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 부채 – 정교한 기술력과 전통미가 함축된 손 안의 미술관

무더운 여름이면 어머니께서는 밀짚으로 만든 밀대 방석을 마당에 깔아 놓고 모기 불을 피워놓고 옛날 얘기를 해주시며 연신 부채로 모기도 쫓고 더위도 식혀주셨다. 사랑이 담긴 그 부채 바람은 마음속까지 시원하게 해준,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바람이다. 어머니의 부채 바람이 새삼 그리워지는 여름, 민화작가들도 작품을 즐겨 그리는 부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원시시대부터 사람들은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부채를 만들어 사용했다. 맨 처음엔 크고 질긴 나뭇잎을 말려서 사용하다가 그 다음에는 잘 나는 새의 깃털로 부채를 만들어 사용했다. 한자로 ‘부채 선扇’자를 보면 ‘집 호戶’자에 ‘깃 우羽’ 자가 합쳐졌다. 즉 집안에 있는 날개란 뜻이다. 매미를 잡는 도구를 매미채, 파리를 잡는 도구를 파리채라 하듯 부채의 어원도 손으로 부친다는 부와 도구를 뜻하는 채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순수한 우리말이다.

역사 속 부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부채 유물은 투탄카멘 왕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것이다. 황금 봉에 타조의 깃털을 꽂아서 만든 것으로 깃털은 삭아 없어지고 자루만 남아 있으나 깃털을 꽂았던 구멍에 남아있는 찌꺼기를 분석해 보니 타조의 깃털로 밝혀졌다. 또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부채 유물은 경남 의창군 다호리의 고분에서 출토된 옻칠된 부채 자루이다. 이것 역시 깃털 부채 자루로 원삼국 시대의 것인 약 2천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
황해도 안악군 유성리 안악 3호 고분벽화에 깃털 부채를 들고 있는 인물상이 보이고 고구려 계통일 것으로 추측되는 일본 다카마쓰[高松] 고분 벽화에도 주인공으로 보이는 인물 뒤에 자루가 길고 선면이 둥근 부채를 든 시녀들이 서 있다. 따라서 이미 고구려 시대에 깃털 부채 뿐만 아니라 자루 달린 단선도 있었음이 증명된다.
또한 고려 때 부채 유물로 전해지는 것이 있으니 고려의 개국공신 3분을 모신 안동 태사묘 사당안 보물각에 보관된 것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참배하러 왔다가 공민왕은 친필 병풍 한 벌과 홍배(붉은칠이 된 나무잔)를, 노국공주는 늘 손에 들고 다니던 부채를 두고 간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선면은 얇은 깁으로 되어있고 테두리와 자루는 나무이고 옻칠이 되어 있다.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에 부채 이야기가 나오는데 고려의 태조 왕건이 왕으로 즉위하자 후백재 왕 견훤이 축하의 선물로 공작 꼬리깃으로 만든 공작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왜 하필 부채를 선물했을까? 고대의 왕이 취임식을 할 때 부채를 들고 했는데 그 의미는 ‘바람을 막는다’는 뜻이 있다. 바람은 전쟁이나 액운을 상징하기에 왕이 바람을 일으키면 그 나라에 전쟁이나 환란이 온다 하여 오히려 바람을 막는다는 의미를 넣었고, 왕이 더울 때는 옆에서 시녀들이 부채질을 했다.

선행 치하하기 위해 부채 선물

고대 중국의 순舜임금은 어질고 현명한 인재를 구하여 등용시키려 오명선五明扇이란 부채를 만들어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나 인재를 추천하는 사람에게 오명선을 선물로 주었다고 하며 그래서 그런지 나라가 태평하였다 전한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고려 때 한 임금은 좋은 일을 많이 한 어진 사람에게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날 부채를 선물했는데,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더 많이 주었고 임금님께 받은 귀한 부채를 웃어른이나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 더운 여름 요긴하게 사용했다. 그것이 시초가 되어 단오날 부채 선물이 지금까지 선물로 내려오는데 ‘여름 생색은 부채가 제일이고 겨울 생색은 책력(책으로 엮은 달력)이다’라는 속담까지 나오게 되었다.

세계 최초로 접선 발명한 우리 선조

지금부터 700여 년 전 송나라 때 사신으로 왔던 서긍은 고려의 여러 풍물을 보고 돌아가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에 “고려인들은 한 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니는데 접었다 폈다 하는 간편하고도 신기한 부채를 사용한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 중국에는 접선이 없었고, 고려에는 이런 접선이 일반화된 것을 보면 접는 부채의 발명은 천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선조들의 기술력이 뛰어남을 짐작할 수 있다. 양반들은 외관을 갖춰 입고 손에 부채를 쥐어야 비로소 외출을 할 수 있는 풍속이 있었다고도 전한다. 이처럼 부채를 늘 쥐고 다닌다하여 ‘쥘부채’라고도 했다.
고려 때 만들어진 접선이 황해도 지방에서 출토되어 20여 년 전 우리나라에 온 것을 필자가 직접 보았고 현재 소장중이다. 갓대가 금속으로 되었고 은상감이 정교하여 고리 장식이 은으로 도금되어 있었는데, 고리가 쌍어雙魚 문양에 부채고리에 늘어트리는 장식과 줄은 은으로 만들어졌고 도금되어 있었다. 왕이 썼던 것으로 추정될 만큼 정교하고 고급스러웠다. 접는 부채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록이나 유물로 미뤄보아 고려 시대 세계 최초로 접는 부채가 발명되었음을 증명한다. 일본은 일본의 신공 왕후가 박쥐의 날개를 보고 접는 부채를 창안하였으며 세계 최초라고 우기지만 신빙성이 부족하다.
양반들은 고려 때부터 접는 부채를 계절과 관계없이 늘 쥐고 다니다가 더울 땐 더위를 식히고 겨울에는 찬바람이나 먼지를 막았다. 또한 빚쟁이나 거북스러운 상대를 만날 때나 더러운 사체, 가증한 것을 마주할 때 부채를 사용해 얼굴을 가렸으며 시조라도 한 수 읊으려면 부채로 먼 산을 가리키거나 장단을 맞춰 흥을 돋구었으니 부채는 단순히 바람만 부치는 도구가 아니라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수한 한지 발명하며 부채 제작 기술 급속도로 발전

우리나라의 부채는 100여 종에 이르는데 부채의 종류를 간추려 살펴보도록 한다. 우선 깃털부채부터 보면 수꿩의 꼬리로 만든 치미선, 흰색 깃털로 만든 백우선, 검정 깃의 흑우선, 부엉이 깃의 광우선, 공작 깃의 공작선 등 새나 깃털의 색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천으로 만든 단선으로는 명주로 만든 명주선, 모시로 만든 모시부채, 삼베로 만든 포선, 얇은 천의 깁부채, 비단에 수를 놓은 수선, 꽃과 나비를 수놓은 화접수선, 목단을 수놓은 목단수선 등이 있다. 문양이나 색깔에 따라 분류해보면 청선, 홍선 등이 있으며 궁중에서 혼례 때 사용하던 진주선, 양반가 혼례 때 쓰던 혼선 중에도 목단혼선, 쌍학혼선, 화조혼선이 있다. 임금님이 손에 장식으로 들던 용 수선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 한지가 발명되면서 부채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했는데, 닥나무 속껍질은 질겨서 그것을 원료로 만든 종이는 가벼우면서도 질기고 수명이 길어 ‘지 천 년 포 오 백 紙天年 布五百’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부채 만들기에 가장 좋은 종이가 바로 한지인 것이다. 종이부채의 종류는 참으로 많은데, 선면에 태극문양이 있는 태극선, 그림이 그려진 화선, 시가 적힌 시선, 꽃과 나비가 그려진 화접선, 민화가 그려진 민화선, 선면이 둥근 원선, 옻칠을 한 칠선, 황칠을 한 황칠선 등이 있다.
조선 정조 임금 때 화원이었던 운초 박기준이 그린 백선도 병풍에서도 갖가지 전통부채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운초가 그린 100선도의 접선은 중국 부채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고 그 당시 중국으로 수출하던 부채를 중국 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개량하여 만든 것이다.

한국 부채의 단아한 아름다움과 높은 기술력

우리의 전통 부채는 우아한 곡선미와 단아한 멋이 한복의미와 닮아있다. 결코 번잡하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정교하며 얇고 가벼우면서도 견고하게 만들었다. 단선의 부채 자루 박는 부위는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었으며 문양 꽃지를 붙여주어 멋을 내었는데 안정감도 주고 멋도 살렸다. 이런 꽃지는 100여 가지가 되며 세계에서 오직 우리나라 부채에만 있다. 문양을 오려 붙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접는 부채도 부챗살이 50개여서 백 번을 접어야 하는 백접선이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촘촘히 접는 부채이다. 한지가 얇으면서도 질기기 때문에 이를 제작 가능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합죽선은 세계에서 유일한 부채로 대나무 겉껍질을 얇게 만들어 합죽合竹한 대 살로 만들었다 해서 합죽선合竹扇이라 했다. 이 부채는 모방을 잘하는 중국에서도 절대로 만들지 못하는 우리만의 부채이다.

내 손 안의 미술관

언제부터 부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5~6백년 된 부채에도 부채에 그림을 담아 사용한 흔적들이 보이고 궁중화가나 명필들이 부채에 그림을 남겼다. 그중에도 겸재 정선의 금강산을 그린 부채가 남아 있다. 부채를 들고 다니다가 금강산이 보고 싶으면 부채를 활짝 펼쳐 감상했으니 ‘금강산이 내 손안에 있소이다’ 할 만 하지 않겠는가. 무더운 여름에 시각적으로 시원케 하기 위해 청전 이상범과 심향 박승무는 설경산수를 많이 그렸다. 그래서 부채는 가지고 다니다 언제든지 펴 볼 수가 있어 움직이는 미술관이라 할 수 있다.
부채 및 글씨와 관련된 재밌는 일화가 있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307-365 진나라)가 낮잠을 자고 있는데 부채를 팔러 다니는 노파가 “부채사려~”하고 골목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바람에 잠에서 깨었다. 그때 부채 장사 노파가 한 보따리 부채를 맡기며 ‘부채 다 팔면 찾으러 올 터이니 잠시만 맡아달라’하고는 가버렸다. 잠에서 깨어 부채를 보고 있자니 심심해서 부채 하나를 꺼내어 글씨를 써보니 재미가 있어 한 보따리의 부채 모두 붓글씨를 써넣었다. 노파가 부채를 다 팔고 와 보니 모든 부채에 낙서를 한 것이 아닌가. 화가 난 노파가 부채값을 물어내라고 하자 왕희지가 껄걸 웃으며 “할머니, 사람들이 많이 모인 저잣거리에 가서 황희 선생이 글씨 쓴 부채 사라고 외치면 서로 사갈 것이오. 그때 부채값이 얼마요 하면 열 배를 부르시오. 만약에 안 팔리면 내가 그 부채 값을 모두 물어드리리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부채 장사 노파가 왕희지가 시키는 대로 했더니 정말 10배를 불러도 순식간에 팔려 이 노파는 횡재를 했고, 그후부터 부채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중국에서 유행했다고 하니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아니 했겠는가!

마음을 담아낸 부채, 오래도록 함께 할 것

한겨울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가다가 주막에 머물게 되었는데 주막에서 일하는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시험 날짜가 가까워져 할 수 없이 작별을 하면서 갖고 다니던 부채에 시 한 수를 적어 주었다.
“한겨울에 부채 선물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너는 아직 나이 어리니 어찌 능히 알겠느냐만 한밤중 서로의 생각에 불이 나게 되면 무더운 여름 6월(음력)의 염천보다 더 뜨거우리라.”
후일에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황진이가 “마음에 타는 불을 부채인들 어찌 끄리요. 눈물로도 못 끄는 것을..”하는 화답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또, 조선 중기 때 임재백호라는 이는 황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무덤에 가보니 잡초만 무성한지라. 술 한 잔을 따라 무덤에 뿌리고 한 잔은 자기가 마신 뒤 지은 시가 지금까지 전하니 소개하면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었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이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시로 써서 주기도 하고, 자기의 자작시도 부채에 적어서 단오날 친지들에게 주면 얼마나 좋을까! 특히 부채에 민화는 잘 어울려 요즘 부채에 민화를 담아 전시회도 하고 부채 예술 공모전에도 민화 부채가 가장 많이 출품 된다고 하니 요즈음 선풍기나 에어컨이 있다곤 해도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온 부채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예술품으로 거듭나고 있다.


글 금복현(전통부채 연구가, 청곡부채박물관 관장)
사진 이주용 기자 유물 청곡부채박물관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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