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기 병풍 통해 공유한 당대 이상적 여인의 상 像

중국 산서박물관이 소장한 붉은색 목판 칠화<사마금룡병풍칠화>는 중국 회화사에서 고개지의 작품과 양식이 유사한 것으로 보이는 중요한 작품으로 당시 책에서 볼 수 있었던 고사들을 시각화시킨 것이다. 주로 여인의 절의節義, 정순正順, 어머니로서의 역할 그리고 유가사대부의 문화를 수호하는 여인의 역할 등에 주안점을 둔 내용이다. 이 글에서는 작품 속 고사의 이야기와 회화사적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 글 이상국 ((사)한국민화센터 이사장)


(사)한국민화센터와 한국민화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월간<민화>가 행사를 주관한 <2019년 하계 해외학술답사>가 지난 8월 22일부터 8월 26일까지 산서성 일대에서 진행되었다. 불교와 도교미술의 정수를 찾기 위해 대동大同의 운강석굴과 영락진永樂鎭에 있는 영락궁永樂宮에 이르는 대 장정의 중간에 산서성의 성도인 태원에 있는 산서박물관을 답사했다. 이 코스는 답사일정 가운데서 중간과정의 한 코스로 생각하고 짧은 시간 간단히 둘러보았다. 박물관 3층에 붉은색 목판 칠화漆畫를 전시해 놓은 곳이 있었는데 ‘안면이 있는 작품이다’ 생각하며 셔터를 눌렀다. 답사 도중 유미나 원광대학교 교수로부터 해당 작품이 중국회화사에서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귀국해서 중국미술사 책을 찾아보는 과정에서 해당 작품은 고개지(顧愷之, 344-406)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대영박물관 소장의 <여사잠도女史箴圖>(도1)와 북경 고궁박물원의 <열녀인지도列女仁智圖>와 비견되는 중요한 유물임을 알게 되었다. 상당히 감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중요한 작품을 몰라보았다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이는 작품에 대해 특별히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

발굴과정 및 작품의 모습

<사마금룡무덤 칠화병풍>은 1965년 11월 산서성山西省 대동시大同市의 사마금룡묘司馬金龍墓에서 출토된 북위 시대의 병풍으로 국가1급문물로 지정되어 현재 대동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2년 64건의 금지출국전람문물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도2) 위서魏書의 기록에 따르면 사마금룡은 진선제晋宣帝 사마의(司馬懿, 179-251)의 남동생 동무성후東武城侯 사마규司馬馗의 9세손으로 부친 사마초司马楚가 태상泰常 4년(419) 북위에 투항하여 낭야왕琅琊王에 봉해졌고 사마금룡은 사마초의 작위를 이어받아 ‘사지절시중 진서대장군 이부상서 우진사공기주자사랑야강왕使持节侍中镇西大将军吏部尚书羽真司空 冀州刺史 琅琊康王’이 되었다고 한다.

사마금룡묘는 사마금룡과 처의 합장묘로 대동시大同市 성 동쪽 15리 지점의 석가채촌石家寨村 서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1965-1966년 다퉁시박물관에서 발굴을 진행하여 묘지석을 통해 부인 희진姬辰이 연흥延興 4년(474), 사마금룡은 태화太和 8년(484)에 사망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 무덤은 일찍이 도굴되었던 적이 있었으나 여전히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칠병풍漆屏風 출토시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병풍 5폭이 발견되었으며 양쪽 모두에 그림이 있다. 그러나 아래쪽은 부식이 심하며 위쪽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였다. 이 병풍의 길이는 약 80㎝, 폭 약 20㎝, 두께 약 2.5㎝로 목판으로 제작되어 양면에 붉은 옻칠을 한 후 그림을 그렸다. 인물은 검은 선으로 묘사하였으며 얼굴과 선은 흰색, 복식과 기구는 황백색, 청록, 홍색, 회색 등의 안료로 채색하였으며 검은 색으로 글자를 써넣었다. 이 목판 칠병풍은 관棺앞에 세워져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별히 제작된 부장품이라기보다는 죽은 부부의 저택에 있던 가구의 일부분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원에 위치한 산서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은 칠병풍 중 첫 번째이고 나머지는 대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산서박물관 작품 전면의 고사 내용과 회화사적인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림의 구성 및 내용

이 칠기의 제작 당시 회화 주제는 주로 세 가지로 첫째는 경사經史와 고사故事, 두 번째는 풍속風俗, 세 번째는 신성하고 상서로운 내용이다. 이에 왕실과 귀족들은 고사 등을 통해 격려, 권고 및 교화를 위한 용도로
용을 사용하였으며 병풍의 그림에서도 전통적인 선현先賢, 열녀, 효자 등을 주제로 하였다. 사마금룡묘 출토 병풍채화중 한 폭이 산서박물관에 있는데 이 칠화는 전면과 후면으로 되어있다. (도3), (도3-1) 전면의 이야기는 대부분 기원전 1세기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에서 뽑은 글과 주제가 칠로 그려져 있다. 이 칠화의 맨 위의 인물은 《열녀전》의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다(도4). 다음이 주실삼모周室三母(도5), 노지모사魯之母師(도6), 동승어련同乘御辇 고사(도7)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내용은 원래 황궁의 병풍에 그려져 있었던 것이지만 귀족들의 무덤에서도 나타난다. 목판칠기는 상하로 4개 부분의 똑같은 크기로 나누어 고사를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하늘을 감동시킨 순임금의 효성과 훌륭한 두 아내 이야기

병풍의 앞면의 맨 위의 장면은 주제가 《열녀전》의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의 고사이다. 화면의 가장 우측에 있는 왕의 복장을 한 우순虞舜임금이 있고, 좌측으로 가면서 우순임금이 두 비妃인 아황과 여영과 있는 장면, 우순의 부친인 고수瞽叟와 이복동생 상象이 우물을 메우는 고사(오전정敖塡井)와 우물 그림, 순임금의 계모가 우순에게 창고 지붕을 고치게 하고 불을 질렀다는 고사(순후모소름舜後母燒廩) 등 5인이 등장하여 순舜이 엄격하게 효를 지키는 고사를 담고 있다.(도4) 자매 사이인 아황과 여영은 요堯 임금의 딸이자 순舜 임금의 두 아내이다. 이들이 사실은 ‘좋은 부인’에 해당되지만 ‘훌륭한 어머니’ 편에 소개된 것은 천하 인민의 어머니라는 뜻에서인 것 같다. 높은 신분의 두 여성이 미천한 신분의 남자를 남편으로 삼아 천하의 성군이 되게 했다는 것이 이 서사의 요지이다.

우순虞舜은 이름을 중화重華라 했다. 중화의 아버지는 고수瞽叟라 했고, 순의 아버지 고수는 맹인이었다.

-중략-

순의 어머니가 죽자 고수는 다시 아내를 취해 상象을 낳았다. 상은 오만했다. 고수는 후처가 낳은 아들을 사랑하여 늘 순을 죽이려고 해서 순은 피해서 도망 다녔다. 사소한 잘못이라도 있으면 바로 벌을 받았다. 아버지와 계모를 잘 모셨고, 동생과도 잘 지내길 매일 독실하고 삼가면서 흐트러지지 않았다.

-중략-

순의 아비는 나쁘고, 어미는 남을 잘 헐뜯고, 동생은 교만했다. 모두가 순을 죽이려 했다. 순은 자식의 도리를 잃지 않고 늘 공손했다. 형제간에도 자애로워서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었다. 찾으면 언제나 옆에 있었다.
순은 스무 살에 효성으로 소문이 났고, 서른에 요가 기용할 만하냐고 물었다. 사악이 모두 우순을 천거하며 된다고 했다. 이에 요는 바로 두 딸(아황과 여영)을 순의 아내로 삼게 하여 집안에서의 언행을 관찰했고, 아들 아홉을 함께 거처하게 하여 집밖에서의 언행을 관찰했다.

-중략-

요가 곧 순으로 옷과 거문고를 내리고 창고를 지었으며 소와 양을 주었다. 고수는 여전히 다시 순을 죽이려고 순을 시켜 창고에 올라가 벽을 칠하게 하고는 아래서 불을 질러 창고를 태웠다. 순은 삿갓 두 개를 양산처럼 세워 아래로 뛰어내려 도망쳐 죽음을 면했다. 그 뒤 고수는 또 순에게 우물을 파게 했다. 순은 우물을 파면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구멍을 함께 팠다. 순이 깊이 들어가자 고수와 상이 함께 아래로 흙을 부어 우물을 메웠다. 순은 몰래 파놓은 구멍을 통해 나와서 도망갔다. 고수와 상은 순이 죽었을 것이라며 기뻐했다. 상이 “이 꾀를 낸 사람은 상입니다”라 하고는 그 부모와 (순의 재산을) 나누려면서 “순의 아내인 요의 두 딸과 거문고는 내가 갖고 소와 양, 창고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드립니다”라고 했다. 상이 순의 궁에 가서 거처하면서 거문고를 뜯었다. 순이 가서 그를 보자 상은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내가 순을 생각하며 울적해하고 있었소”라고 했다. 순은 “그랬구나, 네가 그렇게까지 하다니”라고 했다. 순은 다시 고수를 섬기고 동생을 더욱 더 아꼈다.
이에 요는 순에게 오전과 백관을 맡겨 시험하니 다 잘 다스렸다.

순임금의 이러한 효성은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키다’는 ‘효감동천孝感動天’이라고 해서 원나라의 곽거경郭居敬이 지은 《이십사효二十四孝》의 첫 번째 효자로 등장한다.

주나라의 현모양처 주실삼모 이야기

두 번째 부분은 유향이 쓴 《열녀전》에 나오는 주실삼모周室三母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그림에는 주태왕周太王 고공단부古公亶父의 부인 태강太姜, 주문왕 희창姬昌의 어머니 태임太任과 주 무왕 희발姬发의 어머니 태사太姒가 서 있는 그림이다. 이 장면들은 《열녀전》<모의전母儀傳>은 주실삼모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4줄의 글로 적어 놓았다.(도 5) 《열녀전》에서는 106명의 여인들이 주인공인데, 실존인물과 설화속의 인물이 혼재되어 있다. 《열녀전》은 이전에 있던 문헌에서 간략하게 취급한 여성을 기본 자료로 하여, 이것을 7개의 주제로 분류한 다음 각각의 주제에 알맞게 각색하였다. 각 편의 말미에는 ‘군자왈君子曰’이라는 형식으로 이상적인 여성상을 제시하고 있다. 군자의 입을 빌려 지은이 자신 또는 당시 식자들의 여성관을 반영한 것이다. 실제로 송·명 이후의 중국이나 조선에서 강조된 정절과 ‘열녀烈女’ 부분은 《열녀전》의 일부분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열녀전의 주실삼모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주왕실의 세 어머니는 태강, 태임, 태사를 말하는데 태강은 주 문왕의 아버지인 왕계王季의 어머니로 유태씨有台氏의 딸이고 태왕인 고공단보와 결혼하여 비가 되어 태백太伯, 중옹仲雍, 왕계를 낳았으며 태강은 마음이 곧아 세 아들을 키우며 몸소 실천하니 아이들이 이를 본 받아 실수하는 일이 적었고 태왕은 사업을 계획하거나 집을 옮기는 일에서도 반드시 태강과 상의했으니 군자가 이르길 태강은 덕으로 사람을 잘 이끌어 가르침을 넓혔다.

-이하 생략-

이 장면은 《열녀전》에 나오는 주나라의 현모양처에 관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아마 이러한 유교적 관념이 후대 조선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삼종지도를 보여주는 노지모사 고사

세 번째도 유향 《열녀전》<모의전>의 노지모사魯之母師 고사의 춘강春姜과 춘강녀春姜女의 그림과 6행의 글씨가 있다.(도 6) 이 그림은 여자의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다하는 춘강이라는 노나라의 이상적인 여인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에 따르면 여자는 태어나면 아버지의 소속인으로 합법화되고, 결혼하면 남편의 소속인으로 합법화되어 아버지에 대해서는 효와 공경의 의무를 남편에게는 정절과 신의의 의무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 그림은 역시 유향의 《열녀전》에 나오는 고사를 그린 것으로 그 내용은 남편 없이 자식들과 사는 한 어머니를 소개하는데, 친정나들이를 계획하면서 그 아들들에게 허락받고자 한다. 어머니의 논리는 “여자에게는 삼종의 도가 있어 무슨 일이든 독단으로 생각하여 처리해서 안된다”는 것이다. 아내에게 남편이란 그 은혜와 의리의 소중함이 자식에게 부모, 신하에게 군주와 같은 것이라는 것으로 가부장적인 질서 유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노지모사魯之母師 고사의 일부를 살펴보자.

모사母師란 노魯나라에서 아홉 아들을 거느리고 과부寡婦로 살았던 어머니를 이르는 말로 납일(매년 동지 후에 신에게 제사 지내는 날) 후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날에 일에 여가餘暇가 있는 아들이 제사를 맡아서 지냈는데 그때 어머니가 여러 아들들을 불러서 이르길 여자의 도리로는 부모의 상을 당하지 않았으면 남편의 집을 나서지 않는 법이지만 그러나 내 부모 집에는 어린 것들이 많아서 세시歲時의 예가 잘 다스려지지 않으니 나는 너희들이 허락許諾한다면 친정親庭에 가서 도와주고 싶다고 하니 여러 아들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려 허락하였다.
또 여러 며느리 들을 불러서 말하길 여자에게는 삼종의 도리가 있으니 무슨 일이든지 독단으로 생각하여 처리함이 없어야 하며 어려서는 부모의 뜻에 따르고 자라서는 남편을 따르며 늙어서는 자식을 따르는 법인데 지금 여러 아들들이 나에게 친정에 가서 세시의 일을 돌보고 오게 허락했는데 비록 정상적인 예禮를 벗어난 일이라 해도 막내아들을 데리고 가길 원하니 여자가 출입하는 절차를 잘 갖추도록 하고 며느리들은 집안 단속을 잘 하거라. 나는 저녁에 돌아오마. 그리고 집을 나서 막내의 시중을 받으며 친정에 돌아가서 집안일을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날이 흐려 서두르다가 너무 빨리 와서 이문里門 밖에 이르러 오래 멈추었다가 저녁이 되기를 기다려 집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중국 유교의 삼종지도는 유교를 국시로 개국한 조선시대 여인들의 행동을 지배하던 이념이었고 삼종지도의 강요로 인한 여인들은 심지어 죽음으로써 이를 지키고자 하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조선시대 여인의 숙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성제와 반첩여 고사

네 번째 칸에는 한성제漢成帝와 그의 후궁이며 반고班固, 반초班超, 반소班昭의 대고모, 여류작가로 미모와 덕을 갖추었던 반첩여班婕妤 고사가 그려져 있다.(도7) 《전한서前漢書》 <외척열전外戚列傳>에 보면 반첩여 고사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반첩여는 황제가 매우 사랑하여 즉위 초에 후궁으로 선택되었다. -중략- 아들을 낳았으나 몇 달 만에 잃었다. 성제가 뒤뜰에서 노닐며 일찍이 첩여와 함께 가마에 오르고자하니, 첩여가 사양하여 가로되, “옛날의 그림을 보면 어질고 성스러운 임금은 모두 이름난 신하가 곁에 있고 삼대(하, 은, 주(1046-771 BC)의 마지막 임금들은 이에 여자를 두고 있으니 지금 함께 가마에 오르고자 한다면 그에 비슷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황제가 그 말을 옳게 여겨 그만 두었다.

그림에서는 제기題記를 ‘한성제반첩여漢成帝班婕妤’라고 하고 있고 네 명의 가마꾼이 황제가 탄 가마를 메고 앞으로 가고 있다. 주인공인 황제는 고대 그림에서 보듯이 가마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덩치 큰 모습으로 그렸으며, 황제는 뒤에 옆에 따라오는 반첩여를 보면서 가마를 타라고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반첩여는 황제의 청을 거절하고 옷깃을 날리며 뒤에서 걸어가고 있는데 이를 이른바 동승어련同乘御辇 고사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발행된 《삼강행실도》에서는 <첩여사연婕妤辭輦>이라는 그림으로 포함되어 있다.(도8)

중국의 유교적 가치, 조선에 영향 미쳤을 것

사마금용묘 출토 칠화병풍 중 일부분만 소개하였지만 이 작품은 중국 회화사에서 고개지의 작품과 양식이 유사한 것으로 보이는 중요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책에서 볼 수 있었던 고사들을 시각화시킨 것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음에 틀림없다. 주로 남성에 복종하는 여인의 절의節義, 정순正順, 어머니로서의 역할 그리고 유가사대부의 문화를 수호하는 여인의 역할 등에 주안점을 둔 고사들이다. 이러한 유교적인 가치들이 조선의 《삼강오륜도》 등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클레그 클루나스 지음/임영애, 김병준, 김현정, 김나연 옮김, 《새롭게 읽는 중국의 미술》 (시공사, 2007),
[네이버 지식백과] 사마금룡묘출토 채회인물고사칠병 [司马金龙墓出土 彩绘人物故事漆屏] (국가급 중국문화유산총람, 2010. 8. 1, 황매희 편집부)
고혜련, <班婕妤圖像>《중국사학》 59 (중국사학회, 2009)

이상국 | (사)한국민화센터 이사장

경북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경주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재학을 전공하고 2012년 조선후기 수렵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경주대학교 강사를 역임한 바 있으며 현재 (사)한국민화센터 4대 이사장이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