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의 민화 켈렉션 ⑰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Ⅱ

이달에 소개할 작품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이하 LACMA)에 소장되어 있는 총 5점의 병풍 유물이다. 먼저 호렵도 및 문자도가 함께 있는 양면 병풍을 소개한 후 최석환의 포도도 병풍, 자수로 된 호렵도·곽분양행락도·백동자도 병풍 3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각 유물들은 제작 당시 유행했던 병풍의 다양한 형식과 화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양면이 호렵도와 문자도로 꾸며진 단병

LACMA 소장 양면 병풍은 앞면이 호렵도 10폭, 뒷면이 문자도 8폭으로 꾸며져 있다. (도1-1, 1-2) 뒷면의 화폭 수가 적은 까닭은 병풍의 양끝 폭을 덮개로 고안하였기 때문이다. 현재 세상에 알려진 40여 점의 양면 병풍 대부분이 이렇게 양끝 덮개 방식으로 장황되어 있다. 양면 병풍은 보통 앞면을 채색의 장식화 계열로 꾸미고 뒷면을 수묵의 문인화 계열로 꾸미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앞면을 축연祝宴에 사용하고 뒷면은 제사 때 펼치는 방식으로 활용하기 위함으로, 하나의 병풍으로 두 가지의 연출 효과를 냄으로써 병풍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고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LACMA 소장 양면 병풍은 그림의 높이가 51㎝에 불과하며 장황을 합친 병풍 전체의 높이도 60㎝를 밑돈다. 사실상 이 정도 높이의 병풍은 성인의 앉은키보다도 낮은 것으로 제례나 축연에 썼을 리는 없다. 이렇게 낮은 단병短屛은 보통 이부자리를 편 상태에서 베개 주위에 둘러 잠자리의 웃풍을 막아주는 용도로 활용되었으며 머릿병풍 혹은 침병枕屛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이 유물은 잭 레빈(Jack Levine, 2009년 작고)과 앤 레빈(Ann Levine, 2007년 작고) 부부가 기증한 것이다. 잭 레빈은 리투아니아 태생으로 미국 뉴욕 주의 브루클린(Brooklyn)에서 자랐으며 앤은 브루클린에서 나고 자랐다. 이들은 1941년 캘리포니아 남부로 이주한 이래 죽을 때까지 60여년 여생을 산타 모니카(Santa Monica)에서 보냈다. 레빈 부부가 어떤 연유로 이 병풍을 손에 넣었는지는 밝힐 수 없었으나 잭 레빈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도 미술에 대한 취미 활동을 활발히 했다고 한다. 병풍 앞면의 호렵도는 10개의 화면이 독립적으로 구성된 각장各粧 병풍이다. 규모 있는 호렵도는 대개 화면이 연결되어 있어 막사에 운집해 있는 사냥꾼들의 모습과 여러 개의 호쾌한 사냥 장면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본 유물은 가장 오른쪽 1폭에 첩첩산중의 산수를 그려 넣어 사냥이 일어난 장소를 보여준 후 나머지 아홉 폭에서는 고졸古拙한 필치로 병풍 한 폭에 하나의 사냥 도상을 배치하였다. 이 중 3폭에는 호인胡人이 새를 활로 겨누는 장면이 보이고 4폭에서는 사냥개를 이용하여 호랑이 몰이를 하고 있으며 5폭에서는 사슴 사냥을 하고 있다. 6폭에서는 지금껏 사냥한 것들을 한데 모아 바치고 있고 7폭에는 토끼 사냥 장면이 보인다. 이러한 도상들은 대형 연결 병풍 호렵도에 있는 도안에서 주요 도상을 발췌하여 작은 화면으로 다시 꾸민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종림의 추위를 막아준 포도도 병풍

두 번째로 소개할 작품은 낭곡 최석환(浪谷 崔奭煥,1808-1883년 이후)의 <포도도 병풍>(도2)이다. 병풍 전체에 커다란 포도를 그린 것으로 오른쪽 3번째 폭에서 가지가 시작되어 양방향으로 포도 덩굴이 뻗쳐 있다. 포도나무는 잎과 덩굴이 풍성한 가운데 포도 알갱이들이 잘 자란 모양이다. 최석환은 한평생 포도를 집중적으로 그린 화가였다. 병풍 뿐 아니라 축이나 첩에도 포도를 그렸으며 유독 종이와 먹만을 사용한 수묵 포도를 고집하였다. 선행 연구에 따르면 최석환은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현재의 군산시 나포면 장상리)에서 주로 활동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최석환의 작품은 40여 점인데 이 가운데 30건 정도가 포도도이며 그중 절반 이상이 병풍 형식이다. 이 중에는 화면의 폭을 독립적으로 꾸민 각장 병풍도 있지만 다수는 연결 병풍이다. LACMA 포도도 또한 8폭의 연결된 화면을 활용한 병풍이다. 게다가 이 작품에는 이종림(李鍾林, 1857-1925)이 남긴 제발이 있어 작품이 유전된 내력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그림의 제발과 같은 글이 이종림의 문집인 《저전유고樗田遺稿》에도 실려 있다. 제발에 따르면 이종림은 이 포도도 병풍을 오랜 기간 잊고 있다가 1895년 겨울바람을 막기 위한 물건을 찾던 중에 우연히 발견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종림이 1895년에 이르러서야 병풍 끝에서 ‘丙子正月旬八古峰散人浪谷寫(병자년 정월에 고봉산인 낭곡이 그리다)’라는 제발(도2-1)을 발견하고 이 작품이 1876년에 최석환이 그린 것임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종림이 병풍에 남긴 글(도2-2)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내가 서울에서 돌아왔던 을미년(1895년) 가을의 일이다. 난리를 겪은 뒤라 집이 엉망이 된 탓에 창과 벽에 바람이 들어 견디기가 어려웠는데, 겨우 누더기가 된 병풍을 하나 찾아냈다. 오래 전부터 보관했던 것인데 중년中年에 사두었던 것[買得]으로 누가 그린 것인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병풍 전체에 커다란 포도를 그린 것으로, 잎과 덩굴이 난만한 가운데 포도 알갱이가 무성하게 자란 모양이었다. 정말 좋은 그림이라 생각하며 완상하던 중에 병풍 끝에 낙관이 있어 이것이 ‘낭곡浪谷’이 그렸음을 알게 되었고, 새삼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종이에 풀을 다시 먹이고 헐은 곳에 흠을 메꾸고 나니 겨울 추위를 막는 것 뿐 아니라 그 그림을 사랑하게 되어 그 그림을 다시 거두어드리지 못하게 되었다. 어느 날 손님이 와서 내게 말하기를 “선생은 운치 있는 사람〔韻人〕입니다. (병풍이란) 비단으로 폭을 꾸미고 자수로 장식을 하는 것이 마땅한데 어찌 검소하고 단출함이 이와 같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내가 한숨 쉬며 말하기를 “세상에 운치 있는 사람〔韻人〕을 알아주는 이가 드뭅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을 가리켜 운치 있는 사람〔韻人〕이라 하십니까? 비단과 자수는 부귀인富貴人이 과시하는 것이요, 포도는 청한인淸閒人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귀인이 운인일까요, 청한인이 운인일까요. 당신이 아는 운인은 어떤 것과 같습니까?” 손님이 미처 대답을 못했을 때에 내가 이 일을 써서 명銘으로 남기니, 명의 내용은 ‘8폭 병풍 포도 하나 열매가 겹겹이다. 비록 누추하지만 내가 추위 이기기에는 충분하네. 가죽 같이 추위 막고 담장 같이 빈 곳 막아내니 세상이 필요로 할 때 자기 도道를 다해 쓰이고 소용없을 때에는 조용히 물러갈 줄 아는 군자의 중용일세.

이 글은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보여주는데 첫째는 이종림이 오랫동안 병풍의 작가가 누군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수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 병풍을 화가에게 직접 주문한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구입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울러 병풍이란 실용성과 심미성을 겸한 물건이기에 방한防寒의 기능이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역할 보다 큰 경우도 허다했음을 일깨워준다. 둘째로 이 포도도 병풍이 ‘자수 병풍처럼 화려하지 않고 검소하고 단출한 수묵’임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문인들에게 수묵 장르에 대한 각별한 애호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보통 최석환의 작품들은 포도라는 화제는 유지되지만 매 작품마다 다른 도안의 변주가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최석환 작품의 다수가 연폭의 병풍을 잇대어 포도 덩굴을 수묵으로 초룡草龍처럼 그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현재까지 알려진 병풍 중에는 단 하나의 작품도 겹치는 구도가 없기 때문에 초본草本을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또 하나 주목할 만 한 점은 유독 해외 기관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최근 여러 경매에서 최석환 작품이 빈번히 거래됐을 뿐 아니라 한국 미술을 소장하고 있는 여러 미국 기관이 최석환 포도도 병풍을 소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Asian Art Museum, San Francisco), 디트로이트 박물관(Detroit Institute of Arts), 프리어 갤러리(Freer Gallery of Art) 소장본(도3)을 들 수 있다. 이 중 샌프란시스코 본과 디트로이트 본은 지난 6월호에서 소개한 바 있다.

간소한 도상과 담백한 색상의 자수 병풍

이 밖에 LACMA에는 자수로 된 병풍이 3점 소장되어 있다. 세 점 모두 높이가 80~90㎝가량 되는 나지막한 병풍이다. 먼저 <자수호렵도 8폭 병풍>(도4)은 높이가 89㎝로 화면마다 독립된 도상을 가진 각장 병풍이다. 6폭에 사냥한 짐승을 말과 수레에 싣고 가는 도상과 8폭에 보이는 술 마시는 호인 도상이 특기할 만하다. <자수 곽분양행락도 8폭 병풍>(도5)도 높이 80㎝이며 곽분양과 그 부인의 모습이 구현된 전형적인 곽분양행락도 도상을 보여준다. 다만 대형 규모의 대병大屛에서 보통 좌측 상단에 배치되는 폭포 도상을 없애고 배경을 간소화하여 침병으로 구현한 것을 볼 수 있다. <자수 백동자도 10폭 병풍>(도6)은 일반적인 백동자도에 들어가는 전형적인 장면들을 모았다. 오른쪽 1폭은 겨울 장면으로 연을 날리고 매화를 따는 모습이다. 보통의 순서대로라면 절기상 가장 왼쪽 마지막 폭에 자리 잡았어야 할 화면이다. 2폭은 장군 놀이, 3폭은 사슴 놀이, 4폭은 잠자리 잡기, 5폭은 연못에서 멱 감기, 6폭은 그네 타기 장면과 씨름 장면, 7폭은 닭싸움, 8폭은 새 잡기, 9폭은 원님 놀이, 10폭은 염소 타기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LACMA 소장 회화는 한국과 일본에 있는 기관을 제외하고는 국외 기관 가운데 가장 풍성한 한국 회화 컬렉션을 자랑한다. 그중에는 18~20세기에 크게 유행한 다양한 화제와 재료의 병풍들이 고루 포함되어 있어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글 김수진(한국민화학회 학술이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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