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대학 미술관 소장 민화 ② – 책거리도 8폭 병풍

하버드 대학 미술관에 소장된 민화 이야기, 그 두 번째로 책거리도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유물에서는 국내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소재도 발견할 수 있을뿐더러 동일 공방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한국에 남아 있어 서로 비교하며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 책거리들의 이야기를 찬찬히 살펴보자. (편집자주)


만년필과 밤이 등장하는 <책거리도>

이달에 소개할 유물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병풍이다(도1). 하 버드 소장 에서는 만년필이나 밤〔栗〕처럼 보통의 에서 보기 드문 소재가 포함되어 있다. 아울러 국내의 다른 기관에 동일 공방工房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군이 남아 있어 이들을 하나 의 그룹으로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먼저 하버드 는 기물이 나 열된 형식의 8폭 병풍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화면 전반에 다양한 패턴의 책 장정裝幀, 꽃꽂이, 고동기古銅器와 중국 채색 도자기가 다수 등장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왼쪽부터 1폭에는 고동기, 밤을 담은 바구니, 매화꽃 및 철쭉 꽃꽂이가 있다. 2폭에는 복숭아 두 과가 탐스럽게 담겨 있고 참나리 꽃꽂이, 화로가 있다. 3폭에는 안경과 안경집, 도장 두 과가 보이고 백합 및 맨드라미 꽃꽂이, 석류가 탐스럽게 그려져 있다. 4폭에는 청화 주자, 국화 꽃꽂이, 불수감이 있다. 5폭에는 포도, 공작 깃털, 연꽃 처럼 책거리에서 자주 보이는 도상 뿐 아니라 시계와 만년필이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6폭에는 복숭아, 참나리 꽃꽂이, 촛대, 청화 주자가 두 드러진다. 7폭에는 벼루, 붓이 꽂혀 있는 필통, 석류와 불수감이 있다. 8 폭에는 찻잔을 거꾸로 쌓아둔 도상과 도자 주자가 있다. 아울러 송나라 균요鈞窯 자기로 보이는 흰색 안료가 흘러내린 찻잔이 인상적이다. 사실 상 이러한 도상들은 대부분 보통의 책거리에도 자주 등장하는 것들이 다. 그런데 유독 특이하면서도 이 작품의 제작 시기를 추정하게 하는 도 상으로 만년필이 있다. 책거리에는 보통 필통에 꽂혀진 붓이 그려지곤 하는데 하버드 본에는 붓과 함께 만년필이 등장한다(도1-1). 우리나라 에 만년필이 유입된 것은 1897년경으로 미국의 루이스 워터맨(Lewis E. Waterman, 1837~1901)이 개발한 것이 일본을 거쳐 수입되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제작 시기는 1897년 이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유물과 동일 초본을 활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12폭 병풍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 어 있다(도2). 국립중앙박물관 본도 하버드 것과 마찬가지로 책 장정, 꽃 꽂이, 고동기, 도자기가 매 폭에 등장한다. 그런데 세부를 비교해보면 국 립중앙박물관 본이 하버드 본보다 도상이 조금씩 정교하고 묘사가 꼼 꼼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장印章 묘사의 경우 하버드 본 은 인면印面이 드러나지 않은 반면 국립중앙박물관 본은 완산학사完山 學士, 석당石堂이라는 글씨가 드러나 있다. 시계의 경우에도 하버드 본 은 뚜껑을 닫은 채로 묘사(도1-4)한 데에 반해 국립중앙박물관 본에는 숫자, 시침, 분침까지 잘 묘사가 되어 있다(도2-4). 게다가 국립중앙박물 관 본에는 하버드 본에 없는 회중시계가 두 점 포함되어 있다. 안경과 안 경집의 묘사도 하버드 본은 두 물건을 각기 맥락 없이 나열해 놓은 반면 국립중앙박물관 본에는 안경집을 반쯤 열어 안경이 보이게 묘사하였다. 그릇을 포개 놓은 도상과 밤의 묘사를 비교해 보아도 하버드 본(도1-2, 도1-3)보다 국립중앙박물관 본(도2-1, 도2-2)이 조금씩 더 정교하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국립중앙박물관 본에는 편지 봉투에 부안군 내扶安郡內 무오오월戊午五月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 작품의 제작 시기 도 무오(1918)년 이후로 추정된다. 아울러 흥미로운 도상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10 Cigarette, 定價六錢, MELON(?), Sweeten이라고 적힌 담뱃 갑이다(도2-3). 그런데 MELON(?)이라 적힌 영어 알파벳은 글을 썼다기보다는 그렸다고 하는 것이 맞을 정도의 수준이다. 이 담뱃 갑은 1921년 이후 조선총독부전매국朝鮮總督府專賣局에 서 생산한 멜론 참외 담배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과 유사한 작례가 선문대학교 박물관(도3)과 김종춘 개인 소장(도4)으로도 전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 유 물들도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두 책 장정, 꽃꽂이, 고동 기, 도자기 도상이 두드러진다. 포개진 그릇과 밤 도상도 나 온다(도3-1, 도3-2). 그런데 선문대학교 본에도 제작 시기를 가늠하게 하는 도상이 하나 등장하는데 그것은 성냥갑이 다(도3-3). 상자의 앞면에 조선朝鮮이라는 제목이 있고 옆 면에 이십본입貳拾本入이라 적혀 있다. 우리나라에서 조선 이라는 성냥은 조선인촌회사朝鮮燐寸會社에 의해 1917년 부터 생산된 적이 있다. 이 같은 사실을 고려하면 이 는 1917년 이후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국립중앙 박물관 본이 1918~1921년 이후로 제작 시기가 추정되는 것 과 연대가 부합한다. 하나의 책거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꽤나 많은 지물의 도안이 필요하다. 이로 인해 책거리는 전 체이든 일부이든 간에 초본이 활용된 경우가 많았다. 현재 세상에 유전하는 책거리 초본도 여러 점 있다. 하버드 소장 본을 포함한 나머지 3점의 유물도 여러 도상이 반복적으로 재현되었다는 점에서 동일 공방에서 부분 도안을 활용하 여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시계나 밤의 도상을 보 면 국립중앙박물관 본(2-4)이 가장 정교하고 하버드 본과 선문대 본이 그 다음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도1-4, 도3-4). 도안의 정교한 정도는 작품 제작의 기간 및 공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김수진 (한국민화학회 학술이사, 하버드 옌칭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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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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