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한산도 이충무공유적 바닷 바람 타고 전해지는 무적 이순신 함대의 위용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유적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유적

경상남도 통영시에 딸린 아름다운 섬 한산도는 유명한 한려수도 비경의 출발점이자 그 옛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최고 사령부가 있었던 유서 깊은 섬이다. 또한 그 앞바다는 임진왜란 동안 조선 수군이 거둔 승리 중 가장 크고도 빛나는 승리로 기록된 한산대첩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이 싸운 남녘 바다의 ‘화룡점정畵龍點睛’ 한산도에 남은 그날의 흔적들.

충무공의 숨결 서린 아름다운 섬

minhwa2015052061592년 4월, 일본의 침입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조선뿐 아니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역사적 지형을 송두리째 뒤흔든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일본에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대륙은 주인이 바뀌었다. 7년에 걸쳐 온 국토가 초토화된 조선은 속절없는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나라를 연 후 근 2백여 년 동안이나 국제 정세에 눈을 감은 채 태평성대를 누리던 조선은 전혀 준비 없이 맞이한 이 큰 전쟁 앞에서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 선발대가 부산진에 상륙한 이후 수도 한양을 함락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보름 남짓이었다. 이후 연이어 들려오는 기막힌 패전 소식에 조선은 아예 가망이 없는가보다 싶었다.
그런데 이런 일방적인 전쟁의 흐름을 바꿔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水軍의 선전과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이름 없는 의병들의 눈부신 활약이었다. 특히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기적 같은 연전연승은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궁극적인 조선의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발자취가 서려있는 곳은 서남해안의 진도에서 동남해안의 부산에 이르기까지 남해안 전역에 걸쳐 있지만, 그중에서도 그의 숨결과 체취를 가장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단연 경상남도 통영에 딸린 아름다운 섬 한산도閑山島일 것이다.
한산도는 임진왜란 동안 이순신 장군이 치른 23번의 전투 중 가장 크고도 빛나는 승리로 기록된 한산대첩閑山大捷의 현장이자, 조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 요즘으로 치면 해군총참모부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장군의 생애에서 가장 진하고 의미 있는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다.
이순신 함대가 역사적인 첫 출전에 나선 것은 1592년 5월 4일이었다. 주력 싸움 배 24척을 비롯, 모두 85척의 배로 선단船團을 꾸린 이순신 함대는 5월 6일 옥포 바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5월 9일까지 계속된 1차 출전 기간에 치른 세 차례의 전투에서 왜선 42척을 격파하며 승리를 이어간다. 이어 같은 달 29일에는 비장의 신무기인 거북선을 앞세우고 2차 출동에 나서 6월 10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해전에서 연이은 대승을 거두게 된다. 역사적인 한산대첩은 이 싸움에 이어 그의 세 번째 출전에서 거둔 빛나는 승리였다.

찬란한 승리, 한산대첩의 현장

옥포 해전의 패전 이후, 당항포 해전까지 이어진 뼈저린 패배로 이순신 함대의 막강한 위력을 실감한 왜군은 조선함대의 선제공격에 맞받아 싸우던 그간의 소극적 전략을 바꿔 수군력을 총동원한 큰 전투로 조선 수군을 완전히 격파하려는 작전으로 나서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왜군은 구키 요시다카 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 加藤嘉明,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등 쟁쟁한 해군장수들로 대규모 연합함대를 구성하고 서쪽을 향해 전라도 해안을 압박하고 나섰다.
이에 맞서 이순신 장군도 수군의 모든 함대가 힘을 합쳐 과감한 선제공격으로 일본 수군을 격파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마침내 1592년 7월 6일,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우수군 연합함대는 노량 앞바다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 합세, 전투 진용을 짜고 일본의 정예 주력함대와 대회전을 벌이기 위한 출전 길에 나선다. 함대의 규모는 전라좌우수군으로 이루어진 48척의 주력함대에 원균 휘하의 배 7척을 합한 55척이었다.
7월 7일 고성의 당포에 이른 이순신은 거제도에 사는 김천손金千孫이라는 목동으로부터 거제와 통영 사이의 작은 해협인 견내량에 수많은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중요한 정보를 얻는다. 견내량에 정박한 왜선들은 하루 전날 도착한 와키자카의 함대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 구성된 대선단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곳 견내량 해협이 큰 전투를 벌이기에는 적당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다. 물길이 좁고 암초가 많은데다 썰물 때가 되면 개펄이 드러나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板屋船이 제구실을 하기가 매우 힘들었던 것이다. 이런 판단에 따라 장군은 견내량의 왜군을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로 유인해 일전을 벌이기로 한다.
조선 수군의 유인작전에 넘어간 왜군은 짐짓 도망하는 조선 함대를 추격, 곧 한산도 바다로 나오게 된다. 그러자 그때까지 꽁무니를 빼던 조선함대는 별안간 일제히 진을 펼치며 왜선을 포위했다. 이때 조선 수군이 펼친 진법陳法이 그 유명한 ‘학익진鶴翼陳’이다.
학익진은 본래 육지의 전투에서 활용되던 전술대형으로 이순신은 이 진법을 해전에 맞도록 응용했던 것이다. 적의 함대를 날개를 편 학의 형상처럼 입체적으로 포위, 퇴로를 차단하고 중앙을 향해 무차별 포격을 가하는 이 진법은 무엇보다도 조선수군의 주력화기인 화포와 총통의 명중률을 높이고 화포를 쉼 없이 쏘아댈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작전대로 포위된 왜선은 퇴로를 찾지 못하고 조선 함대의 포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침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73척의 왜선 중 47척을 침몰시키고 12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둔다. 이 빛나는 승리가 임진왜란 수군 전투사상 최대의 승리로 기록된 한산대첩이다.
한산대첩은 여러 면에서 개전 이래 조선의 일방적인 수세로 진행되던 전쟁의 흐름에 커다란 전환점이 된 뜻깊은 전투였다. 무엇보다도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 육지와 바다 양쪽으로 진격하려 했던 왜군의 이른바 ‘수륙병진水陸竝進’ 작전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실제로 이 싸움 이후, 왜군은 조선 수군과의 정면승부를 완전히 포기하고 거제도를 비롯한 해안지방에 성을 쌓아 조선 수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지키기 작전’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했다. 아울러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무사히 지켜냄으로써 조선 군대와 명明나라 원군援軍의 군량미를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한산대첩은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이 궁극적으로 조선의 승리로 돌아가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투이기도 했다.

이충무공유적지의 핵심 건물인 제승당. 작전참모본부였다.
한산만을 바라보며 서있는 수루, 최근에 세워진 건물이다.
이충무공유적지로 가는 정문, 대첩문
옛 활터 자리에 세워진 건물 한산정. 숲과 바다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 압권이다.
충무공의 사당, 충무사
충무사 뜨락에 서있는 제승당유허비
한산만의 아름다운 바다풍경
 
막강 이순신 함대의 근거지 한산도 통제영

이순신 장군이 여수에 있던 자신의 근거지 전라좌수영을 한산도로 옮긴 것은 한산대첩 이후 안골포, 부산포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함으로써 남해안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1593년 7월의 일이었다. 당시 전라좌수영이 자리 잡은 여수는 남해안 전체로 보았을 때 호남 쪽에 많이 치우쳐 있어 이순신 함대는 전투가 있을 때마다 먼 거리를 출정해 근거지 없이 장기간 바다 위에 머물러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새로운 수군기지를 꾸준히 물색해오던 그는 한산도가 지닌 여러 가지 장점에 주목, 이곳으로 진鎭을 옮길 것을 결심하고 조정에 계를 올려 임금의 허락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마침 그해 8월, 조정에서는 조선 수군 전체를 지휘하는 새로운 직책인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신설하고 전라좌수사겸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순신을 임명한다. 이렇게 해서 한산도는 1597년 2월, 그가 모함에 휘말려 죄인의 신분으로 이곳을 떠날 때까지 만 3년 7개월 동안 명실상부한 조선 수군 최고의 사령부 역할을 맡게 된다.
그때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자리로 짐작되는 곳이 현재 사적 제113호로 지정되어 있는 ‘한산도이충무공유적지’이다. 이곳에 있는 가장 대표적인 건물 이름이 ‘제승당’이어서 흔히 이곳 전체를 ‘제승당 유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장군이 이끌던 수군 병력과 그를 따라나선 백성들의 수까지 합치면 한산도 진영의 규모는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규모는 추정하기 어렵다. 현재 사적지의 규모는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일대의 임야 약 16만 여 평(525,123㎡)이다.
한산도로 가는 길은 참으로 운치 있는 뱃길이다. 통영항 여객선터미널에서 한산도행 배를 타면 한려수도를 이루는 크고 작은 섬들이 사방에 점점이 흩어져 있고, 남해 특유의 잔잔한 물살은 흡사 호수 위를 미끄러지는 듯 유려하다. 통영항을 떠난 배가 물살을 가른 지 한 30분 쯤 후면 이윽고 배는 한산도에 닿는다. 한산도 선착장에 내려 한산만의 우아한 굴곡을 따라 바닷가를 잠시 걷다보면 곧 이충무공유적지에 도착한다. 우거진 숲과 잘 단장된 길, 그리고 수려한 바다풍경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장군이 백의종군白衣從軍하며 고난을 겪고 있는 동안 일어난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진영 전체가 완전히 불타버려 안타깝게도 이순신 장군 당시의 유적은 단 하나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유적지 안에 서 있는 ‘제승당정화기념비’에 따르면 지금 유적지 안에 있는 건물과 기념물들은 거의 다 박정희 정권 당시인 지난 1975년 8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진행된 ‘보수정화기간’ 동안 새롭게 세워지거나 보수된 것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적지 복판에 자리 잡은 당당한 제승당 건물과 한산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수루戍樓, 사병들이 활 쏘는 훈련을 했을 활터, 낡고 퇴락한 유허비 등은 나름대로 수백 년 전 이곳에 머물었던 충무공과 그를 따랐던 이름 없는 수병들의 숨결을 느끼게 해 준다.
유적지의 정문이기도 한 대첩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는 것은 ‘제승당制勝堂’이라는 현판이 걸린 당당한 건물이다. ‘제승당’은 한산도 진영의 중심 건물로 통제사 이순신의 집무실이자 그가 참모들과 작전을 수립하던 곳이다. 본래의 이름은 ‘운주당’이었으나 정유재란으로 한산 진영이 불타 폐허가 된 지 142년이 지난 1739년, 제107대 통제사 조경이 충무공의 뜻을 기려 운주당 옛터에 새 건물을 세우며 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30년대에 중수重修되었던 것을 1976년의 ‘정화사업’ 당시 새롭게 다시 고쳐지은 것이다. 단층의 낮은 화강암 기단 위에 올라앉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최근의 것이기는 하나 문자 그대로 ‘승리를 만드는 집’이라는 뜻의 당호堂號가 막강 이순신 함대의 위용과 썩 어울린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문어포 마을 산 정상에 있는 한산대첩비

▲문어포 마을 산 정상에 있는 한산대첩비

제승당 오른쪽 바닷가로는 ‘수루戍樓’가 재현돼 있다. 수루는 적의 동태를 살피는 일종의 망루를 말한다. 사적지 내에 있는 건물 중 가장 최근에 지은 건물로 화려한 겹처마 팔작지붕에 사방이 탁 트인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장방형 익공식翼空式 누각이다. 이순신 장군이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그 수루의 모습이 본래 이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산만의 바다풍경이 그림처럼 내려다보이는 수루에 올라 먼 바다를 바라보면 밤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번뇌에 잠 못 이루었을 그의 깊고도 먼 고독이 사뭇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한편 제승당 왼쪽으로는 충무공의 사당인 ‘충무사’가 있고 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당대의 명궁名弓이기도 했던 이순신 장군이 활을 쏘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활터가 있다. 장군의 일기인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그가 홀로, 혹은 부하들과 함께 활을 쏘았다는 기록이 수도 없이 나온다. 또한 1594년 4월에는 이곳 한산도 진영에서 활을 쏘는 것만으로 무과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허락을 얻어 1백여 명의 병사들을 과거에 합격시키기도 했다. 한산도의 활터는 이렇듯 그 어느 유적보다도 충무공의 숨결이 서려있는 곳이다. 물론 이곳 역시 옛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아 정말 이곳이 그 활터였는지, 본래 모습이 이러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사대射臺와 과녁 사이에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 풍경이 매우 아름답고 이채롭다. 사대 자리에 세워진 ‘한산정閑山亭’이라는 정자는 본래는 없었던 건물이지만, 시원한 바다 풍광과 그런대로 잘 어울리는 상징적인 흔적이다.
한산도 충무공유적지에서 그나마 어느 정도라도 옛 색깔을 찾을 수 있는 유물은 장군의 사당 충무사 뜨락에 서 있는 ‘제승당유허비制勝堂遺墟碑’라는 비석일 것이다. 영조英祖임금 시절인 1739년 제107대 통제사 조경趙儆이 운주당 옛터에 제승당을 복원하면서 세운 기념비석으로 퇴락해 가는 제승당 터에 대한 안타까움과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충무공에 대한 조선 민중의 사랑을 구구절절 담고 있는 유적이다.
대략 여기까지 둘러보면 충무공유적지는 거의 다 본 셈이지만, 이왕 한산도를 온 김에 한 군데 더 들를만한 곳이 있다. 유적지를 나와 입구 반대편 방향으로 섬을 한 바퀴 돌다 보면 문어포問語浦라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에 다다른다. 한산대첩 당시 왜군 패잔병들이 섬에 상륙해 ‘길을 물었다 問語’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곳이다. 조용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조그마한 섬마을이다. 마을 입구에서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룬 운치있는 오솔길을 따라 10분쯤 걸으면 이 마을의 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그곳에는 지난 1978년에 세워진 ‘한산대첩비’가 있다. 거북선 모양의 대좌에 세로로 긴 직사각형 몸돌을 곧게 올려 세운 웅장한 규모의 비석이다. 대첩비 앞에 올라서면 한산대첩의 현장이기도 했을 한산도 앞바다의 풍경이 와락 달려들 듯 한눈에 들어찬다. 실로 호연지기를 느낄 만큼 완벽한 전망이다.
옷섶을 헤집는 바람을 맞으며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면, 빛나는 전공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내친 조국에 대한 울분을 애써 삼키며 다시 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했던 고독한 영웅의 가슴 아픈 생애가 새삼 가슴을 저며 온다. 제승당유허비의 뒷면에 새겨진 통제사 조경의 절절한 헌사獻詞가 마치 오늘의 외침처럼 바람에 실려온다.

… 이제 다시 수백년이 지나 주춧돌은 옮겨지고 우물과 부엌마저 메워졌건만 아득한 파도 너머 우거진 송백 속에 어부와 초동들은 아직도 손가락으로 제승당 옛터를 가리켜 주니 백성들은 이같이 오래도록 잊어버리지 못하나 보다.
– 제승당 유허비 비문의 일부

 

글 : 유정서(본지 편집국장)
사진 : 김영기(프리랜서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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