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의 민화 컬렉션 ㉖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퍼시픽아시아박물관 소장 한국미술품 Ⅰ- 박계담이 그린 낙화

이번 시간에는 박계담이 그린 낙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박계담은 조선총독부의 비호를 받으며 활동할 정도로 20세기 전반에 낙화로 큰 명성을 누린 인물로, 그동안 그의 작품은 국내와 일본 소장품만이 알려져 있어 미국 퍼시픽아시아박물관 본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낙화가 태평양을 건너간 까닭은 무엇일까.

– 글 김수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후 연구원)


도1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퍼시픽아시아박물관



도2 그레이스 니콜슨
(Grace Nicholson,
1877-1948),1906년

이달에 소개할 새로운 기관은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퍼시픽아시아박물관(USC Pacific Asia Museum: 이하 퍼시픽아시아박물관)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기관이다. 박물관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州에 있는 인구 14만 명이 조금 넘는 소도시인 패서디나(Pasadena)에 위치하고 있다. 패서디나는 북미 원주민인 알곤킨 족이 살았던 지역으로 ‘패서디나’는 알곤킨 말로 ‘계곡의 왕관’이라는 뜻이다. 건조한 바람을 가르며 퍼시픽아시아박물관에 도달하면 지붕의 양 끝이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독특한 중화풍의 건물이 관람객의 눈을 사로잡는다(도1). 2층으로 된 건물은 캘리포니아의 소도시에서 보리라 기대하기 어려운 이국적인 풍광을 보여준다. 이 박물관은 120년 전 그레이스 니콜슨(Grace Nicholson, 1877-1948)이라는 여성이 건립한 패서디나미술연구소(Pasadena Art Institute)에 시원을 둔 곳이다(도2).

퍼시픽아시아박물관, 원주민 민속품 수집하던 골동상에서 출발

본래 필라델피아 출신이었던 니콜슨은 20대 초반 얼마간의 유산을 챙겨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1901년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니콜슨은 곧 패서디나에 골동상을 열었다. 니콜슨이 처음부터 아시아 미술을 취급했던 것은 아니며 주로 북미 원주민들이 만든 민속품과 공예품을 거래했다. 니콜슨은 개인 소장가뿐 아니라 스미소니언(Smithsonian Institution)이나 시카고의 필드자연사박물관(Field Museum of Natural History) 같이 규모 있는 기관과도 활발하게 거래했다. 니콜슨은 매우 적극적으로 원주민의 민속품 및 공예품을 촬영하고 분류하고 기록했는데, 이러한 학술적 공헌을 인정받아 1904년에는 미국인류학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이 시기 니콜슨은 유물을 적극 수집하는 한편 북미 원주민 문화와 예술에 대한 다양한 대중 강연을 이어 나갔다.

도3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퍼시픽아시아박물관의 중국식 정원



(왼쪽) 도4 박계담, <낙화烙畫>, 지본낙화, 100×30㎝, 퍼시픽아시아박물관 소장
(오른쪽) 도6-1 도6의 6폭



정작 니콜슨이 아시아 미술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후였다. 1907년 현재의 박물관 자리에 터를 잡은 니콜슨은 1920년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아시아 미술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의 박물관 건물을 지었던 시점도 1924년에 이르러서였다. 니콜슨은 베이징의 궁전들을 상상하며 박물관의 디자인을 고안했다고 한다. 건축물의 주요 자재인 타일, 석재, 대리석, 주석 등은 모두 중국에서 직접 수입되었다. 건물의 시그니쳐라 할 만한 창공을 향해 휘어 있는 지붕은 벽사辟邪의 상징으로서 건물 위에 그 어떤 사악한 것도 내려앉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지붕의 중심부에는 도자로 만든 개들이 건물을 지키고 있다. 완공 후 건축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이 건물은 니콜슨이 진짜 ‘중국풍’을 만들기 위해 큰 공을 기울인 결과였다. 이는 100년 전 미국인들이 중국에 대해 어떤 인상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문화사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건물은 1925년 1차로 완공된 일부가 공개되었고 1929년 중국식 정원을 포함한 전체가 완성되었다(도3). 이때부터 북미 원주민 유물과 함께 동양 미술이 전시되기 시작했다. 한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니콜슨은 1943년 이 건물을 패서디나시에 기증한 후로도 1948년 숨을 거둘 때까지 2층 한 편에서 생활했다. 패서디나시의 운영으로 유지되던 패서디나미술연구소는 1986년 퍼시픽아시아박물관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 박물관에서 한국미술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1972년으로 꽤 늦은 편이다. 현재는 도자, 회화, 복식, 민속품을 아우르며 총 260점의 한국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단독의 한국실은 2007년에 문을 열었다. 2013년에는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와 합병이 이루어지면서 현재의 긴 이름이 탄생했다. 이를 통해 이 박물관은 미국 대학박물관 중 유일하게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유물을 전문적으로 전시하고 연구하는 기관으로 거듭났다. 이곳의 한국 회화 수집품은 일류라 평하기는 어렵지만 캘리포니아주 교민들을 중심으로 꾸준하게 기증과 후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발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도4-1 도4 상단의 제화시



(왼쪽) 도5-1 도5 상단의 제화시 / (오른쪽) 도6-2 도6의 인장


미국인 선교사가 일본에서 가져온 조선 낙화

이달에는 박계담(朴桂淡, 1869-1948)의 낙화烙畫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도4, 도5). 낙화란 인두나 쇠붙이를 불로 달구어 종이, 모시, 비단에 그림을 그린 것을 말한다. 낙화 기법의 창시자는 박창규朴昌珪(1796-1861년 이후)로 박창규 이후의 낙화 작가는 대부분 그의 일가와 후손인 밀양 박씨였다. 박창규는 일찍이 낙화 기법으로 이름을 얻어 헌종(憲宗, 1834-1849년 재위) 앞에서도 낙화 제작을 시연한 바 있었다. 이후 100여 년간 박창규의 종형제와 자손에 의해 낙화 기법이 독점적으로 전승되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박창규의 종제인 박이규(朴履珪, 1819~1858), 박조규(朴助珪, 1839~?)를 비롯하여 박진호(朴鎭灝, 1842~?), 박계담(朴桂淡, 1869~1948), 박상전(朴相典, 1901~1959)이 알려져 있다. 이 중 퍼시픽아시아박물관 소장품은 박계담의 작품이다.

도6 박계담, <낙화 화조> 10폭 병풍, 지본낙화, 118×424㎝,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박계담은 박창규의 사촌의 손자인 재종손再從孫이다. 박계담은 20세기 전반에 낙화로 큰 명성을 누렸으며 무엇보다 조선총독부의 비호를 받으며 활동했다. 낙화 기법은 일본인들에게도 인기를 끌었을 뿐 아니라 조선의 토속 문화이자 이색 기법으로서 정책적인 후원을 받았다. 그간 박계담의 작품은 국내와 일본 소장품만이 알려져 있던 터라 퍼시픽아시아박물관 본은 나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작품은 현재는 화조도 두 폭이 전하는데 크기를 고려할 때 본래는 병풍에서 산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폭은 연蓮을 배경으로 물총새를 그린 것이다(도4).
여기에는 제시의 시작에 파초잎 모양 두인頭印을 찍고 마지막에 주문방인 월산月山과 백문방인 박계담인朴桂淡印을 찍었다(도4-1). 이러한 관서 형식은 박계담의 작품에 자주 보이는 것으로 국립민속박물관 본에서도 확인된다(도6-2). 특히 국립민속박물관 본 병풍의 한 폭은 화제나 구도가 퍼시픽아시아박물관 본과 거의 유사하다(도6-1). 다른 한 폭은 나무를 배경으로 한 쌍의 새가 날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도5).

도7 거트루드 바일러
(Gertrude M. Byler,
1895-1975)

이 폭의 상단에는 별다른 인장 없이 제시 한 줄만이 남겨져 있다(도5-1). 이렇게 낙화로 화조를 그리고 상단에 제시를 남겨 병풍을 꾸린 방식은 박계담의 여러 작품에서 확인된다(도6). 평생 직업화가로 활동했던 작가가 유사한 화제의 작품을 반복해서 남긴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낙화는 거트루드 바일러(Gertrude M. Byler, 1895-1975)라는 미국 여성이 1973년에 기증했다(도7). 바일러는 이 작품뿐 아니라 수십 점의 일본 민속품 및 미술품을 퍼시픽아시아미술관에 기증했는데 이 낙화만이 유일한 한국 유물이다. 바일러는 1895년 캔사스 태생으로 1975년 캔사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런 바일러가 일본과 한국의 유물을 기증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녀가 1927년 미국연합감리교회(CMC: United Methodist Church) 소속 선교사로 일본에 부임하여 36년 동안 일본 여성의 선교와 교육에 헌신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한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귀국한 바일러가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 어떤 연고가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박물관측에서도 바일러와 관련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박계담의 낙화가 조선총독부 관리를 비롯한 일본 인사들에게도 인기가 있었고, 실제 그의 작품이 일본에 전하는 것도 적지 않은 만큼 해당 작품이 일본 어딘가에서 바일러의 손에 들어갔으리라 추정할 따름이다. 현해탄을 건넌 작품이 다시 미국인의 손을 거쳐 태평양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예술이 가진 질긴 생명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김수진 |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후 연구원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충남대, 서울시립대, 성균관대, 덕성여대, SADI 등에서 강의했다. 하버드 옌칭 연구소와 보스턴 미술관에서 연구했으며 현재는 한국민화학회 총무이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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