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등기구古燈器具 ⑧ 석유수입石油輸入과 등기燈器

새해를 맞이해 잠시 중단했던 ‘한국의 고등기구’ 연재를 재개한다.
조선시대 등화기는 19세기말 수입된 석유를 사용하면서 효율성을 대폭 높이기 시작한다.
이번 달에는 석유 수입 전후로 사용되던 서등, 호롱불, 그리고 석유를 수입하던
당시의 상황에 대해 살펴본다.

글 정하근 (고은당 대표) 사진 이주용 기자


백자 등잔의 단아한 곡선과 색감에서 기품이 물씬 풍긴다. 등잔과 밑받침이 길게 연결된 이 등잔은 ‘서등書燈’으로, 책을 읽을 때 책상 위에 올려두고 사용하던 것이다. 상부의 동그란 등잔 부분에는 석유가 담긴다.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 뚜껑 위로 심지를 뽑아 올려 불을 붙이도록 제작했으며 높은 기둥을 달아 빛이 닿는 면적을 확보했다. <청화백자 죽문 서등>에는 청화 안료로 시원스레 그려낸 대나무 무늬가 돋보인다.(도1) 어떤 틀에도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그려낸 잎새와 줄기마다 자신감이 깃들었다. 경쾌한 그 모습이 민화와도 닮은 듯하다. <백자 서등>에는 기둥부가 대나무 마디를 닮은 죽절문으로 제작됐다.(도2) 한겨울에도 푸르른 대나무처럼 굳은 의지와 절개를 가지고 학문에 용맹정진하리라는 선비의 기개가 아닐는지. 이 아름다운 서등은 석유가 수입된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석유는 언제, 또 어떻게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일까?


(왼쪽) 도2 <백자서등>, 19세기말, 35×22.5㎝, 고은당 소장
(오른쪽) 도4 <은도금 남포등(양등)>, 19세기, 33×11㎝, 고은당 소장

수신사로서 일본 다녀온 김홍집이 석유 들여와

조선시대 등화기는 연료로 초나 기름을 거쳐 19세기말(舊韓末) 수입된 석유를 사용하면서 대폭 발전하게 된다. 한국에 석유류가 최초로 수입된 시기는 일본과 통상조약이 추진되고 무역이 개시된 시기인 1876년(고종 13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매천야록》 상권 석유의 시용조에는 1880년 고종17년에 한국에서 석유가 처음으로 사용됐다고 기술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최초에는 가장 하급품의 석유가 수입되었고 수년 후에는 정제된 등유가 수입됐다. 1880년대에 석유가 수입되고 남포등이 들어오면서 일부에서는 기름등잔을 남포등으로 바꾸고 초도 밀랍초 대신에 양초를 사용하게 되었다.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간 김홍집은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부산 동래 범어사 출신의 이동인이라는 스님을 만나서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신기한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김옥균 등 개화파 인물들과 가까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고 왕실 사람들과 세도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물건들을 펼쳐 보인다. 이때 풀어 놓은 물건이 서양 부싯돌(성냥), 석유, 램프 등이다. 그는 자기가 가져온 물건들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이 얇은 나무토막은 일종의 서양 부싯돌입니다. 황이 묻은 부분을 탁하고 그으면 불꽃이 일어나며 불이 붙지요.”
“참으로 신기하군요. 그러면 등잔처럼 생긴 이 물건은 무엇입니까?” 희한하게 생긴 물건을 가리키며 누군가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서양 기름을 넣어 불을 붙이면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등입니다.”
그가 말한 서양부싯돌은 성냥, 서양 기름을 넣어 불을 붙이는 등은 램프(남포등), 서양기름은 석유였다. 그렇게 그는 성냥과 램프, 석유를 우리나라에 들여와 왕실과 세도가들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당시 학자였던 황현이라는 인물은 《매천야록》이라는 책에서 석유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과 영국 등 서양에서 나온다. 어떤 이는 바다 속에서 난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석탄에서 만든다소장고도 한다. 돌을 삶아서 그 물을 받아 걸러낸 것이라고도 하나 천연자원임에는 틀림없다. 처음에는 그 색깔이 불그스레하고 냄새가 심했으나 한 홉이면 열흘을 밝힐 수 있다.

그는 우리나라에선 석유가 1880년(고종 17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나라 안에 석유를 등불로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적었다.

17세기 중국에서도 석유는 고래기름의 대체제에 불과

한편, 중국에서도 오래전부터 석유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한나라 역사가 반고(AD.32 ~92 중국 후한의 역사가)가 저술한 전한의 역사서 《한서》에 석유에 관한 언급이 발견되었는데 고대의 중국인들은 석유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처음부터 석유를 연료로 사용하진 않았다고 한다. 5~6세기 남북조시대의 기록에서는 당시 석유가 이 빠진 노인네들의 이를 다시 나게 하고 모든 병을 치유해준다고 적고 있다.
석유에 불을 붙인 기록은 송나라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심괄(沈括, 1031~1095)의 저서 《몽계필담夢溪筆談》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석유는 얼핏 보면 옻나무의 진과 다름없어 보이며 태우면 짙은 연기가 나고 센 불을 낸다. 그 연기로 먹墨을 만들 수도 있는데 이렇게 만든 먹으로 쓴 글은 옻칠을 한 것처럼 검고 윤기가 돈다고 적혀있다. 그 글씨의 아름다움은 소나무의 송진을 태워 만든 먹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석유를 연료로 쓰진 않았던 것이다. 당시 불을 붙이거나 난방을 할 때는 고래기름이나 나무, 땔감 등을 사용했다. 독한 냄새와 연기를 뿜어대는 석유를 당시에는 불완전하고 조잡한 것으로만 여겨왔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석유는 고래기름이 떨어졌을 때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대체재일 뿐이었다. 당시 중국이 유전과 정제 방법을 개발하여 석유를 상품화했다면 세계 경제대국의 판도가 바뀌어 아마 세계 최고의 부국이 되지 않았을까?


도3 <백자 죽조문 삼구 등잔>, 20세기초, 13×9㎝, 고은당 소장

궁중귀족을 중심으로 남포등 수입하기 시작

우리나라도 삼국시대 전부터 석유가 수입되기 전까지 등불을 밝히는 기름으로 참깨를 짜서 얻는 참기름, 들기름, 피마자기름(아주까리를 짜서 얻는 기름), 목화씨에서 얻은 면실유, 동백기름, 콩기름 등 식물성기름을 사용하였으며 고래나 정어리 등의 생선기름과 소, 돼지, 양 등 동물성 기름으로 만든 초도 양초에 비하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존에 사용하던 등기를 조금 가공만하면 석유를 사용할 수 있었으나 궁중이나 귀족을 비롯하여 부유층은 중국이나 그 밖의 다른 나라에서 더욱 발달된 양식 촛대와 함께 남포등(램프)을 수입해 사용했고 이러한 문화가 점차 사회에 보급되기 시작했다.(도4)
제비와 대나무가 그려진 <백자 죽조문 삼구 등잔>은 석유가 들어오기 이전에 사용하던 호롱등이다.(도3) 불을 붙일 수 있는 심지를 세 개나 만들어 불을 더욱 밝게 밝힐 수 있도록 제작했다. 유물의 연대는 일제강점기인 20세기 초로 추정된다. 복을 상징하는 제비와 절개를 의미하는 대나무를 그려 넣어 온갖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해방을 염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도5 <남포등>, 광복이후, 25×10㎝, 고은당 소장



한국에 본격적으로 석유가 수입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 미국의 각 정유회사들이 스탠다드등과 석유를 들여와 일반에 보급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 이전에도 청나라(중국)나 일본에서 소용량의 석유관(石油館, 석유를 담을 수 있는 물동이나 양철통)등으로 석유를 조금씩 수입하긴 했으나 고가의 물품인 까닭에 대중에게까지 보급되진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자료


《한국전력 : 한국의 고등기》
황현, 《매천야록》
《이조실록》
심괄, 《몽계필담》
반고, 《한서》



정하근 | 고은당 대표
대학교 1학년 때부터 50여년간 고미술품 및 등잔을 수집했다.
수집한 국내외 전통 등기류만 수천여점에 달한다.
블로그(blog.naver.com/eunam-collection)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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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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