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별 민화 특강 ③ 청나라 왕공 귀족이 사냥하는 그림, 호렵도

도2 <호렵도> 12폭 병풍, 19세기 말, 견본채색, 각 115.8×35.3㎝, USC 아시아태평양박물관 소장



호렵도는 대부분 병풍 형식으로 제작되었고 구성은 정형화되어 있다. 사냥을 주제로 전개되는 그림이지만 세부 소재를 살펴보면 인물, 영모, 산수 등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다른 화제의 그림과는 달리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이 철저히 청나라 복식을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호렵도의 원류인 청나라 사냥 그림과 관계가 있다.

글 이상국 (가회민화아카데미 원장)


왕공 귀족으로 보이는 무리가 말을 타고 천천히 이동하며 사냥꾼들의 사냥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사냥꾼들은 기마騎馬 자세에서 활을 쏘아 사냥감을 쓰러뜨릴 뿐만 아니라 칼과 창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산천을 나는 듯 내달리는 현란한 기마술을 자랑한다. 마상재馬上才 수준의 여러 가지 동작을 보여주는 사냥꾼들은 기마술뿐만 아니라 복장도 화려하다. 두발은 변발辮髮을 하고 있어 이들이 북방민족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만주족이 사냥하는 장면을 실감 나게 묘사한 그림을 ‘호렵도’라고 한다(도1).
호렵도라는 용어를 사전적으로 풀이하면 ‘오랑캐가 사냥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지만 그림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그림의 주인공은 화려한 복장을 한 왕공 귀족과 화려한 기마술을 자랑하는 기마병들이 참여한 사냥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서북 변방에서 출몰하여 주로 함경도 일대를 약탈하던 여진족을 오랑캐[胡]라 하였는데, 이는 여진족이 16세기 누루하치에 의해 민족을 통일하고 중국을 통치하게 된 청나라를 일컫는 용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호렵도는 ‘청나라의 왕공 귀족이 사냥하는 그림’인 것이므로 청나라의 사냥 그림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민화 연구 초기에는 호렵도胡獵圖라는 그림을 대개 몽고족의 사냥 그림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심지어 ‘오랑캐 이름 호’자 대신 ‘범 호’자를 사용해 ‘호렵도虎獵圖’라는 용어를 써 ‘호랑이를 사냥하는 그림’으로 이해되기도 했으며, 지금까지도 그렇게 사용하는 경우를 종종 보기도 한다.


도1 <호렵도> 8폭 병풍, 20세기 초, 지본채색, 각 114×46.3㎝, 개인소장


호렵도와 청나라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호렵도를 처음 그린 작가는 18세기 단원 김홍도라는 기록이 있다. 18세기는 영·정조 시대에 해당하는데, 이때는 우리나라 문화사나 미술사에서 특기할 만한 새로운 경향이 드러났던 시기이자 가장 한국적이고 민족적이라 할 수 있는 화풍들이 풍미하던 때였다. 18세기가 조선의 문화사에 있어 가장 한국적인 그림들이 유행한 시기임에도 청나라의 왕공 귀족 일행이 사냥하는 그림 호렵도가 그려지고 유행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마도 병자호란 이후 악화되었던 대청관對淸觀은 청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통해 완화되면서 조선의 군사정책으로 기마전술을 채택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호렵도에 묘사된 기사수렵騎射狩獵(말을 타고 활로 사냥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나라의 역사와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16세기 말,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일하고 1616년 후금을 세웠다. 누르하치(제1대 황제)의 대를 이어 등극한 홍타이지(제2대 황제)는 1635년에 통합된 민족의 명칭을 여진에서 만주로 변경한다고 공식 선포했다. 민족의 명칭을 만주로 명명하고 대청국을 선포한 청나라가 한족을 누르고 명나라 제압에 성공한 비결은 대청국이 여진 당시의 전투력과 상무정신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 초기 황제들의 한결같은 바람은 여진족의 전투력과 상무정신을 숭상하고 계승하여 만대를 누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진인의 강력한 전투력은 실전과 같은 사냥을 통해서 만들어졌다. 여진인에게 사냥은 군사훈련과 생업의 한 방식이고 만주족의 군사조직인 팔기제도의 기본이었다. 여진인의 수렵활동은 대청국 건립 이후에는 팔기제도에 따라 더욱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확대되어 국가 단위의 훈련으로 변모했다. 누르하치에 이은 홍타이지, 순치제(제3대 황제)는 1644년 입관(심양에서 산해관을 통해 중국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사냥을 통한 훈련방식으로 팔기병사들을 엄격히 통제, 질서를 유지하면서 만주족의 전투력을 보존하고 상무정신을 고양시켜 무비武備를 갖추었던 것이다.
호렵도는 청나라의 팔기제도와 관련이 있는데 팔기제도는 청나라의 군사·행정 제도이면서 전투조직이다. 팔기제도는 만주족의 부족제에서 유래된 것으로 누르하치에 의해 1642년에 확립되었다.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군사·행정 조직을 팔기제도로 만들었던 것이다. 팔기의 각 구분된 기旗는 누르하치가 직접 관할하거나 아들들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누르하치가 직접 통치한 정황기正黃旗는 이후에도 황제들이 직접 통치하였기 때문에 가장 상위의 부대였다. 누르하치에 의해 확립된 팔기제도로 더욱 강력한 전투력과 상무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순치제順治帝(재위 1643-1661)의 입관入關 전까지는 사냥을 통한 군사훈련 방식으로 팔기병을 실전과 같이 훈련 시켰다.
청나라는 여진 당시부터 기사수렵을 통해서 강력한 전투력과 상무정신을 고양시켜 무비武備를 갖추고 있었지만 입관 후 강희제에 이르면서 중국 본토에 배치된 팔기병사들의 전투력과 상무정신이 쇠퇴하자 강희제는 대청국을 세울 당시의 상무정신과 전투력을 함양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는 팔기병들의 잃어가는 만주정신을 고양시키는 방법으로 사냥을 통한 실전적인 군사훈련을 위해 곳곳에 군사훈련장인 사냥터를 건립하였다. 대표적인 사냥터가 1681년에 만든 목란위장木蘭圍場이었다. 강희제는 목란위장을 만든 후 가을 수렵을 정례화시켰고 손자인 건륭황제는 이를 크게 발전시켰다. 건륭제는 기사수렵과 상무정신으로 표현되는 청나라의 민족정신을 함양하여 중국을 자손만대로 통치하고자 하였다. 그 일환으로 건륭제는 자신이 영원한 만주족의 무사로 인정받기를 원하며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각종 사냥 그림을 그렸다. 그 대표적인 황실 사냥 그림이 <목란도>인데 이 그림에는 건륭황제가 북경의 자금성을 떠나 목란위장에서 사냥하는 장면이 세밀하게 기록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그림은 파리 기메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강희제의 목란위장 수렵은 손자인 건륭제가 이어받아 목란위장에서 가을 수렵[木蘭秋獮]을 정례화시켜 팔기군의 군사훈련을 통한 만주의식을 함양했다. 만주의식은 ‘만주간박지도滿洲簡樸之道’가 주된 것이었다. 만주간박지도는 만주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아영 생활을 하며 기사수렵을 하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국 정복 이전에 검소하게 살던 만주족 본연의 삶을 일컫는다.
강희제와 건륭제는 각각 이들의 만주의식을 표상하는 그림들을 남겼다. 이 그림들에는 만주족의 무사로서 영원히 만주의식을 갖고 청나라를 자손만대에 물려주고자 노력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호렵도와 청나라 수렵도

호렵도는 청나라의 사냥 그림에서 영향을 받아 그린 것이다. 청나라의 사냥 그림이 조선에 전해진 과정은 부연사행赴燕使行(조선시대에 사신을 베이징에 보내던 것)을 통한 회화교류의 결과물이다. 당시 사행은 정치적 목적이 주를 이루었지만 부수적으로 경제적, 문화적 목적도 있었으므로 중국과의 회화교류도 당연히 사행을 통해 이루어졌다.
사행에는 화원이 참여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 화원 중 김윤겸, 김후신, 강희언, 김홍도, 이인문 등은 조선 후기에 사행단 일행으로 참여해 청나라의 풍속이나 사냥에 관한 그림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김홍도는 1789년 6월 동지정사의 사행단 일행으로 다녀온 것이 《승정원일기》에 기록돼 있고, 그 후 호렵도를 가장 먼저 그렸다는 기록이 《송남잡지》에 있다. 18세기 이후에서 19세기 초의 작품으로 알려진 대부분의 호렵도 작품에 김홍도의 화풍이 남겨진 것으로 보아 화원으로 참여한 김홍도가 최초로 호렵도를 그린 것이 분명하며 그가 그린 청나라의 사냥 그림을 조선에서는 호렵도라고 불렀던 것이다.
청나라의 사냥그림을 대표하는 <목란도>의 주요 장면들과 청나라 수렵도들을 조합해서 만들어낸 18세기의 ‘조선식 호렵도’는 영·정조 당시의 군사정책이 보병전술에서 기병전술로 바뀌는 과정에서 시각적으로 필요한 자료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무예교본 《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마상무예 장면과 청나라 수렵도와 호렵도에 등장하는 장면들이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표1).
중국의 건륭제에 비견되는 조선의 정조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임금으로서 중국과의 회화교섭에서 문치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책거리>를 도입하였고, 무武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대표되는 청나라의 사냥 그림인 <목란도>를 수용하여 호렵도를 그리게 하였다. 정조는 김홍도로 하여금 <호렵도>를 그리게 하여 자신이 조선의 융정戎政(군사정책)을 기마전술로 전환하는 용도에 활용하였다고 생각된다.
조선에서 18세기 이후 그려지고 유행한 호렵도를 보면, 정조가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수렵도에 담긴 민족정신 ‘만주간박지도滿洲簡樸之道’가 의미하는 무비정신을 조선의 군사정책에 활용하려 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호렵도는 정조 이후 군사적 용도가 없어지자 다양한 길상의 표현이 그림의 소재로 등장하면서 본연의 용도에서 벗어나 길상화로 변화했고 다양하고 화려한 채색을 덧붙임으로 일반 장식화로 변화했다.
호렵도의 구성과 표현 소재를 청나라 수렵도와 비교해 보며 호렵도에 표현된 소재들이 청나라 수렵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청나라와 회화 교섭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청대 수렵도의 대표작인 <목란도>는 건륭황제 시대에 그려진 작품으로 그 길이가 60m나 되는 긴 두루마리 그림으로 프랑스 파리의 기메박물관에 소장돼 있는데, <목란도>는 청대의 통치 이미지를 시각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여진족인 청황실이 기사수렵騎射狩獵을 통해서 황실의 통치이념을 실현하고자 한 의미 있는 그림으로 주목된다. <목란도>를 통해 청대의 정치, 군사, 사회, 문화의 여러 부분을 읽어낼 수 있는데, 이처럼 청대에는 사냥, 특히 기사수렵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청대의 기사수렵을 포함한 ‘만주의식’은 건륭황제와 동시대의 왕인 조선의 영·정조의 통치이념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 자명하다.



표1 《무예도보통지》와 울산박물관소장 <호렵도>의 마상무예 비교

민화 호렵도

조선시대의 회화는 대개 상류층에서 향유하던 문화이다. 상류층의 문화가 조선 후기에 오랜 평화 시기가 지속되고 중산층 이하의 백성들이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게 되면서 윗사람이 좋아하는 문화를 아랫사람이 따라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회화에서 ‘상행하효上行下效의 붐’이 된 것이다. ‘상행하효의 붐’이 일어나면서 조선 회화에서 민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호렵도를 비롯한 민화들은 기층 민중들의 독자적인 그림이라기보다는 궁궐이나 관청 주변의 최고 상류층 그림이거나 그것이 저변화되어 토착화된 그림이 적지 않다. 이것은 아마도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미술사의 원리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호렵도 역시 일반적인 미술사의 원리가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민화 <호렵도>는 19세기 후기 이후 조선 사회 전반에 민화가 유행했던 시기에 그려진 그림 중 민화풍으로 그려진 호렵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최근에 알려진 민화 호렵도 중 민화의 요소와 청나라의 목란위장에서의 수렵에 대한 서사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도2). 작품의 설명을 통해서 민화 호렵도를 잘 이해하고자 한다.
이 작품은 19세기 말의 양식이 다분한 채색이나 복장을 하고 있지만, 당시 작품으로 상당한 필력과 호렵도의 서사를 잘 표현하고자 하였고, 다양한 소재들로 화면을 구성하였다. 그림은 상당히 깊이감이 있으며 자연물과 동물의 배율이 적당히 유지되고 있으며 조형적으로 상당히 조화롭게 화면을 구성했다.
이 작품의 구성을 살펴보면 호렵도의 다양한 세계를 알 수 있다. 작품의 1-3폭에 궁궐의 모습을 그려놓았는데, 이는 호렵도가 청나라의 수렵도 중 목란위장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화가가 그린 것으로 보인다. 화면에 묘사된 궁궐은 청나라 강희제가 만든 피서산장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3폭의 궁궐은 청나라의 황제가 목란위장에 사냥을 나가기 위해 만든 청나라 황제의 행궁인 피서산장인 것이다. 1-3폭에는 팔기병들이 피서산장을 떠나 애구崖口를 지나 사냥터로 향하는 서사를 표현한 것이다. 특히 5폭은 황제가 시위들을 거느리고 석교石橋 위에서 사냥을 통한 군사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팔기병들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다. 이는 중국 황제가 목란위장에서 사냥을 통한 군사훈련을 하는 병사들을 사열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화면의 사면에 있는 말을 타지 않은 병사들은 포위사냥을 위한 몰이꾼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기마병들은 몰이사냥을 하면서 짐승을 사냥하고 있다. 이색적인 장면은 10폭 하단에 있는 원숭이 3마리인데, 이들이 사냥꾼에 쫓기는 사냥물이라기에는 너무나 여유가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히려 사냥꾼에 가까워 보인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원숭이를 길들여 전쟁에 참여하게 하는 원병猿兵의 제도가 있었는데, 일례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숭이 부대가 참여한 기록이 있다.
호렵도가 <목란도>로 대표되는 청나라 황실의 사냥 그림을 정조임금이 자신의 융정에 활용하기 위해서 도입한 것은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조선 왕실에서 청나라의 사냥 그림을 도입했지만 김홍도를 비롯한 조선의 화원들은 조선화된 양식으로 왕실의 사냥 그림을 그리고 이를 호렵도라고 하였다. 호렵도는 대부분 병풍 형식으로 제작되었고 구성은 정형화되어 있다. 사냥을 주제로 전개되는 그림이지만 세부 소재를 살펴보면 인물, 영모, 산수 등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다른 화제의 그림과는 달리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이 철저히 청나라 복식을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호렵도의 원류인 청나라 사냥 그림과 관계가 있다.

[참고문헌]
이상국, 2020, 《삶의 환희를 담은 그림 호렵도》, 다할미디어
강관식, 2000, <규장각자비대령화원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 논문
임계순, 2007, 《청사-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신서원
정은주, 2007, <명청사행관련 회화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 논문
허영환, 1999, <목란도 연구>, 《동양미의 탐구》, 학고재
오주석, 1998, 《단원 김홍도》, 열화당


이상국 – 가회민화아카데미 원장

경주대학교에서 조선후기의 호렵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단행본 《호렵도》의 저자이다.
(사)한국민화센터 사무총장 및 제4대 이사장직을 거쳐
현재 가회민화아카데미의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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