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도에 담은 소망 소과응시도 (小科應試圖)

도 1-1. 평생도(도1)의 부분

조선 후기 풍속화에 평생도(平生圖)라는 그림이 있다. 일생의 가장 영광스럽고 기념이 될 만한 장면을 8폭이나 10폭에 그린 것이다. 김홍도(金弘道)의 전칭작을 비롯해 19세기에 제작된 사례가 여러 점 전한다.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의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평생도를 제작하는 유행이 있었던 듯하다. 평생도를 통해 한 개인이 살아온 일생의 주요 순간들이 극적인 장면으로 화폭 위에 재현되었다. 예컨대 생애의 순서에 따라 돌잔치와 혼인식이 들어가고, 과거급제(科擧及第)와 주요 관직의 부임, 그리고 회갑·회혼례 등으로 채워졌다. 조선 후기에 유행한 평생도는 점차 일정한 형식을 이루며 민간으로 확산되었고, 민화(民畵)로도 그려졌다.
먼저 소개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평생도》 10폭 병풍은 주인공을 알 수 없지만, 일생의 가장 소중한 10장면을 골라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다른 평생도에서 보기 어려운 아주 특별한 장면 하나가 들어가 있다. 바로 과거시험의 응시 장면을 그린 ‘소과응시(小科應試)’라는 그림이다.(도 1) 과거시험장의 풍경을 그린 그림은 일반 풍속화나 기록화에서도 매우 드물게 전한다.
과거시험은 국가의 인재를 선발하는 주요 행사였기에 공식 기록화로도 그려졌다. 예컨대 16세기의 명종(明宗) 임금이 과거시험의 장면을 그린 그림을 신하들에게 보이며 시를 짓게 한 기록이 있다. 그림은 생원·진사를 뽑는 초시도(初試圖), 향시도(鄕試圖), 각종 문무과시도(文武科試圖) 등 23점이나 되었다. 이 그림들은 화원들이 임금이 감상할 어람용(御覽用)으로 그려 올린 기록화일 것으로 추측된다. 명종은 과거시험의 중요성을 대신들에게 당부하기 위해 기록화를 내보이고 시를 주문했던 것이다. 과거시험의 현장을 그린 궁중 소장의 기록화를 알려주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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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소과(小科) 시험장의 한 장면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의 《평생도》로 시선을 옮겨 보자. 10폭 병풍 가운데 세 번째 그림인 <소과응시>는 생원(生員)·진사(進士) 시험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소과는 3년에 한 번씩 전국에서 200명을 뽑아 생원, 진사의 자격을 주는 시험이다. 그런데 그림 속의 시험장은 규모가 너무 작다. 응시자가 고작 서른 명 정도에 불과한 과거시험이 있었을까? 이 장면은 전체 시험장의 한 부분을 그린 것으로 이해된다. 수백 명의 응시생들을 좁은 화면에 모두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실에 근거하되 한 부분을 재구성하여 그린 장면일 것이다. 그렇다면, 관료를 꿈꾸며 첫 과거의 관문에 들어선 응시생들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을까?
<소과응시>의 화면 아래에 시험장의 출입문과 담장이 보인다. 유생들이 모여 앉은 장소는 시험장 내부가 된다.(도 1) 화면 위쪽의 대청에는 감독관과 관리들이 분주한 모습이다.(도 1-1) 보안을 위해 주변을 장막으로 가렸다. 그런데 장막 가운데에 임시로 세운 거치대 위에 종이 한 장이 걸렸다. 바로 합격의 향배를 좌우할 이 날의 시험 문제지다. 따라서 그림 속의 상황은 이미 시험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장막 안쪽에는 관리들이 먼저 제출받은 시험지를 옮기거나 중간 현황을 감독관에게 보고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시험장의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하다. 유생들은 햇빛을 가리는 일산(日傘)을 쳐놓고, 그 안에서 답안을 작성하고 있다.(도 1-2) 과거시험을 보는 장면이라고 하기에는 일반적인 상식과 거리가 멀다. 더욱이 그림의 곳곳에 응시생을 도와주고 있는 정체 미상의 사람들이 포착된다. 대신 답안을 작성해 주거나 답안을 베껴 써주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부정행위가 자행하는 장면이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통제도 이루어지지 않는 이런 혼란스러운 현장이 정말 과거시험장일까? 믿기 어렵겠지만, ‘난장판’이라는 말이 이러한 과거시험장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림 속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이점은 두 명씩 짝을 지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도와주는 모습이 버젓이 그려진 점이다.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얼굴에 수염이 그려진 좀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과 수염이 없는 젊은이가 짝을 이루고 있는 점이다. 그런데, 수염있는 사람들이 주로 부정행위를 하고 있다. 과거시험장에서 일어나는 병폐들은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여러 개인 문집 등에도 자세히 언급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은 답안을 작성해 주는 거벽(巨擘), 정리된 답안을 대신 써주는 사수(寫手)라고 불렀다. 이들은 시험장에 함께 입장하여 한 사람은 책에서 정보를 찾아 글을 짓고, 다른 한 사람은 글씨를 쓰는 식으로 답안을 써주었다고 한다.
당시의 세태가 놀랍다.

당당한 모습의 주인공

과거 시험장에서의 부정행위는 대부분 지방에서 치른 소과 1차 시험인 감시(監試)나 소과 초시(初試)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위에서 본 그림의 제목도 ‘소과응시’가 아니던가. 1차 시험에 합격한 뒤 서울에 올라와 정해진 인원들만 치르는 본시험은 분위기가 이와 달랐을 것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엄격히 정렬하여 앉아 시험을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본 시험때는 <소과응시> 속의 모습과 같은 부정행위는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과응시>에서 고려해야 할 점은 이러한 부정행위로 얼룩진 장면을 왜 평생도의 한 폭으로 그렸을까 하는 점이다. 평생도는 그 주인공의 명예로운 장면을 보이기 위해 그린 것인데, 이 그림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소과응시>는 평생도의 맥락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생각해 보면, <소과응시>를 《평생도》의 한 장면으로 넣은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림 속의 주인공이 부정행위가 횡행하는 시험장에서 자신만은 정당하게 시험에 임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만약 이 그림의 주인공이 부정행위를 자행했다면, 그러한 부끄러운 모습을 평생도에 싣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주인공 자신의 당당한 모습은 시험장 전반에 흐르는 무질서한 장면과 대비를 이루게 된다.
《평생도》에는 장면마다 주인공을 반드시 그리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야만 주인공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그림 속의 이야기를 감상자가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과응시> 속의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필자의 추측으로는 응시자들의 무리 가운데 가장 오른편 위쪽에 자리한 인물로 추측된다. 일산 아래에 앉아 있는 그는 이미 답안을 다 완성하여 제출한 듯 여유로운 모습이다. 따라서 는 과거시험장에서 볼 수 있는 실상을 반영하면서도 주인공을 부각하기 위한 풍자적인 연출이 들어간 그림으로 볼 수 있다.

평생도의 유행과 확산

고위 관료들의 평생도는 구한말에 이르러 일정 주제와 형식을 갖춘 그림으로 정형화되었다. 그리고 점차 민간으로 확산되어 민화의 주제로 활발히 그려졌다. 내 일생의 이야기를 그린 나의 평생도는 아니지만, 정형화된 평생도 속에 담긴 출세, 장수(長壽), 다자손(多子孫) 등은 누구나 소망하는 보편적인 염원이었다. 즉 인생의 성공적인 모범사례를 평생도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구한말에 민간에서 평생도를 주문한 수요자는 서민층이라기보다 대부분 신흥부유층이나 중산층이었을 것이다. 먼저 민간에서 그려진 평생도를 한번 살펴보자. 필자가 찾은 사례는 송암미술관과 경기대박물관에 각각 소장된 <소과응시>이다.(도 2, 3) 두 그림은 앞서 살펴본 국립중앙박물관 본과 구성이 비슷하다.
즉 국립중앙박물관의 《평생도》와 같은 그림을 범본으로 삼아 베껴 그리면서 약간의 재구성을 가한 그림으로 추측된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어느 정도 기본기를 갖추었지만, 화원화가들의 기량과는 차이가 있었다. 두 점의 평생도는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그림의 내용은 앞서 본 <소과응시>의 구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차이점이라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유생(儒生)들의 수가 앞 시기의 그림보다 훨씬 많아졌다는 점이다. 곳곳에 펼쳐 놓은 일산 안에 유생들이 빽빽이 들어앉아 시험을 보고 있다. 이번에는 나이가 들어 보이거나 부정행위를 조력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답안지를 두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여전하다. 너무나 자유분방한 분위기여서 감독관만 없다면 과거시험장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시험공간의 위쪽에 갓을 쓰고 서 있는 사람들은 앞의 그림에서는 관원들로 나왔는데, 도포를 입은 일반 선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평생도는 특정인의 성공한 인생 스토리라기보다 출세와 행복을 추구한 많은 사람의 바람을 담은 그림이 아니었을까? 한 개인의 일생에 근거한 그림이지만, 출세에 대한 기원을 소망한 그림이기에 그만큼 수요와 인기가 많았을 것이다. 구한말의 흑백 사진에 나오는 어느 양반가의 안방에 놓인 평생도 한 점이 눈길을 끈다.(도 4) 정면을 바라보는 후덕한 부인의 뒤편에 놓인 병풍이 평생도이다. 아마도 어린 자녀들의 앞날을 축원하거나 젊은 선비의 출세를 소망하기 위해 《평생도》가 이처럼 안방에 놓였던 것은 아닐까.
병풍의 크기가 때로는 그것을 소유할 사람들의 계층을 결정한다. 구매자의 가옥에는 우선 10폭 정도의 병풍을 여유 있게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고, 그림 한 폭의 열 배에 달하는 고가의 금액을 지불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화풍의 평생도는 이름난 화원들이 그린 그림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유통되었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평생도》에서 <소과응시> 다음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삼일유가(三日遊街)를 주제로 그린 것이다. 삼일유가는 과거에 합격한 즉시 사흘 동안 가두행진을 하며 합격의 영광을 알리는 의식이다. <소과응시> 속의 주인공이 정직하게 치른 시험을 통해 합격의 영예를 안았음을 설명해 주는 장면이다. 정직하고 당당하게 실력을 발휘한 합격자에게 더 큰 영광의 순간이 기다리고 있음을 이 <소과응시>가 보여주고 있다.
민화로 분류되는 위의 두 평생도는 특정인의 일생을 그린 평생도로 시작했지만, 이후 정형화의 단계를 거치며 출세에 대한 소망을 담은 그림으로 재생산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소과응시>는 평생도에 빠지지 않고 그려졌다. 평생도 속의 과거시험은 합격을 기원하는 그림이기보다 출세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오래도록 남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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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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