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 Ⅰ. 들어가는 글 : 현대 민화?

     초기 한국현대미술의 민화 차용
     십장생의 현대적 변환, 김환기의 영원한 것들
     현대 목판화의 민예적 요소
     유·불·선 통합의 간결함, 장욱진

• Ⅱ. 1970년대 문화 민족주의 시대의 민화 차용
  

     김기창의 바보산수
     굿과 무속연행과 한국 현대미술

• Ⅲ. 민주화 시대의 민화

     오윤의 판화
     민화. 민중미술 민족미술

• Ⅳ. 1990년대와 그 이후

※이 글은 한국민화의 과제와 나아갈 방향이라는 주제로 열린 ‘2014 한국민화 학술대회’에서 9월 20일에 발표한 논문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Ⅰ. 들어가는 글 : 현대 민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큰 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민화 民畵’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맥락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용어이다. 이 말은 마치 근대 민족주의를 논하면서 “만들어진 전통”이라고 했던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말을 연상시킨다. 물론 이 말은 ‘민화’의 실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다양한 계층의 시각문화가 발전하면서 벽사와 길상, 종교와 계몽, 감상에 걸친 수많은 민간의 회화가 ‘속화 俗畵’라는 이름으로 번성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 시각 문화계에서 ‘민화’라는 용어가 직접 사용되지는 않았다. ‘민화’는 1920년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988~1961)가 자국의 오오츠에와 같은 값싸게 사고파는 그림을 지칭하였고, 1959년 「불가사의한 조선민화」라는 글에서 처음 명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60-70년대에 일본과 한국의 민화 수집 붐이 불고 세간이 관심이 높아지자 1975년 일본 청담사에서는 《이조민화》를 발간하였고, 같은 해 한국에서는 《한국민예미술대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무엇보다 ‘민화’는 조자용과 같은 초기 컬렉터에 의해 본격적으로 탐구와 분류의 대상이 되었다. 1980년대에는 민중 사관에 의해 한국미술의 원형이라는 가치가 부여되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민화는 민간 애호가들의 성장에 의해 대중문화의 속성이 부여된 가운데, 미술사에서도 궁화, 채색화, 장식화라는 화목의 분화에 따라 더욱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이처럼 ‘민화’는 시대마다 다른 ‘민화적’인 것들의 구성체였다. 그런 이유로 민화에 관한 연구는 곧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대한 메타서사이기도 하다. 사실 1980년대 이후 민화가 미술계나 학계에서 한국적 미술의 한 원형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문인들의 수묵 산수화 중심으로 편성된 한국 회화사와 전통화단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큰 몫을 하였다. 그간 한국 회화사는 민간의 삶 속에서 제작된 다양한 미술의 풍부함을 아우르지 못하고, 이를 무명의 그림이라는 이유로 미술사 서술의 대상에서 배제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이미 한국 미술을 둘러싼 그간의 시대적 맥락과 화단, 학계, 한·일 관계의 다층적인 문제들이 관여되어 있다고 하겠다.
글의 전제로서 정리하자면 ‘민화’는 무명의 미술, 겨레미술, 민중미술, 민간미술 등으로 정의되고 있으며, 서민들의 삶과 욕망과 가장 밀접했기 때문에 다른 어떤 미술보다 한국인의 감정과 조형성이 잘 드러난 서민회화라고 할 수 있다.¹⁾ 물론 이러한 합의도 최근 들어 조선시대 왕실의 시각문화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엘리트 문화의 대항문화로서 ‘민화’라는 구도의 유효성에 문제가 제기되었고, 근대기 동아시아 미술의 영향관계가 연구되면서 민화의 민족 고유성을 배타적으로 주장하기도 어려워졌다. 본 글이 민화의 정의나 개념을 이 정도에서 건너 뛰어 현대미술에서의 차용의 용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려는 것은 민화를 아우르는 개념의 난맥상을 피하고, 실제 무엇이 전통으로 받아들여졌는지 그 상황을 들여다보겠다는 생각에서이다. 그 차용의 역사가 곧 ‘현대 민화’의 역사라고 보기 때문이다.

초기 한국현대미술의 민화 차용
근대기 우리나라를 왕래한 외국인들의 기록에는 민간의 주택을 장식하고 있는 광경에 대한 그림과 설명이 자주 나온다. 일본에서 우키요에 판화를 배우고 한국을 방문하였던 영국인 엘리자베스 키이스(Elisabeth Kieth, 1887~1956)는 “한국에서는 방 출입문 흰 벽에 값싼 종이에 그린 전통적인 문양을 붙이는데, 처음 붙였을 때는 색깔이 유치하지만 시간이 지나 퇴색하면 아름답고 부드러운 색으로 변한다. 흔히 여러 가지 색의 새 그림이 들어가는데 이는 시간을 상징한다고 한다. 개는 도둑을 방지해 주고, 사납게 생긴 사자나 호랑이의 그림은 악귀를 쫓는다고 믿어진다”고 자세히 상술하고, 그 풍속을 사실적인 수채화로 남겼다(도 1).²⁾
키이스가 묘사한 근대기 집 안팎을 장식하는 풍속은 1844년 한산거사(漢山居士)가 <한양가>에서 광통교에서 묘사했던 갖가지 민간 그림이 일본 강점기 서양화의 유입으로 미술의 개념이 변화하는 와중에도, 민간사회에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 근대기 대중에게 많이 팔리던 엽전 소설, 딱지본의 표지에도 십장생과 같은 전통 도상이 자주 이용되었고, 대중 잡지의 장식문양으로도 민화는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나 근대기 서민의 삶을 주로 많이 다루었던 화가 김중현(金重鉉, 1901~1953)의 작품 <무녀도>(1941)나 장우성(張遇聖, 1912~2005)이 채색화로 그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승무>(1937)에서 보듯이, 무속이나 민속적인 소재는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작가들 사이에서 심사위원들에게 인상을 줄 수 있는 주제로 자주 이용되기는 했으나 민화의 조형적인 요소나 도상적 내용을 차용하여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는 데 이용한 예는 찾기 어렵다.
또한 1930년대 후반부터 김용준(金瑢俊, 1904~1967)과 문장(文章)파 미술가를 중심으로 전통의 골동과 서화의 세계를 탐닉하며 전통미에 관심을 가졌으나, 이들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격조와 문인들의 고동을 완상하는 풍류를 추구하였다. 속화로서의 민화는 퇴속한 전 근대적 풍속으로 경시되었던 것인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문자도나 화조화 등을 제외한 많은 민간화 제작의 맥은 현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전승이 아닌,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민화적인 요소들이 본격적으로 차용되는 것은 해방 이후 민족미술의 정립과 현대화를 적극적으로 구현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십장생의 현대적 변환, 김환기의 영원한 것들
한국적 소재는 민족미술의 정립이라는 해방 이후 화단의 요구와 맞물려 미술가들의 관심이 높았다. 한국 최초의 추상화가인 김환기(金煥基, 1913~1974)는 1941년부터 추상화에서 점차 매화와 달, 항아리가 소재가 되는 한국적 화제로 회귀하는데,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완성한 <영원한 것들>(도2)은 한국미에 대한 그간의 관심사가 드러난 작품이었다. 화면을 나눈 아홉 칸에는 풀과 구름, 학, 물고기, 달, 사슴, 괴석과 소나무, 산이 추상적으로 단순하게 그려졌다. 거북과 해가 빠진 민화 십장생의 모티브들로서 김환기는 이를 당시 책의 표지화로 자주 사용했던 제재들이었다.
십장생(十長生)(도 3)은 도교의 신선사상에서 나타난 도상으로 장수와 영원을 비는 길상화로, 고구려시대부터 등장하여 조선시대 화려한 왕실 미술부터 규방의 장식화나 자수로 널리 이용되었다. 그러나 김환기에게 십장생은 기복과 길상이기 전에 캔버스의 화면을 조형하고, 화가의 시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매개물이었다. 그의 미학은 소위, 민중의 생활문화라기보다는 격조와 품위를 중시하는 문인들의 풍류와 흡사한 것으로 김환기는 이를 위해 유화이지만 기름기가 느껴지지 않게 담백한 마티에르로 처리하고, 민화의 붉고 짙은 채색 대신 먹색과 담채의 푸른색을 선택하였다.
잘 알려졌다시피 김환기는 문장파인 근원 김용준의 영향으로 달 항아리와 골동을 탐미 완상하였다. 사의적인 수묵화에서 조선미의 근간을 찾은 근원 김용준의 동양주의 미학에 잇닿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미감은 “무기교의 기교”의 자연미를 숭상한 고유섭(高裕燮, 1905~1944) 과, 무명씨의 순수한 마음을 강조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와도 상통하는 바가 있다.⁷⁾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미는 이후 언급하는 ‘민화’의 형식미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토속적이고 원초성이 강조되는 ‘민화’에 비해서 ‘민예’를 구성하는 미적 요소에는 고아하고 아취 있는 엘리트적 감수성과 현대적인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음악적 서정성을 중시하는 김환기의 작품은 민화보다는 민예의 요소가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자연주의 순수 미학은 김환기를 중심으로 한 장욱진(張旭鎭, 1918~1990), 이규상(李揆祥, 1918~1967)과 같은 ‘신사실파’ 화가들, 정규(鄭圭, 1923~1971), 권옥연(權玉淵, 1923~2011) 등의 한국 초기 현대 미술가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성향이었다.

현대 목판화의 민예적 요소
화가이자 도예인 정규 역시 김환기와 마찬가지로 전통 미술에서 영감을 얻어 극도로 간결한 현대성을 추구한 미술가였다. 특히 정규는 일찍이 유강렬(劉康烈, 1920~1970) 등의 영향을 받아 목판화를 제작하였는데, 그 구성의 단순함과 간결한 선의 처리는 조선시대 후기 민간 목판화의 요소가 농후했다.(도 4)
목판화는 1950년대에 한국 현대화가들에게 크게 주목 받았다. 이는 당시 미술가들의 민족미에 대한 관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국제 판화 교류전과 각종 공모전이 어느 때보다 활발했던 세계미술의 흐름이 한 몫을 하였다. 특히 화가 최영림(崔榮林, 1916~1985)이 일본에서 배웠던 무나카타 시코(棟方志功, 1903~1975)가 195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랑프리상을 받았던 것은 국제화단에 진출하고 싶었던 한국미술가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던 것 같다. 고미술품에 대한 애정으로 조선시대 판화를 일찍이 수집하고 있었던 이항성(李恒星, 1919~1997)은 1958년 신시내티 미술관에서 열린 국제 현대 색채석판화비엔날레에 <다정불심>을 제출하여 입상하기도 했다. 이에 한국 화단은 1962년 《현대작가초대전》이 판화를 새롭게 받아들였고, 1963년에는 화가 김봉태가 판화로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하였다. 1968년 김종학은 도쿄 국제판화전에 목판 <역사>(도 5)로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간결하고 흑백의 선 맛이 두드러져 민화적 요소가 강했는데, 김종학의 판화는 단순하지만 부적과도 같은 기호적 상형과 여백을 조화시킨 조형적 혁신으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목판화의 요소가 적극적으로 현대 미술가들에게 전승되게 된 데에는 혜곡 최순우(崔淳雨, 1916~1984)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최순우는 일제 시대 개성에서 고유섭에게 배웠고, 이후 줄곧 국립중앙박물관에 근무하면서 1953년 부산 임시 박물관에서 《현대작가초대전》을 기획하고, 세 번째 신사실파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전통 미학이 현대미술로 이어지는 데 실질적인 역할을 하였다. 최순우가 1963년 《이조 목가구전》을 기획하고, 1963년에 유강렬, 김봉태, 김종학, 윤명노, 한용진을 국립중앙박물관에 초대하여 《판화 5인전》을 열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조선시대의 목가구나 달 항아리는 그 조형적 무작위성, 정교하지 않은 민중의 예술로서 야나기 무네요시에 의해 일제강압기 민예미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최순우나 김환기에 동일하게 나타나듯이 그것이 향유되는 방식은 양반들의 유교세계와 한옥의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민예품을 완상하는 풍취는 지극히 문인적인 풍류였다. 이러한 모순은, 한국 현대미술가들이 수용한 전통이라는 것이 민중의 생활 미술을 의미하는 민화와 본질적으로 상치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장욱진의 예에서 좀 더 살펴보겠으나, 한국 현대 모더니스트들에게 있어 민화적 전통이란 삶의 미술이기 보다는 그 소박하고 엉성한 구성과 치졸미에서 오는 조형의 현대성이었다.

유·불·선 통합의 간결함, 장욱진
김환기나 정규 등에서 보듯이 한국 현대 미술가들에게 민화란 한국성을 담보하고 동시에 조형적인 혁신을 이루는 ‘한국적’ 모더니즘의 보완물이었다.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은 민화적 단순함을 통해 자신만의 현대적 어법을 구축했던 대표적인 미술가이다. 근대기 <소녀>나 <공기놀이>와 같은 토속적인 유화로 등단했던 장욱진은 1950년대에는 파울 클레와 같은 유럽 20세기 전반기의 현대미술에서 큰 영향을 받아 극도로 간결한 화면에는 양옥과 자동차 등 유럽풍의 소재도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그의 그림은 점차 소박한 민화풍으로 변모하는데, 1958년 <까치>(도 5)는 그 변화하는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푸른 달과 까치는 동양적인 분위기의 소재로, 특히 큰 나무에 앉은 까치는 호랑이와 함께 한국인들에게는 익숙한 제재이다.(도 6) 비교해 보건대 민화, 호랑이와 까치의 천연덕스러운 관계는 장욱진의 화면에서 인물과 새와 나무의 관계를 구성하는 치졸미하고 관계가 있으며 중심이 없는 시점과 소재를 좌우 대칭으로 무심하게 배열하는 화가의 방식은 다분히 민화적이다. 특히 개, 까치, 집과 나무, 해와 달 등 몇 가지 제재를 작은 화면에서 거듭 반복하는 것도 도상이 반복되는 민화와 유사한 점이다.

그러나 민화와의 형태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는 차이가 분명한데, 장욱진의 회화에서 까치는 흔히 세계와 고립되어 자족하는 화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화를 바탕으로 교훈과 골계미를 주는 민화의 세계와는 매우 다르다고 하겠다. 사실 1950년대에는 민화에 대한 담론도 부재했거니와 까치와 호랑이 그림은 1962년에 임인년 호랑이해를 맞아 특별히 열렸던 《조선 호도전》을 계기로 대중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반복된 도상으로 다량 복제하여 싸고 널리 판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속화로서의 민화는, 극도로 예민하게 군더더기 없이 전체를 구성하는 장욱진의 작화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무엇보다 욕망이 배제된 무위의 세계를 꿈 꾼 장욱진의 회화는 기복과 벽사를 위한 민간 회화와 그 실용적인 목적과 세속적 기능이 상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장욱진의 단순환 회화는 민화 보다는 선화(禪畵)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일찍이 1953년 국전에서 민속적인 소재로 화려한 색채 추상화를 선보였던 전혁림(全爀林, 1916~2010), 탈춤이나 오방색을 이용하여 마티스를 연상시키는 쾌활한 색면 추상화의 세계를 보인 손동진(孫東鎭, 1921~ ), 향토적 토속성을 추구한 최영림 등이 민화를 일찍이 자신의 회화세계에 차용하여 현대화를 지향한 예들이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김환기로부터 장욱진에 이르기까지 이들 미술가들에게는 서민, 민중의 미술이라는 계급성 보다는 그 조형적 특이성이 중요했다.
민화를 둘러싼 논란의 와중에서도 많은 관련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부분은 ‘민화’가 지니는 조형의 현대성이다. 그것은 국내의 평가 뿐 아니라 외부의 시선과 평가도 마찬가지인데, 2001년 파리 기메 박물관에서 이우환이 수집하여 기증한 한국 민화 전시회가 ‘한국의 향수 Nostalgies coréennes, peintures et paravents du ⅩⅦ au ⅩⅨ siècle’라는 이름으로 열렸을 때 한국 민화의 추상성과 환상적 상상력에 대한 구미의 미술계의 호평이 있었다. 숙련되지 않은 솜씨에서 오는 단순함과 치졸미, 근엄함을 대신하는 해학과 익살, 속된 욕망을 마음껏 투영하는 원초적 환상성이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민화의 요소들이다. 특히 화려한 채색과 평면성, 그림과 문자를 자유자재로 결합하는 기호적 상징성은 민화가 가지는 놀라운 현대적 조형 요소로 평가되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마치 20세기 초 큐비즘이나 표현주의를 시도한 마티스, 피카소 등, 유럽의 모더니스트들이 아프리카 원시부족 미술에서 절대적 영감을 얻고 차용하듯이 한국 초기 현대미술가들은 민화를 유용한 창작의 원천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1) 김철순, 《한국민화논고》 (예경산업사, 1991)
2) 엘리자베스 키이스· 엘 스펫 K. 로버트슨 스콧, 송영달 옮김,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책과 함께, 2006)

Ⅱ. 1970년대 문화 민족주의 시대의 민화 차용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큰 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1960년대는 본격적으로 민화에 대한 관심과 수집 붐이 일어났던 시대였다. 일본과 미국에서 한국의 포크아트(Folk Art)로 알려지기 시작한 민화는, 조자용, 김호연 등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집되고 애호가들이 늘면서 관련 연구와 전시가 이어졌다. 1968년 조장용이 문을 연 에밀레 미술관이 그 중심에 있었는데, 1972년에는 한창기 사장이 경영하는 한국 브리태니커 사에서 《한국민화의 멋》을 발간한 것은 이러한 조류의 한 기폭제가 되었다. 일본에서의 반응도 뜨거워서 1972년 일본 도쿄화랑에서는 에밀레 미술관 소장민화에 일본의 소장품을 더하여 《이조기의 영정과 민중화》 전시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민간과 일본의 관심만으로 이후 민화에 대한 관심의 증대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1960년대는 국내에서도 민족문화 담론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정부는 1968년 문화공보부를 설립하여 국립박물관을 새로 건립하고 국학을 진흥시키는 등 본격적인 민족 문화와 전통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정책을 실행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경제발전과 근대화를 위한 절실했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가 실행되던 시대이기도 했다. 이에 다양한 전승 공예와 미술과 음악 등에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그러한 가운데 민화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졌던 것이다. 민화 연구자 김호연은 1972년을 ‘민화의 해’라고 회상했는데, 그 해 한국일보에서는 <이조의 민화> 를 19회에 걸쳐 연재하였고, 서울화랑에서는 여러 수장가들의 출품으로 민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덧붙여 김호연은 1969년 신세계 화랑에서 《호랑이 전》을 할 때 그림 한 장에 만원이 넘지 않던 그림들이 1972년에는 50만원에도 골라잡을 수 없다며 당시 민화에 대한 수집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도 회고하였다.³⁾ 한마디로 1970년대는 민과 관이 함께 그리고 한국과 일본이 각각 다른 시선과 관심에 따라 민화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며, 본격적인 민중 민족주의의 1980년대를 준비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민화의 차용은 앞서 살펴 본 현대 모더니스트들의 예와는 달리 보다 적극적이고 또 그 입장이 복합적이었다.

김기창의 바보산수
1931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 연속 입선과 특선으로 일찍이 추천작가가 된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은 김은호에게 배운 대표적인 근대 채색화가로서 그만큼 해방 이후 친일작가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그 타개책으로 일찍이 큐비즘과 추상표현주의를 수용하여 전통에 있어서 현대화를 이룬 미술가이다. 특히 김기창은 남산에 건립된 국립민속박물관 송석하(宋錫夏, 1904~1948) 관장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일찍이 풍속화에 관심이 많았다. 예를 들어 1947년 5월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조선미술동맹전》에 출품된 <농악>이나, 1950년대 초반 큐비즘의 영향으로 형태를 크게 단순화한 탈춤시리즈는 이러한 남산시절의 여운이었다. 특히 김기창은 민화에 대한 수집 붐이 일어나던 초기부터 운향화실을 통해 많은 민화를 수집하였다. 1972년 《공간》 잡지 7월호 민화관련 특집 기획에서 김호연은 그간 김기창이 수집한 효제도(孝悌圖)를 자료삼아 민화 문자도의 도상을 분석한 본격적인 관련 논문을 싣기도 했다. 김기창 자신도 민화에 대한 의견을 지면을 통해 거듭 드러냈는데, 1962년 임인년 호랑이해를 기념하기 위해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호도전》에 대한 소고에서 “옛부터 우리 동양화에 있어서는 산수화나 화조화 같은 것은 중국 것을 그대로 옮겨 놓기가 다반사였지만, 우수한 초상화나 드문 호도 같은 특별한 것은 좀 다른 각도로 당시의 사회상이 잘 반영되어 왔다”고 하여 민화의 한국적 독자성을 강조하였다.⁴⁾
그림에서 확인하듯이 김기창이 빠르고 경쾌하게 그려낸 1977년 작품 <화조도>(도 9)는 일본 구라시키 민예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같은 장르의 민화(도 8)를 해학적이면서도 분방하게 그려낸 채색화이다. 김기창이 일찍이 민화에 주목한 이유는 그를 둘러싼 왜색 논란에서 벗어나고, 수묵 중심의 주류 화단과 대항적인 위치를 모색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풍속화를 청록산수 풍으로 결합한 바보산수로 결실을 보았다. 어머니의 고향인 충북 청원에 정착한 뒤인 1976년 처음 선보인 바보산수에 대해서, 김기창은 “나는 오랫동안 근원을 찾아 헤매다가, 한국적이면서도 순수한 인간의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해 놓은 것이 민화임을 알게 되었다. 바보산수는 그러한 민화의 정신을 내 나름의 작품세계에 담아보려고 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민화가 지니는 참신한 발상이나 치졸한 기법, 자유로운 필획을 통해 산수화의 전통적 규범과 형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 같다.
김기창은 이 외에도 문자도를 추상적으로 변형하는 등, 민화를 통해 전통화의 표현과 발상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리고 수묵화의 계보에서 벗어난 김기창의 호방한 채색화는 1990년대 민화적 해학성을 중시했던 사석원이나 김병종, 이왈종 등의 작품으로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

굿과 무속연행과 한국 현대미술
한편 1960년대 중반 민화는 서양의 팝아트가 들어오면서 전후 등장한 젊은 현대작가들도 색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들은 4·19 이후 앵포르멜 추상미술을 주도했던 세대 미술가들로 전후 전위화가로 자처하며 국제 미술의 변화에 민감하였다. 전후 감정을 앵포르멜의 거칠고 무거운 추상으로 구현하고자 하였으나, 국제미술은 1960년대 중반 급변하여 대중문화와 키네틱, 설치미술, 기하학적 추상과 팝아트가 넘쳐나게 되었다. 무엇보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환경의 변화는 전후(戰後) 미학에서 벗어나야 할 물질적 조건이 되어 있었다.
앵포르멜에서 팝아트로의 전환, 미술가들은 이 극적인 선회를 위한 모색으로 단청, 불화, 그리고 무속화의에 강렬한 채색과 자유분방함을 차용하고자 했다. 앵포르멜 미술 운동을 선도하였던 박서보 1966년 9월 한 신문 인터뷰에서 “굿놀이 혹은 신풀이 성황당 같은 것이 추상화되”고 “원시인들이 빛깔의 조화를 이루지 못해 오히려 천기마저 느끼게 하는” 그러한 작품을 그려내고자 하며, 이는 어릴 때 감화를 받았던 토착사상들, 잊었던 서민감정들이 강렬하게 사무쳐 왔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박서보는 《巫祭展》을 통해 무속화, 민화의 현대적인 변용을 시도하였던 것으로, 1968년 <유전질>(도 10)은 <무제>라는 제목이 더 알맞게 적, 청, 황, 백, 흑색을 주조로 한 화려한 오방색으로 처리되었다. 당시 무속에 대한 관심은 설치와 행위미술가들에게 영감이 되었는데, 한국 행위미술의 선두주자이기도 했던 이승택은 무속의 초혼굿에서 영향을 받아, 독특한 대지미술(도 11)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즐겨 이용하는 청색과 홍색, 동여매는 작업이 “성황당이나 풍어제를 염두에 둔 서민들의 생명력”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기 급격한 국제 미술계의 변화와 전통 문화의 괴리에서 현대작가들은 적절한 해법을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미학적으로 실존철학에서 출발하고 추상미술을 추구했던 전후 현대 미술가들에게 무속이나 민화의 설화적인 요소나 구상적 조형성은 끼어들기 힘들었다. 1969년 ‘가정의례준칙’의 실행으로 전통 상례는 단절되기 시작했으며, 1972년 새마을 운동과 이후 근대화가 가속화되면서 민간신앙과 세시풍속은 생활에서 유리되어 민속자료로 급속히 박제화되었다. 재미 사회학자 최정무는 “1972년에 이르러, 무녀의 치료행위는 ‘비과학적, 비윤리적, 사이비’라는 이유 때문에 사회악으로 지목되면서 무속은 미신타파의 목표가 되었다. 이것은 근대화 프로그램인 새마을 운동과 유신의 전주곡이었다”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 무속사진으로 유명한 김수남(1949~2006)은 1970년대는 무당을 미신을 유포한다는 죄목으로 유치장에 잡아 가두기도 했던 시대였던지라 사진기를 들고 굿판에 나타나면 경찰의 끄나풀로 오인 받기도 했다고 회고하였다.⁸⁾ 이처럼 전승 생활양식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강화된 것은 점차 대학가나 재야를 중심으로 사회저항 세력이 민중의 기층문화형식과 결합해 가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했다.

3) 김호연, <민화란 무엇인가>, 《한국의 민화》 (열화당, 1976)
4) 김기창, <논문 호랑이 그림 이야기(1962. 3. 1>, 《운보 김기창, 침묵의 심연에서 나의 화필 60년》( 법조각, 1988), pp. 286-291.
5) 「巫際展을 갖는 화가 박서보씨, 앞장섰던 아방가르드로서도 탈출, 색채 통한 새 화풍 시도, 그림 같지 않은 그림으로」, 『서울신문』 (1966. 9. 13)
6) 이승택, <무속과 비조각의 만남>,《이승택 비조각전》, 후화랑 카탈로그 1986. 쪽 표시 없음.
7) Chungmoo Choi, The Competence of Korean Shamans As Performers of Folkore, Diss, of Doc, Indiana Uni,, 1987, p, 75-76.
8) 김수남, 《굿, 영혼을 부르는 소리》 (열화당, 2005)

Ⅲ. 민주화 시대의 민화

1980년대는 사회저항과 민중미술, 민주주의에 욕구가 폭발했던 시대였다. 보통사람, 서민, 민중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으며, 민권과 개인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또한 대학가 재야를 중심으로 냉전 이후 전후 질서, 한미 관계에 대한 수정주의 사관이 모색되면서, 전후 한미관계와 국제 질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표출되었다. 문화적으로는 엘리트 미술 대(對) 민중 미술이라는 계급적 대립각이 선명해졌다.⁹⁾ 소수의 시장, 갤러리, 미술관 중심의 ‘유한층의 속물’ 취미¹⁰⁾ 대신에 현실을 반영하고 서민의 삶에서 유용한 사실주의가 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전통도 선별되면서 민화를 민중들의 원형적 미술로 보는 이론이 구축 강화되었다. 각 대학마다 결성된 대학의 민화반 활동도 민간 속화나 기층 시각문화가 재발견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에 민족 리얼리즘 계열의 미술가들은 부적, 만장, 탱화와 같은 민화적 형식을 적극 차용하였다. 이들은 1970년대와 달리 특정 모티브나 화려한 채색, 데포르메나 평면성과 같은 조형형식의 차원을 넘어 민중의 역동적인 생명력을 간직한 토착문화로 퇴폐한 현대 사회를 재생하려는 목적성이 강했다.

오윤의 판화
오윤(吳潤, 1946~1986)은 1969년 현실동인을 결성하고 삶의 미술을 주장한 현실비판적 미술가로서 목판화와 회화를 통해 전통 민화를 적극 차용 새로운 현실주의 미술을 선구적으로 제시하였다. 서울대 조소과 출신인 오윤의 1960년대 작품은 조각적인 입체감이 두드러졌고, 멕시코 벽화와 같은 제3세계 리얼리즘의 영향이 농후했다(도 12). 그러나 강증산의 동학사상을 탐문했고, 홍명희(洪命憙, 1888~?)의 《임꺽정》과 이동주의 《한국회화소사》를 읽으며 역사 속 민초들의 삶과 미학을 추구하게 된다. 특히 1970년대 제도권 미술계와 거리를 둔 오윤은 경주에서 신라 토우를 배우고 전통 벽돌을 연구해 공장을 여는 등 자신의 생활에서 전통과 미술을 통합시키려 애썼다.

판화는 1975년 수유리 시절, 출판사 청년사와의 인연으로1978년 이오덕의 『일하는 아이들』 , 1985년 김지하의 《남녘땅 뱃노래》 등, 수많은 서적의 표지와 삽화 작업에 참여하면서 제작하게 되었다. 빠른 제작을 위해 고무판을 주로 사용했지만, 굵고 각진 선과 흑백의 대조는 목각판화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목판 세화가 민간 회화로 발달했던 중국과 달리, 우리의 민화에는 붓그림이 많지만 조선시대 후기 불교나 감상용, 그리고 부적 등에 판화가 사용되기도 했다.¹¹⁾ 오윤은 조선시대 목판의 전통과, 중국 노신(魯迅, 1881~1931)이 주도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판화, 그리고 독일 표현주의를 모두 수용하였다. 그리고 강하고 간결하면서도 힘찬 선과 분명한 의미를 담아 노동하고 연희와 놀이하는 서민들의 다양한 인물 전형을 새롭게 시각화했다. 탈춤과 판소리 마당극뿐 아니라 동네 학춤의 전수자 집안 내력답게 전통 연희의 흥과 신명을 담아냈는데, <칼춤>(도 13)에서 보듯이 춤사위가 강조된 인물에서는 ‘민중’의 강렬한 힘과 원초적 생명력 넘쳐난다
또한 벽사의 이미지인 도깨비를 불러와 현실비판의 매개로 삼기도 했다. 이를 본 김지하는 오윤의 도깨비 그림은 ‘추의 미학’ 숭고와 괴기, 익살과 청승, 한과 흥, 이승과 저승의 융합이었다고 술회했다.¹²⁾ 오윤이 판화로 혹은 목각 판화 양식으로 개발한 판화는 김철수, 김봉준 등 많은 민중 미술가들에 의해 계승되는데, 특히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내었던 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내라>(도 14)는 현실 정치에 대항하는 의지의 아이콘이 되었다.
오윤은 빠른 제작을 위해 정교한 다색 판화보다는 목판에 채색을 하는 방식을 썼으며, 감상이나 미술시장에서의 판매를 위한 에디션에 한정하지 않았다.¹³⁾ 오윤은 한 좌담에서 “민화의 요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살아가는 것” 이라고 강조하였는데, ‘상투적 액자 미술’이 아니라 생활에서 쓰임이 있는 비싸지 않은 서민 회화를 지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¹⁴⁾ 아이러니하게도 상업미술에 대한 거부감으로 그저 몇 점 찍어내고 필요한 이들에게 거저 주었던 오윤의 판화는 그가 죽은 후 그 수효가 적고 귀해 가격이 더 오르게 되었지만 애초 오윤의 의도는 상업성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오윤의 판화작업은 1970년대 이전 모더니즘 계열의 목판화와는 달리, 포스터, 삽화, 표지와 같은 실제 쓰임이라는 매체의 본성에 준하는 것이었다.

민화. 민중미술 민족미술
판화운동과 함께 1980년대 민중미술가들은 탱화나 부적과 같은 불교와 무속의 도상을 차용하고 새롭게 해석하였다. 종교적 의례에 사용되었던 그림은 생로병사 인간의 희로애락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화목보다 한국인의 정서가 깊게 반영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오윤은 1980년 제1회 《현실과 발언전》에 <마케팅1-지옥도>(도 15)를 출품하였는데, 외국의 리얼리즘 형식 대신에 감로 탱화의 형식을 차용하여 현실의 세태를 풍자하였다.
감로탱화란 조선시대 불교에서 사용된 걸개식 그림으로 중생이 업의 굴레에서 벗어나 불·보살의 자비가 깃든 ‘감로(甘露)’로 구제받을 수 있다는”는 내용을 도상화한 종교화이다. 지옥과 현세, 내세의 3단 구성이 일반적인데, 특히 현 세계를 반영하는 지옥도에는 엄격한 종교적 도상을 넘어 풍속화의 영향을 받는 등, 작가의 창의성과 시대의 흐름이 더욱 자유롭게 반영되었다. 오윤은 특히 전라남도 구례의 화엄사 명부전(冥府殿)에 봉안된 시왕도(十王圖)를 차용하여 소비 상품주의가 만연하고 외국 자본에 우리의 농촌이 몰락하는 장면을 알기 쉬우면서도 익살스럽게 그려냈다.¹⁵⁾ 특히 소위 ‘벽지화’라고 하는 단색 추상미술에 빠진 미술계의 모습도 유머러스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화 양식은 민중적 리얼리즘을 주장하였던 소그룹 ‘두렁’ (도 16)화가들에게 계승되어, 김봉준은 <만상천하>(도 17)는 불교 걸개그림에 만화적 요소를 더하여 더욱 당대성을 부각시켰다. 한편 고답적 미학을 거부하고 대중과의 소통을 중시했던 미술가들은 만화가 가지는 대중문화로서의 가치를 재인식하였다. 만화에 서사를 덧붙이는 시리즈 회화인 민정기의 <한씨연대기>와 같은 작품은 새롭게 번안된 20세기 후반의 민화라고 할만 했다.¹⁶⁾
이들 현대판 풍속도에는 당시의 시대 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1980년대 사회변혁을 꿈꾸었던 이들은 물질 만능주의와 서구 풍조에 물든 도시 문화를 멀리하고, 농촌 공동체의 만상천하 대동 세계를 이상향으로 설정하는 것이었다.¹⁷⁾ 이러한 역사관은 1980년대 반제국주의와 반자본주의 민족이념에 바탕을 둔 것으로, 최종 목적은 오염되지 않은 민족 고유의 독자성으로 회귀하는 데에 두고 있었던 만큼 그 이상은 낭만적이고 복고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1980년대 담론은 이전 이국적 포크미술로서 수집되기 시작한 민화에 본격적으로 ‘민중’의 미술이라는 계급성을 부여하는 새 국면을 맞게 하였다. 비평가 원동석과 라원식은 ‘민화’라는 말 대신에 적극적으로 ‘민족미술, 민중미술’이라는 상위 범주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원동석은 1975년에 쓴, 민중미술에 대한 선구적 글에서 민족문화를 위해서는 민중의 참여활동이 주요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의식적인 상부분화는 과거 속으로 사라졌어도 오늘날 민족문화의 저변에 살아 있는 것은 이러한 무의식적인 민중문화”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하였다.¹⁸⁾
이러한 견해는 이후 조선시대 궁중화, 민화 산수화에 대한 연구가 확대되고, 동아시아 시각문화의 보편성 속에 한국의 민화를 연구하는 입장이 나타나기까지 ‘민화’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입장이었다.

박생광의 무녀도
내고 박생광 (乃古 朴生光, 1904~1985)이 1979년 진화랑에서 전시를 열고 발표한 <무녀도>(도 18)는 주홍색 윤곽선이 선명한 가운데 푸른 무복을 입은 무녀의 신기 어린 흰 얼굴과 터져나갈 듯한 원색의 폭발로 당시 추상미술 일색의 화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78년 시작한 무속 연작은 일본화풍으로 폄하되던 자신의 미술세계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기도 했다.
경상남도 진주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와 1970년대 두 차례 일본에 유학하고, 일본 미술원전과 같은 관전을 중심으로 활동한 박생광은 금지나 은지, 호분을 사용하는 등 확실히 일본화의 영향이 짙었다. 그러나 1977년 일본에서 두 번째 유학에서 귀국한 이후에는 단청과 오방색을 조금씩 실험하더니, 1978년 <무녀도> 시리즈를 통해 강렬한 채색 화풍으로 전환하였다. 마을 어귀 당집에 걸린 으스스한 무속화를 연상시키는 섬뜩하고 강렬한 그림이었다. 이러한 조형상의 극적인 전환은 화가로서도 환골탈태하는 것이라, 박생광은 이전까지 쓰던 한자사인을 버리고, 마치 부적을 연상시키는 도장글씨로 한글 “그대로 박생광”이라 서명하고 단기로 날짜를 기록하였다.
민화의 여러 장르 중에서도 무속화는 민족의 삶과 관련해 더욱 원초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각적 효과 역시 강렬하다. 그러나 무속은 전근대성과 민족주의가 교차하는 이중적 영역으로 일제 강압기 일본 촉탁 인류학자들에 의해 식민지의 후진성으로 다루어지거나 아카이브의 자료로 수집되고 재현되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소재로 차용되는 정도였다.¹⁹⁾ 이는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여서 무속화의 강렬한 채색은 왜색 청산이라는 명분에 밀려 화단에서는 거의 금기시되었고 전통화단은 담박한 수묵 담채화로 한국성을 구현하려고 했다. 국토를 근대화하기 위해 급박하게 이루어진 새마을 운동으로 인해 민간에서 이어지던 무속은 비합리적 미신으로 공동체에서 뿌리 뽑혀나갔다. 그러던 것이 김태곤(金泰坤, 1937-1996)과 같은 민속학자들에 의해 한국인들의 원형적 사고(arch-pattern)이라거나 ‘창조 에너지’로 이해되기 시작했다.²⁰⁾ 1970년대 이후 국학연구가 활발해지고 1980년대 ‘국풍’이라는 문화기획이 정치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굿과 무당에 대한 방송과 잡지의 기획이 많아졌다. 특히 무속인 김금화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져, 1981년 5월에는 미국 유학생 출신의 신딸이 김금화에게 내림굿을 받는 장면은 KBS로 방영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소설가 김동리(金東里, 1913~1995)의 『무녀도』(1936)에서 퇴락한 토착문화의 상징이었던 무속의 당당한 부활이자, 민족 문화의 생명력을 되살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 문화의 배경은 박생광이 과감하게 화풍을 전환하는 데 동기가 되었다.

박생광은 1981년 백상화랑에서 연 개인전에 불교와 무속, 십장생과 부적 등 대작의 채색화를 선보였다. 화가의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대작 그림에 ‘현실과 발언’으로 본격화된 현실주의 리얼리즘 미술 진영에도 큰 자극이 되었으며 이후 원동석과 같은 민중미술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고 교감하면서 1983년 <명성황후>와 1984년 <전봉준>과 같은 역사인물화를 제작하게 되었다.(도 19) 이 그림들은 봉건적 신분질서에 항거하는 민중 혁명을 그린 역사화이자 1980년대 민주화 정신을 함축하는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생광의 재창조된 민화적 상상력은 민중 진영 뿐 아니라 수묵화 위주의 한국화와 모노톤이 대세이던 서양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서양화가 하인두는 1985년 파리에서 열린 박생광의 전시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아 자신의 색채 추상을 더욱 심화시켜 나갔다.

9) 김영나, <현대미술에서의 전통의 선별과 계승: 1970년대의 모노크롬 미술과 1980년대의 민중미술>《정신문화연구》, 제23권 제4호(통권 81호), 2000. 겨울호. pp. 33-53.
10) 1980년 10월 7일 ‘현실과 발언’ 창립취지문의 언급된 내용이다.
11) 정병모, <한국 민화와 중국 민간연화의 비교>,《동아시아의 민화》(국립민속박물관, 2006), pp. 59-90.
12) 김지하, <중력적 초월이라는 생명과 그마저 벗어난 큰 평화-오윤과 나>, 《오윤 낮도깨비 신명마당》, pp. 298-305
13) 유홍준, <오윤 예술에 대한 미술사적 회상>, 《춤추는 도깨비》, 오윤기념사업회(ARA art, 2012)
14) <좌담, 오늘의 우리에게 굿은 무엇인가>, 《옹진 배 연신굿》 (열화당, 1986), pp. 91-115.
15) 정병윤, <오윤의 <마케팅> 연작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석사논문), pp.13-23.
16) 최민화, <삶의 무기로서의 만화>, 《현실과 발언: 1980년대 새로운 미술을 향하여》 (열화당, 1985)
17) 김남희, <19세기 감로탱화와 풍속화의 비교연구>, 《미술교육논총》, vol. 32 (2012) pp. 277-298.
18) 원동석, 민족주의와 예술의 이념, 원광문화 제2집, 1975, 《원동석미술평론집, 민족미술의 논리와 전망》 (풀빛, 1985), pp. 23-24.
19) 일제시대 촉탁연구의 결과물인 유리원판 사진에 관한 후기 식민주의적 관점의 전시회로는 《그들의 시선으로 본 근대, 서울대학교 박물관소장 유리건판사진전Ⅱ》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4) 이 있다.
20) 김성례, <무속전통의 담론 분석-해체와 전망>, 《한국문화인류학》 (22집, 1990). pp. 211-243.

Ⅳ. 1990년대와 그 이후

한국 현대미술에서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 심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폭발한 한국 채색화의 과감한 구상적 요소와 자유분방한 색채는, 내부적으로는 수묵화 전통, 모노톤의 추상미술에 대한 반감 등이 작용했지만, 대외적으로는 때 마침 일어난 독일, 미국, 이탈리아의 신표현주의 사조와 때를 같이 확산되었다.
황창배, 사석원, 김종학, 서용선과 같은 소위 한국 신표현주의 작가들은, 서구의 신표현주의가 미국과 이탈리아, 독일 등 각 나라마다의 독특한 역사, 문화적 환경에 대해 반응했던 것처럼 과감하게 민화적 소재나 역사를 적극 이용하여 화면에 생명감을 불어넣었다.
김종학은 1979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설악산이라는 주제를 반복하면서 겸재의 산수화를 차용한 개성적인 산수화와 길상의 성격이 강한 꽃 그림을 그려냈다(도20). 특히 2003년 제작한 <백화만발>에서 보듯이 김종학의 꽃그림은 붉은 천에 수를 놓아 베개머리 장식으로 쓰는 민수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김종학은 관찰로 체득한 설악산의 꽃들을 화조화의 도상과 융합하여 사실과 상징의 세계를 초월한 독자적 세계를 일구었을 뿐 아니라, 아크릴을 직접 캔버스에 짜고 내지르듯 급하게 일필휘지하는 강렬함으로 젊은 시절 매체와 씨름했던 아방가르드로서의 면모를 지속하였다.
황창배(1947~2001)는 1980년대 민화적 요소와 설화적 내용을 담은 작품들을 거쳐 1990년대 색면의 강조를 통한 평면작업을 선보였는데, 특히 먹, 화선지, 호분 같은 한국화의 재료를 벗어나 아크릴 물감이나 유채 등 서양화의 재료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더불어 소재에 있어서도 산수나, 인물, 화조 등 특정 장르에 머무르지 않았다. 심지어 붓 외에도 손이나 나이프를 활용하여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끊임없는 실험은 민화적 파격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서용선은 형식보다는 역사적 내용에 몰두했다. 특히 조선시대 단종의 역사를 통해 정치과 권력, 역사의 명암을 다루는 방식은 거친 선과 붉고 푸른 색채의 충돌로 증폭되었다. 그 세련되지 않은 거친 대작의 화면은 전통 무속화의 생경함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대중성과 표면을 강조하는 컨템퍼러리 미술계에서 시간의 주름에 묻혀버린 역사의 여러 질곡을 드러내는 서용선은 묵직한 주제의식으로 독자적인 역사화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를 서울에 유치하고 한국 미술계에 모습을 드러낸 백남준(1932~2006)은 샤먼으로서의 미술을 주장하며 현대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굿을 차용한 퍼포먼스를 벌였다. 독일의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와 교감하며, 플럭서스와 일본의 전위미술에서 활동하고 비디오 아트라는 새 미디어 아트의 문을 열었던 이 세계적 미술가는, 미술을 제의와 샤먼의 행위로 보았던 것이다. 한편 2000년대 컨템포러리 미술가들은 다양한 문맥에서 민화, 무속의 주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설치와 미디어, 퍼포먼스의 적극적 차용이 두드러지는데, 박찬경의 영화 <만신>(도 21)은 오리엔탈리즘과 근대화에 이중으로 억압된 아시아 성을 드러내는 전략적 소재였다.
물론 이 외에도 현대에 있어 민화를 차용하는 젊은 화가들은 매우 많다. 그러나 이 글은 하나의 정전으로 구축된 한국 현대미술에서, 그 과정에 민화의 요소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대표적인 예들을 쫓아보며 살펴본 결과이다. 김환기에서 백남준을 거쳐 박찬경에 이르기까지 전후 한국 현대미술에서의 ‘민화’ 혹은 무속과 한국의 토속 시각문화는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부여하고, 한계를 넘어 독자적 회화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데 영감이자 동력이 되었다. 모더니즘 화가들에게 새로운 조형 실험의 원천이었으며, 산업화시대를 통과하면서 억압되었던 것들의 회귀가 1980년대 다양한 민화의 현대적 계승으로 나타났다. 1990년대 이후 신표현주의와 소비사외의 대중적 감정을 여전히 민화적 주제로 차용하여 표현하는 예가 많다.
‘민화’적 요소는 한국 미술사의 국면 전환기 마다 강력한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한국화에서 채색화의 전통을 되살리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 면에서 민화는 엘리트 중심의 닫힌 한국 현대미술의 맹점과 결여에 대한 거울이자 대안적(혹은 대항적) 미술운동이었다고 할만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민화는 참조해야 할 전통이었지, 모방과 답습의 대상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최근 민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데에는, 토착 시각문화에 대한 긍정적 재인식과 함께 지나치게 현학적이며 자폐적인 현대미술에 대한 반감도 작용하고 있다. 민화의 정신은 서민, 즉 보통 사람들, 대중이나 공중의 현실적 감정과 욕구,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화의 전통과 의미는 보다 적극적인 차용되어 다양한 매체와 새로운 방식으로 거듭 창안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