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별 민화 특강 ⑤ 민화 산수화의 배후 소상팔경도와 금강산도를 중심으로

도1 전 안견, <어촌석조도>, 조선 초기, 16.4×11.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민화 산수화의 주류를 이룬 소상팔경도와 금상산도를 중심으로, 민화 화가들이 기존의 산수화를 어떤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번안했으며, 어떤 형식과 내용을 통해 가시화했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글 허균(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산수화는 산과 물이 어우러진 풍광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같은 산수화라도 자연이 주는 흥취와 감격을 표현한 소경小景 또는 인물 산수화가 있는가 하면, 대자연의 이치를 드러낸 관념 산수화가 있고, 승경락도勝景樂道 풍조와 맞물린 실경산수화도 있다. 이들 모든 종류의 산수화를 종전까지는 양반 사족들이 독점하고 있었으나 조선 후기의 민화 유행과 함께 일반 서민들도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산수화를 향유하기 시작했다.
현재 각 소장처에 남아 있는 옛 민화 산수화의 실태를 살펴보면, 상류층이 향유했던 산수화를 원본 삼아 그대로 베껴 그린 것이 있고, 정형화된 상투적 형식과 내용을 적절히 구사하여 대용代用의 가치를 높인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원본을 자신의 지식과 생각을 바탕으로 해석, 또는 번안한 작례가 있는데 이런 유형이 민화 산수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번역’이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단순히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이라면, ‘번안’은 번안자의 취향과 주관적 상상력의 개입이 두드러진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민화 산수화 중에는 번안에 의해 원본이 상당 부분 변형되거나 왜곡, 또는 손상된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이것은 정오正誤, 선악善惡의 문제가 아니라 좁게는 수요자와 민화 화가의 취향 문제이며 넓게는 서민 계층의 집단 정서와 의식에 관한 문제다.
본 글에서는 이점에 유의하면서 민화 산수화의 주류를 이룬 소상팔경도와 금상산도를 중심으로, 민화 화가들이 기존의 산수화를 어떤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번안했으며, 어떤 형식과 내용을 통해 가시화했는가에 대해 살필 것이다. 이에 앞서 신분 사회인 조선시대 서민들이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산수화를 향유하게 된 인문 사회적 배경부터 짚고 넘어가려 한다.


도2 소상팔경도 8곡 병풍 중 <동정추월>, 조선 후기, 49.5×31㎝,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산수화 향유의 배경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엄격한 신분제도를 시행했다. 신분은 크게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왕공 귀족과 양반 사족은 전자에, 양민(良民, 서민)·천민은 후자에 속했다. 피지배층에게 지극히 불리했던 이 신분제도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경제력과 능력을 겸비한 서민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의 도전을 받게 된다. 1592년에 발발하여 7년 동안 계속된 임진왜란과 한 세대쯤 뒤에 일어난 정묘·병자 호란은 조선 백성들에게 참혹한 희생을 강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양 난은 끝났지만, 정부는 토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할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양반 사족들 역시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무능했다.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서민들은 자구책으로 상행위를 하여 생계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자유 시장이 활성화되고 상업과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부를 축적한 서민들이 늘어났다. 이들의 약진이 양반 사족의 지위를 위협하는 수준에 달하면서 신분제의 기능과 효력이 약화되기에 이르렀다. 신분제는 와해의 길로 들어섰지만 긴 시간 동안 지속되어 온 권위주의는 온존하고 있었다.
재력과 능력을 갖춘 서민들은 자신의 입지를 자각하고 위상을 높이려는 욕망에서 종전까지 양반 사족들이 독점해 오던 문화생활을 적극적으로 향유했는데, 서화부벽書畫付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방치장용 그림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화가의 숫자 또한 증가하기 시작했다. 한양의 경우 광통교 서화사書畫肆와 같은 그림 시장을 중심으로 수요와 공급의 체계가 성립, 활성화되면서 상층 미술의 생활화가 안정적으로 지속되었다. 이 같은 일련의 사실들은 민화 산수화가 태생적으로 상층 고급문화의 저변화, 보편화라는 문화 발전의 원리와 맞물려있음을 알게 해준다.


도3 소상팔경도 8곡 병풍 중 <산시청람>, 조선 후기, 49.5×31㎝,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소상팔경도

조선 서민들이 생활 속에서 향유한 산수화 계통 그림 중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 소상팔경도다. 내용이 각기 다른 여덟 폭의 그림이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는 점, 부를 축적한 서민층이 증가하여 병풍 소비가 늘어난 점이 큰 몫을 했다.
소상팔경도는 중국 후난성 소수와 상수가 만나는 지역의 여덟 경치, 즉 평사낙안平沙落雁·원포귀범遠浦歸帆·산시청람山市晴嵐·강천모설江天暮雪·동정추월洞庭秋月·소상야우瀟湘夜雨·연사만종煙寺晚鍾·어촌석조漁村夕照를 내용하는 그림이다. 중국 북송의 문인화가 송적宋迪이 처음으로 그렸다는 8폭 그림이 소상팔경도의 전형典型이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전해진 후 조선 말기까지 유행했다.
애초에 소상팔경도는 사장詞章을 필수적 교양으로 생각했던 문인 사족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들은 소상팔경 시 읊는 것을 고상한 취미로 여겼으며, 시의詩意를 형상화한 그림을 눈앞에 두고 와유臥遊를 즐기기도 했다. 소상팔경은 실제로 볼 수 있고, 체험 가능한 경관이라는 측면에서 실경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옛 문인들의 관점에서 본 소상팔경도는 실경이 아니라 ‘흉중구학胸中丘壑’이 시각화된 모습이었고 시화일체詩畫一體의 세계였다.
시화일체사상은 시인이 시를 쓰기 전의 정서와 화가가 먹물에 붓을 담그기 전의 정서가 같다는 데서 출발한 사상이다. <도화원기>로 유명한 동진 출신 도연명(365〜427)은 그의 <음주飮酒> 시에서 자연경관을 이렇게 읊었다. “산 기운은 석양이 되니 아름답고, 나는 새는 서로 더불어 돌아온다. 이 중에 참뜻 있으니, 말하려 해도 이미 할 말을 잊었다[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여기서 ‘석양’과 ‘나는 새’는 자연의 도와 이치를 상징하는 언어다. 소상팔경도의 산수 역시 경물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대자연의 도를 함축한 상징형으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안목 높은 감상자들은 생략이 많고 표현이 소략해도 소상팔경의 예술미를 대자연 자체와 동일한 것으로 보고, 거기서 대자연의 도를 느껴보는 것이다.


도4 소상팔경도 8곡 병풍 중 <어촌석조>, <한사모종>, 조선 후기, 전체 77×288㎝,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어촌석조도>는 조선 초기 화원畫員 안견의 작품으로 소상팔경 중 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도1). 만물의 생성분화 이전의 근원적 상태를 도道라고 하고, 도의 근원으로서의 산수를 마음속에 그린 것이 심중구학이다. 심중의 산수는 산과 물이 구별 없이 하나가 되어 흐른다. 도는 볼 수도, 만질 수도, 냄새 맡을 수도 없다. 도를 청각적으로 말한다면 적막하다고 할 수밖에 없고, 시각적으로 표현한다면 현玄하고 공空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뛰어난 화가는 산수 경물 묘사를 가능한 한 절제하고 여백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화면에 적막감을 불어넣는 방법을 구사한다. <어촌석조도>는 그 묘처를 보여준다.
안견은 문인이 아니라 도화서의 화원이다. 그런 그가 이처럼 화격 높은 그림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자질도 자질이려니와 그림의 소비자인 당대 문인 사대부들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견은 그들이 소상팔경도에 대해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문인 사대부들에게 있어 소상팔경은 도의 본체이자 일종의 정신세계와 같은 것이지만 민화와 함께 서민 의식과 정서를 공유하는 판소리, 민요, 국문소설 등 조선 후기 대중 예술 속에서는 소상팔경이 흉중구학이나 시화일체의 세계가 아닌 명승의 대표 상징으로, 또는 고사故事의 현장으로 묘사되고 있다. 다음은 <심청가> 중 소상팔경 관련 사설의 한 대목이다.
“소상팔경이 눈앞에 벌여 있거늘 역력히 둘러보니 강천江川이 망막하여 우루룩 쭈루룩 오는 비는 아황娥皇 여영女英의 눈물이요, 반죽斑竹 썩은 가지 점점이 맺혔으니 소상야우 이 아니냐. 칠백 평 호湖 맑은 물은 추월秋月이 돋아오니 상하천광上下天光 푸르렀다. 어옹漁翁은 잠을 자고 자규만 날아들 제 동정추월이 아니냐. 오초동남吳楚東南 너른 물에 오고 가는 상선은 순풍에 돛을 달아 북을 둥둥 울리면서 ‘어기야 어기야이야’ 소리하니 원포귀범이 아니냐. 격안강촌양삼가隔岸江村兩三家에 밥 짓는 연기 나고, 반조입강석벽상返照入江石壁上에 거울 낯을 열었으니 무산낙조巫山落照 아니냐. 일간귀천심벽이요 반태용심이라. 웅장하게 일어나서 한 떼로 둘렀으니 창오모운蒼梧暮雲이 아니며, 수벽사명양안태水碧沙明兩岸苔의 청원을 못 이기어서 일어 오는 저 기러기는 갈대 하나를 입에 물고 점점이 날아들여 낄룩낄룩 소리하니 평사낙안이 아니냐. 상수湘水로 울고 가니 옛 사당이 완연하다. 남순형제南巡兄弟 혼이라도 응당 있으려니 하였더니 제 소리에 눈물지니 황릉이원黃陵二園이 아니냐. 새벽 쇠북 큰 소리에 맑은 쇠소리 ‘뎅뎅’ 섞여 나니, 오는 배 천리 원객遠客의 깊이 든 잠을 놀래어 깨우고, 탁자 앞의 늙은 중은 아미타불 염불하니 한산사 저녁 종소리 아닌가.”


도5 금강산도 10곡 병풍 중 7~10폭, 19세기, 123×594㎝, 리움미술관 소장



<심청가>의 소상팔경 사설은 당시 서민들이 소상팔경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 방법은 민화 소상팔경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시로써 그림에 들어가고 그림으로써 시에 들어가는 시화일체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소상팔경시와 그림은 한 몸이지만 민화 화가들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시의 세계보다 시제詩題 내용을 현실감 있게 형상화하는 데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예컨대 ‘동정추월’은 가을 달밤의 유현幽玄한 분위기를 은유하는 시어지만 민화 화가는 하늘에 뜬 둥근 달과 선유객들이 수면에 비친 달을 구경하는 장면을 그렸고, ‘산시청람’에서는 나뭇단을 멘 초부, 등짐 진 짐꾼 등이 술 파는 주막을 향해 모여드는 장면을 그렸다(도2), (도3). ‘연사만종(연사모종)’에서는 승려가 타종하는 모습을 그리는 것을 잊지 않았고, ‘소상야우’에서는 장대비가 쏟아지는 장면과 물이 불어난 계류, 우산 쓴 사람 등을 그렸다. 그런가 하면 ‘원포귀범’에서는 사람들이 포구로 돌아오는 배를 가리키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묘사했다. 민화 화가들은 이처럼 소상팔경을 보이지 않는 도道의 상象으로서가 아니라 특정 상황이나 이야기가 전개되는 무대로 번안해 그린 것이다.
민화 소상팔경도 12곡 병풍(국립민속박물관 소장)처럼 기존의 팔경에 사시四時의 농촌 일, 즉 ‘춘월낙종春月落種’ ‘하월이종夏月移種’ ‘추월예수秋月刈穗’ ‘동월적곡冬月積穀’을 덧붙여 12경으로 확대 편성해 놓은 것도 있다. 12폭 병풍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지만, 소상팔경을 현실적 경관으로 인식했던 서민 대중들의 취향과 정서를 드러낸 작례 중 하나다.
‘한사모종寒寺暮鐘’, 또는 ‘한산모종寒山暮鐘’이라는 화제가 붙은 병풍 그림도 있다(도4). 원제 ‘연사모종煙寺暮鐘’은 ‘안개에 묻힌 절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라는 뜻으로 인위와 자연의 구별이 없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은유하는 시어詩語다. 그러나 위의 <심청가> 한 대목에서 본 것처럼 민화 화가에게는 저녁 종소리가 들려오는 곳이 ‘한산사’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한편, ‘강천모설江天暮雪’, ‘어촌낙조漁村落照’를 ‘강천조설江天釣雪’, 혹은 ‘어촌낙조漁村落釣’로 고쳐 써놓고 낚시꾼을 그려 넣은 것도 있는데, 번안의 수준과 정도가 심해 화의가 손상된 경우에 속한다.

금강산도

소상팔경도와 더불어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그림이 금강산도이다. 금상산도는 고려시대부터 그려지기 시작했고, 조선 후기에 와서 당시 만연했던 승경낙도勝景樂道 풍조와 맞물려 크게 유행했다. 금강산도는 실경산수화의 일종으로 눈과 마음에 기억해 둘만 한 경치를 기록해 두려는 목적에서 그려졌다. 현장에서 느낀 감격과 흥취를 표현하는 데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으나 경관 기억 장치로서는 의미와 가치가 있었다.
금강산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알려진 것이 정선(1676~1759)의 <금강전도>(국보 제217호)이고, 그 뒤를 잇는 것이 김홍도(1745∼?)와 김응환(1742∼1789)의 <금강산도>이다. 모두 실제로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본 명승과 산수 경관을 그린 것이다. 화폭에 자신과 함께 유람한 동료들을 그려 넣어 승경낙도 분위기를 고조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경향京鄕을 막론하고 당시 금강산을 유람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고관대작들이었다. 그들의 후원을 받거나 공무로 간 벼슬아치나 화원들이 몇몇 있었지만 극소수였다. 드물게는 벼슬살이의 부질 없음을 깨닫고 먼 길을 떠나는 심정으로 금강산을 찾은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남긴 금강산 유람기를 보면 ‘기막힌 경치는 첫손에 꼽힌다’거나 ‘기승절경奇勝絶景’이라거나, ‘천하에 이름난 명승’이라거나 하는 등의 감탄사를 남발하고 있는데, 이것을 보면 금강산 유람이 가능했던 계층 사람들의 금강산에 대한 관심은 주로 아름다운 경치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에는 한양의 동소문을 출발하며 금강산 장안사에 도착하는 데 9일 걸렸다고 한다. 금강산 유람 시간과 돌아오는 시간을 감안할 때 드는 시간과 경비가 막대했을 것이다. 현실 상황이 그러했으니 서민 화가의 입장에서 직접 금강산을 유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민화 화가들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금강산을 잘도 그려냈다. 생활 속에서 영산靈山인 금강산을 가까이 느껴보려는 서민들의 요구가 이를 가능케 한 것이다.
서민 대중들이 금강산을 영산으로 인식하게 된 데에는 도교 신선설과 불교 불국토관佛國土觀의 영향이 컸다. 신선설에 의하면 봉래·방장·영주 삼신산이 발해 중에 있으며, 여러 신선들과 불사약이 모두 그곳에 있고, 온갖 새와 짐승들이 다 희며, 궁궐은 황금과 은으로 지어져 있다고 한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이라는 말은 금강산을 법기보살의 주처住處로 믿은 신라시대의 불국토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문수보살이 오대산을 주처住處로 삼는 것처럼, 법기보살은 금강산을 주처로 삼는다는 것이다. 조선의 서민들은 지금도 법기보살이 금강산에서 일만 이천 인의 권속을 거느리고 설법하고 있다고 믿었다. 서민 대중들의 관념 속에서 금강산은 이처럼 신선경으로, 불국토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도6 금강산도 8곡 병풍 중 <구룡담>, 조선 후기, 125.5×355㎝,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리움미술관 소장 <금강산도>를 예로 들어 민화 금강산도의 세계를 살펴보자(도5). 10곡 병풍으로 꾸며져 있는데, 현존 민화 금강산도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화면 아래쪽에 토산을, 위쪽에 암산을 배치한 구도인데 정선 금강전도의 영향이 감지되는 부분이다. 미륵봉과 비로봉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수많은 봉우리와 기암괴석 사이로 폭포, 절, 계곡이 보인다. 산봉우리마다 절마다 이름이 붙어 있지만 실제와 일치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금강산의 절과 봉우리에 대해 화가가 알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민화 금강산도 중에는 군집을 이룬 괴석과 같은 산봉우리, 군학이 서성이고 신귀神龜가 노는 장면을 그려 놓아 신선경을 방불케 하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폭포가 산꼭대기 가까운 곳에서 흘러내리는 등 현실을 무시한 상상 속의 금강산 모습을 그린 작품도 많다. 이런 여러 가지 작례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민화 금강산도는 현실과 환상 세계를 넘나드는 또 다른 차원의 관념 산수화로서 서민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민화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 자기 자신의 개성과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다. 다만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그릴 뿐이다. 그러므로 민화 금강산도에 전개된 다양한 금강산 모습은 주된 소비자인 서민들이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고, 상상하고 있던 금강산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금강산은 현실에 실존하는 산이지만 민화 금강산도를 실경산수화가 아니라 관념 산수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 후기에 시작된 민화 유행의 배후에는 경제 발전과 신분제의 와해라는 사회 경제적 환경 변화와 행복 추구라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맞물려 있었다. 민화 산수화 역시 그러한 추세 속에서 수요와 공급이 이루어졌고, 상층의 고급 미술 문화의 저변화, 보편화를 촉진시켰다. 민화 산수화가 대부분 고원산수高遠山水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주로 병풍용으로 그려졌기 때문인데, 이것은 차폐 혹은 장식용으로 병풍을 사용해 온 주생활 방식과도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민화 소상팔경도와 금강산도는 당초 지배층이 향유한 그림을 모본으로 삼았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서민적 관점에서 원본을 재해석하거나 번안을 통해 자기화한 점은 상층 고급문화의 저변화, 보편화와 관련하여 큰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린 문제가 아니라, 좁게는 수요자와 민화 화가의 취향과 정서와 관련된 문제이며, 넓게는 서민 계층의 집단 정서와 의식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허균 –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책임편수원이자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이다.
한국민화학회 고문이며,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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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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