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鄕愁를 조각하고 애환哀歡을 찍어내다

오는 11월 가회민화박물관에서 한진해 선생 초대전 <1970년대 풍속화 문화상품과 호텔화랑>을 개최한다.
전시에서는 그가 판화가로서 활동했던 1968~1982년에 제작했던 풍속화, 민화 판화를 공개할 예정이다.
한진해 선생은 ‘먹고 살기 힘들어’ 전업했다고 말했지만 그 힘든 시기 판화가로서 생계를 이어갔던 15년의 세월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또 하나의 역사이다.


1968년, 한진해 선생(81)이 난생 처음 판화를 출품해 공모전에서 특선을 거머쥐었던 그 시기는 사회문화적으로 변혁의 시대였다. 한편에선 근대화란 미명 아래 새마을운동을 진행하며 전통 한옥, 풍속 등을 마구 허물었고, 이에 맞서 지식인들은 국학부흥을 펼치며 전통 수호에 앞장섰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민화 부문 역시 1960년대 말부터 가치가 재조명되며 연구와 수집 활동이 활발해졌고 세계적인 오리엔탈리즘 열풍과 맞물려 수출용 민화가 대거 제작됐다. 한진해 선생은 작가란 명칭을 극구 사양하며 스스로 “목판을 조각하던 사람일 뿐”이라 말했지만 시대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헤치며 걸어온 길이기에 그가 화단에 남긴 발자국 하나하나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례로 미국 스탠포드 대학 캔터 아트센터가 소장 중인 한국 미술 컬렉션 중에는 1973년 그가 제작한 호랑이 판화가 있다. (본지 2019년 3월호 <해외의 우리 민화> 참고) 판화 경험이라곤 중학교 때 미술시간에 접해본 게 다였다는 그가 격랑의 시대에 판화가로서 살아간 15년에 대하여.

작품 속 섬세한 먹선을 모두 조각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미술을 전공하셨나요?

아닙니다. 신흥대학교(현 경희대학교) 경제학과 출신이에요.(웃음) 전쟁 통이었던 학창시절엔 담당교사가 없어 미술시간을 건너뛰기 일쑤였어요. 집안 형편도 어렵고 제가 장남이라 일찍 취업하려고 서울상고를 거쳐 고2 때 대학에 편입했지요. 1957년 대학 재학 중에 미술 교재, 부교재, 미술잡지 등을 발간하는 문화교육출판사에서 몇 달간 아르바이트하며 어깨너머로 판화 작품을 보곤 했습니다. 군대 제대 후 1966년 출판사를 열었지요. 이후 지인이 근무하던 문화교육출판사를 들르곤 했는데 상황이 어려웠던지 직원들 대부분이 퇴사했더군요. 책을 편집할 사람조차 없어 제가 가끔 드나들며 책 표지 작업을 돕곤 했습니다.

그렇다면 판화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당시 출판사에 계시던 이항성 선생님은 한국판화협회 회장직도 맡고 계셨는데 하루는 절더러 협회에서 개최하는 전국판화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해보라고 하셨어요. ‘책 표지 만드는 실력이면 충분하다’고 하도 독촉하셔서 난생 처음 판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때가 1968년이지요. 당시 심사위원은 이항성 선생, 이화여자대학교 김인승 교수, 최순우 박물관장, 판화가 정 규, 석도윤 선생, 신문사 문화부장 이일동, 이구열 총 7명이었고 수상자로는 대상 송번수 교수, 금상 천병근 고교 미술교사 외 은상 4명, 동상 5명이 선정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동상 명단에 끼어 있길래 너무 놀라 이항성 선생한테 극구 사양 의사를 밝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심각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웃음) 당시 저는 미술전공자도 아니었고 상은 앞으로 판화를 하고자 하는 이들이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였죠. 결국 저는 동상 밑인 특선을 수상했습니다. 사람일이란 알 수 없는 게 그렇게 동상을 사양한 제가 판화를 15년 생업으로 삼았다니 아이러니해요. 한국판화협회에서 전국 판화공모전과 국립공보관에서의 수상작 전시가 끝난 뒤 이항성 선생은 판화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조선시대 풍속화를 목판화로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풍속화 목판화를 자신의 전시회에 함께 전시하거나 전시장에서 풍속화 판화 시연을 하기도 했죠. 그때 저는 다섯 점의 풍속화를 만들어 주곤 출판사를 떠났습니다.

생계로 판화를 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주요 고객은 누구였습니까?

판화를 주고 나니 아깝다는 생각에 다시 목판을 파기 시작했죠.(웃음) 제가 차렸던 출판사는 1968년초에 접었던 상황이고요. 때마침 친구가 납품처를 주선해줘서 1970년 반도아케이드 내 수화랑, 1971년에는 조선호텔에 새로 문을 연 자하화랑 등에 판화를 공급했습니다. 특히 조선호텔에서 작품이 많이 판매됐는데 호텔 관광객이 늘어나며 화랑도 옆 건물로 확장이사하게 됐고 제 작품도 덩달아 많이 판매되면서 생활이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호텔 방문객이 외국인이 대부분이다보니 제 작품의 고객 상당수가 외국인이었어요.

당시 판화에 대한 인식은 어땠습니까?

1960년대만 해도 대중들은 판화를 잘 모르던 시대였습니다. 국가가 주도하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조차 판화 부문이 없어 판화 작품은 서양화 부문에 접수되던 시절이었지요. 한국판화협회 회장이었던 이항성 선생은 국전을 관할하던 문교부 장관에게 국전에 판화부문을 신설해 달라고 청원서를 내곤 했습니다. 한국 전통 판화는 일제 강점기에 사라지다시피 했어요. 1920년대까지는 동양식 선각 판화가 책표지, 삽화로 존재했지만 1930년대부터 일본에서 유학을 다녀온 서양화가들이 서양판화를 내놓을 뿐이었죠. 그 무렵 판화전으로는 1958년 차역, 배륭의 2인전, 같은 해 제1회 한국판화협회전(최덕휴, 전상법, 김정자, 박수근, 임직순, 이규호, 이상욱, 차역, 변종하, 박성심, 유강렬, 최영림, 장리석, 이항성이 참여), 1960년 최영림, 유강렬, 김환기 등 5인의 동인전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1세대 판화가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한 상황에서 판화를 제작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네, 지금처럼 옛 그림 전시회도 없었고 풍속화 책도 찾기 어려워 일본이 발간한 도록 등 흐릿한 흑백 사진을 간신히 참고해 목판을 각했습니다. 집에서 조각, 인출, 채색, 배접 등 모든 과정을 해야 했죠. 목판 하나를 파는 데만 사흘이 걸리는데다 수십 장의 작품을 찍어야 되니 보통일이 아니었지요. 예를 들어 하루는 얼굴색만, 다른 날엔 나무색만 계속 찍는 겁니다. 라면 하나를 끓여 아내와 반씩 나눠먹으며 끼니를 때우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는 날도 없이 계속 작업했습니다. 어찌나 조각을 했는지 조각도 중에는 날이 ⅔가 닳아버린 것도 있고, 어깨 한 쪽은 아직도 아파서 팔을 제대로 굽히기도 힘듭니다. 그렇게 만든 작품은 몇 천원이 채 되지 않았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1974년도가 호랑이 해였기 때문에 1973년부터 민화에 나오는 호랑이들을 조각했는데 꽤 많이 팔렸습니다. 그때는 어느 정도 목판화로 자리도 잡히고 생활도 안정됐을 때라 색다르면서도 시기상 적절한 것을 생각하던 때였지요. 당시 조자용 선생이 개최한 호랑이 민화 전시를 보고 스케치에 응용했습니다. 하루는 종로통 어느 지물포에 들렀다가 호랑이 무늬처럼 얼룩덜룩한 콜크 벽지가 참 마음에 들어 한동안 여기에 찍어 화랑에 냈는데 내놓기 무섭게 팔리더군요.
이 콜크 벽지는 내수용이 아니고 수출용인데 시내에 나온 것이 약간 흠집이 있는 것이라곤 했지만 판화를 찍기엔 이상이 없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콜크 벽지는 벌목 요인이 될 수 있어 산림녹화에 방해가 된다며 콜크 벽지를 일절 제작 금지하는 바람에 콜크 판화는 끝나버렸지만 호랑이 종이판화도 많이 판매됐습니다. 민화 속 호랑이 도상을 재배치해 팔기도 했는데 이제와서 돌이켜보니 창작물이라곤 호랑이를 재배치해 작업한, 바로 그 한 점밖에 없네요.

이후 진로를 바꾸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생계 때문이지요. 우선 1976년 이후의 이야기를 들려드리자면, 자하화랑이 조선화랑으로 이름을 고치면서 조선화랑 권상릉 대표가 아케이트 친목회 회장이 됐고 저는 총무를 맡게 됐습니다. 당시 부가가치세법이 새로 도입돼 가게마다 관련 정보를 항목별로 취합한 장부를 여러 개 작성해야했는데 장사만 하던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하겠어요? 큰 업체야 세무사가 있겠지만 영세업자들은 현금출납장밖에 모르니까요. 저는 경제를 전공했으니 공부해볼만하겠다 싶어 수십 권의 세법 관련 서적을 읽으며 독학했고 상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세무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중 매제가 건설회사를 운영하면서 저에게 전무직을 제안하기에 회사 운영, 입찰, 세무회계 등의 업무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건축업이 너무 바쁜 나머지 결국엔 판화를 놓아버렸어요. 건설회사에 입사한 것이 1982년도였고 2002년까지 일했습니다. 은퇴 이후에야 시간이 나서 손주를 데리고 전시를 관람하거나 취미로 판화를 찍어보곤 했지요.

오는 11월 가회민화박물관 초대전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소감이 어떠신지요?

괜히 겁부터 났어요. 생각지도 못한 전시를 하게 돼서…. 전시의 발단은 월간<민화>에 기사를 연재 중인 한국민화학회 김수진 이사가 미국 스탠포드 대학 캔터 아트센터가 소장 중인 제 판화 작품을 보고 연락처를 수소문하면서부터예요.
김수진 이사를 통해 제 이야기를 전해들은 한국고판화학회 권혁송 감사도 함께 절 찾아왔고, 이후 권혁송 감사가 가회민화박물관 윤열수 관장에게 저를 소개하며 초대전을 진행하게 됐죠. 전시에서는 제가 1968년부터 1976년도까지 만든 작품들을 공개할 예정입니다. 출품작은 견본용으로 집에 남겨둔 것이라 만족스럽진 못해요. 정식으로 판화나 그림을 배운 사람도 아니어서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1970년대 풍속화 문화상품과 호텔화랑>
11월 3일(일) ~ 11월 13일(수)
개막식 11월 4일(월) 오후 5시
가회민화박물관

글 문지혜 기자 사진 이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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