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등기구古燈器具 ⑨ 석유수입과 등기燈器Ⅱ

석유가 들어오기 이전에 밤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 사용한 것이 등잔이다.
등잔에 사용되던 식물성, 동물성 기름은 19세기에 석유가 등장하자마자 자취를 감추었다. 석유가 효율성이 좋고, 가격도 쌌기 때문이다. 석유가 수입되면서 남포등이 수입되기 시작했고, 등잔은 화기에 강한 도자기 등잔과 호롱(도자기나 사기)으로 바뀌었으며 훨씬 다양한 종류의 등잔이 출현하게 된다.

글 정하근 (고은당 대표) 사진 이주용 기자


이 풍속등잔대風俗燈盞臺에는 각기 눈, 귀, 입을 막은 원숭이 세 마리가 조각되어있다(도1). 예로부터 원숭이는 원숭이를 뜻하는 한자 ‘후猴’의 음과 획이 제후諸侯를 뜻하는 ‘후侯’와 비슷해 ‘출세’, ‘관직’, 나아가 ‘부귀영화’를 의미했다. 또한 수호신인 십이지신상의 하나로 재앙의 침입을 막아주는 벽사적 의미, 부부지간의 사랑과 장수, 화합 등 다양한 상징성을 지닌다.
언뜻 흥미로워 보이는 조각상에는 조선시대 한국 여성의 비애가 깃들었다. 조선 세종 때부터 법으로 혼례 후 여자가 시집살이 하는 풍습이 생겼다. 고단한 시집살이와 관련해 옛날 우리나라 속담에도 ‘시집살이 10년’이란 말이 있다. 귀 막고 3년, 눈 가리고 3년, 입 다물고 3년까지 시집살이에 적응하기까지 10년쯤 걸린다는 얘기다.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못 본 척, 말하고 싶어도 참으라는 의미다. 여성은 매서운 시집살이 속에서도 이 등잔대를 곁에 두고 남편의 출세를 염원하고, 가족 간 사랑을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석유가 들어오기 이전, 전등이 없던 시절에 밤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 사용한 것이 등잔이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들기름이나 피마자기름 등의 식물성기름을 사용하여 어둠을 밝혔다. 식물성, 동물성 기름은 석유가 등장하자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석유로는 기름보다 두 배 오래 사용할 수 있고 가격도 쌌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도 나도 등불을 밝히는 연료로 석유를 사용했다. 이후에는 미국 회사나 일본등지에서 석유가 수입되었고 주유소도 생겨 일반인들에게 석유를 팔기 시작했다. 1876년 이후 일본으로부터 석유가 들어오면서 남포등이 수입되기 시작하고 등잔은 화기에 강한 도자기 등잔과 호롱(도자기나 사기)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해방 전까지 일정시대에 사용한 등을 왜사기 호롱이라 불렀다. 뒤이어 장식적으로 한층 더 화려하고 다양한 종류의 등잔이 출현하게 된다.

(왼쪽) 도2 <석간주 무궁화 음각 등잔>, 19세기말, 8×6㎝, 고은당 소장
(오른쪽) 도3 <석간주 모란문 음각 등잔>, 19세기말, 8×6㎝, 고은당 소장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호롱(등잔)

호롱등잔은 도자기 호롱과 사기 호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도자기 호롱은 전통적인 기법으로 도자기 가마에서 1200~1300도 사이에서 소성된 도자기를 말한다. 사기 호롱은 가마에서 약한 불로 900~1000도 사이에서 소성된 사기 등잔으로 일본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 전력에서 발행한 《한국의 고등기》에 의하면 흔히 ‘외사기’라고 통용되는 수많은 등잔들은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 상당히 많은 양이 수입되어 한국 등잔들과 뒤섞여 판매,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또한 1920년 한일 합방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쳐 근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알고 있다.

갖가지 길상문, 글귀로 호롱의 미학 더해

호롱은 본래 뚜껑이 없는 종지 같은 그릇이었으므로 석유를 사용할 수 없었다. 석유는 인화성이 강하여 등잔 전체에 불이 붙어 화재의 위험성이 많기 때문에 석유를 넣는 병모양의 용기와 이를 덮는 뚜껑을 만들었다. 그리고 뚜껑을 관통하는 심지를 만들고 뚜껑 밖으로 나온 심지에 불을 붙여 사용하는 호롱등잔을 제작했다. 도자기로도 각종 등잔을 제작했다.
호롱은 대체로 나무로 제작된 등잔대에 얹어 사용했으며 등잔대의 밑판은 원형, 사각, 육각, 팔각 등 다양하게 제작하여 담배 부시 성냥 등을 놓을 수 있게 하거나 담배 재떨이용으로도 사용했다. 60년 전만해도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곳이 절반을 넘었다고 한다. 그때 대부분의 지방 학생들은 호롱불을 밝히고 공부를 했다고 한다. 호롱불을 밝히면 꼭 그림자가 생겨 밤이 되면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재미있는 놀이를 하곤 했다. 필자도 어린 시절 손을 이용하여 벽에다 개나 새, 나비 등의 그림자를 만들어 벽에 비추게 하는 놀이를 한 기억이 있다.
호롱에는 아름다우면서도 길상의 의미를 지닌 문양을 넣어 사용했다. 모란문을 새겨넣어 부귀영화를 염원하거나(도3), 장수를 축하한다는 의미의 석죽화石竹花(패랭이)를 그려 장수를 기원했다(도6). 일제 강점기에 사용된 호롱등잔을 들여다보면 국민들의 희망과 염원을 엿볼 수 있다. 한일합방시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호롱을 보면 국화인 무궁화가 또렷이 음각돼 있다(도2). 밝게 타오르는 촛불을 보며 우리나라 해방을 위한 간절한 소망을 새기고 또 되새겼으리라. 세밀한 기술력과 현대적인 미감이 감탄을 자아낸다. 한글이 들어간 호롱도 무척이나 흥미롭다(도4, 도5). ‘불조심’이라는 문구를 곁들여 불에 대한 경감심을 고취한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왼쪽) 도4 <쌍심지 불조심 등잔>, 일제강점기, 9×7㎝, 고은당 소장
(오른쪽) 도5 <일제강점기 백자 천사 그림 등잔>, 일제강점기, 9×8㎝, 고은당 소장

서양에서 들어온 램프, 일본 거쳐 남포등으로

서양의 ‘램프(LAMP)’를 가리키는 말이며 일명 양등이라고도 했다. 램프는 금속과 유리로 만든 용기에 심지를 만든 다음 유리등피를 씌운 것이다. 석유용기에 심지를 만들어 불의 양을 조절하게 만들고 등피는 비바람에도 견딜 수 있도록 연통형(굴뚝 형)의 유리로 만들었는데 그을음이 많아 닦을 때 유리가 자주 깨지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1850년대 이후 일본에서 램프를,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조금 더 일찍 서양으로부터 수입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에서는 수입된 램프등을 일본식 발음으로 ‘남포등’이라 표기하고, 남포등은 다시 우리나라로 수입되며 일본식 발음 그대로 사용했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만일 일본이 아닌, 서양에서 바로 램프가 수입되었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램프등’으로 불렀을 것으로 생각한다. 시간이 차츰 지난 뒤 일본을 비롯해 선진국들과 통상을 맺으면서 다양한 램프등이 수입되었다.

도6 <패랭이꽃문양 등잔>, 20세기초, 7.5×6㎝, 고은당 소장

외부에서 사용하기에 편리했던 남포등

남포등은 냄새와 그을음이 심하여 실내에서는 사용하기 어려웠다. 주로 마루나 마당, 부엌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필자도 어릴 적 시골에 가면 부엌에서 사용하는 것을 많이 목격했다. 또한 우리나라의 전통 등구인 제등과 같은 용도로 야간 나들이에도 많이 사용되었다. 등잔의 심지보다 심지의 크기가 크기 때문에 화력이 월등히 좋아 밤에 멀리서도 사물을 판단하기 쉬웠으며, 연통형으로 제작된 등피 덕분에 비바람을 막을 수 있게 만들어져 외부에서 사용하기에도 편리했다.
필자가 1960년대 겨울에 충청도 시골 친척집에 놀러가면 전기가 보급되지 않은 지역이어서 밤이 되면 아주 불편해하던 기억이 있다. 저녁이 되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부엌에서 남포등을 켜고 저녁을 만들곤 했다. 화장실에 가고는 싶은데 밖이 깜깜하고 앞이 안보이지 않아 무서우니 고모가 남포등을 들어줘서 간신히 화장실을 다녀오기도 했다. 당시 시골이라고 해서 모든 가정이 다 남포등을 사용하진 않았다. 가난한 가정에서는 석유가 많이 소모되는 남포등을 사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남포등을 사용하기 이전에는 안방과 부엌 사이에 창문을 내고 그곳에 등잔(호롱)을 올려놓고 불을 밝혀 양쪽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등 하나로 두 군데를 밝혀 석유를 아껴 쓰기 위해서다. 부엌에서 사용하지 않을 때는 안방에서 등잔대에 등잔을 올려놓고 사용했다. 이 남포등은 1970년대 전기가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나 1960년대 전등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는 일부 가정에서도 전통적인 기름(석유)등잔을 사용했다.


참고자료
《한국전력 : 한국의 고등기》
황현, 《매천야록》
《이조실록》
심괄, 《몽계필담》
반고, 《한서》



정하근 | 고은당 대표
대학교 1학년 때부터 50여년간 고미술품 및 등잔을 수집했다.
수집한 국내외 전통 등기류만 수천여점에 달한다.
블로그(blog.naver.com/eunam-collection)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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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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