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성대太平聖代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그림 –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

삼국지연의도는 장편소설 《삼국지연의》의 주요 장면과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다. 본래 관우신앙을 배경으로 하는 관왕묘에 걸기 위한 신앙화로 제작되었던 삼국지연의도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대부들의 고사인물화 또는 일반 서민들의 길상화로 제작되어 쓰이기도 했다. 삼국지연의도가 출연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함께 그 쓰임새와 조형특징에 대해 고찰해 본다.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 출연의 역사적 배경

‘삼국지연의도’는 중국의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와 함께 중국 4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로 꼽히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의해 탄생되었다. 즉 삼국지연의도는 장편소설 《삼국지연의》의 주요 장면과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다. 《삼국지연의》의 원래 명칭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인데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라 부르기도 한다.
《삼국지연의》는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에서 널리 읽혔으며, 처음에는 중국의 원본이 수입되어 읽혀지다가 곧 수많은 국역본이 출간되면서 인기를 더해갔다. 이른바 《삼국지연의》는 60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책을 비롯한 신앙, 그림, 판소리, 만화, 게임 등 다양한 문화로 재창조되어 오면서 우리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간혹 《삼국지연의》를 《삼국지三國志》와 동일하게 보는 경우가 있는데 엄연한 차이가 있다. 《삼국지》는 중국 서진西晉(265〜16)시대의 진수陳壽(233〜97)가 위魏·촉蜀·오吳 세 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사료들을 모아서 하나로 편찬한 정식 역사서이다. 반면에 《삼국지연의》는 중국 원元(1271〜368)나라 말기에서 명明(1368〜662)나라 초기인 1300년대 후반에 나관중羅貫中(1330?〜1400)이 정식 역사서인 《삼국지》를 토대로 하고, 《한진춘추漢晉春秋》와 《삼국지주三 國志注》를 참고해가면서 상상력을 가미해 지은 장편 역사 소설이다. 앞서 《삼국지연의》의 원제목이 《삼국지통속연의》라 했는데, 통속通俗이란 일반 대중들이 즐기는 대중적인 장르를 뜻하고, 연의演義는 사실을 부연하여 재미나게 썼다는 뜻으로 결국 판타지를 말한다.

관왕묘關王廟 출연의 역사적 배경

삼국지연의도는 관우關羽(?~219) 신앙을 배경으로 관우사당 즉, ‘관왕묘關王廟’에 쓰였던 신앙화信仰畵였다. 이에 〈삼국지연의도〉의 쓰임새를 알기 위해서는 관왕묘에 대해 보다 상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관우신앙은 중국인과 화교들이 신봉하는 세계에서 신도가 가장 많은 종교 중 하나이다.
우리 역사 속에도 관우신앙은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으나 그 실체를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관왕묘는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관우를 ‘전쟁의 신’으로 믿으며 모시는 사당이다. 관우를 신격화했기에 호칭을 관운장關雲長, 관성제군關聖帝君, 관보살關菩薩, 관제關帝, 관왕關王 등으로 높여 불리는 동시에, 그가 모셔진 사당을 관왕묘關王廟, 관성묘關聖廟, 관제묘關帝廟, 관묘關廟, 무묘武廟 등으로 불리며 숭배되어 왔다.
추적해 보면, 관우를 신으로 모시기 시작한 것은 중국 당唐나라부터이고 이후 송宋나라 시대에 들어와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그때 관왕묘가 세워지면서 ‘전쟁의 신(무신武神)’ 또는 ‘재복신財福神’으로 보다 깊게 숭배되었다. 이와 같은 관왕묘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은, 1594년 명나라 신종神宗(1563~1620)이 관운장을 나라와 백성을 수호하는 무신武神으로 선포한 것이 계기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우리나라에서도 관우를 ‘전쟁의 신’으로 믿으며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그 전에 우리나라는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을 ‘전쟁의 신’, ‘승리의 신’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이른바 《고려사》, 《연려실기술》을 비롯한 여러 종의 고문헌에 따르면, 고려 때부터 치우를 모셨던 둑신사(독신사纛神祀)와 마제단이 한양 동대문 밖의 ‘뚝섬’과 어딘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동교東郊, 북교北郊 또는 동북교東北郊에 있었다. 당시에 무관들은 정기적으로 1년에 두 차례 제祭를 올리거나 근무지와 전쟁터로 떠나가기 전에 어김없이 제사를 지냈다는 것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래왔던 것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원군援軍으로 왔던 명나라의 장수들에 의해 관우가 치우를 대신해 ‘전쟁의 신’으로 숭배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임진왜란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이나 《임진록壬辰錄》 등에서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관왕묘가 국내에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조선에 왔던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을 비롯한 모국기茅國器, 진정영도사眞定營都司 설호신薛虎臣, 도독都督 유정劉綎 등에 의해서였다.
당시 위에 언급한 명나라 장수들은 ‘관왕의 위령’ 덕으로 왜적을 능히 물리칠 수 있으니 관왕묘를 건립해 줄 것을 조정에 강하게 요구한 한편, 주둔지마다 관왕묘를 세워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예컨대 진린 장수는 왜적을 물리치려고 울산성을 공격하다가 부상을 당해 치료를 받고 나은 일이 있었는데, 그 당시 그는 자신의 상처가 완쾌된 것을 관우에 의한 것으로 믿으며 그 곳에 관왕묘를 설치했다. 이를 시작으로 진린에 의해 강진(1597), 모국기에 의해 성주(1597), 다시 진린에 의해 서울 도동에 남관왕묘南關王廟(남묘, 1598), 설호신에 의해 안동(1598), 유정에 의해 남원(1599) 등에 각각 관왕묘가 세워졌다. 대표적으로 1598년 진린에 의해 서울 도동에 세워진 남관왕묘는 거의 최초라 할 수 있는데, 그 당시 진린은 마귀魔鬼 장수와 함께 앞서 언급했던 울산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후 서울 남대문 밖 동자동으로 거처를 옮겨 요양을 하면서 이곳 후원에 남관왕묘를 설치했다.

조선 왕실에서도 호국신으로 받들어진 관우

이후 조선 왕실에서도 관우를 절대적인 ‘호국신護國神’으로 받들면서 전국 곳곳에 관왕묘를 세워 나갔다. 특히 선조(재위 1567~1608)는 관우를 구국의 인물로 추대하고 봄, 가을에 어김없이 제를 올렸다. 나아가 선조는 명나라 조정에서 관왕묘 건립을 공식적으로 요청함에 따라 1602년(선조35년),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동관왕묘東關王廟(동묘)’를 세웠다. 이는 진린 장수가 명나라로 돌아가 황제에게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관우신이 나타나서 도와주었기에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라고 보고함에 따라 명나라 신종이 선조에게 요청한 것이었다.
어떻든 당시에 관우묘는 서울뿐 아니라 지방 여러 곳에 줄줄이 세워져 숭배되었다. 그러나 숙종 후부터는 관왕묘에 대한 제사를 미신으로 여겨 일시 폐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고종 때에 다시 회복되어 더욱 많은 관왕묘가 전국 곳곳에 설치되었다. 당시에 세워진 관왕묘를 열거하면, 1883년 무당 진령군眞靈君에 의해 서울 혜화동에 ‘북관왕묘北關王廟(북묘)’, 1902년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 조병식趙秉式의 제안에 의해 서대문 밖 천연동에 ‘서관왕묘西關王廟(서묘)’가 새로 세워졌으며, 종로 보신각普信閣 뒤에 ‘중관왕묘中關王廟(중묘)’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후 남묘, 중묘가 없어지고 1909년 경 서울 서묘와 북묘 역시 동묘에 합사되어 없어졌으며 지금은 동묘만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편 관왕묘는 민간신앙적인 방향으로 더욱 활성화되면서 서울 명륜동 관성묘, 중구 예장동의 와룡묘, 중구 장충동의 관성묘, 방산동의 성제묘 등 총 20여 개가 남아 있었다. 지방에는 명성황후의 명을 받은 민간인들에 의해 세워졌는데, 1885년에 마여사가 동관왕묘, 1884년에 오상준이 남관왕묘, 1892년에 윤희보가 북관제묘를 건립하였다. 그밖에 1879년 인천, 1895년 전주, 시대 미상의 영동, 조선말의 여수, 조선시대의 완도, 조선후기의 김제 등에도 무속적인 성격과 연결된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그러나 1908년(순조2년)부터는 관우를 구국救國의 신으로 모시는 관왕묘에 대한 국가의례가 일제의 강요에 의해 폐지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국가차원의 관우신앙은 현저하게 약화되었지만 관우신앙은 여러 주변 종교에 습합習合 혹은 마을신앙으로 편입되면서 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그 위상과 인기가 이어지기도 했다. 예컨대 불교에서는 호법신護法神의 ‘가람보살伽藍菩薩’로, 유교에서는 ‘문형성제文衡聖帝’로, 도교에서는 ‘협천대제協天大帝’, ‘복마대제伏魔大帝’, ‘익한천존翊漢天尊’ 등으로, 무속에서는 ‘장군신將軍神’으로, 그리고 ‘관제영첨關帝靈籤’이라는 점술로 이어졌으며 민간층에서는 경칩일驚蟄日, 상강일霜降日 등에 관우와 관련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삼국지연의도의 쓰임새와 조형특징

앞서 언급했듯이 《삼국지연의》를 모태로 한 삼국지연의도는 본래 관우사당에 걸기 위한 신앙화信仰畵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시대가 내려오면서는 사대부들의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 또는 일반 서민들의 길상화吉祥畵로 제작되어 쓰이기도 했다. 이른바 삼국지연의도는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신앙목적으로 그려졌고, 어느 시점에 와서는 민간층의 신앙목적으로도 그려져 사용되었다. 또한 삼국지연의도는 《삼국지연의》의 인기가 더해감에 따라, 사대부들의 사상과 행동의 귀감으로 삼기 위한 충忠과 효孝 그리고 염치廉恥와 절개節介를 생각하고 다짐하기 위한 고사인물화로 그려져 쓰였다. 더 나아가 〈삼국지연의도〉는 일반 서민들이 그들의 정서에 맞게 효孝, 재복財福, 장수長壽 등의 의미를 담은 길상화로 그려져 쓰이기도 했다.
이렇듯 〈삼국지연의도〉는 신앙화, 고사인물화, 길상화로 그려져 폭넓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세 가지 구분은 상호 관계성으로 인해 정확히 구분 짓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민간층의 신앙목적으로 사용한 삼국지연의도와 사대부들의 고사인물화 〈삼국지연의도〉 그리고 서민들의 길상화 삼국지연의도가 담고 있는 의미와 형상이 서로 상통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길상의 원뜻에는 기복적인 바람뿐만 아니라 윤리적 덕목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58?〜147?)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길吉은 선善이고 상祥은 복福이라 했다. 이렇게 길상이란 원뜻에는 윤리적인 선善과 기복적인 복福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고사인물화와 길상화로 구분 짓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사인물화는 사대부들의 윤리적인 선善의 성격이 강하고 길상화는 서민들의 기복적인 성격이 강하다. 또한 사대부의 고사인물화와 서민들의 길상화의 조형특징도 어느 정도는 차이를 보이고 있기에 길상의 원뜻을 잊지 않고 구별해 사용한다면 각각의 성격 특징을 드러내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이에 편의상 신앙화, 고사인물화, 길상화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그 성격 특징을 밝혀놓는다.

신앙화信仰畵 삼국지연의도

삼국지연의도는 신앙화로, 관우를 숭배하기 위해 제작된 그림이다. 주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관왕묘에 삼국지연의도가 봉안되어 숭배되었다. 즉 국가적인 차원의 관왕묘 제사 때 신앙용 삼국지연의도가 붙여져 숭배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관우신앙이 여러 주변 종교에 습합되어 숭배되거나 민간층의 마을신앙으로 편입되면서, 신앙용 삼국지연의도는 보다 다양한 의미로 그려져 쓰이기도 했다.
국가적인 차원의 신앙화 삼국지연의도의 조형은 편액扁額 형식으로 모본이 정해져 있으며, 궁정취향의 장엄성, 섬세한 필력, 치밀한 구성력, 화려한 채색 등이 핵심 키워드로 정리된다. 다시 말해 국가적인 차원의 신앙용 삼국지연의도는 크기가 크고 편액 형식으로 제목을 적어 넣게 되어 있고 모본을 그대로 따라 제작되어야 하며, 부감법(새가 날아 하늘에서 본 듯한 장면)에 의한 치밀한 구성력과 섬세한 필력 그리고 화려한 채색의 조화 등이 특징을 이룬다. 특히 신앙용 삼국지연의도의 조형은 신성한 의식이나 신앙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장엄은 하지만, 화면에 펼쳐진 모든 조형요소가 동일한 형태 즉, 범례화되어 그려진 것이 하나의 큰 특징이 된다. 다시 말해 신앙용 삼국지연의도의 실체는 그림으로써의 테크닉이나 독창성 이전에 상징 적 의미를 상기시켜 주는 수단이기 때문에 약속된 기호처럼 도식적·장식적으로 그려졌다.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 삼국지연의도

고사인물화는 유교적 이념을 중시했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자신의 사상과 행동의 귀감으로 삼거나 유교의 교훈을 보급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다시 말해 고사인물화는 충忠과 효孝 그리고 염치廉恥와 절개節介 등의 모범이 되는 종교적,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 이야기 등을 주제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이로써 고사인물화 삼국지연의도는 다름 아닌 《삼국지연의》 속에 담긴 유비 현덕을 중심으로 한 한실에 대한 충성이나 공명의 지략, 유비·관우·장비의 결의 등을 귀감으로 삼기 위해 제작되어 사용된 것임을 알게 된다. 특히 고사인물화 〈삼국지연의도〉는 관우를 주인공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관우가 몸을 사리지 않고 나라와 모시는 주인을 구하는 무용武勇과 충의忠義 그리고 재략才略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고사인물화 삼국지연의도의 조형특징의 핵심 키워드는 정교, 세련, 고상 등으로 정리된다. 즉 고사인물화 삼국지연의도의 전체 화면을 하나로 묶어 주는 정교한 공간 배치와 세련된 필력 그리고 고상하거나 선명한 색상의 조화가 돋보인다. 이렇듯 고사인물화 삼국지연의도가 담고 있는 상징은 물론, 화법, 구도, 양식 등의 조형이 국가차원의 신앙화 삼국지연의도, 서민들의 길상화 삼국지연의도와는 어느 정도 구별되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길상화吉祥畵 삼국지연의도

길상화는 주로 서민들이 행복, 출세, 장수 등을 위해 빌고 염원하기 위해 제작하여 사용한 그림을 말한다. 이로써 길상화 삼국지연의도는 다름 아닌 《삼국지연의》 속 관우의 장한 의기와 절개를 비롯한 재복, 장수 등과 관련한 서민들의 희망의 아이콘으로 그려져 사용되었음을 바로 이해하게 된다. 한마디로 길상화 삼국지연의도는 서민들이 복을 받고 병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집에 붙여놓는 그림을 말한다.
길상화 삼국지연의도의 조형특징의 핵심 키워드는 자유, 익살, 해학, 친근감 등으로 정리된다. 즉 길상화 삼국지연의도는 등장인물들이 누구든 간에 투박한 선과 색채를 사용해 거의 우스꽝스럽거나 해학적으로 그려진다. 즉 대부분의 길상화 삼국지연의도는 등장인물이나 경물이 자유롭게 과장되고, 그들의 상호 비례 관계가 무시되거나 원근이 거꾸로 되어 있어서 왠지 친근감이 든다.


글 김용권(겸재정선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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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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