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 Ⅰ. 머리말
• Ⅱ. 한국 현대작품과 민화의 위상
• Ⅲ. 한국 현대미술에서 민화의 이코노그래피
• Ⅳ. 맺음말

※이 논문은 한국민화의 과제와 나아갈 방향이라는 주제로 열린 ‘2014 한국민화 학술대회’에서 9월 20일에 발표한 내용을 전제한 것입니다.

Ⅰ. 머리말

한국 현대미술은 국제성을 의미하는 글로벌리즘 논의를 넘어 글로컬리즘(세계통합주의globalism와 지역중심주의localism의 합성어 glocalism)의 담론에 위치해 있다. 그것은 혼종문화의 시대에 들어선 사회가 보여준 일련의 법칙 아래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혼종문화가 득세할수록 ‘민족적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보수주의’가 득세한다는¹⁾ 현상을 미술에 곧바로 적용할 수는 없다. 미술은 문학보다 급진적이고 경계를 넘는 성격이 강하며 시대마다 아방가르드가 존재했던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국 현대미술에서 소비되는 민화적 요소를 글로컬리즘의 잣대로 적용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현대미술의 자양분으로 칭해지는 민화의 차용(借用) 혹은 이용이나 접목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한국 현대미술의 일부 작가들은 분명 ‘민화적 요소’를 작품의 특징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소재주의로서의 접근은 작품의 한계와 작가적 특성의 분리를 어렵게 한다. 채색(彩色), 도상(圖像) 혹은 구도(構圖)에서 민화적 요소를 확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전통으로서 민화를 차용하는 측면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민화의 정체성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판단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의 강력한 전략인 ‘전통을 소비하기’에 다름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도 있다.²⁾
그렇다면 왜 한국현대미술에서는 ‘민화’라는 코드 아래 작품을 진행하는 일련의 작가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일까. 이는 한국 현대미술에서 후기산업사회의 특징 중 하나인 신속한 정보전달과 해독을 목표로 한 작품들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해독할 수 있는 작품을 요구하는 대중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으며, 정보가 넘치는 시대의 다른 세계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단서로 미술작품 대하는 태도와도 또한 무관하지 않다. 이는 민화의 특성이 여전히 한국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유효한 전통의 요소를 지니고 있음을 방증한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민화적 요소를 파악하는 것은 일견 매우 용이해 보인다. 이미 각인된 특징이 뇌리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까치호랑이부터 모란에 이르기까지 단순한 윤곽과 화려한 채색을 기조로 한 무한반복의 세계이다. 일종의 전형성으로 이해된다는 말이다. 그 전형은 도상(圖像, Icon)을 바탕으로 형성하기에 민화의 의미와 형식이 어떤 양상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근간을 이루는가를 파악하는 단서가 된다. 민화가 갖는 형태가 의미를 동반하는 법칙이 현대미술에서도 여전히 존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도상해석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연구의 의미는 민화의 현대화가 외형의 문제인가 내면화인가 아니면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양상의 미술의 가능성을 연 것인가를 파악하는 잣대를 얻는 데도 있다.

1) 장희권, 『글로컬리즘과 독일문화논쟁』, 산지니, 2013 참조.
2) 조은정, 「전후 한국현대미술의 이념적 동인」,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25권, 2013, p.147 참조.

Ⅱ. 한국 현대작품과 민화의 위상

민화를 형식적이든 내용으로든 자신의 작품세계에 포함하는 작가들의 등장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한 부분에 위치한다.³⁾ 헌데 현재진행형의 평단(評壇)에서 조우하는 작가들의 민화적 요소를 담은 작품은 작가적 양식의 견고한 미술사적 위치를 점하기 위한 의도로서라도 택하게 되는 지속성에서 벗어나 일회적, 일시적이거나 특정 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인 경우가 많다. 이는 현대작가들이 ‘대중과 소통하기’의 방식으로 민화적 요소를 도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한 작가의 양식적 특성의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에서 보자면, 민화가 소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회적 상황에 근거한 것이기도 한다.
현대미술의 모더니즘은 구상을 기반으로 한 이전의 미술을 타자화 하였고, 수용하는 전통은 정신의 가시화로서 백자(白磁)의 미와 전통 산수화(山水畵)를 선택하였다. 공고한 민족적 미술의 논리적 틀을 선택한 데서 나아가 민화가 전통의 이름으로 혹은 유효한 소통의 언어로 한국 현대미술계에 수용된 것은 한국적 특수상황이라 할 비서구적인 판단의 모델 도입과 탈모더니즘 담론과 무관하지 않다. 비 서구미술에서의 가치 도입은 멕시코 벽화운동, 중국 뤼신(魯迅, 1881-1936)의 판화운동에 대한 조명이 대표적인 예이다. 민족적 통합을 위하여 서사(敍事)를 작품에 표현한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의 벽화와 중국에서 보여준 민중의 손으로 제작하는 미술의 힘은 우리나라 민중미술의 자양분이기도 했다.
한국미술의 자생성에 가치를 두는 방식은 우리 내부를 타자화 하였던 추상미술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전개되었다. 그 중심에서 한국미술의 전통 혹은 우리미술의 실체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고 한국적인 미술, 한국성의 표현이 미술계의 한 관심사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서구 중심의 추상미술에 대한 대척점에서 전통의 오방색과 미술에서의 구조파악은 2000년대 들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후기산업시대의 가속화와 성공적으로 자본주의에 편입된 한국사회에서 미술시장의 판도 또한 변화한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미술은 ‘시장’으로 논의되고 수용되었다. 특수계층의 혹은 일부에서 점유하는 미술이 아니라 대중이 누리는 미술은 ‘소통’을 화두로 삼게 되었고, 일상의 소소함과 일상의 발견은 마치 근대기 지식인인 플라뇌르(flaneure)가 산보하는 파리의 모습처럼 우리를 관찰하고 타자화 하여 분해하는 시각을 생산하였다.
아케이드가 도시의 표정을 형성하는 파리와 베를린을 동시에 경험하였던 벤야민의 근대의식은 백 여년 뒤 서울에서도 유효하였으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경험이기도 하다. 정신적 가치의 표현으로서 미술이 아닌 시장에서 판매되는 물품, 상품으로서 미술의 전개과정에서 민화적 요소가 강화된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이러한 논리를 방증한다. 외형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이는 1980년대 한국성이나 전통담론 아래 생성된 작품들과는 다른 층위의 것이다. 당시 민족성을 기반으로 한 한국성의 성격은 서구라는 상대편에 선 비서구의 담론을 위한 시금석이었다. 반면 2000년대의 한국 혹은 전통의 상징으로 채용된 민화적 요소는 누구나 인지하는 상품으로서의 가치, 소비되는 소통의 도구였던 것이다.
1971년 ‘한국적 미술의 정립’을 위해 제안한 김윤수는 ‘문헌에 나타난 선조들의 미학사상을 종합하는’ 것을 첫째로 할 일로 꼽은 반면 조자용은 ‘한국적인 것의 대표적인 것을 민화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전통적인 입장에서 보면 속기가 지나친 유치한 그림이지만 한국의 고유한 멋을 풍긴다”고 하였다.⁴⁾ ‘민화가들이 오히려 한국적 예술가들’이라는 조자용의 주장이 당시에는 생경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민화를 민중의 미술로 파악하고 서민적 풍취로 규정함으로써 공예에서의 ‘활용’으로 나아가게 하였고 결국 장식문양으로 유포되는 결과를 낳았다.⁵⁾ 하지만 이 시기 민화가 대중에게 달력을 통해 유포된 것은 필자의 관심을 끈다. 한국적 미술의 원형을 찾는 길에서 민화가 대중을 대상으로 재발견되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달력을 통한 유포는 세화(歲畵)의 기능으로 민화를 소비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이해된다.⁶⁾ 이럴 즈음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의 조자용에 의한 민화 전시는 그가 “한국문화의 해외소개”로서 중국이나 일본의 것과 구분할 수 있는 민화를 앞장세운 전략적 입장에서였다. 그는 민화가 국제적으로 한국만의 특징적인 미술이자 경쟁성을 갖춘 미술로서 파악하였다.⁷⁾ 민화의 가능성은 외부의 눈을 통해 내부에서 당위성을 얻을 수 있던 시대였던 것이다.
1980년 관전이었던 국전이 민간에 이양되자 당시 미술사학자 정병관은 <국전>이 프랑스의 <살롱전>처럼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미술작품이 존재하는 공간일 것을 꿈꾸었다. 그는 대중문화시대에 미술이 특수계층의 향유물이 될 수 없다며 ‘민화의 전통이 이전 전람회에 현대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전망하며 누구나 교육만 받으면 제작할 수 있는 민화를 국전의 한 분야로 구성할 것을 제안하였다.⁸⁾ 미술계 내부에서 대중문화와 민화의 연관성이 제기된 것이다. 향수자이자 생산자로서 민화에의 접근은 이어진 민화동호회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서 확인된다. 민화양식의 재해석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도 80년대 초반이었다. 조자용의 콜렉션이 미국 부룩클린미술관에 소개되고 뒤이어 호암미술관에서 민화전이 개최된 것이나 이만익을 소개하며 ‘평면적인 구성에 대담한 원색으로 민화의 현대적 변주’로 설명하고 있는 점 등은⁹⁾ 민화가 한국적인 특성을 담보하는 상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민화적 소재를 석채화로 나타낸 이영수, 단군의 신시 등 설화를 작업에 끌어들인 백수남, 민화나 단청을 현대회화로 대입시켜 해석하는 작업을 보인 황창배, 이서지, 임봉규 등의 작업이 주목을 받으며 한 시기의 특성으로 파악된 것은 1987년이었다.¹⁰⁾ 정하정, 나정태, 서정태, 이규환 등이 등장하며 민화에서 볼 수 있는 진채의 화사한 색감을 한국화의 영역에서 살려낸 것도 이때였다.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민화전과 민화를 주제로 한 전시가 많아진 것은 결국 대서구적인 시각에서 대안으로 제시한 한국적 미술의 양상이라 할 수 있다. “민화에 나타난 재미있는 표현방법, 색감이야말로 현대미술이 활용할 수 있는 보배로운 밥이라고 생각”한다는 송수남의 발언은¹¹⁾ 동양화가 전통회화에서 새로움을 창신하기 위하여 수묵(水墨)을 선택하였고, 그 전통회화의 영역에서부터 민화의 형태와 색감에서 발견한 특성을 기반으로 대중적 방법론적으로 전환한 것이다.
90년대 들어 전통 민화의 기법을 익힌 민화작가들이 성장하고 화단의 한 영역을 이룸으로써 민화는 다시금 기성화단에서의 민화적 요소의 사용과 민화작가라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구분은 민화의 전통기법의 계승과 이의 해석이라는 차원으로의 이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세득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민화나 단청의 요소 등 서양화에서 한국적인 것의 표현은 설화나 구조 등으로 내용화 하고, 한국화의 진채 부분에서 민화적 요소가 강화된 것은 90년대의 현상이다. 왜색논의 아래 자유로울 수 없던 채색화가 민화라는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은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동호회에서부터 아마추어작가로 그리고 민화전문가로 양성된 민화화가들의 신장은 한국화단에서 민화의 위치를 변화시켰다.
‘나이브미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¹²⁾ 민화는 ‘한국인의 얼’이라는 정신적 영역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¹³⁾ 민화적 분위기, 전통의 민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기 등으로 수사되는 현대미술작품과 민화의 관계는 상징의 영역으로 들어섬에 따라 오히려 현대미술에서 민화적 특성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짙은 채색, 꽃이나 문자 등의 요소는 민화와 민화적 요소를 구분하는 준거가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민화의 상징과 내포, 의미와 관계망을 파악함으로써 작품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3) 이 연구에서는 다른 연구자와의 연구범위의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현대 평단에서 활동중인 작가들에 한정하여 살피고자 한다.
4) 「정립 서두르는 한국의 미학」, 『경향신문』, 1973. 3. 12.
5) 이경성, 「심사후기」, 『동아일보』, 1976. 9. 16.
6) 「여적」, 『경향신문』, 1976. 12. 22.
7) 조자용, 「세계의 길목, 본대로 느낀대로, 미국에 심은 문화외교, 로스엔젤레스 전시회를 끝내고」, 『경향신문』, 1977. 8. 5.
8) 정병관, 「대중문화시대의 국전」, 『경향신문』, 1980. 9. 15.
9) 「이만익유화전」, 『매일경제』, 1987. 6. 5.
10) 이용우, 「‘87미술계, 한국적 소재 현대화 작업」, 『동아일보』, 1987. 12. 11.
11) 「宋秀南(송수남)씨 판화전 民畵的(민화적) 표현…실크스크린 주종」, 『동아일보』, 1989. 12. 1.
12) 「나이브미술 국내 첫선, 붓가는 대로 그린다」, 『동아일보』, 1992. 6. 23.
13) 「‘강렬한 색채 통해 우리 얼 표현’ 한국화가 장혜용 씨」, 『동아일보』, 1992. 8. 26.

Ⅲ. 한국 현대미술에서 민화의 이코노그래피(Iconography)

도상학, 도상해석학이라고도 칭해지는 이코노그래피는 이제 더 이상 파노프스키가 정립한 것처럼 모든 시대, 모든 미술에 대해 명쾌하게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자연이나 대상의 외형을 재현하고 그것이 의미화 하는 과정을 추론하는 도상해석학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민화가 어떤 방식으로 수용되는가를 밝힐 수 있는 도식을 제공한다.
탈전통의 세계에 존재하는 우리는 열린 선택의 상황에 처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의 습속에서 벗어나 완전히 합리성으로 대체되는 순간에 존재하지도 않는다.¹⁴⁾ “고정된 경로 안에서 삶을 질서지우는” 전통과 달리 후기산업사회에서의 삶은 선택을 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다양한 결과를 도출한다. 현대미술에 등장하는 민화적 요소는 ‘선택’의 문제이므로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현대미술에서의 다양한 해석가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000년대 이후 한국 현대작품에서 오방색의 색채 사용만으로 민화적인 요소를 지닌 작품이라 평가되지 않는다. 미술에서 장르의 경계가 희박해진 때문인데 민화적 양식이라 일컬어지는 요소는 라이프 스타일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기든스가 지적한 ‘전통에 대한 길잡이’가 사라진 현대에 선택의 다양성은 민화라는 요소를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게 만든다. 이는 전통 민화의 의미를 현대회화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¹⁵⁾ 이는 또한 국가가 규정하는 공적인 의미에 대항하는 사적인 영역으로, 은폐되어 있는 것을 더 드러나게 하는 것으로 오래된 미술의 전략적 기호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발칙한’ 용어로 평가되는 몇몇 젊은 작가들의 세계는 성(性)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국민국가에서, 규범을 존중하는 시민사회에서 성은 억압의 대상이다. 하지만 전통사회에서 형성된 민화에서의 성은 자손번식이라는 공리성을 띤 것이다. 이들은 번식과 같은 합리성이나 효율성이 아닌 놀이로서의 성을 통해 금기에 도전한다. 성이라는 대상을 번식이라는 의미에서 벗어나 미술의 기본적인 성격인 유희에 맞추어 놀이로서, 혹은 장식으로서 사용하는 것이다.
모란을 비롯한 화조화와 어해도에 이르는 다양한 상징은 부부금슬, 다산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꽃 중의 왕이기에 부귀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 작가들에게 이러한 의미의 통용보다는 형식 혹은 외양의 장식성이 도상을 소비하는 이유인 경우가 많다.
김근중의 모란은 화사하면서 농염한 자태를 뽐내지만 그 앞에서 부귀라는 상징을 적용할 수는 없다. 한국적 미의 소재로서 접근한 김근중의 모란은 “나는 김근중의 모란을 보지만, 한편으로는 모란 뒤의 이와 같은 무애의 세계, 또 다른 존재에의 세계를 음미하기도 한다. 그것은 모란이기도 하고 모란이 아니기도 하다. 그렇지 않지만 크게 그러하다”고 윤범모에 의해 설명되었다. 선가(禪家)의 문장처럼 모란은 전통의 의미로 ‘선택’되었지만 그것은 자연만물을 상징하는 존재성으로 확장된 의미를 담보한다.
여성작가인 김민수의 모란도에는 일상이 숨어 있다. 그림자 같은 주전자와 찻잔의 여유가 그리고 역으로 욕망이 꿈틀대는 심리적인 공간이다. 그리하여 욕망은 확장하여 명품백과 하이힐과 신용카드가 공존하는 공간이 된다. 민화의 여성적 욕망으로서 현상화 된 자리를 현대의 즉각적 물질로 대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탕으로 모란꽃을 만들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 이미지를 고착시키는 구성연은 “모란은 부귀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큰 모란도 병풍은 혼례 청이나 잔치 자리에 놓이고 작고 아담한 모란도는 신혼방에 걸렸다”고 모란도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소비하는 모란의 의미는 “세속적인 즐거움에 대한 소망을 황금이나 태양처럼 단단하거나 영원할 것 같은 대상이 아닌 잠깐 피고 마는 꽃에 기댄 마음은 이제 보니 퍽 소박한 것으로 보인다”며 인생의 비유를 모란에서 찾고 있다. 열려진 해석의 가능성을 작품으로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¹⁶⁾ 이러한 태도는 나무에 팝콘을 부착하여 촬영한 사진을 흐드러진 매화나무처럼 보여줌으로써 지식의 전복이라는 미술의 이념을 구현하는 동시에 친근한 소재의 작품화라는 팝아트 그리고 극단의 장식성과 싸구려의 조잡성을 공유한 키치의 색을 공유한다. 그리고 이러한 팝과 키치의 절묘한 조화가 현대 미술작가들이 민화에서 얻고자 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엄옥경이 보여주는 이상향도 “인간이 추구하는 각기 다른 색깔의 행복에 대한 간절한 기원을 표현하기 위해 모란의 상징성을 차용한” 공간이다. 모란 자체가 갖는 염원의 의미를 그대로 적용하였다기보다는¹⁷⁾ 창을 통해 들여다본 상징의 공간, 즉 액자와 같은 공간을 민화의 도상을 차용하여 창안해낸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이라는 팝아트의 본질에서 출발한다. 대중적 지식이나 정보에 기반한 이러한 지식체계는 민화가 발생할 당시 대중의 소박한 염원과 현대 사회의 지식화된 정보로서의 고도의 상징물이 된 위치에 민화가 자리하는 데 기인한다.

문자도의 경우,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는 전통사회의 국가경영의 이치이자 실생활의 도덕률이었다. 하지만 젊은 작가
이미정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취업 전까지는 부모님께 딱 붙어 살 수밖에 없는 <효>, 서슬퍼런 귄력 앞에 무조건 쥐 죽은 듯 비굴한 굴복의 자세로 이루어진 <충>과 경쟁을 위해 우정도 버린 채 밟고 서거나, 대기업에의 취업을 소원으로 이루어진” <문자도>를 보여준다. 작가는 ‘88올림픽으로 한창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워졌을 때 태어난 1988년생 작가가, 88만원 세대라는 자각 아래 20대의 현실을 투영하였다는 사실에서 과거의 정형화한 도상으로부터 현재진행형의 사건에 대한 비판적 도상을 획득하였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¹⁸⁾ 문자도라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전통 도상의 이용이 현대 사회 비판의 칼로 작용하는 이러한 방식은 마치 중국 현대작가들이 문화혁명기의 포스터를 이용하여 획일성과 전제성을 비판하는 것과도 같은 유형이다. 하지만 그들이 선전물을 기반으로 한 ‘팝’의 성격이 강한 데 비해 한국의 현대미술은 좀더 비판의 담론에 가까이 있다. ‘믿을 신(信)’자를 여자의 머리를 한 새로 표현하여 기괴함과 동시에 인간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서은애의 경우, 도(道)를 나타내는 중국의 그림에서 만나는 무거운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류준하의 <충>이나 <효>는 전통사회에서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여성의 삶을 문자도 형식으로 빌어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먹으로 쓴 글씨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드러낸 것은 여성문제를 신체의 일부를 통해 시각화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까치와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호랑이는 민화의 주요 화목이다. 불가의 산신도에 등장하는 호랑이, 김홍도가 그려낸 호랑이 등은 털을 섬세하게 잘 그려내는 화사의 기량을 자랑할 수 있는 분야이다. 하지만 현대미술에서 이들은 그 ‘털’의 표현보다는 생김새에 집중하는 경향이 짙다. 동물의 순박함과 해학을 담은 사석원의 작품이나 12지로서 동물의 표현은 전통의 방위개념이나 수호라기보다는 현대사회에서 의인화의 의미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아트놈의 핑크호랑이는 사회적 정체성과 오해받는 자신의 이름(강현하)과의 관계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현대 작품에서 동물들은 도상의 정립 과정에서 형체가 의미가 되는 도상학적 이해는 3단계를 넘어서 개인에 의해 변주되고 새로운 의미망을 창출한다. 박영택은 현대미술에서 전통이란 코드로서 사용된 민화에 대해, “민화라는 텍스트를 인생의 서사로 전환시키거나 전통에 대한 메타 비평의 단서로 삼거나 혹은 이미지 물신주의의 환생, 미술의 소통 등으로 관심을 넓혀나가며 그에 따른 일정한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음은 주목된다”고 파악하였다.¹⁹⁾ 이러한 현상을 일러 ‘변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존의 가치에 의해 생산된 민화는 욕망의 법칙에 따르자면 물신주의적이며, 물신의 부활이야말로 현대 후기산업사회의 속성이다. 그러한 개인이나 사회의 욕망을 적절히 드러내기에 민화의 외형은 매우 적합한 자료이다. 하지만 공동의, 기성의 의미망 아래 이해되는 작품이라면 그것은 전통의 민화와 경계를 지을 수 없을 것이다. 작가의 양식과 개인적 세계관의 투영은 결국 이미지의 변주라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홍지연의 마음을 훔치는 색과 형태의 화면은 민화가 지닌 본질적 구조를 가시화한 것이었다. 최근에 이르러 색동무늬와 형상의 조합은 여성주의를 넘어서 숨은 의미망의 확장을 위한 새로운 도상을 실험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책장에는 옛 지식인들이 탐닉하던 고동기(古銅器), 도자기, 진귀한 과학물품 등이 위치해있기 마련인데 김지혜는 꽃, 나무, 시계 등을 삽입하고 있다. 무한한 작은 물체들이 집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공간을 이루는 홍경택의 서재는 책가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선 듯 과잉의 이미지들로 넘쳐난다. 장막화를 동반하여 나타나는 책가도들에는 욕망이 그득하다. 슬쩍 들춰보는 듯한 화면은 현대인의 훔쳐보기인 관음증을 만족시키는 장치로서 장막화의 일면을 본다. 이제 장막이 사라진 현대에 그것은 전통의 욕망과 물질의 부를 드러내기에서 훔쳐보기로 이동함으로써 극히 내밀화 하고 개인화하여 공공의 민화가 갖는 공유성으로부터 탈주하여 작가 개인의 세계로 안주하는 장치가 된다.
현대사회에서 욕망하는 것들의 드러냄이 훔쳐보기로 화하는 장치로의 변환은 미장센이 완성된 책가도에서 다시금 확인된다. 넘치는 정보 속에서 자신만이 소지한 지식에의 갈망은 책가도라는 공간을 통해 투사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예를 들어 테라코타로 책가도를 구워 채색하여 벽에 건 이지숙이 전통의 도상에 충실하게 욕망의 법칙을 재현하였다면 임수식은 현대인의 책장을 책가도로 유형화함으로써 현재화한다. 그 욕망의 법칙은 시대에 따라 유사하지만 다르게 등장함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서유라의 일련의 작업도 같은 구조로 파악할 수 있다. 엄청나게 큰 책에 비해 왜소한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그 안에서 길을 잃고 말게 되는 지식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민화에서 볼 수 있는 유형화된 대상을 조합하여 작품화한 강용면의 조각이나 일련의 상징들을 폐품들을 이용하여 채색을 통해 민화로 탄생시킨 서희화, 캐릭터화한 자신이나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 구조로 단순한 화면을 보여주는 윤대라, 백민준, 한유진 등은 민화적 기법과 만화의 혼용이라는 디지털 세대의 매끄러운 표면과 무한 복제의 모습을 차용한 세계를 보여준다.

14) 앤소니 기든스. 지음 권기돈 옮김, 『현대성과 자아정체성』, 새물결, 1997, p.40.
15) 정병모, 『미술은 아름다운 생명체다』, 다할미디어, 2001/허균, 『전통미술의 소재와 상징』, 교보문고, 1999. 등에서 연구, 정리된 민화의 도상적 의미는 현대미술의 형식을 이해하는 원천을 이루지만 어떤 형상이 전통의 의미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16) 「구성연 사탕시리즈, ‘모란꽃’ 사진으로 재탄생」, 『한국경제』, 2014. 1. 20
17) 윤열수, 『민화이야기』, 디자인하우스, 1995. 참조.
18) 조은정, 「가치(價値)의 해체를 위한다양한 전술들」, OCI미술관 이미정 개인전 카탈로그 서문, 2013.
19) 「박영택의 전통이란 코드로 읽어보는 한국현대미술」, 두산아트스쿨 2011년 배포자료.

Ⅳ. 맺음말

한국 현대미술에서 차용 혹은 이용되는 민화적 요소는 전통의 상징에서 출발한다. 그것의 외형적 차용은 ‘전통’의 요소이며 외형이 곧 내용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이 미끄러짐은 도상해석학적 입장에서도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어윈 파노프스키는 대상의 외부적 정보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3단계 안에서 작품분석에 도달한다. 하지만 민화에 적용되는 일차적인 이코노그래피는 현대미술에 접목되었을 때 의미의 미끄러짐, 해체를 겪게 된다. 그것은 의미를 내포한 상징이 아닌 비판이나 외형적 요소로 선택된 기호이기 때문이다.
‘주관적 판단의 명료화’라는 도상해석학의 과제는²⁰⁾ 현대미술의 다양성, 다의성에 의해 의미를 확언할 수 없는 모호함에 봉착하게 된다.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은 욕망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비판의 틀에서 보여지는 것은 전통 민화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건인 것이다. 따라서 민화에서 정의되는 의미들은 한국의 현대미술에서는 이미지의 차용에 더 가깝다. 그것은 의미의 생성구조와는 별개이며 수요자의 욕망에 의해 새로운 의미의 범주에 위치한다.
민화가 소비되는 방식의 한국 현대미술사의 궤적에서 드러난 것처럼 전통은 이제 국민국가 만들기의 비판적 대상이 되는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였다. 창안된 전통의 신화는 상층부 미술의 키치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는 민화를 전통의 틀에서 찬미함으로써 벌어졌던 일련의 해프닝을 지나 진정한 민화의 정신과 오히려 닿아 있는 지도 모르겠다. “네가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내가 물고기의 뜻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도(道)의 논의를 상징하는 <어해도>가 수복다남자(壽福多男子)화 한 그 구조야말로 물신화하고 욕망의 법칙에 충실한 결과인 것처럼 말이다. 더불어 민화의 이코노그래피가 다양성의 이름으로 의미를 비껴가고 있음을 목도하는 이유는 아마도 2000년대 들어 실패한 유토피아에 대한 좌절, 그 결과 자본주의 회화에서 먼 아르카디아를 찾는 고대인처럼 향수를 가지고 도상의 외형에 집착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20) 주형일, 「직관적 앎의 기호학적 적용의 문제: 외국인을 위한 한국 홍보포스터의 도상해석학적 해석」, 『인문연구』 55호,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8, pp.503-538.

참고문헌
장희권, 『글로컬리즘과 독일문화논쟁』, 산지니, 2013.
조은정, 「전후 한국현대미술의 이념적 동인」,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25권, 2013.
앤소니 기든스 지음, 권기돈 옮김, 『현대성과 자아정체성』, 새물결, 1997.
정병모, 『미술은 아름다운 생명체다』, 다할미디어, 2001.
허균, 『전통미술의 소재와 상징』, 교보문고, 1999.
윤열수, 『민화이야기』, 디자인하우스, 1995. 참조.
조은정, 「가치(價値)의 해체를 위한다양한 전술들」, OCI미술관 이미정 개인전 카탈로그 서문, 2013.
주형일, 「직관적 앎의 기호학적 적용의 문제: 외국인을 위한 한국 홍보포스터의 도상해석학적 해석」, 『인문연구』 55호,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