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민화의 출발점 이룬 열정의 노대가 ‘파인 송규태’

파인 송규태
파인 송규태

오늘날의 한국 민화 화단에서 파인 송규태 선생을 소개한다는 것은 참으로 새삼스러운 일이다.
실상 ‘현대 민화’라든가 ‘민화 작가’라는 말 자체가 그의 존재로 인해 비롯되었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한국 민화계의 큰 어른이자 스승’이라는 표현이 전혀 과찬이 아닌 유일한 대가이기도 하다. 어느새 팔순을 넘긴 노대가의 음성은 여전히 힘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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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고 완벽한 필력, 독보적인 민화 세계

송규태 화백이 한창 국보급 서화의 보수와 재현 분야에서 독보적인 명성을 쌓아갈 때만 해도 요즘엔 흔히 쓰이는 ‘현대 민화’라는 말은 개념조차 없다시피 했다. 민화의 기법으로 옛 그림을 새롭게 재현하고 거기에 작가의 개성까지 담아내는 ‘민화 작가’의 존재는 더더욱 희미했다. 족히 수만을 헤아리고도 남을 민화 인구가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 민화 화단은 그런 허약한 풍토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민화계가 이렇듯 짧은 기간에 눈부신 발전을 이루기까지는 수많은 선구자의 열정과 노력이 있었겠지만, 그중에서도 이론의 여지 없이 가장 앞자리에서 논의되어야 할 인물이 바로 송규태 화백이다. 그의 존재야말로 현대 한국 민화 화단의 출발점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규태 화백의 화업이 애초부터 민화를 지향하며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평을 들어왔지만, 시대가 험난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군에 입대하면서 대학과 같은 전문교육기관에서 정식으로 미술을 전공할 형편이 못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미술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지 그림에 대한 열망은 감출 수가 없었다. 삼양동 판자촌에 살며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던 당시 같은 동네에 살았던 운정 정완섭 화백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림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 운정은 이당 김은호 화백의 제자로, 수묵 산수화와 채색화에 두루 능한 중견 한국화가였다.
일찌감치 화려하고 섬세한 필력을 갖추게 된 송규태 화백은 1950년대 후반부터 고서화 보수 작업으로 명성을 드날리게 된다. 그러던 중, 민화의 선각자 대갈 조자용 선생이 민화를 중심으로 한 에밀레박물관을 개관하면서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민화의 보수와 수리를 그에게 맡겼다. 송 화백이 우리 민화와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안료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섬세하고 화려한 그의 필력은 옛 고서화의 모사에서 특히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이후 1970년대에 이르면 환자가 명의를 찾듯 파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그림들이 줄지어 그를 찾아들어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이나 호암미술관, 리움미술관 등 국내 유명 국공립·사립 미술관의 그림 치고 그의 손길을 거쳐 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이제까지 그가 수리한 고서화가 무려 1만여 점에 이른다는 말도 있다.
그가 이 분야에서 얼마나 뛰어난지 알려주는 전설 같은 일화는 무수히 많다. 그가 보수 작업한 그림에서는 어느 부분이 원래의 것이고 어느 부분이 보수된 부분인지를 분간하기조차 어렵다고 한다. 채색이 얼마나 완벽한지 길게는 수백 년 전에 그려진 원래 그림의 색채와 전혀 따로 놀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다.

 
4세기부터 21세기까지 넘나들며

실로 그의 탁월한 솜씨로 인해 수많은 우리 문화재들이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다. 멀리는 고구려의 무용총, 능산리, 순흥리, 안악3호 등의 고분벽화가 고유의 색감으로 되살아났고 가깝게는 조선 후기의 화려한 궁중장식화들이 제 위치를 다시 찾았던 것이다.
그는 이렇듯 탁월한 솜씨로 많은 궁중장식화와 민화를 재현해 내기도 했다. 사실 그의 그림은 민중의 그림인 민화라고 부르기엔 격조와 품격이 매우 높다. 민화와 궁궐그림을 구분해 논하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그의 그림은 일급 화원이 그린 궁궐 그림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그가 그린 조선 궁중장식화 가운데 여럿은 청와대에서 소장 중이다. 청와대에서 내부를 장식할 그림을 그릴 화가를 수소문할 당시, 궁궐 그림을 염두에 두고 마땅한 작가를 찾았다. 그런데 어디를 가서 묻든 한결같이 ‘송규태’를 추천했다.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고 해도 열의 한둘 정도는 뜨뜻미지근한 평을 하게 마련인데, 송 화백만은 예외였다. 열이면 열, 모두가 칭찬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작품 구매를 맡았던 담당자가 직접 나한테 그런 말을 했어요. 인사동에서든 박물관에서든 미술관에서든 한결같이 나를 추천하며 칭찬하더라고. 그러면서 인심 얻으려고 무슨 로비를 했느냐고 물어오는 거야? 로비는 무슨 로비. 나도 그 원인을 모르겠어, 허허.”
이후 가장 한국적인 그의 그림은 나라 안을 넘어 외국으로까지 퍼져나갔다. 해외 공관은 물론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 등 먼 나라의 왕궁이나 대통령궁 등에도 그의 작품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그의 작품 중에는 진작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정밀하게 재현된 걸작들이 너무 많아 특별히 대표적인 작품을 꼽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가장 의미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의 하나는 ‘서궐도(西闕圖)’를 재현해낸 일일 것이다. 서궐도는 서궐, 즉 경희궁의 전경을 그린 웅장한 그림인데, 채색 없이 먹선으로만 그려진 것이 아쉬움이었다. 송규태 화백은 이 서궐도에 화려한 채색을 입혀 완벽한 궁궐도로 거듭나게 했다. 수많은 궁궐 그림을 보수하고 재현해 온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원로 미술사학자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그림에 대해 “뼈만 있던 것에 살을 붙이고 피를 통하게 하여 새로운 생명체로 거듭나게 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송규태 화백이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도 일급 도화서 화원으로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을 게 틀림없다.

살아있는 민화의 역사, 화단의 큰 스승

송규태 화백이 민화계에 끼친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공로는 후진과 후학의 양성을 통해 오늘날 수적으로 압도적인 민화 화단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작 송 화백은 가르치는 일은 자신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열심이었지, 사실 누굴 가르치거나 지도하는 데는 관심도 없었고, 또 즐거워하지도 않았어요. 아마 정식으로 제자 삼아 가르친 사람은 박수학 화백 정도였을 거야. 다만 박수학 화백을 비롯해 나에게 배운 이들이 후학을 양성하는 데 열심이었기 때문에 내가 후진 양성의 첫걸음을 마련했다고 하기는 해.”
그러던 그가 본격적으로 많은 이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서의 일이다. 당시 홍익대학교 박물관장이었던 남천 송수남 화백의 제안으로 홍익대학교에 강의를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르치는 데 소질이 없어서 좀 하다가 그만두려고 했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어느새 14년째나 계속하고 있는 거야. 게다가 수강생들이 자꾸만 늘어나서 이젠 오전반 오후반에다 저녁반까지 만들었어. 14년 동안 여기서 배운 제자들도 아마 수백 명은 될 것 같아요.”
현재 송 화백은 월요일에는 대학에서, 그리고 금요일에는 자신이 운영하는 ‘파인 민화연구소’에서 후진에게 민화를 지도하고 있다. 그에게 민화를 배운 그 많은 사람들이 또다시 후학들에게 민화를 가르치고 있으니, 그를 정점으로 하는 민화작가의 수는 아마 수천은 족히 헤아릴 것으로 보인다.

송규태 화백은 지난해 팔순을 넘겼다. 그만 하면 좀 늦춰갈 법도 하건만, 그는 여전히 젊은 현역처럼 바쁘다. 그야말로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가만히 두지 않는’ 격이기도 하지만, 몸에 밴 근면함과 부지런함의 탓이 더 크다. 더욱이 말술을 마다치 않는 전설적인 주량을 자랑하면서도 끄떡없는 건강이 뒤를 받치고 있으니 그의 열정적인 화업은 조금도 지칠 기색이 없다.

독특하고 새로운 스타일의 대작 남기고 싶어

민화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민화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민화연구자의 수도 늘어나면서 새삼스레 민화와 민화작가에 대한 정의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즉 사실상 민중의 그림이 아닌 궁궐그림까지 민화의 영역에서 다루어야 할 것인가, 또 민화작가의 본령이 옛 기법의 충실한 계승과 전승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예술적 창의성이 담긴 창작에 있는 것인지, 어떤 식으로든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현대 민화’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시절 그림에 입문, 평생 옛 그림의 재현과 모사에 집중해온 노대가의 입장에선 몹시 곤혹스런 일일 수도 있다. 사실 송 화백뿐만 아니라 많은 전문가들에게도 이 문제는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의외로 명쾌하다.
“민화에서 과연 어디까지를 창작으로 보아야 하는지, 또 그 창작의 의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그런 것들이 더 중요하지요. 옛 기법을 완전히 배우고 소화하는 것도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에요. 그런 것들을 완전히 마스터하고 난 뒤에 어떤 작가적 상상력을 가지고 색다른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작가 개인의 마음이지만, 기초가 부실하면서 창작만을 외치는 풍토에 난 반대해요. 모사라고 해서 판화로 찍듯이 그려내는 게 아니지요. 물론 작업의 목적 자체가 수리나 재현에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만, 개인적인 작품을 그릴 때는 모사 안에서도 새로운 패턴이나 창의적으로 변형된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모두 모사로 국한하며 평가절하해서는 안 돼요. 민화에서는 이것도 창작이라고 봐야 해요.”
요컨대 그는 민화의 본령은 옛 기법의 충실한 계승에 있으며 소위 ‘창의적인 그림’이라 하더라도 철저하게 기본을 익힌 후에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민화의 본령에 대한 노대가의 이러한 견해는 민화와 민화작가의 정의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도 그의 이러한 신념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벌써 나이가 팔순이니 너무 거창한 계획은 욕심이 될 거야. 그래도 계획을 말하라면 아직 그려 본 적이 없는 대작을 하나 완성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어요. 기본적으로는 모사의 틀을 벗어나지 않지만, 그래도 나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기법과 스타일이 가미된 뭔가 새롭고 독특한 그림을 남겨놓고 싶어요.”

 

글 : 윤나래 기자
사진 : 박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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