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도 초본Ⅰ

이번 시간에 소개할 초본은 풍속도 초본이다.
이 초본을 통해 우리 풍속이 어떤 형태의 그림으로 전해져 왔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글 이다정(가회민화박물관 객원연구원)


초본의 형태를 살펴보자

풍속도 초본(도1)은 유산지에 그려져 있어, 광복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집 당시 왼쪽 상단 모서리가 훼손되어 있었으며, 현재는 보존을 위해 한지로 배접했다. 초본의 주제는 다듬이질하는 여인들이다. 화면 중앙에는 돗자리가 깔려 있고, 그 위에는 세 명의 여인이 앉아 있다. 두 명의 여인은 다듬이질하고 있는데, 한 명은 쪽머리를 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얹은머리를 하고 있다. 댕기를 드리운 다른 한 명의 여인은 옆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다. 여인들의 옷에는 ‘보라’, ‘미’ 등의 색채명이 쓰여 있는데, 대체로 간색間色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여인들 옆에는 포도와 사과가 담긴 과일바구니가 놓여있고, 돗자리 옆에는 짚신 한 켤레가 놓여있다.
화면 오른쪽에는 나무가 한 그루 높이 솟아있는데, 형태만으로는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없으나 나무에 ‘五桐(梧桐의 오기)’이라는 한자가 쓰여 있어 오동나무임을 알 수 있다. 뻗어 나온 나뭇가지 뒤에는 달로 추정되는 둥근 형태의 물체가 있고, 가지 아래에는 산이 그려져 있으며 ‘산’이라는 글자도 쓰여 있다. 오동나무의 주변에는 수풀이 그려져 있다. 뿌리와 가까운 수풀에는 몇 개의 점으로 그려진 꽃과 ‘황국’, ‘白국’이 쓰여 있어 국화를, 오동나무 뒤의 수풀에는 군데군데 ‘竹’자가 쓰여 있어 대나무를 그려야 함을 알 수 있다. 화면 왼쪽 중앙에 있는 수풀에는 ‘갈대’라는 글자와 ‘국’자가 쓰여 있다.

풍속도의 변화

풍속도뿐 아니라 풍속도 초본을 통해서도 조선 후기 풍속도와 현대 풍속도를 비교할 수 있다.
조선 후기 풍속도와 현대에 그려진 풍속도의 차이점 중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작품의 크기이다. 김홍도와 신윤복 등 조선 후기 화가들이 그린 풍속도는 대부분 화첩을 만들 만큼 화면의 크기가 작은데, 현대의 풍속도는 병풍으로 제작될 만큼 크다. 이 초본의 크기 또한 길이 74㎝, 너비 38㎝로 병풍용으로 제작된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풍속도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과거 조선의 풍속을 간접 경험하기 위해 풍속도를 원하던 사람들이 장식과 감상을 목적으로 풍속도를 원하게 됐고, 이에 따라 풍속도의 크기가 커진 것이다.
풍속도의 변화는 수요자들의 요구 이외에도 시대 상황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조선 후기 풍속도는 우리 민중의 삶을 그대로 담아내었던 반면, 일제강점기에 그려진 풍속도는 일본의 영향과 서양의 영향을 크게 받아 우리 고유의 전통이나 풍속을 담아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광복 이후에는 조선 시대의 전통 풍속을 그린 풍속도가 활발하게 제작됐고, 당시의 생활상을 반영한 풍속도도 함께 나타났는데, 이는 현실을 직시하고자 하는 화가들의 창작 의지가 드러난 결과이다.
풍속도는 변화할 수 있다. 아니 변화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변화의 원인이 외부의 압력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는 우리의 삶뿐 아니라 그림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회화기법이나 재료 면에서는 분명히 일정 부분의 발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부분에서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음 시간에는 풍속도 초본을 통해 일제강점기가 우리 풍속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다정 | 가회민화박물관 객원연구원

백석대학교 기독교박물관 학예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성백제박물관 학예연구원, 가회민화박물관 객원연구원이다.
월간<민화> 창간호부터 민화 초본에 대한 칼럼을 기고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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