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보다 예리한 시대적 미감 – 침통 소망을 담다

과거 선조들은 작은 침통 하나에도 민화를 정성스레 그려 넣었다. 작은 침통의 재료와 크기의 제약을 뛰어넘어 민화를 통해 환자에 대한 사랑, 의술에 대한 믿음을 새겼으리라.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이 소장중인 19세기 침통 속 민화를 통해 당시의 예술성, 나아가 염원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침통은 의원들이 환자를 시술할 때 사용되는 침을 담은 통이다. 국내 박물관에서 이루어지는 특별기획전에서도 흔치않은 소재이며, 상설전시의 전시품으로도 한의학 관련 박물관이 아니라면 내놓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침통을 유심히 들여다볼 기회는 거의 없으며 침통 하나만을 독자적으로 전시하기엔 콘텐츠에 한계가 있다. 침통의 크기가 평균 길이 10~12cm 직경 1~1.5cm 정도의 크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통형뿐만 아니라 다면체로 이루어져 있어 침통의 여러 면을 관찰하기에는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관람객들에게 침통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전시효과에는 한계가 있다.

침통 전시를 앞두고 발견한 민화

필자는 2017년 10월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 이전 개관을 앞두고 전시콘텐츠를 구상해야했다. 당시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 테마전시 공간에 침통 전시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침통은 30여점에 불과했고, 이 중 문양이 새겨진 침통이 20점이 조금 넘었다. 과연 침통으로 관람객들에게 무엇을 보여줄지가 문제였다. 고민하던 중 문득 침통 속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세심히 관찰해보니 놀라운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침통 속에 십장생문, 매조문, 산경문, 신선문, 까치호랑이 등 전통민화에서 볼 수 있는 문양들이 들어있던 것이다. 재밌는 점은 침통에 그려진 십장생이 대체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장엄하고 웅장한 십장생도와는 거리가 먼 지극히 민화적인 그림이었다는 점이다. 전시를 위해 침통의 문양을 민화로 제작하기로 마음먹고 오랜 친구이자 (사)한국민화협회 수석부회장인 송창수 작가에게 그림을 부탁했다. 사실 침통의 문양을 밑그림으로 제공하긴 쉽지 않다. 정확한 밑그림을 제공하기 위해선 3D스캔이 필요하지만 당시에는 그럴만한 시간이 없어서 다면체로 되어 있는 침통은 직접 확대 스캔하여 한 면씩 붙였으며, 원통형의 경우는 여러 번 촬영하여 밑그림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그림 중 5점의 십장생도를 소개하고자 한다.

은제육각십장생문 침통

은제육각십장생문 침통은 3점이다. 침통의 크기는 길이 11~12cm이며, 둘레는 4cm를 넘지 않는다. 문양은 학, 사슴, 거북, 소나무, 대나무, 천도복숭아, 해, 구름, 바위, 물, 등이 새겨져 있다. 침통은 주물로 육각의 형태로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문양은 육각의 형태에 바로 새겨 넣었을 것이다. 문양을 새겨 넣는 공정과정은 대단히 까다로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각각의 침통은 주문양을 도드라지고 입제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원형형태의 작은 원을 구슬을 잇듯 연주문聯珠紋을 세밀하고 촘촘히 두들겨 새겨 넣었다. 크기와 형태의 제약상 문양의 표현에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십장생의 문양이 축약 및 약소화되었을 것이다. 침통의 문양을 보면 이와 같은 양상을 반영한다.
첫 번째 침통(도1), (도2)은 대체로 십장생이 생략되어 표현되었는데 사슴, 학, 소나무, 대나무가 새겨졌고 여기에 천도복숭아가 추가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사슴과 학이다. 뿔이 없는 어린 사슴과 짧은 다리의 어린 학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십장생도에서 볼 수 있는 사슴과는 달리, 사슴이 지긋이 눈을 감은 모습이 마치 무언가에 토라진 듯한 표정을 연상시켜 작가의 감성이 돋보인다. 1세기 이전에 제작된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대단히 파격적이다. 해학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다.
두 번째 침통(도3)에는 사슴, 거북, 학, 해, 구름, 물, 바위, 대나무, 소나무가 새겨져 있다. 이 침통은 십장생도에서 보여지는 모든 사물이 거의 빠짐없이 새겨져 있다. 사슴과 거북은 오늘날의 만화를 연상케 할 정도로 해학적이고 유머러스하게 표현되었다. 사슴 아래의 바위, 물결의 표현 등도 단순화, 패턴화되었다. 이같은 바위와 물의 표현 방식은 다른 침통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세 번째 침통에는 해, 구름, 학, 사슴, 거북, 소나무, 대나무, 물, 바위, 그리고 영지가 그려졌다. 바위는 두 번째 침통보다 더욱 단순화되었으며, 그 옆에는 영지를 새겨 넣었다. 영지는 장생에 대한 깊은 믿음을 의미한다. 사슴과 거북 역시 대단히 해학적으로 묘사되었다. 물결의 문양은 조선후기 기와에서 보여지는 전형적인 수파문水波紋의 형태다.

목제원형십장생문 침통

목제원형십장생문 침통 2점(도5), (도6), (도7)은 원통형 나무에 십장생문을 새겨 넣은 것으로 은제침통보다 더욱 단순화돼 그려졌다. 십장생은 일반적으로 건강과 장수를 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침통 속에 담겨진 십장생 문양 가운데 특히 사슴, 학, 거북이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사슴은 불행과 질병을 물리치고 영생이나 재생의 상징으로 여긴다. 사슴의 수명은 25년 남짓하나 뿔과 피가 영험하다는 속설이 있으며, 뿔이 떨어져나가고 다시 자라는 순환과정은 재생과 영생의 상징으로 취급되었다.
학은 선계仙界 동물로 인식되어졌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에 학이 신선을 태우고 날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도교의 신선사상과 관련이 깊다. 과거 학은 1,000년 이상 사는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하며, 사슴과 학을 같이 그리는 것은 학록동춘鶴鹿同春이라 하여 부부가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거북은 학과 함께 구학제령龜鶴齊齡의 의미로 장수를 상징하며 고구려의 고분벽화인 사신도에서는 북방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등장한다. 선조들은 거북을 신성하고 신령스러운 존재로 다뤘던 것이다.

문자가 새겨진 침통

그 외에 ‘춘생연수’(도8)와 ‘多男子壽富貴 (다남자수부귀)’ 한자가 새겨져 있는 침통(도9)이 있다. 춘생연수에서 ‘연수 延壽’는 ‘연년익수延年益壽’의 줄임말로 ‘더욱 더 수명을 늘여나간다’는 의미이다.
‘다남자수부귀’는 《莊子 天地》에 <화華 땅을 지키는 봉인封人이 요堯 임금에게 아뢰기를 “아, 성인께 축복 드리기를 청하노니, 성인께서 장수하고 부유하고 아들을 많이 두시기를 축원합니다.[噫! 請祝聖人, 使聖人壽富多男子.]” 라고 하자, 요 임금이 “아들이 많으면 걱정이 많고 부자가 되면 해야 할 일이 많고 장수하면 욕되는 일이 많으니, 이 세 가지는 덕을 기르는 것이 아니다. [多男子則多懼, 富則多事, 壽則多辱, 是三者, 非所以養德也.]”>라고 하며 사양한 고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와 같이 문자를 새겨 넣은 형태는 조선후기 문자도가 제작될 당시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민화문자도에는 수호상징문자도守護象徵文字圖, 길상문자도吉祥文字圖, 효제문자도孝悌文字圖의 표현양식이 있는데 ‘길상문자도’는 수壽, 복福, 염廉, 영寧, 부富, 귀貴, 다남多男, 희囍, 녹錄, 만卍을 이용한 그림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된 염원이나 꿈을 글씨로 구체화 시킨 그림이며 수·복의 사용 빈도가 높다. 따라서 침통에 문자를 새겨넣는 형태는 이러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빛나는 위트로 그려낸 간절한 염원

이상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침통 속 민화들을 살펴보았다. 침통은 주로 의원들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으므로 문양의 제작 역시 의원들의 요구에 맞춰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제작방식은 주물로 침통을 제작한 후 각각의 면에 음각으로 문양을 새겨 넣은 것으로 추정되며 문양에서 나타나는 사물의 위치, 그림의 구도 등이 매우 정교하고 짜임새 있는 것으로 볼 때 당대 최고 수준의 장인이 제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러한 침통을 사용할 수 있는 의원이라면 상당한 재력을 갖췄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과거 의원들은 신분적으로 중인에 속해 있었다. 이중 특별한 의술을 지녀 관직에 들어가지 않는 한 이들의 기록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백제금동대향로, 고려청자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화려하고 정교한 걸작들이 널리 조명 받는 것과 비교해 아직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훌륭한 문화재들이 적지 않다. 침통 민화도 그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침통에는 환자들의 쾌유를 비는 의원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자칫 심각하고 무게감 있는 분위기의 물건을 만들 수도 있었으나, 앞서 살펴보았듯 도상에서 빛나는 해학적 요소는 당시 의원들의 높은 의지와 뛰어난 지혜를 나타낸 것이리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심영옥, 《십장생도에 내재된 장수길상의 상징적 이미지 연구》
전호근·안병주, 《譯註 莊子》
윤열수, 《민화이야기》
김만희, 《한국의 수복도:한국민속 칼라북스 8집》
유장용, 신승택, 《민화문자도의 표현내용과 표현양식에 대한 고찰》


글 윤성준(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 학예사) 사진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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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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