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정 서민자, “오늘의 민화, 시대의 얼굴”

호정 서민자
호정 서민자

동이 틀 무렵이면 밝아오는 세상이 궁금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난다는 호정 서민자. 그녀의 관심은 오늘을 살아가는 동시대의 인물들에게 있다. 전통적인 민화의 재현이라는 방법으로 가장 가까운 시대 오늘을 담아내는 서 작가는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작업, 그 가운데 특히 인물화에 매진해왔다. 그녀가 포착한 시대의 혼과 얼을 담은 사람 이야기.

소녀를 화가로 만든 은인들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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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자 작가와의 인터뷰는 4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시작했다. 훗날 운명처럼 조우한 민화는 몰랐지만, 인생의 중요한 일이라고는 그림밖에 모르던 소녀시절의 이야기다. 그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세 명의 소중한 인연이 지금을 있게 한 장본인이라고.
지금도 서 작가가 잘되는 일에 누구보다도 기뻐하신다는 은사님을 첫 번째 은인으로 소개했다.
“중학생 때 방학숙제로 그림을 그려갔는데, 선생님이 ‘이거 누가 그려줬니’ 하시더라고요. ‘제가 그린 거예요. 친구들도 제가 그린 걸 다 봤어요’라고 말씀드렸죠. 그 뒤로 선생님께서 저를 눈여겨보시고는 미술을 계속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셨어요. 한날은 집으로 찾아오셔서 저를 예술고등학교에 보내라고 하셨는데, 그때 아버지께서는 형제들도 있으니까 간호사를 시켜서 제 앞가림하게 해야 한다고 답하셨던 게 기억나요.”
그림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지만, 선생님은 길을 찾아주었다. 입시미술을 지도하던 인근 고등학교의 미술 선생님께 어린 서 작가를 소개하고 수업료 일체를 지원한 것. 그때 배웠던 소묘와 데생, 스케치, 수채화와 유화 등 기초적인 소양이 오늘날 작품세계의 기반을 만들었다.
두 번째 은인은 서예를 즐기셨고 시의원을 지내신 선비 같은 시아버지. 8남매의 장남을 남편으로 맞은 덕에 종갓집 맏며느리로 남다른 규모의 살림을 살아야 했던 그녀에게 꾸준히 그림을 그리라고 격려해주셨다. 아버님께 물려받은 벼루와 문진, 먹 등이 그녀의 화실 한구석을 지키고 있다.
마지막 은인은 가장 가까운 지음이기도 한 서 작가의 남편이다.
“남편에게 ‘전생에 무슨 빚을 지셨기에 이렇게 저에게 잘해주시나요?’라고 한답니다. 종갓집 맏며느리다 보니 챙겨야 할 게 많아서 집안일을 계획적으로 해도 그림 작업이 늦어질 때가 많아요. 그럴 때면 남편이 여러모로 챙겨주는데, 정말 고맙고 든든하죠. 더 열심히 작업에 집중하게 돼요.”
이런 남편의 든든한 지원은 아는 사람은 다 알 정도로 유명하다. 1년에도 수차례 크고 작은 전시에 참여하는 호정의 작품 운반을 남편이 도맡아 줄뿐 아니라, 서 작가가 마음 편히 작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배려해준다.

조상들의 색감 살린 미래의 모본 만들어

은인들의 지지로 ‘화가’라는 꿈을 이뤄가는 서민자 작가는 여러 장르의 회화를 두루 섭렵하고 민화에 천작하게 되었다. 고인이 된 안종혁 작가를 통해 민화를 처음 접했으며, 이후 박수학 작가를 사사했다. 초창기에는 민화에 수채화나 수묵화를 접목한 듯한 그림이 나왔으나, 곧 전통민화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되었고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간색보다는 조선시대 조상들이 그렸던 밝고 고운 오방색을 구현하겠다는 일념으로 민화 재현 작업에 몰두해왔다. 서 작가가 추구하는 전통색은 세월의 때가 묻지 않은 그려질 당시의 맑고 선명한 색감으로, 전통색 재현을 통해 ‘길상’이라는 민화의 본질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다. 색과 그림의 전문성을 갖추기 위한 일례로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시행하는 컬러리스트산업기사 자격증과 동국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예전에 같이 그림 그렸던 친구들이 민화라는 장르에 의문을 표할 때마다 보란 듯이 잘 그려내고 싶었어요. 지금은 우리 세대가 그린 민화가 미래의 범본範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려요. 돌이켜보면 민화를 계속하게 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조상들의 혼과 소우주를 그려내기까지 마음이 너무 바빠 더 이상 세월을 보낼 수도, 늙을 수도 없다는 호정이다.

독도
장자의 빈 배 2
 
전통민화 옷 입은 오늘의 자화상

호정 서민자전통민화의 재현이라는 원칙은 고수하지만, 창작에 있어서만큼은 서 작가만의 특징을 알아챌 수 있는 부분들이 뚜렷하여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세부묘사를 더욱 치밀하게 하고 시든 잎을 그리는 것, 서정적이고 독창적인 창작세계가 그렇다.
“남과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은 건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기술적인 면으로는 색을 더욱 세분화해서 나누어 올리고, 개념적으로도 나름대로 그림에 차별화되는 요소를 넣으려고 합니다. 그게 ‘시간’ 또는 ‘시대’라는 개념인 것 같아요. 화조도에는 병들고 시들거나 벌레 먹은 잎을 꼭 그려 넣어요.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과 균형미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변화하는 자연의 순간을 담을 수 있잖아요.”
서 작가의 시든 잎은 16~17세기에 걸쳐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에서 그려진 정물화의 대표적인 성격인 바니타스Vanitas와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하면서도 다르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공통의 교훈에 그치지 않고 결국 삶은 끝이 아니라 다시금 반복된다는 희망의 메시지까지 더했기 때문.
서 작가는 그간 <옛이야기> <장자의 빈 배> 등 다채로운 창작세계를 펼쳐왔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시대의 요구와 가장 이슈화된 그림을 그리겠다는 것인데, 특히 독도를 수호하자는 마음으로 그려낸 <독도> <문무왕과 독도> <독도 아리랑> 등의 작품은 큰 호응을 얻었다. 서 작가의 창작 화풍은 서정적이고 몽환적인 색조와 요소들이 가득한 한편 서사적인 구조도 있다.
최근 그녀가 몰두하고 있는 작업은 배채법을 사용한 전통초상화, 그중에서도 의궤 등 기록화에 등장하는 작은 인물들을 화면으로 불러내는 작업이다. 철저한 고증과 완벽한 기교를 갖춰 육리문肉理文을 너머 인물의 내면까지 담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다부진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왕이면 가장 어려운 것, 가장 한국적인 것을 하자는 생각이었어요. 예를 들어 의궤의 연회장면에는 무용수들이 나오잖아요. 복식과 인물의 동작은 철저히 고증하되, 인물에는 현대인들의 얼굴을 넣고 싶어요. <조선통신사행렬도> 속 인물이 각자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이야기도 복원하고 싶고요. 공부할 것이 너무나 많지만, 인물의 이야기가 더해질 때 더욱 가치 있는 복원이 되지 않을까요?”
서 작가는 욕심이 많다. 전통 초상화를 배우기 위해 영정과 초상화 분야의 대가인 권오창 작가를 20년간 찾아가 지도를 청한 일화를 보면 욕심에 끈기까지 더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범인이라면 균형을 이루지 못할 양 극단의 것을 조화롭게 실행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가정에 충실하지 않으면 그림에 집중할 수 없다’며, 일과 가정의 균형을 꾀하는 일이나, 전통을 충실히 하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을 선보이는 것, 개인작업과 더불어 민화를 알리는 교육과 일련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신과 단둘이 고독한 싸움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고독하고 외로운 싸움을 할 수 있게 가족과 제자 등 여러분이 응원해주셨죠. 그분들께 보답하는 길이 좋은 작품을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죠.”
가장 민화적인 방법으로 오늘날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내는 서 작가의 작품세계 역시 변함이 없을 것이다.

 

글 : 윤나래 기자
사진 : 박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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