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있게 더위에 맞선 선조들의 지혜 바람의 샘터 부채이야기

바람의 샘터 부채이야기

여름을 나는 전통 기물로는 부채가 으뜸이다. 부채는 바람을 일으키는 기능적인 역할 외에 멋과 풍류를 느끼게 하는 장식적인 기능도 가졌다. 단선이나 접선에 멋들어진 그림을 그리고 오묘한 공예로 선추를 장식했다. 지금도 여름이면 부채 그림전이 많이 열린다. 부채 그림에는 민화도 아주 어울린다. 여름을 맞이해 우리의 전통 공예품인 부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아득한 시절부터 함께 해온 생활의 기물

바람의 샘터 부채이야기우리 옛말에 ‘여름 생색은 부채, 겨울 생색은 달력이라(鄕中生色 夏扇冬曆)’는 말이 있듯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에 부채를 선물하는 지혜로운 풍습이 있었다.
부채는 순수한 우리말로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의 ‘부’자와 대나무를 가늘게 쪼갠다는 ‘채(조그마한 도구의 손잡이 채)’자가 어우러진 용어다. 부채라는 뜻의 한자 ‘선(扇)’은 새털을 엮어서 만들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옛날에 새털 부채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고대 제정일치 시대의 지배자가 사용한 진귀한 물건으로 새만이 오직 하늘을 오를 수 있어 새를 신의 사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깃털부채는 신성시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은 기원전 1000년경 주(周)나라 시대에 2개의 깃털로 만든 부채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삼국시대 사대 사람 제갈량은 언제나 학(鶴)의 깃털로 만든 ‘백우선(白羽扇)’으로 삼군을 지휘했다고 한다. 깃털로 만든 부채의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부채를 사용했다는 기록과 근거가 많이 남아있다. 「삼국사기」 에 태조가 즉위하자 견훤이 공작선(孔雀扇)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고 원삼국시대 전기의 유적으로 알려진 경남 창원 다호리 고분에서는 부채자루가 출토되었다. 또한 4세기 경의 유적인 고구려 안악 3호분 벽화에도 부채가 나타난다. 그밖에 산신각에 모셔진 산신령은 모두 깃털 부채를 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보다 더 오랜 흔적도 있다. 기원전 약 3000년, 고대 이집트 투탕카멘 왕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황금봉(棒) 타조 깃털로 만든 부채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부채일 것이다. 또한 기원전 1500년경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벽화에는 긴 자루로 된 종려나뭇잎 부채를 들고 왕을 수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듯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온 부채는 단순히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뿐 아니라 비와 햇빛을 가리는 우산(雨傘)과 일산(日傘)의 역할을 했으며 신분을 나타내는 도구였다.
이처럼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는 세계 어디서나 공통점을 갖는다. 그것은 인간의 오랜 역사와 같이 해왔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필수적인 도구였기 때문이다.

 

 
생활에 멋을 더한 다양한 종류와 용도

옛 사람들은 부채를 일컬어 인풍(仁風)이라 하였다. 즉 부채 바람은 ‘어진 바람’으로 임금은 바람을 일으켜 모든 백성을 위로하고자 했다고 전해진다. 단오에는 부채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는데 이 풍습은 고려 중엽부터 조선후기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유행하였다. 궁궐에서는 부채를 만드는 선공(扇工)에게 개수를 할당하여 단오선을 만들어 바치도록 하였고 이 부채를 모아 두었다가 단오에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부채를 하사받은 이들은 여기에 화가나 명필의 그림, 글씨, 시를 받거나 그냥 백선(白扇)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에 ‘고려인들은 한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니는데 접었다 폈다 하는 신기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발행된 「월간 공예」에는 전주의 합죽선(合竹扇)을 높이 평가하여 “부채로서 최상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일본에는 이 같은 물품이 없다. 조선의 공예품 중에서 영원히 갖고 싶은 것 중의 하나이다”라는 일본인의 평이 나온다.
이렇듯 접선(接扇)은 예부터 세계적으로 알려진 우리의 소중한 문화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자루 달린 태극선의 종류인 단선(團扇)은 부녀자들이 주로 사용하였고 접선은 남자들이 외출할 때 들고 다녔다. 의관을 모두 갖추고 마지막에 부채를 들어야 비로소 외출을 할 수 있었다. 여름 뿐 아니라 한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니다가 찬바람이나 먼지를 막기도 하고 불편한 상대와 마주치게 되면 슬그머니 얼굴을 가리기도하였다. 시조와 창을 할 때도 부채로 장단을 맞추거나 폈다 접었다 하며 풍류와 멋을 즐겼고 호신용으로도 사용하는 등 선비들에게 부채는 필수품이였다.
부채의 사용에도 법도가 있어 접는 부채 중 큰 것은 신분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만 사용했고, 작은 것이라도 접는 부채은 여자가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기생과 무속인, 종교인에게는 필요에 따라 허락해 사용케 하였다. 한때 옻칠한 것을 선호하기도 했는데 옻이 귀할 때는 국가에서 필요한 칠선(漆扇)외에는 옻칠 부채의 사용을 금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선면을 색깔 있는 종이나 천으로 두르고 변죽을 나전이나 화각, 대모 등을 붙여 화려하게 만든 부채를 기생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그런가 하면 노비들이 상전에게 부채질을 해주는 노선(奴扇)이라는 것도 있었다. 그냥 앉아만 있어도 견디기 힘든 삼복염서(三伏炎署)에 큰 부채인 노선(奴扇)을 천장에다 매달아 놓고 쉴 새 없이 부채질하며 땀을 흘려야 했던 상노들의 고생은 어떠했을까?

아름다운 그림과 장식, 예술성도 높아

바람의 샘터 부채이야기부채의 종류에 따라 장식도 다양했다. 단선은 손잡이와 배면 사이에 꽃지 문양을 오려 붙이는데 국화 문양과 포도 문양을 주로 섰다. 국화는 초가을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포도는 다산과 풍요를 뜻한다. 꽃지 문양을 붙임으로써 부채의 격을 높여주기도 하였다.
조선 정조 때 궁중의 화원 운초 박기준은 부채 그림을 많이 남겼는데 백선(百扇)에 산수화, 초충도, 화조도, 나비, 태극문양 등을 그렸다. 이 부채 그림은 아주 사실적이어서 마치 실물을 붙여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부채는 민화의 책가도 병풍이나 족자 등에도 그려졌는데, 대부분 낙관이 없어서 작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합죽선에는 화가의 이름이 남겨진 것들이 많다. 겸재 정선의 산수도, 단원 김홍도의 신선도, 호생관 최북의 그림이나 완당 김정희의 글씨 등 거장의 작품이 그려진 부채는 그 시대의 가장 격조 높은 부채였다.
부채의 으뜸가는 멋이라면 선추(扇錘)를 꼽을 수 있다. 부채의 손잡이에 은이나 백동장식을 붙이고 고리를 끼운 후 사복에 선추란 장식물을 단다. 옛날 이 부채는 양반이라 해도 과거에 오르지 못하면 사용하지 못했으며 벼슬한 문관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무관도 사용할 수 없었다.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사회에서 색실로 끈목을 짜서 매듭을 맺고 술을 단다는 것 자체가 지체 있는 계층에게만 허용되는 장식이었던 것이다.
선추술에는 분홍, 다홍, 자주, 연보라, 옥색, 남색 등 다양한 색이 쓰였는데 붕술이나 실술같은 번다한 것은 피하고 주로 단정하게 딸기술이나 광다회를 이용하는 방울술을 다는 것이 예사였다. 선추술에는 보다 멋스럽게 향(香)을 꿰어 달기도하고 침통 같은 조각품을 달기도 했다. 침통에 비치하는 기물은 응급용 침이나 바늘 혹은 귀이개와 이쑤시개 나침반 등인데 침통형태가 다분히 장식성 위주라 한다면 나침반은 항시 휴대 할 수 있게 극소화한 실용품이다. 자그마한 목장에다 정교하게 일력각(一力刻)하는 재간이 선추장에 부수되는 기능처럼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선추술에 매다는 목각품으로는 오래된 대추나무나 회양목, 박달나무를 깎아 새기는데 빛깔이 곱고 윤이 나는 대추나무를 제일로 친다. 물소 뿔이나 대나무 등도 있지만 극히 적은 예이다. 조각은 반양각한 것을 만각이라 하고 맞뚫어 새긴 것을 통각이라 하는데 문양의 소재는 19세기에 유행한 송학, 일월, 산수, 누각 , 불로초, 사군자, 십장생 등이 주조를 이룬다. 빼어난 조형성을 보여준다.

낭만과 풍류, 깃든 사연도 가지가지

부채에는 운치와 낭만성 그리고 풍류가 담겨져 있다. 선조 때 백호 임제가 평안부사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를 찾았으나 죽었다 하여 지니고 있던 부채에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 어듸 두고 백골만 무쳤난가 잔 자바 권하리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는 글귀를 남겼다. 그는 또 어린 기생에게 다음과 같은 시가 적힌 부채를 남겼다고 한다.
“한겨울에 부채 선물을 이상하게 생각마라. 아직 나이 어리니 어찌 능히 알겠냐마는 한밤중 서로의 생각에 불이 나게 되면 무더운 6월의 염천보다 더 뜨거울 것이다.”
이 시에 화답이라도 하듯 고시조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 있다.
“한겨울 부채 보낸 뜻을 잠깐 생각하니 가슴에 타는 불을 끄라고 보내었으나 눈물로도 못 끄는 불을 부채인들 어이하리.”
김시습은 「금오신화」 중 에 “비단 부채가 맑은 하늘을 원망하는 일은 하지마세요”라는 글귀를 남겼는데 이것은 소박당한 여인을 상징한 것으로 가을 부채처럼 자기 자신을 홀대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경남 통영 지방에는 구전 민요가 진해진다.
“부채 부채 포랑 부채 접고 피는 때깔 보소 포랑 부채 고운 도령 접는 부채 나를 주소 부채 부채 포랑 부채 가린 얼굴 눈썹 보소.”
한국인의 마음속에 투선강(投扇江)이 있었는데 어느 청렴한 관료가 임지를 떠나올 때 부채를 가지고 온 것을 부끄럽게 여겨 부채를 강에다가 던졌다는 투선강. 오늘의 현실 사회에서 투선강의 의미를 다시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문명의 이기 속에 부채는 그 설자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지만 우리의 부채에는 선조들의 풍요로운 마음과 청량감 같은 시원한 바람이 역사의 향기와 함께 불어오고 있다.

 

글 : 금광복(민화작가, 한국민화전업작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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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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