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페이에서 곽분양을 만나다

도1 곽자의기념관



타이페이에 곽자의기념관이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답사하며 조사할 곳이 생겼다는 기쁨도 잠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당나라 장수 곽자의(곽분양) 기념관이 왜 타이페이에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직접 가보면 알겠지 하는 생각으로 무작정 곽자의기념관으로 향했다.

글·사진 김취정 (서울대학교 박물관 객원연구원, 고려대학교 강사)


곽자의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가파른 계단과 마주하게 된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수없이 게양된 노란색 깃발이 곳곳에 보인다. 이는 당나라 장수 곽자의의 기념관이 타이페이에 세워진 연유를 밝히는 단초가 된다. 깃발에는 ‘세계곽씨종친총회世界郭氏宗親總會’라고 쓰여 있다. 세계곽씨종친총회는 몇 종류의 책을 발행했는데 구매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료조사를 간곡히 요청한 결과 사진 촬영이 허용된 자료열람을 허락해주었고, 이를 통해 필요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곽자의기념관의 건립과정은 다음과 같다. 1967년 초 곽계교郭寄嶠, 곽철郭哲 등이 타이페이에 세계곽씨종친총회世界郭氏宗親總會 설립을 발의했다. 당시 곽자의기념관 건립은 자금 부족으로 불가능했다. 1990년 곽대수郭大壽 종장宗長은 세계곽씨종친총회世界郭氏宗親總會를 위해 200여 평의 땅을 기증했다. 1999년 이 땅의 매각대금을 곽자의기념관 건립을 위한 특별 자금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세계곽씨종친총회世界郭氏宗親總會는 1982년에 설립되었고 여러 과정을 거치며 2007년 재결성된다. 2010년 내호內湖의 곽씨 가문은 1917년 건립된 곽씨고택郭氏古宅을 곽자의 기념관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했다. 2010년 6월 1일에 건설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건설을 위한 모금위원회를 구성하고 건축 프로젝트는 건축사 린진홍[林金洪]에게 위탁해 기획, 설계, 시공했다. 실내 공간에 대한 것은 건축가 천순휘[陳順輝]에게 기획과 디자인을 의뢰했다. 2년여 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2012년 1월 5일 곽자의 기념관이 곽자의에게 봉헌되었고, 2012년 2월 2일 공식적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곽자의의 종손 ‘郭華溪’가 타이완 타이페이에 와서 집을 짓고 살았고, 이 고택이 곽자의 기념관이 된 것이다. ‘郭華溪’는 1917년(다이쇼 6년)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당시 ‘紅樓厝’이라는 고급 주택을 건설했으며, ‘郭華溪’는 제2차 세계대전 말에 타오위안시[桃園市]로 이사하게 되면서 타이페이의 곽씨 집안 고택에 대한 소유권을 당시 내호 지역 수장이던 ‘郭華溪’의 사촌 ‘郭華讓’에게 넘겼다. 현재 소유주는 ‘郭詩咏’이다. 그는 ‘郭明晉昆’의 조부이다. 곽씨 고택은 건축 당시 그들의 성인 ‘郭’ 글자 형태를 형상화하여 디자인하였다. 기념관 건물의 상단 중앙에는 ‘분양汾陽, 西元 1917年’이라는 글자들이 양각으로 새겨진 석제 현판이 있다.


도2 깃발에는 ‘세계곽씨종친총회世界郭氏宗親總會’라고 쓰여 있다.



곽자의의 종손으로부터 이어진 ‘세계곽씨종친총회世界郭氏宗親總會’가 중심이 되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지은 건물이며, 당시로서는 거금을 들여 지어 살았던 집이 곽자의기념관이 된 것이다. 이 고택은 1999년(중화민국 88년)에 타이페이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 외관은 붉은 벽돌, 씻은 돌, 점토 조각, 색 타일 장식 등 다양한 건축 자재를 결합한 것이다. 중국의 상서로운 문양은 발코니 아래에 배치되어 있다. 곽자의기념관은 상당히 독창적인 고대 가옥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당시에는 다이쇼[大正] 시대 양식의 건물로 평가받았고, 건물의 장엄한 스타일과 고대 장인의 정교한 장인 정신, 수 세기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견고한 구조가 특징적이다. 곽자의기념관의 유지와 곽자의 관련 학술적, 문화적 행사들은 세계 곳곳의 곽씨 종친회, 즉 ‘세계곽씨종친총회世界郭氏宗親總會’의 주최로 이들의 자금 지원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곽자의가 왕으로 책봉된 분양 지역에도 곽자의와 관련한 특별한 행사가 없는데, 곽자의를 기리고 기억하는 학술적, 문화적인 행사들이 세계곽씨종친총회世界郭氏宗親總會 중 타이페이 곽자의기념관 소유 및 관리를 담당하는 곽씨 종친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도3 분양汾陽, 西元 1917年, 석제 현판


국가(왕)와 백성에 대한 곽자의의 마음가짐
곽자의의 광초 ‘후출사표後出師表’

곽자의는 명장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서예가이기도 하다. 이는 곽자의기념관 1층 홀 안쪽 벽면에 걸려있는 곽자의의 광초 작품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곽자의 광초의 원본은 현재 ‘Fenyang City Museum’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북송의 명장, 조빈(曹彬, 931-999)이 수집했던 것이라고 한다. 국가(왕)와 백성에 대한 곽자의의 마음가짐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곽자가 광초로 희롱하듯 써 내려간 후출사표後出師表이다. 출사표出師表란 출병하면서 자신의 뜻을 적어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말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요한 일에 임하며 심경을 발표하는 것’ 또는 ‘중요한 일에 임하는 것’ 자체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관용어로 사용될 만큼 그 의미가 확장되고 용어의 사용이 저변화된 대표적인 계기가 제갈량의 출사표이다. 그런데 곽자의는 위작으로 알려진 후출사표를 방하여 글을 남겼다. 그 연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제갈량의 후출사표가 위작이라는 주된 근거 중 하나는 그 내용 중 왕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는 점이다. 황제에 대한 충성보다는 황제의 잘못을 강하게 질책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아마도 곽자의는 제갈량의 후출사표에 기대어 황제의 잘못을 질책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보게 된다. 글씨는 매우 훌륭하다. 포효하는 급류와 같이 힘차고 웅장하며, 글자의 형태는 물론 글자의 대소나 그 두께, 자간에 변화를 주어 시원시원하면서 자유분방한 서체를 구사하였다. 곽자의의 서예가로서의 면모 또한 알 수 있어 특기할 만하다.


도4 내부 전시 작품 사진


만복을 바라는 염원이 담긴 곽분양행락도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의 주인공 곽자의(郭子儀, 697~781)는 당나라를 지킨 최고 명장으로서 훗날 숙종 때 수도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수복한 공으로 중서령中書令에 발탁되고, 훗날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졌다. 이후 곽자의는 곽분양으로 불렸다.
곽자의는 역대 중국의 과거 시험에서 유일하게 무과 장원 출신으로 재상에까지 오른 자였고, 4대에 걸쳐 조정을 섬기며 두 번 재상으로 발탁되었다. 또한 무과 장원 출신으로서 그 공이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곽자의는 이광필과 더불어 최고의 명신이라 칭송받았고, 8명의 아들과 7명의 사위가 모두 입신출세하여 장수와 번영의 상징으로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관료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고, 장수를 누렸을 뿐 아니라 자손들 또한 번창하여 세속에서의 복을 마음껏 누렸기 때문에 곽자의는 후대에 부귀공명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서 팔자 좋은 사람을 비유하는 ‘곽분양 팔자’라는 말이 나왔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곽자의의 삶을 병풍으로 형상화한 ‘곽분양행락도’가 크게 유행했다. 곽분양행락도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채색 병풍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곽분양’으로도 불렸던 곽자의는 관료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자손들 또한 번창해 세속에서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았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역사서와 문집에서 부단히 곽자의(郭子儀, 697~781)가 거론되었고 《郭汾陽傳》이란 대중소설까지 나온 사실을 통해 조선 사회에 확산된 곽자의 현상을 파악할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곽분양행락도 12폭 병풍>은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린 당나라 곽자의의 삶을 주제로 그린 그림이다. 화려한 대저택을 배경으로 한 연회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제1폭 뒷면 우측에 ‘행락行樂’이 묵서된 종이가 붙어있다. 곽분양행락도에 그려져 있는 도상 중에는 곽자의의 많은 손주들이 노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경우도 많다.
여러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갖가지 놀이에 열중하는 모습을 장식적 화풍으로 그린 백자도는 곽분양행락도의 양식에 영향을 미쳤다. 곽분양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대가로 황제의 총애를 입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을 완벽하게 누렸다는 인물이다. 그의 복락이 자랑일 수 있었던 까닭은 그것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곽분양행락도가 궁중회화로서 유별난 사랑을 받은 데는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는 부귀富貴는 물론이고 장수長壽에다 자식 복까지 넘쳤다. 백자도는 곽분양이 누린 복락 중 다남多男의 복을 표현하는 데 결정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전형적인 곽분양행락도의 오른쪽 내전內殿 뜨락에는 아이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이 거의 어김없이 그려진다.


도5 <곽분양행락도 12폭 병풍>, 조선, 12폭의 연폭 병풍, 견본채색, 145.5×431.6㎝,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세계곽씨종친총회世界郭氏宗親總會, 타이페이의 곽자의기념관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는 백자천손을 누리면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는 당나라 장군 곽자의의 생일잔치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곽분양행락도는 세속사에서 인간이 꿈꾸는 모든 바람을 담아 그린 민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어쩌면 민화의 수요 및 소비자들이 꿈 꾸고 염원했던 모든 소망이 담긴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인간 이해와 민화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곽분양의 삶에 주목하여 곽분양행락도가 유행한 것이라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곽분양 관련 연구에 있어서 곽자의 자체에 대해 알아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중국 분양에서도 곽자의를 기념하는 학술회의를 개최하는 등의 행사를 하고 있지만, 세계의 곽자의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곽자의와 관련된 학술적, 문화적 행사들을 개최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참고문헌]
世界郭氏宗親總會 編印, 《世界郭氏》 (世界郭氏宗親會, 2015.10)
1997년 9월 7일 Fenyang에서 열린 곽자의의 130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학회의 자료
신동민, 《고사성어랑 일촌 맺기》 (기획집단 MOIM, 2010)
歐陽修 等撰; 黃永年 分史主編. 《新唐書》 (上海 : 漢語大詞典出版社, 2004); 차이위치우 외 34인 지음; 김영수 편역, 《모략》 (서울 : 들녘, 2003, 2004); 차이위치우 외 지음 ; 김영수, 김영진 옮김, 《역사를 바꾼 모략의 천재들 : 중국편》 (파주 : 들녘, 2016)
유정서, <조선후기 백자도 -도상의 형성과 변모과정을 중심으로- > (명지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3.02)


김취정 | 서울대학교박물관 객원연구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고려대 강사, 서울대학교박물관 객원연구원, 한국민화학회 이사이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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