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의 민화 컬렉션 ⑲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Ⅳ – 서원아집도 10폭 병풍 외

이번호에서는 지난달에 이어 로버트 무어(Robert Moore) 컬렉션을 몇 점 더 소개하면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이하 LACMA)의 한국 컬렉션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자 한다.
각 작품들이 들려주는 당대 화풍과 미감에 대하여 살펴본다.


로버트 무어 컬렉션 중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도1)는 비록 그림에 관서나 제작 연대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안정된 구도와 필치의 수준이 뛰어나다. 이 작품은 세간에 전하는 병풍 형식의 서원아집도 대부분이 8폭인데 반해 10폭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서원아집’이란 송나라 때 학자인 왕선王詵(1036-1089년 이후)이 서원西園에서 친구인 소식蘇軾(1037-1101)을 비롯하여 당시 명성이 높았던 유자儒者, 도사, 승려를 두루 초대하여 가진 모임을 말한다. 이 모임에 참가했던 문인화가인 이공린李公麟(1049-1106)이 서원의 아집 장면을 그린 것이 바로 동아시아 삼국에서 꾸준히 애호되었던 <서원아집도>이다.

김홍도 작품의 계보 잇는 초본들

LACMA 본은 몇 개의 인물군을 중심으로 읽어볼 수 있다. 오른쪽에서 네 번째 폭에는 일군의 학자들이 등장한다.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이는 이공린이며 다른 세 명의 학자들이 그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다. 두 명의 동자가 이 학자들의 곁을 지키고 있다. 5폭에 보이는 두 번째 인물군은 총 9명이다. 가운데 앉은 소식은 시를 쓰고 있고 이 모임을 주관한 왕선을 포함한 네 명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이들의 곁에는 사녀士女와 시동侍童 넷이 섞여 있다. 6폭에 보이는 이는 미불米芾(1051-1107)로 석벽에 글씨를 쓰고 있다. 7, 8폭에는 비파를 연주하는 진경원陳景元(?-1094)과 이를 듣고 있는 진관秦觀(1049-1100)이 보이며 그 옆으로 차를 준비하고 있는 시동이 있다. 마지막으로 9폭에서는 승려 원통圓通이 마주한 학자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그려졌다. 이러한 전반적인 도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하는 김홍도金弘道(1745-1806?)의 1778년 작품 <서원아집도 6폭 병풍>(도2)의 계보를 잇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다섯 무리의 인물 군상을 중심으로 화면을 꾸민 도안은 유지되었으나 시대가 내려올수록 병풍 화면 자체의 너비가 넓어지면서 개별 군상의 행위들이 보다 독립적으로 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LACMA 본과 매우 유사한 도안을 보이는 작품(도3)이 현재 호림박물관에도 전하고 있다. 호림 본의 경우 제발과 낙서를 통해 작가가 강필주姜弼周(1852-1932)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두 작품은 호림본이 8폭인데 반해 LACMA 본이 10폭이라는 사실 외에 화면의 크기가 일치하고 도안도 겹친다. LACMA 본 또한 강필주가 제작했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시대에 주변 화가군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강필주가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900년 6월이다. 강필주는 이때 화원화가 조석진趙錫晉(1853-1920) 및 채용신蔡龍臣(1848-1941)과 함께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사했다. 이후 강필주는 통신사通信司의 전화과電話課 주사主事로 근무했으며 1911년에는 덕수궁 함녕전에서 조석진, 김응원, 윤영기, 강진희, 정대유, 이도영과 함께 고종이 베푼 어전휘호회에 참여한 것이 확인된다. 1912년에는 한국 최초의 서화 강습기관인 서화미술회의 동양화과 교수가 되어 8년간 후속 세대의 교육에 집중하였다. 사실 김홍도의 초본을 조금씩 번안한 서원아집도가 비단 호림 본 뿐만은 아니다. 개인소장 및 각종 옥션에 출품된 <서원아집도 병풍> 또한 크게는 김홍도-LACMA 본의 계보를 잇고 있다. 이는 김홍도의 서원아집도를 바탕으로 한 초본草本이 18세기 이래 직업 화가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조선 후기 전 계층이 즐겨 사용한 서원아집도 병풍

이 밖에도 1880년대 이후 서원아집도 병풍을 배설하고 촬영된 사진들이 다수 전하고 있어 주목된다. 우선 흥선대원군의 서자이자 고종의 이복형인 이재선李載先(?~1881)을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사진(도4)에 서원아집도가 펼쳐져 있다. 이 사진 속 오른쪽 인물이 이재선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가 1881년에 사사賜死되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 사진은 적어도 그 이전에 촬영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진과 동일한 병풍을 배설한 사진 하나(도5)가 더 전한다. 이는 1914-1919년에 한국에서 근무했던 미국인 에드나 판 펠트(Edna Van Pelts)가 보관해 오던 30여장의 한국 사진 중 하나이다. 이 사진 속에는 두 여인이 있는데 배경이 되는 카펫과 병풍이 이재선 사진의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이 서원아집도 병풍은 특정 사진관에 배치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동일한 작품은 아니지만 서원아집도가 촬영된 사진(도6)은 또 있다. 이는 1904년 러일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였던 잭 런던(Jack London, 1876-1916, 도7)이 촬영한 것으로 두 남녀가 술을 먹는 장면은 연출된 것으로 보인다.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바느질 하는 여인들을 촬영한 사진(도8)에서도 서원아집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진 자료들은 서원아집도가 20세기 전반에 매우 인기를 끌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실제로 서원아집도라는 주제는 왕실 최고의 화원화가들이 응시하는 녹취재祿取才 시험에서 1856년과 1861년에 출제된 바 있다. 이후 1877년에는 고종에게 바쳐진 계병禊屛 목록에서도 보이며 1879년 왕세자 순종의 천연두 완치를 축하하기 위한 계병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또한 1881년 이듬해에 있을 순종純宗의 혼례를 준비하면서 꾸민 병풍 60좌 중에도 서원아집도 대병大屛이 2점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하면 서원아집도 병풍은 왕실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계층을 초월하여 조선 후기에 큰 사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LACMA 본 또한 이러한 맥락 안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다채로운 작품들

이 밖에 무어 컬렉션에는 다양한 화목畵目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연화어해도>(도9)에는 물총새 한 쌍, 거북이 한 쌍, 물고기 한 쌍이 싱그러운 초록색 색감의 연잎과 잘 어울리게 표현되어 있다.
<산신도山神圖>(도10)속 산신은 산비탈 위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다. 산신은 머리에 책 두 권을 얹은 관을 썼고 붉은 옷을 입었으며 의자에는 표범 가죽을 깔았다. 산신은 한 발을 호랑이에 얹고 한 손은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려 치아를 드러낸 모습이 마치 큰소리로 호통을 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책상 위에 놓고 장식용으로 썼을 법한 병풍(도11)이 있다. 이 작은 크기의 미니 병풍은 양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면(도11-1)에는 도연명陶淵明과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시가 보이며 ‘병진정월상완만송丙辰正月上浣晚松’이란 낙서가 있어 병진년인 1856년 혹은 1916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병풍의 뒷면(도11-2)에는 계절감이 뚜렷하게 반영된 춘하추동의 산수가 그려져 있다. 이렇게 작은 병풍은 흔치 않은 유물이라 차후 유사한 작례들을 발굴하여 비교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무어 컬렉션이 우리에게 남긴 것

로버트 무어는 1950년대에 서울에서 하루에 한 트럭 분량의 미술품과 민예품이 거래되었다고 회고했다. 물론 전쟁 직후 한국인들에게 미술에 가치를 부여한다거나 미술 시장을 꾸린다든가 하는 것은 관심 밖의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 미술품을 사들였던 외국인들조차 오늘날 그 가치가 이 정도로 커질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국외로의 문화재 반출을 막는 보호법 자체가 없던 시절 많은 유물들이 그렇게 한국을 떠났지만 사실상 유물이 어디에 있느냐는 부차적인 문제일지 모른다. 역사를 기억하고 그 의의를 논의하지 않는 이상 유물의 존재 여부가 무슨 의미이겠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로버트 무어 컬렉션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글 김수진(한국민화학회 학술이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후 연구원)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