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은적사 약사전 별화, 1856년, 가회민화박물관 촬영

차례

• Ⅰ. 들어가면서
• Ⅱ. 민화라는 용어와 개념의 비판적 검토
• Ⅲ. 유교시대의 화가 신분과 작품의 특성
• Ⅳ. 민화 작가의 다양성과 불교 畵僧의 역할
• Ⅴ. 민화 용어의 대안 吉祥畵
• Ⅵ. 마무리

※ 본 논문은 2013년 경주민화포럼에서 <민화라는 용어와 개념, 다시 생각하기>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고, 이를 보완하여 동악미술사학회 발행 [동악미술사학] 논문집에 수록된 것을 옮긴 것입니다. 함께 소개하는 도판은 가회민화박물관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Ⅰ. 들어가면서

필자는 2013년도 경주민화포럼에서 <민화라는 용어와 개념, 다시 생각하기>¹⁾라는 제목의 논고를 발표한 바 있다. 위의 논고는 기본적으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에 의해 비롯된 민화라는 용어에 대한 강한 불만과 더불어 폐기를 위한 대안의 모색이었다. 때문에 민화라는 용어의 개념 정리를 새롭게 시도할 필요성을 제안했고, 더불어 수묵화와 채색화의 관계에 대한 위상 정립의 재고를 요구했다. 필자는 이미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수묵 문인화가 아니라 채색화임을 주장한 논고를 발표한 바 있다.²⁾ 채색화의 복권은 곧 민화의 위상 제고에 커다란 기여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술사학계는 물론 작가 중심의 미술계에서조차 우리의 채색화는 그렇게 각광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민화 연구에서 가장 첨예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宮畵와 民畵의 변별점 문제이다. 기왕의 민화라는 용어는 궁화까지 포함하여 사용했다. 하지만 궁화 관련 연구가 깊어지면서 궁화와 민화의 성격 차이 등에 의해 구분을 요구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민화라는 용어로는 궁화를 포용할 수 없게 되었고, 더불어 우리 민족의 빛나는 부분인 채색화 분야를 포괄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용어의 문제점을 안게 되었다. 이에 본고는 궁화와 민화의 특성을 함께 아우르면서 기왕의 민화라는 용어에 대한 대체어를 제시하고자 한다.
민화라는 용어에 대한 대체어의 하나로 필자는 기왕의 ‘민화’를 ‘민간 회화’의 약자라기보다 ‘민족 회화’의 약자로 사용할 경우, 궁화까지 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왕의 ‘민화’라는 용어의 고착된 강한 이미지를 깰 수 없어 ‘한민족의 채색화’라는 용어의 약칭으로 ‘韓彩畵(Hanchaehwa)’라는 대안을 제시한 바 있다.³⁾ 물론 궁화나 민화의 공통점은 채색화라는 점이다. 게다가 한국 회화사의 빛나는 전통 분야가 채색화 분야이기 때문에 이 부분의 강조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채색화라는 부분의 강조는 재료 등 외형적 특징에 대한 주목이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내용 중심의 또 다른 대체어를 제안하고자 한다.
더불어 야나기가 정리했던 민화라는 개념, 즉 무명의 저속한 下手의 그림이라는 언급에 대하여 비판을 시도하고자 한다. 여기서 ‘민화’는 결코 하수의 그림도 아니며 게다가 무명의 저속한 그림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민화는 당대 사회에서 나름대로 예술성을 가지고 있는 당당한 화가의 작품임을 확인하려 한다. 실제 민화 작품이 가지고 있는 품격과 개성의 화풍은 이 점을 입증시키고 있다. 민화는 결코 야나기 식의 저급한 무명화가의 하품이라고 볼 수 없다. 더불어 민화작가 가운데 일정부분은 사찰 소속의 畵僧이었다는 점을 논증하려 한다. 그렇지 않아도 주요 사찰의 불화에서 민화풍의 소재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던 바, 이는 불화와 민화의 친연성을 입증시켜주는 자료이다. 조선후기의 사찰경제는 매우 피폐했었으며 민화 제작은 사원경제에 도움을 준 수입원이기도 했다. 따라서 민화작가로 도화서 화원부터 민간 화가 그리고 화승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작가층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때문에 본고는 기왕의 <민화라는 용어와 개념, 다시 생각하기>에서 <또 다시 생각하기>로 확장시켜 논지를 심화시키고자 한다.

1) 경주민화포럼 2013, 사단법인 한국민화센터 주최, 2013, 3
2) 졸고, <채색화의 복권과 회화사 연구의 반성>, [한국민화](3), 한국민화학회, 2012
3) 졸고, <채색화의 특성과 창조적 계승 문제>, [영월국제박물관 포럼], 영월군, 2013

Ⅱ. 민화라는 용어와 개념의 비판적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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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라는 신조어는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와 연결된다. 야나기는 1927년 ‘민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개념을 정리했다.

“단독으로 한 장 한 장 완성된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 기념품이라든지 봉납품 혹은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 대량생산된 그림을 나는 민화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오츠에(大津繪)라든가 에마(繪馬)와 같은 종류로, 도로에(泥繪) 또한 좋은 일례가 된다. 민간의 것이므로, 한마디로 말하면 하수(下手), 저속한 그림이다. 일반민중을 위해 무명의 화공이 대량으로 그린 그림이다.(…) 우선 민화의 특성을 말하면 공예에 가깝다. 아니 이보다 공예와 미술이 아직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의 그림에 가까운, 소박하고도 무심의, 애완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⁴⁾

야나기가 민화의 개념으로 제시한 것은 민간의 무명화공에 의한 대량 생산된 그림, 특히 하수의 저속한 그림이라는 것이다. 다만 민화는 소박하면서 무심한 아름다움이 있는 그림이라고 의미 부여했다. 무명화공에 의한, 그것도 하수의 저속한 그림, 이것이 과연 민화의 실체일까. 특히 야나기의 민화 관련 개념정리는 오늘날까지 위력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바, 이 부분은 매우 심각한 재고를 요구하고 있다. 진정 민화는 무명 하수에 의한 저속한 그림일까.
우선 민화의 특성으로 강조한 작가의 無名性 부분을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무명이라 함은 유명하지 않은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무명화가라 함은 화가는 화가인데 유명하지 않은 화가라는 의미이다. 유명하지 않다는 뜻은 실력이 없다는 의미와 상통하며, 민화는 바로 무명의 저속한 하수 그림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민화작가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는 작가에 대한 모독 그 자체일 뿐이다. 민화작가는 야나기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무명화가도 아니고 저속한 하수도 아니었다. 때문에 민화의 특성을 옳게 파악하고 내린 개념정리라고 볼 수 없다. 민화 작가는 지배계층인 왕공사대부와 비교하여, 무명이고, 저속하고, 하수일지 모른다. 이는 유교사회의 이분법적 신분 구조와 더불어 유교의 예술 천시이론과 맥락을 같이하는 피상적인 시각과 같다. 조선 왕조의 사대부 계층은 전문적 미술활동을 높게 평가하지도 않았고, 특히 작가의 사회적 대우는 매우 열악한 수준이었다.
민화작가의 무명성과 관련하여 미리 결론부터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민화’는 민화가 아니었다. ‘민화라는 용어의 적합하지 않음’, 이 같은 사실 때문에 그동안 민화계는 많은 혼란을 자초했다. 이른바 민화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생산자과 소비자의 문제, 왕조사회의 신분문제, 그리고 미술활동의 주체와 객체의 문제, 작품 관련 형식과 내용의 문제 등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이유 때문에 개념과 관련한 혼란이 지속되어 왔다고 본다. 이런 커다란 문제를 안고, 위에서 언급했던 무명성 문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민화’는 농경사회 공동체의 산물이다. 개성을 기본으로 하는 특정 미술작가의 개인적 산물이라기보다 공동체 사회의 의식을 조형적으로 표현한 시각자료이다. 때문에 민화의 특징으로 꼽은 무명성 부분은 당연한 결과이다. 마을공동체에서 회화적 기량이 있는 화가가 공동체의 염원을 평면위에 펼친 것이 이른바 민화이다. 이때 그림의 형식과 내용 특히 수준 등은 수용자인 공동체의 눈높이에 맞춘 것이다. 수용자의 취향과 처지를 고려하여 화가는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래서 왕공사대부 사회에서 소통되던 그림과 다른 독특한 면모를 가질 수 있었다. 이른바 민간화가의 민화가 화원의 채색화보다 자유스럽고 분방한 필치와 해학적 요소가 많은 것은 그만큼 수용자인 공동체의 눈높이에 맞추었다는 의미이다. 이런 특징의 그림을 두고 작가명이 누락되었다하여 저속한 하수의 그림이라고 폄하할 수 없다. ‘민화’는 요즘과 같은 작가 개인주의적 산물이라기보다 마을 공동체 정신을 기반으로 한 ‘공동 의지의 작품’이었다. 때문에 지역에 따라 비슷한 화풍의 다량 생산도 가능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공동 의지의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아프리카 미술과도 맥락을 공유할 수 있다.
아프리카 미술은 구미 사회의 미술 상황과 판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아프리카의 미술 작가는 구미사회처럼 작품을 출세의 수단이나 재화가치를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 미술의 특성은 무엇보다 건강성을 제일의 덕목으로 꼽게 한다. 작품의 인도 조건은 수용자의 미적 만족감에 의해 결정되지 작가의 일방적 ‘낙하산’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프리카 미술에서 스타 혹은 유명작가의 존재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 점은 자연스럽게 아프리카 미술의 익명성과 연결된다. 아프리카 미술의 익명성에 대한 특성을 자세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익명성에 있다. 대부분의 작품은 그 작가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렇듯 미술품에 있어서의 익명성이란 특이한 존재논리를 동반케 한다. 작가명 없는 작품은 그만큼 제작자로서의 사적 세계관에 입각했다기보다는 사회구성원의 보편적인 미적 인식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생성구조와 일치한다. 때문에 아프리카 미술은 한 개인의 예술적 욕구가 범람되기보다는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같이 가식이 없다. 아프리카 미술에서 원초적 생명력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조각은 수 천년동안 갈고 닦은 발달된 양식의 결정체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여기서 원시미술이라 하여 그 가치 자체가 부정적 의미의 원시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일례로 서양식 조형언어에만 익숙한 시각에서는 아프리카 미술은 영원히 ‘원시적’인 것이라고 치부하고픈 습성이 있을 것이다. 자기 민족중심주의적 입장에서 아프리카 미술을 볼 때 그것은 서툴고 단순하고 생래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원시미술이라고 불려지는 오늘의 아프리카 미술을 부정적이고 백인 위주의 사고방식에 의해 폄하할 근거는 진실로 희박한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윈시미술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에서 깊이 있는 예술성이라든가 심지어는 현대성까지 감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⁵⁾

우리 민간회화의 생성과정과 비교하여 아프리카 미술은 훌륭한 참고자료가 된다. 아프리카 미술은 마을 공동체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시대정신’의 공유를 확인하게 한다. 공동체의 감성과 눈높이에 맞춘 것이 그들의 ‘미술작품’, 즉 ‘영혼의 그릇’이었다. 이와 같은 맥락은 우리의 민간회화와 맥락을 함께할 수 있는 부분이다.
민화는 오늘날 자본주의 미술시장의 특징처럼 작가의 개성 혹은 천재성 우선주의와 다른 사회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현대미술은 작가 이름 그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로 작용하여 재화가치로 환원된다. 이와 같은 바탕에서 예술적 천재성은 훌륭한 덕목이 된다. 하지만 미술시장은 물론 미술계조차 형성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미술활동은 특성을 달리한다. 왕공사대부라는 지배계층은 나름대로 특수사회를 만들어 미술을 하나의 餘技로 즐길 수 있었다. 수묵문인화의 존재가치는 이와 같은 바탕에서 가능했다. 하지만 채색화는 무엇보다 고가의 재료비, 재료 다루는 기법과 훈련, 사실적 묘사력과 기량 등 기본적인 요구사항이 있다. 채색화는 결코 여기로서 다룰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때문에 채색화는 일정부분 예술적 기량과 훈련을 거친 화가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대목을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민화의 특징인 채색화라는 재료는 아무나 다룰 수 없는 사회 경제적 특성이 있다는 점, 더불어 이와 같은 고가 재료를 사용하려면 최소한의 기초적이고 예술적인 기량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때문에 경제적 배경이 없는 이른바 ‘저속한 하수’는 비싼 채색 물감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경제적 특성을 감안해야 한다. 채색화 재료는 수묵처럼 값싼 재료도 아니었고, 또 채색을 다룰 화가들은 그림을 즐길 정도로 사회적 경제적 자립할 바탕도 없는 중인계층 미만의 신분이었다. 한마디로 채색화가는 생존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재료를 아껴가면서 치열하게 제작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환경 속의 존재였다. 치열한 환경에서 제작한 채색화를 무명의 저속한 하수 그림이라고 무조건 폄하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19세기 말기와 20세기 초기의 한국인은 무엇 때문에 ‘민화’를 그렇게 좋아했을까. 왜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민화’ 작품이 제작되었고, 각광 받는 화목으로 격상했을까. 이 부분은 정치 경제적 상황과 맞물리고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궁핍했던 경제상황과 더불어 탐관오리의 횡행 그리고 국제 열강들의 조선 침탈 등 국내외 상황은 위기 그 자체였다. 민중의 삶은 날로 피폐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했다. 이 같은 慰撫의 대안으로 이른바 민화를 선호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18~19세기 사찰에서 甘露圖가 유행했던 사례와 비교되는 부분이지 않은가 한다.⁶⁾ 감로도는 亡者 특히 억울하게 죽은 이를 위한 위무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인간은 물론 물고기와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를 위무하는 水陸齋라는 의식의 유행도 감로도와 함께 검토하게 하는 부분이다. 궁핍했던 시대, 한국인은 희망의 이상향을 그리워하면서 해학과 자유분방한 세계를 꿈꾸었다. 비록 현실세계는 피폐했고 억압 받는 사회였지만 이 같은 곤궁의 극복을 위해 민화풍의 그림 세계를 대용하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물론 18세기 이후 민간 상업의 발전은 일상생활에서 미술을 수용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을 넓은 의미에서 호전시켰다. ‘민화’는 궁핍과 고난 시대의 역설적 산물임을 특기하게 한다.

4) 柳宗悅, <口繪 解說>, [柳宗悅全集](10), 0摩書房, 1983, 631쪽
5) 졸저, <아프리카 미술의 새로운 인식>, [미술과 함께, 사회와 함께], 미진사, 1991, 314쪽
위의 글은 1987년 호암갤러리에서 주최한 <아프리카 미술> 전시도록의 논고이다. 필자는 아프리카 미술을 국내 최초로 본격 소개하고자 전시기획에 참여했고, 위와 같은 논고도 작성하게 되었다.
6) 졸고, <한국불화의 한국성 문제>, [실학사상연구](14), 무악실학회, 2000, 6

Ⅲ. 유교시대의 화가 신분과 작품의 특성

그동안 미술사학계에서는 수묵 문인화 중심으로 우리 회화사를 정리하고 의미를,부여해 왔다. 문인 사대부들은 미술행위를 하나의 餘技로 보고 시서화 三絶 차원에서 즐겼을 따름이었다. 그림은 취미생활 정도였지 결코 직업적 대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유교문화는 미술행위를 玩物喪志로 보아 금기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문제는 수묵 문인화 중심의 여기문화에 별도로 채색문화가 생명력을 잃지 않고 이어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수묵문인화가 아니고 채색화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더불어 중국 사고방식 중심의 조선 문인화의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고, 여기로서의 수묵문인화의 한계 역시 냉철하게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채색화](다할미디어 발행, 2015)에 소개된 수 백점의 채색 걸작품 가운데 한 점의 작품조차 기왕의 한국회화사 책에 소개된 바 없다는 사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회화사의 중심은 채색화라는 사실의 확인, 여기서 한국회화사 연구의 새로운 시각을 강조하게 한다.
신분계급사회였던 조선왕조의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사회적 구조를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채색화에서의 민화와 궁화 관계를 주목하게 한다. 궁화와 민화의 특성이 아직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이전에는 채색화를 대개 민화라고 불렀다. 그동안 ‘민화 걸작전’에 출품된 대표작의 상당수는 민화라기보다 궁화 작품이 많았다. 이 말은 민화의 특성을 역설적으로 설명해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왕실에서 사용되었던 채색화, 즉 궁화의 전국 단위 광역화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길상을 의미하는 왕실 사용 채색화는 점차적으로 양반 사대부 가문을 거쳐 중인 계층 이하의 민간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이와 같은 표현은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수묵 문인화가 아니고 채색화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민화 부분 가운데 왕공사대부 계층이 아니고 민간 자체적으로 발생된 형식과 내용의 그림도 많다. 시대가 흐를수록 민간의 독자적 화풍 전개의 비중은 커졌을 것이다. 아무튼 물질적 풍요로운 지원 아래 제작된 도화서 화원의 궁화와 열악한 환경에서 제작된 민간의 채색화는 형식과 내용에서 차별상이 있을 수밖에 없다.⁷⁾ 하지만 민간 주도의 채색화에서 보다 독자적인 개성적 표현을 볼 수 있다면, 이는 채색화의 발전 양상과 관련이 있다.
궁화의 생산 담당자는 도화서 화원이었다. 특히 화원은 새해를 맞아 歲畵 제작에 몰입해야 했다. 세화 제작의 경우, 도화서 화원은 각 20장씩, 자비대령화원은 각 30장씩을 제작하여 진상해야 했다. 이들 세화는 궁중에서 사용하고 일부는 군왕이 신하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이 때의 세화 작가에게는 등급을 주어 시상하기도 했다.⁸⁾ 이들 그림은 민화의 원류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양흉영길(禳凶迎吉) 제액초복의 門排 그림 또는 歲畵에서 전승된 것으로 파악된다.⁹⁾ 이는 辟邪와 吉祥을 근간으로 했다.
‘민화’의 화풍상 특징은 바로 ‘민화’의 개성적 존재가치와 맞물리는 지적이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민화의 특징에 대하여 언급해 왔다. ‘추상적인 환상’(이우환), ‘꿈과 사랑의 세계’(김철순), ‘소박하다’ ‘순진무구하다’ ‘해학적이다’ ‘자유분방하다’ ‘아이와 같다’ 등등. 일단 권위적이고 엄격한 질서의 궁화와 비교하여 민간 중심의 ‘민화’는 보다 자유스런 화풍을 추구할 수 있다. 권력으로부터의 거리는 그만큼 절대적 규범으로부터 자유스러운 공간 확보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는 궁화의 권위적 화풍과 달리 민간 채색화의 특성을 고찰하고자 한다.¹⁰⁾
민간 채색화의 화풍상 특징으로 먼저 들 수 있는 개념은 바로 ‘질박하다’라는 키워드이다. 여기서 質朴이라 함은 ‘순박하고 진솔한 본색’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質은 본질, 본색, 바탕을 의미하고, 朴은 가공하지 않은 순수한 목재라는 의미에서 천연상태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단순하고 소박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질박이야말로 조선 민간 채색화의 세계와 직결되는 개념어가 아닌가 한다. 수묵문인화를 두고 질박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박하다 하여 거칠고 투박한 것이기만 한가. 천연 상태 즉 가공하지 않은 상태라 하여 조잡하다고만 표현할 수 없다. 투박하고 조잡하다고 해서 질박하지 않은 것처럼, 질박하다 해서 반드시 투박하거나 조잡한 것은 아니다. 즉 소박하고, 거칠고, 강한 것은 조잡한 것과 다르다. 질박이란 것은 정신적 품격이며, 조잡하다는 것은 재료와 가공에서 비롯된 외형적 특징을 의미한다. 그래서 질박은 통속성과도 거리가 있다. 민간미술에서 질박은 실용적인 것과 심미적인 것,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조화와 통일로 표현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조선 민간 채색화의 회화적 특성의 하나로 質朴美를 강조하면서, 도화서 화원에 의한 궁화의 귀족취향과 비교하여 민간 채색화의 질박 취향의 비중을 염두에 두고자 한다. 민간미술의 특징으로 질박함 이외 天眞함을 들 수 있는 바, 이는 동심의 세계와 연결된다. 동심의 세계에서는 호랑이라 하더라도 獸性을 지우고 인자한 천사처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동자가 호랑이보다 크게 그려진다 하여 이상스러울 것도 없다. 이는 창의성을 기본으로 하는 동심의 세계가 갖는 특권이자 장점이다. 저항 기질의 학자 李卓吾는 말했다. “천하의 아름다운 작품들은 모두 다 동심에서 나왔다.” 바로 동심은 진심이고 질박과 상통한다. 천진함과 더불어 민간미술의 특성으로 生命性을 들 수 있다. 생기발랄은 민간 미술의 특징이다. “궁중예술은 언제나 화려한 인생에 대한 만족을 숨김없이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민간예술이 표현하는 것은 하루 노동에 지친 인간의 생명에 대한, 또 그것이 행복에 대한 열렬한 갈망과 축복, 그리고 기도이다. 표현형식은 일반적으로 특별히 함축된 내용이 없는 듯 보이지만 곁과 속이 일치하는 성실하고 진실된 것이다.”¹¹⁾ 우리 민간회화에서도 위와 같은 지적이 상통한다고 믿어진다. 바로 민화의 건강한 생명성을 의미한다.

7) “궁화와 민화는 같은 주제에 같은 채색화풍이라 하더라도 조형세계는 엄연히 다르다. 궁화에서 깊이 있는 공간을 구축했다면, 민화에서는 평면적이고 구성적인 공간을 채택했다. 궁화에서 세련되고 숙련된 필선을 사용했다면, 민화에서는 평범하고 질박한 필선을 구사했다. 궁화에서 진지하고 장중한 스토리가 전개되었다면, 민화에서는 익살스럽고 해학적인 감성이 곳곳에 내비쳤다. 민화는 주제와 기법에서 궁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미지에 나타난 취향과 감각은 다른 차원의 세계다.”(정병모, [민화, 가장 대중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2012, 돌베개, 47쪽)
8) [中宗實錄](中宗 5年), 9월 29일조/ [承政院日記](正祖 5年) 12월 20일조 등
9) 홍선표, <조선민화의 새로운 관점과 이해>, [조선 회화], 한국미술연구소, 2014, 414쪽
10) 郎紹君 (김상철 역), [중국 근현대미술], 시공아트, 2005, 300-306쪽
11) 郎紹君, 앞의 책, 316쪽

Ⅳ. 민화 작가의 다양성과 불교 畵僧의 역할

사찰 벽화에 남아 있는 민화풍의 작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¹²⁾ 통도사, 해인사를 비롯 전국도처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민화풍의 작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찰의 畵僧 상당수가 민화작업에 직접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송헌 金達基는 해인사 등의 불화를 제작한 화승이었지만 민화 작품도 상당수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단청장으로 역시 채색작업의 가업을 이어받았다. 이만봉 혹은 원덕문 같은 경우는 화승이면서 단청 이외 민화풍의 작품을 제작했다. 불화 속에 민화적 요소가 있고, 또 거꾸로의 경우도 확인할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불화 제작의 화승이 민화를 제작했다는 점이다. 에카르트의 [한국미술사]에 의하면, 그는 1915년경 화승 文古山으로부터 혁필화를 입수했다는 언급이 있다.¹³⁾ 여기서 古山은 竺演(1875~1930 활동) 화승을 지칭하는 바, 그는 불화의 배경에 금강산이라든가 민화적 요소를 수용하여 작업했다. 현재 그의 불화 작품은 50점 정도를 헤아리게 한다. 식민지 시절 활동한 普應(1867~1954) 스님의 불화 작품 속에서도 민화적 요소를 찾을 수 있다. 아니 그의 <흥천사 감로도>는 1930년대 도시 풍경과 전쟁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불화의 새로운 경지를 선보인 바 있다.

“(안양암 <치성광여래도>는) 치성광여래의 권속을 더욱 적극적으로 도교 신선도의 도상으로 표현한 것이 큰 특징이다. 주존인 치성광여래와 협시인 日光 月光 보살 외에 주요 존상인 七如來는 광배의 化佛로 표현되었으며, 소의 양쪽 화면의 하단에는 북두칠성의 도교신격인 七元星君이 3,4명으로 나뉘어 중앙을 향해 있다. 그 앞쪽으로 각기 2명의 동자들이 ‘佛’자와 ‘壽’자 모양으로 휘어진 나무 분재를 들고 서 있다. 이 동자들의 도상은 민화 신선문자도의 유형을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통 분재의 나뭇가지는 壽, 福 문자로 표현되지만 이 그림에서는 福자를 여래를 뜻하는 ‘佛’자로 바꾸었다. 유사한 도상이 같은 전각에 봉안된 또 한 폭의 <치성광여래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데, 이 그림을 제작한 화승인 고산 축연은 1926년 통도사 <16 나한도>에서도 같은 류의 도상을 채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사실들을 통해서 당시 민화와 불화가 도상을 공유했으며, 불화의 제작자인 화승이 민화를 그렸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비록 사진이긴 하지만 안양암 <치성광여래도>(1924)의 제작자인 고산 축연의 민화 문자도풍 글씨와 보응 문성의 민화풍 봉황 그림이 남아 있고, 유사한 화풍의 봉황 초본이 한국불교미술박물관에 남아 있어 그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안양암 <치성광여래도>는 민화 신선도의 도상을 채택하여 수명장수라는 치성광여래의 신앙 성격을 쉽고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으며, 같은 시기 도상을 공유하는 비슷한 그림들이 양산되는 가운데 매우 개성 있고 독특한 도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¹⁴⁾

위의 인용문은 불화와 민화의 도상 공유라는 사례를 들어 불화와 민화의 친연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연구자는 조심스럽게 畵僧이 민화를 그렸을 가능성을 추정하기도 했다. 여기서 필자는 이른바 민화 작가의 상당수는 화승이었음을 강조하려 한다.
통도사에서 주석하면서 전통 미술재료 관련 기법과 제작에 일가를 이룬 性坡 스님의 증언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스님은 전통 제지법을 비롯 염색, 안료, 옻칠, 도자기 등 전통 미술재료학 분야에서 권위자이면서, 창작활동도 겸하고 있는, 조계종의 원로 스님이다.

“불상은 개별적으로 제작했지만 단청이나 불화작업은 수 십명씩 모여 집단적으로 작업했다. 큰 사찰의 경우, 단청이나 불화 불사는 집단적으로 그것도 몇 년에 걸쳐 진행했다. 중국에서는 벽화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우리는 벽에 그려도 別畵라고 불렀다. 별화는 소묘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림 잘 그리는 화가가 맡았다. 수 십명의 단청장 가운데 별화 작가는 따로 있었다. 만년을 통도사에서 살았던 단청장 혜각 스님에게 들었던 말씀이 생각난다. 스님 말씀에 의하면, 불화 작가가되려면 똑같은 그림의 불화 초본(下圖)을 3천장 그려야 겨우 화가 입문생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단다. 3천장의 불화 초를 연습해야 스스로 붓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예전의 화가들은 초를 뜰 때, 그림 위에 화선지를 올려놓고 그대로 베끼지 않았다. 원본을 옆에 놓고 확대하거나 축소해도 그림의 내용은 똑같았다. 그러니까 불화 작가라 하면 원본의 축소 확대를 자유스럽게 할 수 있는 기량이 있었다. 불화의 공식은 수직, 수평, 좌우대칭의 원리가 있어, 이를 잘 지켜야 했다.
사찰의 별화 속에 민화 소재의 그림이 많다. 통도사는 고건축박물관이라는 애칭을 듣고 있는데, 이는 고려 양식부터 조선시대의 다양한 건축 양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통도사는 6.25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아 200~300년 전의 건축이 남아 있고, 특히 그 당시의 그림들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러니까 통도사는 일반적으로 민화가 유행하기 이전인 2백년 전의 민화풍 그림이 많이 남아 있다. 혜장보각에 2백년 전쯤에 그린 까치 호랑이 그림이 있다. 대웅전 천정에도 수 백년 전에 그린 그림으로 가득하다. 통도사는 고건축 이외 그림만 가지고도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채색 그림은 사찰에서 담당했고, 그 전통을 지켜왔다. 궁궐 단청도 사찰의 단청장이 담당했지 궁궐에 단청장이 별도로 있지 않았다. 도화서 화원은 의궤도와 같은 기록성 중심의 그림을 주로 그렸지 단청을 담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찰에서는 단청장이 항상 있었고, 조선 천지 어디에선가는 늘 단청 불사를 시공했다.
경제 사정이 어려워진 조선 말기의 사찰에서는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킬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단청장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어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다. 실업자가 된 불화작가들은 마을로 내려가 부잣집 사랑방에서 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별화를 그리던 솜씨로 종이에 그리면 바로 민화가 되었다. 병풍을 비롯 갖가지의 채색 그림을 그려주고 쌀을 얻었다. 그래서 민화가 민간에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민가에서는 채색 물감이 없었다. 석채 같은 물감은 귀해 민가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 궁중화가라 해도 농채의 물감 대신 담채 정도를 사용했다. 강렬한 원색은 불화의 물감을 사용한 것이다. 사찰에서는 전통적으로 채색 물감을 사용해 왔기 때문에 재료 구하기와 사용 기법 등을 원활하게 다룰 수 있었다. 실력 있는 별화 작가의 민화 그리기는 일도 아니었다. 때문에 뛰어난 민화작품을 다수 제작할 수 있었다. 선비 화가는 수묵의 사군자 정도를 그릴 수 있었지 채색화는 상상도 못했다. 민화는 물감 자체가 사찰용이었고, 선비 집에서는 물감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채색을 무시했다. 민화의 뿌리는 사찰과 연관이 있다. 물감만 보아도 민화는 사찰에서 나온 것이다.
점차적으로 조선 천지에 민화가 퍼졌다. 특히 살기 어려운 시절 민간에 맞도록 길상 주제로 그려준 것이 민화이다. 별화 작가는 시의에 맞게 민족의 사상과 감성을 개성적으로 그렸다. 사찰은 이미 민화 소재, 즉 까치 호랑이라든가, 토끼가 호랑이에게 담배 물려주는 것, 혹은 산신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민화풍의 그림들을 그린 전통이 있다. 이들 민화풍 그림을 민간에 맞게 그린 것이 민화이다. 사찰은 피폐했던 사원경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화를 그렸고, 또 민간은 길상 주제의 민화로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려 했다. 민화는 사찰에서 나온 채색 그림이라고 보아야 한다.”¹⁵⁾
성파 스님의 위와 같은 증언은 매우 소중하다. 조선말기 사찰경제가 최악의 상태로 빠졌을 때, 사찰은 경제적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수입원을 도모했다. 그런 가운데 하나가 민화 그리기였다. 채색 물감을 일상적으로 다루고 있는 별화 작가의 경우 민화 소재의 그림 그리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민화 관련 재료와 또 제작에 일가를 이룬 성파 스님의 사찰 전래 증언은 새삼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다음은 화가 고암 이응노의 증언을 소개하고자 한다. 고암은 파리에서 작가활동하면서 20세기 한국이 낳은 정상급 화가로 명성을 드날린 바 있다. 그런 고암이 상경하기 이전 사찰에서 직접 민화를 그렸다는 생생한 증언이다. 민화 제작에 사찰이 직접적으로 참여했다는 희귀한 사료가 아닌가 한다.

“거기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마침 마을에 산제당을 새로 지어서 그림을 그릴 사람을 찾고 있는데, 그려보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왔습니다. 생각지도 않던 행운이었어요. 산제당이란 것은 마을을 지키는 신을 모신 곳이랍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가까운 절간에 놀러가 그곳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고 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지요. 절에는 탱화를 그리는 스님 밑에 ‘단청’을 그리는 화공이 있어서 틈틈이 산신이랑 선녀 그림 같은 것을 그리기도 했어요. 그 마을에서 세 끼 먹여주고 일당 1원에 그림을 그리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당시 1원은 큰돈이었지요. 건장한 남자라도 겨우 20~30전을 벌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니 하루에 1원이라면 굉장한 거지요. 다음날 청양으로 가서 그림 그릴 화폭과 물감 등을 사다가 곧장 여관에 틀어박히게 되었습니다.”¹⁶⁾
“고려 때에는 불교가 번성했고 무수한 불교예술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들어선 후 5백년 간 불교는 배척을 받아 쇠퇴해 갔지요. 많은 절들이 쓰러져 가는 와중에 그나마 불화의 맥은 민간 무속과 융화되어 이어져 토착화했지요. 그래서 불교는 하층계급 사람들의 복을 비는 종교로서 겨우 명맥만을 지켜왔습니다. 중들은 천민 취급을 당했고, 그나마 소속된 절도 없는 중들은 집집을 돌며 쌀을 구걸하는 거지같은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절에 있더라도 탁발승들은 탁발을 나가기도 했고요. 불교는 나라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민간에서는 사람들의 내세의 행복을 기원해 주거나 현세의 복을 구하기도 하고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의 스님들은 곁일 삼아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렸지요. 그중에서도 소나무에 까치라든가 호랑이를 그린 그림이 가장 많았습니다. 까치는 호랑이나 뱀 같은 것이 나오면 운다고 해서 길운을 가져오는 새로 알려져 있었고, 호랑이 그림을 걸어두면 잡신이 물러간다고도 해서 민가에서는 그런 그림을 부적으로 붙여두곤 하였지요. 또 절에서는 불교행사를 위해서 많은 그림들이 필요했으니까요. 장수(長壽)에 관한 것으로는 선인 그림이나 선녀 그림, 십장생도 같은 것이 있었고, 액땜을 위한 것으로서는 호랑이, 사자, 개, 닭 등이 있었습니다. 일본에도 당사자(唐獅子) 그림이 있잖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그걸 석판이나 목판으로 찍어내 팔았는데, 아마 1장에 10전인가 20전인가 했지요.”¹⁷⁾
“생활을 위해서 할 수 없이 실용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말입니다. 내가 화가로서의 첫 작업을 한 것도 바로 선인과 선녀와 호랑이가 온 그림을 산제당에 그린 것이랍니다. 어쨌든 온 힘을 다해서 그렸더니 마을사람들이 ‘잘 그렸네. 잘 그렸네’ 하면서 칭찬해 주었고, 난 그동안의 일당으로 5원을 받았지요. 그러자 이번에는 주재소의 일본인 순사가 찾아와 호랑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더군요. 1원을 받고 그려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6원이라는 돈이 수중에 들어왔어요. 그 6원으로 운동화와 기차표를 사고 나니 1원이 남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기차란 걸 보게 되었어요.”¹⁸⁾

흥미로운 증언이다. 이응노는 홍성 출신으로 상경하여 김규진 문하에서 묵죽화로 조선미전을 통하여 화단에 등단했다. 그는 상경하기 전에 위의 증언처럼 사찰에서 ‘민화’를 그려 호구지책으로 삼았다. 당시 그는 민화를 그려 상경 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¹⁹⁾ 고암의 증언, 사찰에서 민화를 제작했다는 확고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우리가 보아 온 상당수의 채색화(민간회화)는 사찰에서 제작한 것이고, 또 화승의 작품이기 때문에 굳이 작가명을 밝히지 않았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민화의 주제가 대개 길상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신도들의 행복 추구를 위해 사찰의 별화 작가가 굳이 민화 그리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면, 민화 작품의 상당부분은 화승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이다.

12) 졸고, <행복을 담은 길상화의 제작, 사찰 민화>, [奉恩 板殿], 2015, 4
13) Andreas Eckardt, [History of Koren Art], London, 1929, p.138
14) 최엽, <20세기 전반 불화의 새로운 동향과 화승의 입지>, [미술사학연구](266), 한국미술사학회, 2010, 6, 194-196쪽
15) 필자는 오랜 세월동안 성파 스님을 예방하면서, 그의 전통 미술재료 연구와 실험 그리고 그것을 활용한 제작과정 등을 참관하면서 기록했다. 이런 과정에서 위와 같은 증언도 나오게 되었다. 스님의 전통미술 관련 증언은 국립예술자료원의 구술사 사업을 통하여 필자에 의해 체계적으로 발간될 예정이다.
16) 이응노, 박인경, 도미야마 다에코(富山妙子) 대담집, [서울-파리-도쿄], 記錄社(東京), 1985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 고암미술연구소 엮음, 얼과 알, 2000, 394쪽 (재수록))
17) 앞의 책, 394-395쪽
18) 앞의 책, 395-396쪽
19) 수덕사 고암禪미술관은 개관기념전(2010, 10)으로 고암 이응노화백의 미공개 작품전을 개최한 바 있다. 당시 전시는 고암 작품이라 하여 민화풍의 채색 <호랑이>(1930년대) 그림 한 점을 출품한 바 있다. 진위문제는 따로 살펴야겠지만 작품의 서명은 고암의 초기 아호인 竹史라고 표기되었다. 아무튼 고암과 민화 제작 사항은 사찰에서의 민화제작 관련의 증빙자료라는 측면에서도 흥미롭다.

Ⅴ. 민화 용어의 대안 吉祥畵

吉祥이란 용어의 출처는 [易經]의 <계사하전(繫辭下傳)>에 나오는 ‘吉事有祥’으로 좋은 일에는 상서로움이 있다는 것으로 좋은 징후를 의미한다. 길상이란 용어와 비슷한 것으로 吉兆, 嘉祥, 祥瑞 등을 들 수 있다. 행복 추구는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그래서 조형활동도 행복추구의 인간 활동과 커다랗게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림에는 반드시 뜻이 있고, 뜻은 반드시 길상이다(圖必有意 有必吉祥).’ 의미 없는 그림은 없다. 의미는 길상을 동반한다. 그래서 채색화의 특성으로 길상을 주목하게 한다.

“화조화는 세속적인 행복을 축하하고 기원하는 미디어로, 조선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침투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조선에서 길상적인 기능을 담당한 것은 화조화뿐 만은 아닐 것이다. 조선 고유의 문방도와 맹호도, 문자도, 고사인물도 등도 넓은 의미에서는 길상도에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러한 장르의 작품은 그 길상적인 기능을 눈여겨볼 때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조선의 시각문화를 구성하고 있던 것은 雅, 俗의 계층구조만이 아니다. 궁중, 민간의 계층구조도 지배적이었음이 틀림없다. 이 계층구조가 문인화가를 각별한 존재로 여기며 도화서 화원, 여항 문인화가, 환쟁이 등의 직업적인 제작자의 계층 구조에 대응하고 있지만, ‘民’에 속하는 도상 쪽이 세속적인 행복을 더 직접적인 형태로 제시하고 있을 가능성은 높다. 그러므로 민화를 길상의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 ‘민’을 저변에서 지지하는 도상 쪽으로 관심이 기울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어쨌든 조선의 시각문화 속에서 민화=길상도의 역할은 매우 크다.”²⁰⁾

2013년 경주민화포럼의 종합토론 시간은 민화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학자들끼리의 ‘끝장 토론’을 시도하게 했다. 당시 좌장을 맡았던 필자는 민화라는 용어의 폐기를 주장하면서 새로운 대체어의 도출을 유도했다. 이러저러한 견해가 제출되었지만 커다란 반향을 얻지 못했고, 다만 기시 후미카즈(岸文和) 교수의 ‘幸福畵’라는 제안이 잔잔한 반응을 보였다. 여기서 행복화라는 용어는 의미전달의 수월성이라는 측면에서 주목을 요했다. 하지만 행복이란 단어의 어감이 주는 신선도의 결여는 새로운 대체어를 요구했다. 그래서 필자는 이 자리를 빌려 공식적으로 행복화와 버금갈 수 있으면서 출전이 확실한 ‘吉祥畵’라는 용어를 제시하고자 한다. 기왕의 궁화와 민화의 주제가 행복추구였다면 굳이 길상화라는 용어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크게 내세울 것도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²¹⁾

“민화가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것은 행복이다. 장수로부터 가정의 행복,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행복에서 사회적 행복까지 망라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시한 것이 가정의 행복이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려는 소망이 민화 속에는 넘쳐난다. 그러한 점에서 민화는 행복이 가득한 그림이다. 복을 많이 받고 출세하며 오래 살게 되니, 이보다 더 행복한 그림이 어디 있겠는가? 행복은 민화의 키워드이자 다른 회화와 구분되는 중요한 상징코드인 것이다. 민화의 아름다운 이미지는 대부분 행복을 추구하는 상징이 바탕이 되어 있기에 그 이미지가 더욱 소중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것이다. 민화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에 기초하고 있다. 격조와 이성의 세계를 중시하는 문인화와 달리 민화에서는 감성과 욕망을 거침없이 풀어놓았다. 민화 속에 펼쳐진 행복의 세계는 매우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며 탈권위적인 성격을 띤다. 우아함보다는 실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이념적이기보다는 따뜻한 인간미를 중시하며, 권위로 지배하기보다는 평등한 세상을 꿈꾼다. 서민의 정서와 감성과 위상이 숨김없이 드러난 것이다.”²²⁾

행복추구, 이는 우리 전통 채색화가 지니고 있는 특성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이제 길상화라는 용어로 과거의 궁화와 민화를 아우르면서, 보다 폭넓게 한국 채색화의 입지를 보다 굳건하게 할 필요가 있다. 형식상으로는 채색화이지만 내용상으로는 길상화라는 점, 이제 민화/궁화의 포괄적 대체 용어로 길상화라는 용어를 심각하게 검토할 때가 아닌가 한다. 이른바 민화 소재 가운데 소상팔경과 같은 산수화 부분도 넓은 의미로는 길상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고리키는 ‘민요는 비관주의와 완전히 인연을 끊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민간미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용에서의 낙관, 길상, 이상, 정감 등과 양식에서의 마치 붉은 불이 타오르는 듯한 정열적인 아름다움 등은 모두 넘쳐나는 활력과 낙관주의의 반영이 아닌 것이 없다. 이른바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자’의 삶에 대한 태도와 그들의 분투 정신, 생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 그리고 자신감이 충만한 민족적인 성격 등은 이들의 예술이 가지는 낙관적 바탕의 원천이 되는 것들이다.”²³⁾

20) 기시 후미카즈(岸文和), <길상 도상화 -민화와 행복>, [한국의 채색화](2), 다할미디어, 2015, 344쪽
21) 졸고, <행복을 담은 색깔그림 길상화 다시 보기>, [월간 미술], 2015, 4
22) 정병모, <그림이 삶의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그림으로 본 조선],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엮음, 글항아리, 2014, 216쪽
23) 郎紹君, 앞의 책, 319쪽

Ⅵ. 마무리

화가 운보 김기창은 그의 민화론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나는 항상 거짓 없이 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나의 예술도 순수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이를테면 인간 본능의 거짓 없는 진솔한 그림- 어쩌면 그것은 태고적부터 인간이 아닌 미의식을 솔직하게 표현해 놓은 참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무척 고심을 해왔다. 나는 오랫동안 그 근원을 찾아 헤매다가 한국적이면서도 순수한 인간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해 놓은 것이 바로 우리 민화임을 알게 되었다.”²⁴⁾

민화, 아니 길상화는 순수한 인간 감정을 잘 표현한 장르이다. 한 걸음 더 나가 행복 추구의 시각적 산물, 그것은 바로 전통 기반의 채색화였다. 재료와 형식적 측면에서는 채색화였지만 작품 내용상의 특징은 길상화였다. 하여 민화의 대체 용어로 궁화를 포용할 수 있는 길상화라는 용어 사용을 제기하고자 한다. 본고의 결론을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행복추구의 채색화를 민화라고 명명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주장은 오류였다. 이른바 민화는 결코 무명의 저속한 하수의 그림도 아니었다. 당대의 수준급 화가들이 공동체 의식에 맞추어 개성적이고 창의적으로 제작한 것이 이른바 민화였다. 이 점은 오늘날 남아 있는 숱한 작품들의 수준이 구체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화가의 창의성을 비롯 품격과 채색 재료 다루는 기량 특히 고가의 채색재료 등을 고려했을 때, 이 점 쉽게 수긍할 수 있다.
둘째, 길상화(민화)의 화풍상 특징은 質朴美이다. 민화 속에 동심과 같은 천진함을 특성으로 담고 있다. 왕실의 권위적인 화풍은 점진적으로 민간사회에서 수용되면서 질박하고 천진한 세계와 접목되었다.
셋째, 채색 민화 작가 가운데 상당부분은 사찰에서 別畵를 그리던 畵僧이었다. 이는 도화서 화원을 비롯 순수 민간화가 그리고 승려까지 길상화의 작가 폭이 매우 넓었음을 의미한다. 사찰에서 이른바 민화 제작에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정리되었던 민화개념에 대하여 새로운 시도를 촉구한다.
넷째, 현재 민화라는 용어 속에는 궁화를 포용하고 있는 모순이 있다. 아니 그동안 민화 걸작전의 출품작 대다수는 궁화 부분이 차지했다. 이에 궁화/민화의 혼재 상태를 불식시키면서, 또 행복추구라는 내용상의 특징과 채색화라는 형식상의 특징을 살리면서, 이들을 아우르는 민화의 대체용어로 길상화라는 용어를 제시하고자 한다.

24) 김기창, [운보 김기창], API, 1989, 1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