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롭고 평안한 삶을 염원하다 – 곽분양행락도, 요지연도

부귀공명과 불로장생의 꿈을 그려낸 곽분양행락도와 요지연도. 각 그림의 모티브는 중국 설화에서 비롯됐으나 국내 왕실에서도 이 그림들을 활발히 제작해 사용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이번 시간에는 두 그림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편집자주)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는 중국 당나라 무장武將 곽자의(郭子儀 : 697~781)의 성공적인 삶을 그린 그림이다. 곽자의는 당 현종과 숙종 연간에 걸쳐 9년간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던 안녹산의 난을 진압하여 위기로부터 당나라를 구한 공적으로 분양왕으로 봉해져 곽분양이라고도 불렸다. 여기서 잠깐 관련 역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당 현종은 태종(이세민)의 후궁이었다가 다시 그 아들 고종의 황후가 된 측천무후의 손자로, 측천의 소생 중 예종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부친인 예종을 옹위하여 측천의 일족과 위황후의 일족까지 멸족시키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45년간의 치세동안 재위 전반부는 태종 이세민에 버금가는 치세로 ‘정관의 치’에 빗댄 ‘개원의 치’로 칭송받을 만큼 태평성대를 이끌었지만 노년에 접어들어 자신의 며느리 양옥환(양귀비)을 귀비로 맞아들인다. 현종은 양귀비를 총애하여 정치를 등한시하고 도교道敎에 막대한 국비를 쏟아 붓는 등 나라를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험에 처하게 하였다. 훗날 아편이라 불리는 꽃을 양귀비라 이름붙인 것을 보면 양옥환(양귀비)의 미색이 나라를 뒤흔들 만큼 치명적이었던 것 같다. 현종은 양귀비를 해어화解語花라 부르며 그녀의 미색을 찬탄하는가 하면 양귀비의 친인척을 관직에 대거 등용하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양귀비를 둘러싸고 환관과 탐관오리의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민심도 흉흉해졌다. 당시 변방의 무장이었던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 장안과 낙양까지 함락하는 등 큰 어려움에 직면하기에 이른다.
곽자의는 안사의 난(안녹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난)을 진압하여 당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곽자의(곽분양)는 유일하게 장원급제하여 재상까지 오른 사람으로 4대에 걸쳐 조정을 섬기며 두 번이나 재상에 발탁되었다. 그는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85세로 죽을 때까지 8명의 아들과 7명의 사위가 모두 입신출세하였으며 백자천손百子千孫, 즉 백 명의 자식과 천 명의 손자를 거느렸다고 전해진다. 이런 곽자의의 삶은 후대에 부귀공명을 누리는 상징이 되었다.

부귀공명의 염원이 담긴 곽분양행락도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에 곽자의의 삶을 병풍으로 제작한 곽분양행락도가 크게 유행하였다. 왕실뿐 아니라 일반 사대부가의 혼례식에서 곽분양행락도가 그려져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실제로 1802년에는 왕실에서 순조·순원후 가례에 실제 곽분양행락도를 제작하여 사용했다. 이후 곽분양행락도는 왕실의 모든 가례에 대표적인 병풍그림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곽분양행락도에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바라는 조선왕실의 소망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시대 곽분양행도는 곽자의를 소재로 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소설의 삽화나 화보 등의 영향을 받아 궁중 화원들에 의해 새롭게 구성된 것이다. 농채의 화려하고 정교하게 묘사된 화면에는 곽분양과 그의 처·자식·손자들이 연회를 즐기는 장면들이 파노라마 형식으로 구성되어 8폭, 혹은 10폭의 병풍형식으로 제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장면 중 정원에서 목마를 타거나 일산日傘을 들고 있는 어린이들이 묘사된 장면은 곽자의의 백자천손의 복락을 묘사한 것으로 백동자도百童子圖의 장면과 흡사하다. 작품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구성과 배치가 유사한 작품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볼 때 동일한 본本에 의해 제작한 것으로 보여진다.

서왕모와 관련된 수많은 설화들

요지연도瑤池宴圖는 중국 도교의 여선女仙인 서왕모西王母의 거처 곤륜산 요지瑤池에서 서왕모와 주나라 목왕이 벌이는 연회장면과 함께 잔치에 초대받아 오고 있는 여러 신선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목천자전穆天子傳>은 서주의 목왕穆王이 팔준마八駿馬를 타고 서쪽을 여행하면서 하백河伯, 서왕모와 같은 인물들을 만나서 겪은 일을 쓴 전기소설집으로 신화적 내용을 빼고 보면 중국 최초의 기행문이다. 줄거리를 간추려 본다면, “주나라 목왕은 서쪽 지방에 대해 호기심이 많아 즉위하자마자 팔준마를 얻어 천산天山을 찾아 황하의 물길을 따라 서쪽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 길에 황하의 신이었던 하백을 만난다. 하백의 말을 듣고 목왕은 계속해서 곤륜산을 찾아 간다. 가는 길에 목왕은 많은 이민족을 만나 그들과 선물을 주고받는다. 이윽고 곤륜산에 도착한 목왕은 황제黃帝의 궁전에서 많은 보물을 얻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서왕모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서왕모는 삼천 년에 한 번씩 군선대회群仙大會를 열어 선불성진仙佛聖眞들에게 선도복숭아를 친히 대접했다고 하는데 <서유기西遊記>에는 손오공이 요지의 선도복숭아를 따먹어 신선대회를 망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현중기玄中記>등에는 “동남쪽에 도도산桃都山이 있는데 산 위에는 거대한 복숭아나무가 있어 얼마나 큰지 밑둥지부터 가지까지 삼천리나 되고……복숭아가 맛있어서 그곳에 사는 신선이 서왕모에게 바쳤다. 복숭아 맛이 좋아 서왕모가 그 씨를 받아 심었는데 이것이 바로 선도복숭아다”라는 내용이 전한다.
서왕모와 관련된 많은 전설과 일화가 시와 문학작품 속에 등장한다. 서왕모의 노여움으로 먼 은하계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다가 매년 칠월 칠석에야 비로소 까치가 놓은 다리[烏鵲橋] 위에서 겨우 만날 수 있다는 견우직녀 이야기, 서왕모에게서 얻어온 장생불로 선약仙藥을 훔쳐 먹고 달나라로 도망가 두꺼비가 되었다는 항아姮娥 이야기도 있다. 항아 설화는 한층 더 발전하여 달 속에 계수나무가 있고 토끼가 떡방아를 찧는다는 등의 이야기로 확대되었다. 달나라로 도망간 항아를 두고 이백은 “흰 토끼는 사철 내내 떡 방아 찧고 항아 선녀 외로이 살며 뉘와 이웃할꼬”라 읊었으며, 두보는 “혼자인 항아의 삶을 짐작하나니 추운 날씨 긴 세월에 그 어떠한고”라 하여 달나라 신선이 되었지만 도리어 적막하기 그지없는 넓고 차가운 궁전에서 홀로 영원히 살 수밖에 없는 항아를 불쌍히 여기는 시문을 남겼다. 서왕모의 선도복숭아를 훔쳐먹고 인간계로 도망쳐 삼천갑자 18만 년을 살았다는 동방삭東方朔의 이야기도 전하는데, 경기도 용인시에는 탄천炭川과 관련되어 숯을 씻는 저승사자의 꾀에 넘어가 죽게 된 삼천갑자 동방삭의 전설이 있다.

이상의 세계를 표현한 요지연도

중국의 신화나 전설에서 빼놓지 않고 나오는 곳이 곤륜산崑崙山이다. 기록에 의하면 곤륜산에는 440개의 문과 다섯 개의 성, 열두 개의 누각이 있다고 전한다. 특히 서왕모가 산다는 선경仙境인 요지는 옥으로 된 군옥산群玉山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름 그대로 깊고 넓고 맑기가 깃털도 가라앉을 만큼 투명하고 빛나는 아름다운 옥과 같고, 그 주변에는 선도복숭아꽃 등 온갖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만발하였다 한다. 요지경瑤池鏡이란 바로 요지의 경치에서 유래하여 인간의 천태만상의 세태를 뜻하는 ‘요지경 속 세상’이라는 말을 파생시켰다. 서왕모가 복숭아 열리는 때에 맞추어 요지연에 많은 신선들을 초대하여 함께 즐겼다는 고사故事가 요지연도의 도상적 연원이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요지연도 대부분은 8폭 병풍이 많다. 그 중 1800년 순조의 왕세자 책봉을 기념하여 제작한 <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正廟朝王世子冊禮契屛>이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요지연도 역시 곽분양행락도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본을 가지고 반복되어 그려진 대표적 궁중화로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이상적인 신선들의 세계가 시각적으로 구현된 그림이다. 왕실에서 탄생 축하와 혼인용·축수용 병풍으로 제작, 사용되었다.

현대미술에 영감을 주는 전통 문화

철학자 칼 융과 프로이드는 ‘우리의 꿈속에는 이미 구석기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바람이 들어가 있다’고 정의했다.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옛 그림 속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은 물론 은밀한 욕망과 이념이 담겨져 있다. 누구나 곽분양처럼 부귀영화와 장수를 누리며 많은 자손을 남겨 가문이 번창하기를 소망한다. 누구나 진시황이 되어 불사약을 찾고 있으며 서왕모의 선도복숭아를 탐한다. 우리는 옛 그림에서 외형적인 것은 물론 그 속에 담겨진 역사적 사상과 소재가 갖는 상징적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그것은 전통 문화와 민족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우리의 설화와 전설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 서양화가 이만익 화백은 “세상이 급변하고 동·서가 뒤섞인 때에 우리가 누구인지, 꿈과 이상, 그리고 현재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서양보다 가깝고 훈훈한 것, 때로는 나를 아프게 하거나 분노하게 하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한恨과 기원이 담긴 우리의 얼굴을 그리고 싶었다”고 작가노트에 적고 있다.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얼굴, 그 전통의 샘물에서 회화성(독창성)을 길어 와야만 한다. 민화에서 파격적이고 서민적인 요소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독창성이야말로 새로움과 회화적인 솜씨를 보이는 미술의 기본이다. 어떤 것이 최고인지 알아야 최고 수준의 평가를 할 수 있고 작품을 그릴 수 있으며 미술의 전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이야기했듯 전통은 작가의 영혼을 비추는 창문이 되어야지, 시야를 구속하는 창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글 금광복 (대한민국민화전승민화문화재, (사)한국민화협회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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