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등기구古燈器具 ④ 촛대燭臺Ⅰ

금동으로 제작된 이 화려한 촛대는 고종황제가 쓰던 것으로 조선시대의 뛰어난 공예기술과 격조 높은 전통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8월부터는 우리의 아름다운 촛대 속에 담긴 오랜 등촉기구의 역사, 종류 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는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이 말을 가슴 속에 새겨야할 것이다. 우리는 잊지 못할, 잊어서는 안 되는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구한말 중국과 일본은 조선을 침략해서 우리나라 국권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중요한 문화재를 상당수 약탈했다. 우리는 이 굴욕적인 역사를 잊으면 안될 것이다.
여기 소개하는 촛대는 고종황제가 사용하던 것으로 혼란의 시기에 일본으로 유출됐을 것이다. 1995년 일본 경매에서 매입한 이 촛대는 전체가 금동으로 제작된 귀한 작품인데 제작기법이나 형태가 궁의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라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수려하다.
하대는 복발형으로 당초문양이 두 줄, 맨 윗줄에는 삼각형이 빙 둘러져 있으며 무늬 사이사이에는 작은 구슬문양을 오밀조밀하게 새겨 넣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삼각형의 무늬는 태양문을 띠는데, 연면성을 뜻하는 당초문과 더불어 영원토록 찬란히 빛나는 태양을 형상화하여 새겨 넣은 것이 아닐까 추정해본다.
등간(촛대 부분)은 염주문의 기둥으로, 7개의 염주모양 조형이 일정 간격을 두고 줄줄이 꿰어져 있다.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염주문 크기가 작아져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단조롭지 않으면서도 균형감 있다. 촛대기둥 끝에는 초를 받치는 동그란 판이 있고, 한가운데에 초를 꽂도록 만들어놓은 초꽂이가 달려 있다. 사진에 보이는 연봉모양의 물건은 초를 키지 않을 때 초꽂이를 덮는 일종의 덮개로 동으로 만들어졌다. 다섯겹의 꽃잎이 살짝 포개진 모습으로 제작됐으며 초꽂이를 살짝 덮을 만큼 앙증맞은 크기이면서도 우아한 기품이 깃들어 초를 키지 않을 때조차 격조 있는 모습이다. 초꽂이를 받치는 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판 안을 들여다보면 초꽂이를 중심으로 꽃받침으로 추정되는 네 개의 작은 잎과 연밥에 달린 연실로 생각되는 잔잔한 선이 둘러졌다. 이렇듯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부분까지 세세히 장식한 모습이 놀라울 따름이다. 소담한 연꽃봉우리에서 염주문 기둥을 지나 맨 밑 하단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비례, 곡선과 직선의 조화가 그저 감탄스럽다.

촛대 뒤에 달린, 바람막이 역할을 하는 방풍선은 나비모양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나비 날개에는 촛대 하단과 비슷한 당초문이 새겨져있으며 촛대 하단과 마찬가지로 문양 바깥쪽에는 작은 구슬모양이 빼곡하다. 날개의 양 끝은 네 개의 곡선으로 이뤄져 있고 맨 아래쪽에는 음양의 조화 및 태초의 우주를 상징하는 태극문이 새겨졌다. 올록볼록한 날개의 곡선과 쭉 뻗은 더듬이가 환상적으로 조화돼 왕실의 화려함을 뽐내는 듯하다. 나비는 부귀, 행복, 남녀화합을 뜻하는 대표적인 길상문양으로 촛대가 한 쌍이라는 점에서 금슬 좋은 부부라는 의미와도 상통한다. 방풍선은 회전식이라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도록 만들어졌는데, 그 모습은 나비가 팔랑거리며 날갯짓하는 모습과도 같지 않았을까? 방풍선 아랫부분에는 다른 촛대에서는 보기 어려운 초심지 가위가 매달려 있다. 초심지 가위는 촛불을 끄거나 초심지를 정돈할 때 사용되는 것으로 유려한 곡선 모양이라 촛대의 장신구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방풍선이 달린 막대 끝은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감돼 촛대의 맨 끝까지 심혈을 기울인 장인의 열정을 가늠케 한다.
이토록 높은 기술력과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촛대가 등장하기까지 수많은 세월과 시행착오를 거쳤을 터, 우리나라 등촉(燈燭, 등불과 촛불을 아울러 이르는 말)기구의 역사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중국 고등기의 영향

우리나라 등촉기구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우선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삼국시대 중엽에는 이미 낙랑 공예에서 영향을 받은 한대식 등촉기구가 발견돼 고대 초 등기구 양식 성립에 원천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한정된 일부 상류계층과 사원만이 등촉기구를 향유했으며 일반 서민층은 들짐승의 지방이나 식물성 기름을 이용한 소박한 등잔만을 사용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어떤 기구를 이용하여 어떻게 불을 얻었는지 알 수 없으며 학술적인 사료 또한 찾아볼 수가 없고 실물도 전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선사시대 후에 삼국시대에는 어떤 등구를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확인하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낙랑 시대의 등촉기구가 많이 발굴되었으나 이는 순수한 우리의 유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삼국시대 이전의 출토품 고등기의 경우 중국에서 유래된 고등기와 그 형태와 모양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중국에서 사용된 고등기가 한반도에 전래된 것으로 추측한다.
일례로 한 무제(B.C 206~220)가 고조선을 침략한 뒤, 고구려(B.C 37~668)에 의하여 패망하고(A.D 313) 뒤이어 낙랑군도 패망하던 시기에 유물이 삼국으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 고등기를 살펴보면 중국 고등기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삼국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고유 예술에 유입된 문물을 가미하여 독창적으로 등기구를 개발하여 사용했을 것이다. 당시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낙랑군을 정복한 관계로 고구려가 가장 일찍 중국 문물을 접하게 되었고, 신라는 당(618~907)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백제는 남조(420~589)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가야 또한 일찍이 한나라의 유물을 많이 받아들여 등촉기구를 제작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등촉기구의 시작은 삼국시대부터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계로 삼국시대의 등촉기구에 대하여는 중국의 고대 등구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철제나 목제 등경(燈檠, 등잔을 걸어 놓는 기구)은 사각, 팔각, 원형의 형태에 고려시대 이래의 영향을 받은 이단, 삼단의 등잔걸이 정착 단부가 있는 거치형 모양이다.
고려시대 등이라 하면 귀족공예적인 형태 및 문양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데 귀족사회적 계층 구조로 서민층까지 공예적인 등촉기구가 보편화되진 못했다.
그에 반하여 조선전기에는 산업경제가 발흥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구조의 개혁 등을 통해 공예품의 보급이 이루어졌던 시대이므로 조선시대의 등촉기구는 실용적인 서민공예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더구나 숙종, 영조, 정조의 삼대에 걸친 예술부흥기에 이르러서는 간명하고도 세련된 등촉 의장意匠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소박하고도 간결한 의장은 민예적인 아름다움과 같은 장식적인 면모는 물론 불집게를 비롯한 창의적 발상이 어우러져서 조선시대 아름다움의 본바탕을 보여주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참고자료
《삼국유사》, 《한국전력 : 한국의 고등기 (안겸)》
김삼대자, <이조시대 등촉기구에 관한 고찰 (이화여대 석사 논문)>


글 정하근(고은당 대표)
사진 이주용 기자
유물 고은당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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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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