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등기구古燈器具 ⑦ 등유燈油와 유병油甁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이전에 출토된 고등기를 살펴보면
중국의 것과 그 형태가 유사해 중국으로부터 고등기가 유입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향후 등잔에 대한 내용을 연재하기에 앞서 우선 고대 중국 등유에 관한 이야기부터
등잔의 소재가 되는 등유의 역사, 종류, 이를 담는
유병에 대한 내용 등을 다루고자 한다.


이번 시간에 살펴볼 유물들은 기름을 담은 것으로 추정되는 유병油甁이다. 각 유병에는 기름을 사용한 흔적이 드문드문 남아 있는데, 고려시대부터 조선초기까지 등유燈油가 보편화되진 않아 그 존재가 더욱 귀하다고 할 수 있다.
<청자철화국화당초문매병>(도1)에는 철화기법으로 그려넣은 국화문양과 당초문양이 장식돼 있다. 매병 어깨와 저부에는 국화꽃잎문양이 일정한 간격으로 빙 둘러져 있고 풍성한 모습으로 만개한 국화 송이 주변으로 당초문이 휘감긴 모습이다.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따르면 국화는 고려 충숙왕 때 전래된 것으로 국화와 함께 이에 대한 중국의 관념도 전래됐다고 한다. 황국黃菊을 달여 마시면 장수한다고 믿어 국화는 환갑, 진갑 등의 헌화로도 사용되었으며 11, 12세기의 상감청자를 비롯한 고려시대 자기와 나전칠기 등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더불어 국화는 서리를 견디면서 청초함을 잃지 않아 절개와 길상의 상징이다. 도자기의 어깨에서 저부까지 이어지는 완만한 곡선과 흐드러지게 핀 국화문양이 어우러져 우아한 멋을 느낄 수 있다.

<분청철화삼엽문병>(도2), <청화백자초화문병>(도3), <백자유병>(도4)은 모두 조선시대 제작된 것으로 문양이 들어간 경우 철화기법이나 청화안료를 사용해 삼엽문蔘葉文, 초화문草花紋 등을 그려넣어 장식했다. 이러한 문양은 구체적인 꽃모양이라기보다는 야생화, 풀잎 등의 모습을 간소화한 문양으로 자유분방한 표현이 특유의 미감을 선보인다. 크게 화려하진 않지만 도자기의 심플한 모양과 함께 질박하면서도 은은한 매력이 깃들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유병과 짝을 이룬 유등油燈은 언제부터 사용된 것일까? 우리나라는 삼국시대三國時代와 조선시대朝鮮時代이래로 촛대燭臺와 유등이 가장 많이 보급되었으나 당시 실내조명기구로 사용하면서 크게 대별되었다. 당시 귀한 초[燭]와 촛대를 사용하는 층이 귀족이라면 기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서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초의 사용은 생산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하여 가격이 아주 고가였기 때문에 사회 계층에 따라 엄격히 사용이 제한되었다. 따라서 당시에 초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상류층에서는 각종 행사나 예·의식을 비롯한 일상생활에 조명용으로, 노복들까지도 초를 사용하였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제사 때에도 초를 구하기 어려워 등을 대신 사용하기도 하고 초를 친구한테 빌려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유등의 기름은 손쉽게 구할 수 있어 일반가정의 실내조명수단으로 널리 사용하게 되었으며 등기구 발달에 따라 많은 의장도 지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등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고대에도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생각한다. 중국은 일찍부터 등기구가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고대 중국에서는 어떤 등유를 사용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고대 중국에서 사용한 등유

중국의 등과 등유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면 상주시기商周時期에는 등이라는 글자가 없었으며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등燈’이라 명칭했다. 한나라 시기의 등구燈具중 같은 조형의 등구일지라도 어떤 것은 ‘등’, 어떤 것은 ‘정錠’이라고 불렀다. 등은 전국시기의 명칭이고 정은 한나라의 명칭이다. 명칭은 다르나 그 대상은 완전히 같은 것이다. 일례로 청동두형의 등도 ‘동정銅錠’ 또는 ‘동등銅燈’이라고 함께 사용했으며 한나라 후반부터 이를 등이라고 통일하여 불렀다. 전국 진·한시기秦漢時期의 등구는 거의 청동靑銅으로 제작되었으며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이르러 청자靑瓷가 보편화되며 등구燈具는 청자로 많이 제조되었다.
고대 중국 등유의 경우 주로 동물유지와 식물성기름을 사용했다. 하북만성 한 묘지에서 출토된 한 건의 치등(卮灯, 잔형등) 보고서 <만성한 묘지 발굴서>중에는 ‘치등 중 한 뭉치모양의 물질은 회녹색이고 일반 기온에서 고체 상태로 있으며 물에 잘 용해되지 않으며 비중이 1보다 작으며 유기용제 중 잘 용해되며 염소 중에서 여과해 말린 후 적광선 검증결과 지방(감유지甘油脂, 소나 돼지 등의 가죽 안쪽에 기름 조각이 붙어있는 부분)이 동염(銅鹽, 누런소금)으로 변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실험결과 이 물질은 소고기기름과 같아 동물기름과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을 켜는 기름은 《제민요출劑民要朮》, 《농서農書》, 《천공개물天工開物》등의 자료에 근거하면 주로 삼기름, 유채기름, 목화씨기름, 동나무기름 등을 썼다고 한다. 기름을 연소하는 등구를 ‘유등’이라고 한다. 유등의 등잔은 기름을 넣는 등의 기름과 기름[脂]에 담겨져 있는 심지가 있다. 등심지는 실제상 횃불이 변화되어 온 것이다. 횃불은 삼씨麻賁를 엮어 만든 것이다.
진·한시기의 등심지도 삼씨로 만들어졌으나 조금 가늘었다. 삼씨를 쪄서 말린 후 심지로 사용했는데 이는 단단한 섬유로 만든 것이라 직접 등잔 속에 넣을 수 있어 진·한시기의 등유는 대부분 이 등잔 중심에 송곳모양의 지정(支釘, 침)이 있다. 등심지를 지정에 꽂으면 불도 등잔 위에 바로 설 수 있었다. 이외에도 등심지는 여러 가지 식물섬유로도 만들어졌으며 면사(棉紗, 솜)도 심지로 사용했다. 사실 중국의 고대 등기는 그 재료와 형태를 보더라도 일일이 고찰하기 어렵고 양이 방대하여 서술하기가 어렵다.

중국으로부터 고등기 유입된 것으로 추정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이전에 출토된 고등기를 살펴보면 중국에서 유래된 고등기와 그 형태가 비슷한 점으로 볼 때 중국에서 고등기가 한반도에 유입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일례로 한의 무제(B,C. 206~220)는 고조선에 침략하여 고구려高句麗에 의해 패망하고(A,D. 313) 또한 낙랑군의 패망 후 유물이 삼국시대三國時代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낙랑군을 정복한 관계로 가장 일찍 중국문물을 접하게 되었고 신라는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백제는 남조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가야 또한 일찍이 한대 유물을 많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삼국 모두 중국 유물을 받아들였다. 삼국은 독자적인 고유 예술에 유입된 문물을 가미하여 독창적인 문화를 개발하여 발전시켰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로 고등기의 종류나 형태는 등잔이 사용된 재료에 따라 청동기, 토기, 자기, 옥석, 철와기로 나누어지며 나름대로의 독특한 형태로 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삼국시대부터 많은 유등이 제작됐을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등유로는 어떤 기름을 썼는지 알아보자.

삼국시대 유등의 재료와 관련 사료

기름을 연소하는 등기를 유등이라 한다. 등유의 등잔은 잔의 형태에 기름을 넣은 방식이며 잔에는 심지가 있다. 삼국시대의 등기에서는 석기나 토기류가 많고, 기름으로는 동물의 기름이나 식물성기름을 사용했다. 식물성기름으로는 참기름, 들기름, 콩기름, 피마자기름 등을, 동물성기름으로는 소, 돼지기름을, 생선기름으로는 고래 기름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호마유(참기름)는 궁중과 상류사회에서 많이 사용하였고 사원에서도 사용했다. 그 외에 들기름, 콩기름, 피마자유 등은 중류층에서 사용되었으며 동물성기름은 주로 서민층에서 사용했다. 해안가 주민들은 식물성기름을 구하기 어려워 고래를 잡아 고기는 식용으로, 기름은 등유로 사용했다고 한다. 심지의 재료로는 솜, 삼실, 한지 꼰 것 등을 사용했다.
불교에서의 등은 지혜, 해탈, 자비, 선행 등을 의미하고 있으며 부처님에 대한 공양으로 등과 등유를 으뜸으로 친다고 했다. 이는 등불 하나하나가 수미산과 같을 뿐 아니라 한 종지의 등유인 기름은 큰 바닷물과 같아서 이는 모든 공양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법공양에 속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시기에 어떤 기름을 썼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삼국시대에 사용한 등유 중 신라시대에 호마유(참기름)가 사용된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료(이 사료는 한국의 고등기에서 그 내용을 옮겨 놓은 것임)가 있다. 《삼국유사》 제4권 선율환생이 그것이다. 이것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망덕사의 승 선율은 시주전을 모아 육백만야대품경을 완성코자 노력하던 중 그 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승에 가야만 했다. 선율은 저승에서 염라대왕의 취조를 받았다.
“너는 전생에 무슨 업을 하였나?”
“반승은 단연 대품경을 완취하고저 염원하였으나 아직 반도 못하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 쪽 대장에 네 수명은 이미 끝나고 있다. 그러나 네 원은 매우 기특한 바 있어 보전 완성 시까지 다시 한 번 인간세계에 돌아가라.”
이렇게 해서 선율은 다시 세상으로 쫓겨나게 되었는데 도중 한 여자가 울면서 선율에게 애걸했다.
“스님! 저도 신라의 남염주에서 왔습니다. 생전 나의 부모가 금강산에 시전 일부를 편취한 죄로 명부의 주검을 입어 여기에서 오랫동안 고생하고 있습니다. 사바계에 돌아가시면 부친을 만나 그 시전을 사원에 돌려주도록 훈유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생전 내가 일하면서 호마유를 모아 마루 밑 단지에 넣어 두었습니다. 이것을 불전의 등명으로 바쳐주십시오. 또한 내 침상의 이불 속에는 많은 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시포를 팔아서 경을 만드는 경비로 써 주시면 나도 극락왕생 되겠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나 네 집은 어디에 있는가?”
“저의 집은 소량부 구원사 서남에 있는 마을입니다.”
이때는 선율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과 같이 다시 이 세상에 돌아왔다. 실은 이때는 선율이 죽은지 이미 1일째로 남산 동쪽 기슭 묘지에 묻힌 뒤였는데 다시 3일간 관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그 부근을 지나던 목동이 과중에서 소리 나는 것을 듣고 급히 망덕사에 알리니 스님들이 급히 달려와서 선율을 구했다. 선율은 전말을 이야기하고 조사시킨 결과 그 여자의 부모는 존세하고 있어 시전은 금강산에 돌려주기로 하였는데 그 여자는 15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자가 쓰던 이불을 찾아보니 과연 포가 나왔고 마루 밑에서는 호마유(참기름)의 단지가 발견되었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크게 감명하여 망녀의 제사를 지냈는데 망녀의 혼령이 나타나서 선율사의 은혜를 감사하고 지옥고를 벗었다고 사례를 올렸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크게 감격하여 선율의 사업을 도와서 보전의 완성을 볼 수 있었다 한다.

이 내용은 불전의 등명에 호마유(참기름)를 사용한 것을 실증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다음 호에 계속)



글 정하근(고은당 대표) 사진 이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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