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필화 장인 정홍주의 붓과 인생

혁필화장인
홀대받는 혁필화에 생명력을 불어넣다

‘민(民)’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개념이 달라진다. 우리 민족 전체를 이르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관(官)’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일반 백성을 이르기도 한다. 민화(民畵) 역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가난한 서민들의 미적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그림을 민화라고 본다면, 그림값 낼 형편이 못 되는 그들에게 진입 장벽이 낮은 그림 중 하나는 ‘혁필화(革筆畵)’였다. 가죽 붓 하나로 세상을 화폭에 담은 청산 정홍주의 혁필화 인생.

장돌뱅이 같은 숙명을 지닌 혁필화가

그림을 그리는 도구는 다양하다. 그중 혁필화는 말 그대로 가죽을 붓 삼아 그린다. 폭이 한 치 정도 되는 가죽 조각을 손에 안료가 묻지 않게 철 조각으로 고정하여 붓으로 사용한다. 가죽 붓에 안료를 묻혀 가죽이 마르기 전에 재빠르게 그려낸다. 혁필화는 주로 마을과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헐값에 서민들에게 그려주었던 그림으로, 전승계보가 명확치 않아 근본 없는 길거리 문화라고 천대 받던 설움이 있는 그림이다.
청산 정홍주 화백이 혁필화를 만난 곳도 길 위였다. 젊은 날 그는 외국 단체 관광객의 사진을 찍는 전문 사진가였다. 그러다 한국민속촌에서 운명처럼 혁필화를 만난 것이다. 훗날 스승으로 모시게 된 홍지성 선생이 휙휙 손을 움직일 때마다 각양각색의 그림이 나타나는 것이 놀라웠다. 당시 일행을 여러 번 놓쳤을 정도로 혁필화에 단번에 빠져들었고, 생업이었던 사진을 뒤로 했다. 이후로 경복궁과 수원 화성, 삼청동 한옥마을, 세계 각국을 오가며 혁필화를 알리는데 전념했다. 강산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국내·외에 70여 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방송과 신문, 잡지 등을 통해 혁필화 대중화에 앞장섰다. 그런 그가 손꼽는 가장 가슴 벅찬 순간은 아이들과 교감을 나눌 때.
“아이들의 이름을 써주는 것만큼 의미 깊은 일도 없을 거예요. 서로 구경하겠다며 한꺼번에 몰릴 때면 끼니는커녕 화장실 갈 틈도 없지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붓을 쫓으며 ‘와아~!’ 하고 연신 탄성을 지를 때면, 그 순간이 정말 짜릿해요. 온종일 힘든 줄도 모르고 한다니까!”

혁필화 장인
혁필화 장인
 
국민의 관심과 애정이 절실한 시점

혁필화는 일본에서 꽃 글씨, 화문자(花文字)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졌다. 나가사키에 네덜란드를 본떠 만든 테마파크 하우스 텐 보스에 무려 6년을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의 혁필화가 일본의 전화카드 디자인에 들어가기도 했다. 서양 사람들도 화문자를 캘리그래피의 일종으로 보고 매우 반긴다. 서예가 중요한 종교예술인 이슬람권의 문자까지 혁필로 시도해보았던 정홍주 씨. 그는 세계에서 환영받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홀대받았던 우리의 민화, 혁필화에 국민의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혁필화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것은 분명해요. 다른 그림보다 기교가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고 서민들의 그림이라고 평가절하당하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이렇게 맥이 끊겨도 되는 가치 없는 그림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의 숨결이 담긴 귀한 문화로 여기고 전승해야 합니다.”
서예보다 캘리그래피가 더욱 친숙한 요즘, 혁필화로 전통 예술의 맥을 이어가는 정홍주 씨. 오늘도 가죽 붓은 그의 바람대로 오색찬란한 꿈을 그려내고 있다.

민중의 염원 담은 혁필화(革筆畵)

혁필화장인장식성이 뛰어나 화려하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장수와 다산, 복과 같은 민중의 염원을 담은 상징들이 고루 들어있는 문자도(文字圖)다. 화가의 손 때 묻은 가죽은 적당히 안료를 머금고 있다가 지면 위에 토해낸다. 반대로 말하자면 일반 붓보다 금방 말라버리는 가죽의 특성을 고려해 정확한 힘의 분배와 빠른 속도감으로 섬세하고 분명하게 이미지를 그려내야 하는 고난도의 작업이 혁필화다.
혁필화는 적(赤), 녹(綠), 청(靑), 황(黃), 흑(黑)의 색조만을 사용해 순식간에 화려한 그림문자를 묘기처럼 그려내어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받는 돈은 막걸리값 정도였으니, 서민들도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민중의 삶과 함께한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글 : 윤나래 기자
사진 : 박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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