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기메동양박물관(2) 샤를 바라가 마련한 유럽 최고의 민화 컬렉션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정병모

십여 년간 해외 박물관 또는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우리 민화를 조사한 정병모 교수의 여행기를 연재한다. 정병모 교수는 현재 한국 민화의 정수를 담은 <한국의 채색화> 도록을 총괄 기획하고 있고, 한국 민화의 해외전, 외국에서의 한국민화 축제, 민화의 세계문화유산 지정 등 우리 민화의 세계화에 힘쓰고 있다. 현재 정병모 교수는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이면서, 한국민화학회 회장과 사단법인 한국민화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양에서 구입한 민화들

파리 기메동양박물관1888년 프랑스 인류학자이자 여행가인 샤를 바라(Charles Louis Varat, 1842∼1893)는 증기선을 타고 제물포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풀리고, 제물포조약 덕분에 철저하게 닫혀있던 은자의 나라 조선의 땅을 당당하게 밟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본 제물포의 경치, 조선의 풍광은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웠다. 해안선과 항구를 이루는 크고 작은 섬들을 따라 아기자기한 산봉우리들이 다채롭게 솟아 있고, 항구 전체를 녹원廘苑의 둥지처럼 완벽하게 감싸 안은 가운데 마침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왜 조선을 찾았을까? 그가 직접 밝힌 목적은 “프랑스 국왕의 명을 받들어 우리의 풍습과 문화를 연구하고, 자비로 우리의 온갖 예술품과 농산품, 공산품을 구입해 본국(프랑스)으로 보내는” 것이다. 스스로 프랑스 문교부에서 민속학 연구의 임무를 띠고 파견된 탐험가라고 밝혔지만, 문교부에서는 여행 허가만 내준 것이지 경제적인 지원까지 해준 것은 아니었다.
한양으로 이동한 샤를 바라는 프랑스 영사관에 머물면서 민화를 비롯한 민속품을 수집했다. 오전에는 상인들이 가져온 조선 민속품을 흥정하느라 바빴다. 영사인 콜랑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가 한 프랑스인이 조선의 토산품을 구입하려고 와있다는 장안에 소문을 퍼트렸기 때문이다. 오후에는 ‘친절한’ 영사관의 친구들과 함께 직접 한양 거리로 나가 상점들을 둘러보며 여러 민속품을 구입했다.
이때 수집한 민화들은 한양에서 구입한 ‘한양(서울)민화’라는 점에 그 의미가 크다. 더군다나 이들 그림은 그가 한양을 방문한 1888년이나 이전에 제작된 것이니, 제작연도의 하한선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에는 광통교 그림 파는 가게에서 파는 민화들도 포함되어 있어 그 가치가 더욱 높다고 하겠다.

 
샤를 바라가 감동한 ​밀양의 문자도 병풍

서울에서 어느 정도 민속품 구입이 이루어지자, 지방으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나섰다. 그 준비는 대사관의 콜랑드 플랑시가 도와줬다. 한양을 다 뒤져 여덟 마리의 말과 마부를 구해왔고, 이 씨 성을 가진 공사관 소속 통역관, 프랑스 요리법에 정통한 중국인 요리사, 아울러 공사관 경비를 담당하는 조선 병사 두 명까지 붙여준 것이다. 프랑스 정부가 직접 경제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을지언정 대사관의 지원은 전폭적이었다.
샤를 바라 일행은 한양을 떠나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를 거쳐 부산으로 향했다. 경상도 밀양에 들렀을 때, 거리에서 우연하게 작은 문자도 병풍을 구입했다. 이 작은 병풍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폭우가 쏟아지는 그 날, 좁은 방을 환하고 화려하게 만든 병풍을 바라보며 느낀 감동을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이렇게 하여 민화에 관한 최초의 평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길에서 산 작은 병풍이 내 가구목록에 하나 더 포함되었다. 가로가 3m 세로가 1m 남짓 되는 그것은 무척 오래된 것이었는데, 전체가 여덟 개의 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각각에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한자로 적혀 있었다. 그 의미는 효도, 겸양, 정숙함, 신의, 예절, 의로움, 공정함, 검소함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미들이 관례에 따라 일정한 짐승들이나 상징적 사물들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 현란한 색채가 비좁을 방을 환하게 만들 정도로 화려했다. 밖에서 엄청난 폭우가 짜증나게 내리쏟고 있었는지라, 나는 병풍을 벗 삼아 들여다보며 모든 시름을 잊으려 했다. 가만히 보니 그 각각의 의미가 표방하는 윤리적 가치를 따지지 않더라도, 단지 예술적인 관점으로 보아 그 병풍은 조선 예술의 근본에 관해 무척 소중한 정보로서 가치가 가득했다.”

그는 이 문자도 병풍에 대해 윤리적 가치보다 예술적 가치에 주목했고, 그것은 예술의 근본에 관한 것이라 했다. 효제충신예의염치는 효도, 겸양, 정숙함, 신의, 예절, 의로움, 공정함, 검소함으로 푼 것을 보면, 통역에 의존한 탓인지 약간 내용이 틀린 것을 볼 수 있다. 이것 역시 그가 윤리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어 병풍의 구성과 예술적 특색에 대해 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하나하나 살펴보자면, 우선 하얀 테를 두른 보랏빛 격자 속에 각각의 화폭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하단을 검은 색의 넓은 띠에 흰색 테를 두른 가운데 푸르스름한 기하학적 문양으로 마감되어 있다.
또한, 그 상단도 역시 같은 식으로 된 데다 포도주 빛의 색조로 악센트를 준 가느다란 검은 띠가 추가되어 판 전체를 에두르고 있다. 각각의 화폭 안에는 짚 빛깔이 감도는 흰 바탕 위에 상형적 가치가 두드러진 커다란 한자가 고풍스럽게 수놓아져 있다.
환한 바탕색과 뚜렷이 대조를 이루도록 검은 색으로 부각시킨 글자 주위로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우화적인 그림 속에 흐릿한 색조로 재현시켜 놓았다. 따라서 지나치게 대비되는 색조들이 눈에 거슬릴 법도 한데, 전체 화폭을 두르고 있는 넓은 띠의 효과 덕분에 전체적으로는 절묘한 조화를 느낄 수가 있다.
그림의 경우는 그 섬세한 뉘앙스만 빼면 전체적인 선線에서 전통적으로 엄격하게 규정된 일종의 양식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꽃이나 상징적 동물 형상에서는 페르시아와 인도 예술에서 유입되었을 기하학적인 요소도 엿보인다. 요컨대 하나의 작은 병풍이지만, 그 속에서 발견되는 제반 요소들이 조선인의 국가적 예술 전반에 걸쳐 그 기저를 이루는 자양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샤를 바라는 병풍과 그림이 어우러진 색채의 조화를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선으로 규정된 양식적 특징과 페르시아 및 인도 미술에서 유입된 기하학적인 요소를 짚어내는 것을 보면, 단순한 민속학자를 넘어서 미술사적인 깊은 안목을 엿보게 한다. 아무튼, 밀양에서 구입한 경상도 문자도 병풍 덕분에 그는 조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보아왔던 조선의 여러 예술 작품들, 즉 한양의 기념 건물들과 궁궐의 웅대한 장관, 대구 성문 누각의 그림들, 관리들의 눈부신 복장들, 밀양의 그 다채로운 조각들과 건축물들, 그 밖에도 수많은 수공예품과 더없이 인간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신기한 일인극一人劇 등을 차례차례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나는 촛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운 채, 언젠가 나에게 조선인처럼 야만인들을 없을 거리라고 말했던 누군가의 어리석은 생각을 한껏 비웃으며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작은 병풍에 대한 그의 감동은 컸다. 이를 통해 조선 예술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조선인은 야만인이라고 보는 서구인의 어리석은 생각을 비웃게 되었다. 그가 유럽이나 미국, 일본, 중국 어디를 가나 조선은 민속학적으로 별 볼 일 없는 나라라는 말을 누차 들어왔는데, 밀양의 문자도 병풍 하나가 이러한 편견을 한 번에 깨부쉈던 것이다.

유럽에 처음 선보인 한국 민화

​샤를 바라는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1890년 그는 조선에서 가져간 수집품들을 프랑스 정부에 정식으로 기증했다. 처음에서 트로카데로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얼마 후 기메 박물관(Musée Guimet)으로 옮겨졌다. 민화, 무속화 등의 수집품이 기메 박물관 3층 이에나 갤러리에 전시되었고, 1893년 4월 11일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는 우리 민화가 유럽 박물관에 처음 전시된 행사로 기록되는 장면이다. 그런데 샤를 바라는 자신의 수집품이 이제 갓 머나먼 땅의 촌티를 벗고 현대적 면모로 전시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4월 22일에 5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샤를 바라가 가져온 민화를 비롯한 민속품은 공교롭게도 우리나라 최초 프랑스 유학생인 홍종우(洪鍾宇, 1854~?)가 정리했다. 비록 정규직 큐레이터가 아니라 아르바이트생이었지만,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외국 박물관에서 일한 기록을 남겼다. 사실 홍종우는 프랑스 최초 유학생보다는 김옥균 암살로 더 유명하다. 엘리트 유학생이 암살사건에 휘말릴 만큼, 당시 한반도의 정세는 열강들의 야욕 속에 휘말려 있었다. ​
샤를 바라는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민화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경신했다. 좁은 방을 환하고 화려하게 만든 병풍에 글은 민화에 대한 최초의 비평문이고, 그가 죽기 11일 전에 전시한 민화는 유럽박물관에 처음 선보인 민화가 되는 셈이다. 그가 수집한 민화에 덧붙여 2000년 이우환 선생이 기증한 뛰어난 민화들이 보강되면서 기메동양 박물관은 유럽, 아니 해외에서 가장 뛰어난 민화 컬렉션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글 : 정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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