任羹墻之慕, 珍藏篋笥, 而猶慮蟲魚之或爲灾也. 余赴鶴城任所, 倩工粧屛而歸之.噫. 儀形漸邈, 手澤尙存, 可勝惜哉. 可勝痛哉.”
21)　총석정에는 李穀, 삼일포에는 李達衷, 청간정에 白文寶, 월송정에 安軸, 망양정에 정공권, 낙산사에 金富儀 등 고려의 시가 실렸다. 이보라, 「조선시대 관동팔경도 연구」 pp.60-62 참조.
22)　금강산 여행문화에 대하여는, 고연희, 『조선후기 산수기행문예 연구』 (일지사, 2002); 금강산도 연구는 박은순, 『금강산도 연구』 (일지사, 1997); 민화 금강산도는 이영수, 「민화 금강산도 연구」 (홍익대학교 석사논문, 1999)
23)　이이순과 정조의 관동팔경 기록의 소개 및 비교는, 李尙娥, 앞의 논문, pp.81~83 참조; 李頤淳, 「太廟幕次屛, 畫關東八景, 齋留終夕, 逐景謾吟, 以記卧遊之勝.」, 『後溪集』 卷1.
24)　正祖, 「有人自楓嶽歸, 以關東圖屛示余. 書其屛以還」, 『弘齋全書』 卷2, 春邸錄20.
25)　『우리땅 우리의 진경』, (국립춘천박물관, 2002) 도 25 참조.
26)　李奎象, 「題雙洞謙齋畵帖求坯窩事」, 『一夢集』 卷21.
27)　『우리땅 우리의 진경』, (국립춘천박물관, 2002) 도 35 참조.
28)　『사군강산삼선수석 기야 이방운』 (국민대학교 박물관, 2006)
29)　조선시대 구곡도의 전개양상은 윤진영, 앞글; 유준영, 이종호, 윤진영 공저, 『권력과 은둔』 (북코리아, 2010) 참조.
30)　정홍명(鄭弘溟), 『기옹만필(畸翁漫筆)』 참조
31) 　金壽增, 「谷雲記」, 『谷雲集』 卷4; 金昌協, 「谷雲九曲圖跋」, 『農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