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대학 미술관 소장 민화 ① – 혁필, 책거리

오랜 역사를 지닌 미국 보스턴에는 한국 민화를 소장한 기관들이 적지 않다. 1년 간 하버드 옌칭 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에서 체류 중인 한국민화학회 김수진 학술이사의 연재기사를 통해 해외에 있는 우리 민화를 들여다보도록 한다. (편집자주)

보스턴은 미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로 하버드 대학교 미술관, 보스턴 미술관, 피바디 엑세스 박물관 등 한국 민화를 소장한 기관들이 여럿 위치해 있다. 그간 이들 기관에 소장된 한국 유물은 한국국제교류재단과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일부가 국내에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에는 민화의 가치가 지금만큼 평가되기 전이라 민화 작품은 기본적인 소개조차 누락된 경우가 많았다. 아울러 보스턴 미술관과 하버드 대학 미술관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구입한 민화의 수도 적지 않다. 따라서 이 연재는 이들 기관에 소장된 작품 중 그간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던 민화를 소개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차후에는 이 지역의 개인 소장가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 민화도 소개하고자 한다. 외교, 교육, 사업 등의 이유로 한국에 체류하면서 민화를 수집해 간 이들의 민화는 저마다 흥미로운 내력을 가지고 있다. 해당 연재는 미국에서 한국 미술을 수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기회도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민화를 소개함으로써 국내 민화의 연구와 전승에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달에 소개할 유물은 하버드 대학교 부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민화 두 점이다. 하버드 대학교 내에는 원래 포그 아트(Fogg Art) 미술관, 부시 라이징거(Busch Reisinger) 미술관, 아서 새클러(Arthur M. Sackler) 미술관이라는 세 개의 미술관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여러 면에서 관리와 사용이 불편하던 터라 2015년에 하나로 통합되었다. 이 중 그간 공개된 적이 없었던 민화 5점을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필립 호퍼의 <상국>, <설매> 혁필

먼저 소개할 작품은 혁필革筆 대련 한 쌍과 단품 책거리이다. 혁필은 필립 호퍼(Philip Hofer, 1898-1984)가 수집한 것이고 책거리는 덴만 로스(Denman Waldo Ross, 1853-1935)가 수집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하버드 대학 미술관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미국 내 한국 미술의 수집은 대개 20세기 초에 중국과 일본 미술의 수집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동반된 경우가 많다. 이 두 사람 또한 일본과 중국에 먼저 큰 관심을 가졌고 그 과정에서 한국 유물도 수집할 수 있었다.
필립 호퍼가 수집한 혁필 대련은 말 그대로 붓이 아니라 가죽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림은 크게 두 단으로 꾸며졌는데 상단에는 시가 있고 아래는 ‘상국霜菊’과 ‘설매雪梅’라는 글씨로 구성되었다(도판1, 도판2). 글씨는 획을 썼다고 하기 보다는 유려한 놀림으로 그렸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국菊’과 ‘매梅’에는 각각 국화와 매화 꽃송이가 그려졌다. ‘상霜’, ‘설雪’ 위에는 새가 날아와 앉았다. 뾰족한 새의 부리는 붓을 사용하여 하이라이트를 주었다(도3). 상단의 제화시는 어렵지 않게 읽힌다. 국화는 ‘오직 늦게 시드는 국화만이 남아 있네 唯有黃花晩節香’, 매화는 ‘흰 눈 쌓인 매화가 옥당을 비추네晴雪梅花照玉堂’라는 내용이다. 시구는 평범하지만 ‘서리’와 ‘눈’이 내린 겨울에 마지막까지 남은 국화霜菊와 누구보다 먼저 핀 매화雪梅를 노래하기에 적당한 내용이다. 작품에는 ‘배 교장은 웃으며 받아 주시오裵校長 咲納’와 ‘문인 이명혁이 삼가 드립니다門人李明赫敬贈’이라는 문구가 남아 있다. 배교장은 누군지 알 수 없고 이명혁은 한국 쪽 사료에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이명혁의 혁필과 민화는 일본 경매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대부분 위트 있는 그림과 유려한 글씨가 합쳐진 작품이다. 사실상 혁필 작품은 글씨를 읽고 그림을 보기 위해서만 제작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혁필은 주문을 받아 장고長考 끝에 완성하는 작품이 아니다. 사람 모이는 골목이나 장터로 작가가 직접 찾아가 고객에게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보이는 퍼포먼스가 포함된 종합 예술이다(도4). 국화 그림에는 ‘해동귤포海東橘圃’라는 낙서와 함께 귤나무 모양의 ‘귤橘’ 인장과 ‘귤포橘圃’, ‘조선서화朝鮮書畵’라고 새긴 인장이 찍혀 있다. 굳이 ‘해동’과 ‘조선’을 넣어 자신의 국적을 밝힌 부분은 이명혁이 주로 일본에서 활동했었을 것이라는 추정에 힘을 실어 준다. 실제 많은 혁필 화가들이 퍼포먼스와 재치 어린 예술성을 바탕으로 외국인 고객들에게 더 큰 인기를 끌곤 하였다. 그렇다면 필립 호퍼란 인물은 이 작품을 어디에서 구했던 것일까?
필립 호퍼는 하버드의 고도서 컬렉션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오랜 기간 하버드에서 근무했던 호퍼가 죽자 그의 수집품은 대부분 하버드에 기증되었다. 1888년에는 호퍼의 수집품을 정리한 대규모 전시도 있었다. 현재 하버드 대학에서는 필립 호퍼 상(The Philip Hofer prize)이 제정되어 1년에 한번 도서와 출판의 역사를 다루는 학자들에게 수여되고 있다. 그만큼 호퍼는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고문서의 중요한 수집가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정작 필자가 필립 호퍼 컬렉션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다. 필립 호퍼가 하버드에 기증한 유물의 수는 총 3,000점 가량인데 그 중 2,200 여 점이 한·중·일 삼국의 유물이었다. 물론 그 동안 호퍼 컬렉션 가운데 일본 병풍, 판화, 에마키繪卷에 대해서는 일본미술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소개된 바가 있다.
그러나 컬렉션의 수량을 고려하면 그간 호퍼가 유럽 고문서 전문가로만 주목을 받았다는 점은 이상할 지경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금 균형 있는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호퍼의 동양 컬렉션 중에 한국 유물은 57점 포함되어 있다. 미술품으로는 나전칠기, 토기, 청화백자, 민화가 있고 대부분은 《묘법연화경》과 같은 불교 경전, 사경, 《삼강행실도》, 《관제성적도》와 같은 전적과 판화이다. 그렇다면 호퍼는 어떤 연유에서 한국 미술을 수집할 수 있었을까?
하버드에서 학부를 다니던 시절부터 호퍼의 취미는 중고 서점을 드나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1921년 졸업 후 얼마간 일반 회사에 취직했던 호퍼는 다시 하버드로 돌아와 1929년 미술사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0년 간 뉴욕의 몇몇 도서관에서 일하던 중 호퍼는 1938년 하버드 포그 미술관에 자리를 얻게 되었다. 호퍼의 부임으로 인해 미술관 내에는 출판물 및 판화(Printing and Graphic Arts) 전담 부서가 신설되었다. 이 과정에서 호퍼는 자신의 개인 수집품의 수도 계속 늘려갔다. <상국>과 <설매>의 뒷면에는 호퍼가 친필로 남긴 유물 구입 정보가 남아 있다. 호퍼 컬렉션을 오랫동안 연구한 이들은 호퍼가 자기만의 암호로 유물을 구입한 시간, 장소, 액수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상국>과 <설매>에서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이 작품을 1962년 12월 뉴욕의 C. T. Loo 상회에서 구입하였다는 것이다(도 5). C. T. Loo(盧芹齋, 1880~1957)는 20세기 전반 뉴욕과 파리에 골동상을 운영하던 거물급 인사였다(도 6). 미국 내에서 동양 미술을 취급하던 이가 많지 않았던 때에 루 상회가 호퍼에게 중요한 수집 경로가 되었을 것이라는 정황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덴만 로스의 <책거리>

하버드 미술관에 전하는 단품 <책거리>는 크기와 형식면에서 독특한 작품이다(도 7). 대개 책거리는 병풍 형식에 대한 선호가 뚜렷한 주제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높이 50.8cm 너비 158cm크기로 현재 액자 상태이다. 이것이 언제 액자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화면의 가로결과 세로결에 바둑판 모양으로 전반적인 박락이 이루어진 것을 볼 때 어딘가에 부착되다가 떼어냈던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가옥 내의 천정과 벽 사이에 부착되던 벽장화의 일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도8). 심지어 화면 전체가 물에 의해 손상된 흔적도 있는데 천정에서 샌 빗물로 인한 것일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볼 수 있다. 화면 전체의 손상에도 불구하고 원래 그림은 꽤나 수준이 있었던 것 같다. 차분한 색감에 전형적인 책거리 소재가 고루 보인다. 공작 깃털 한 쌍, 석인재石印材 두 과, 수선화, 불수감, 복숭아까지. 특히 화려한 책 장정과 말아 놓은 포장용 비단의 디자인이 정교한 점이 눈에 띈다.
이 유물은 덴만 로스(Denman Waldo Ross, 1853-1935)라는 인물에 의해 1920년에 하버드에 기증되었다. 덴만 로스는 1853년 미국 신시내티에서 태어나 1875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1880년 하버드에서 정치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50여 년의 남은 생을 미술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는 데에 사용하였다. 그 스스로 그림을 그렸고 그림 이론을 공부하였다. 아울러 유럽과 아시아를 여행하며 미술품을 수집하고 연구하였다. 1895년부터는 죽는 날까지 40여 년간 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의 운영에 참여하였다. 1899년 이래로는 하버드 대학에서 미술 이론을 가르쳤다. 그의 수집 활동은 유럽 미술에서 시작하였으나 점차 동양 미술로 옮겨갔다. 특히 중국과 일본을 여행하고 난 후에는 동양 미술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로스는 주로 일본 그림과 직물, 중국 석비石碑를 모았다. 그의 수집품 가운데 11,000점은 보스턴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하버드 대학에 기증된 로스의 중국 및 일본 미술 수집품은 총 48점이다. 그 중 한국 미술품은 이 단품 책거리 한 점이다. 이는 아마도 로스가 중국과 일본 미술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사실상 로스와 호퍼는 그간 한국 미술 수집가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모은 한국 유물은 하버드의 다른 컬렉션에 비한다면 적은 규모이다. 그러나 58점의 유물 하나하나가 태평양을 건너 두 미국인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있었을 구구절절한 내력을 떠올려 보면 그저 한량없이 마음이 먹먹해진다. 그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소개의 글을 쓰는 것으로 그 세월과 내력을 헤아려볼 뿐이다.


글 김수진(한국민화학회 학술이사, 하버드 옌칭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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