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천숙 작가의 민화에세이 ㉘ 원추리꽃 필 때

원추리는 사내아이를 많이 낳은 부인을 상징하여
임신한 부인이 이 꽃을 몸에 지니면 아들을 낳는다는 설이 있다.
훤화를 그린 그림은 아들을 많이 낳으라는 축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글·그림 최천숙 작가


푸른 하늘에
새털구름이 떠다니고
녹음으로 우거진 산등성이 아래
호랑이 모양의 하얀 바위가 동네를 내려다보고
건너편 바다에서 파도소리 들려오는 듯

세월이 흐르고
아무도 가꾸지 않은 빈 땅에
하늘에서 꽃씨가 날아와
들꽃이 무리지어 물결을 이루고
귀여운 망초가 하얗게 피어있다

전선에 나란히 앉아 있는 참새
아래에는 무궁화가 피어있고
담 밖의 논에 벼가 자라고 있다
참새가 꽃밭을 휘저으며 날아다니고
고인 빗물에 모여 물 바르고 물구나무서기를 한다.

5층 아파트 한 동과 단독주택 한 채가 울타리 안에 서있다. 마당 공터에 집집마다 먹을거리를 심어 함께 모여 상추쌈 한입 가득 풋고추 찍어먹고 가지와 호박 넣어 된장찌개 끓이고 후식으로 방울토마토 나누어 먹으며 둘러 앉아 지냈던 그 시절은 다 지나가 버렸나보다.
누구네 집 창 아래 원추리 꽃이 피어 올라와 있다. 꽃대가 휘어질 만큼 잎이 줄기만큼 길고, 등황색 꽃이 큼직히 피어났다. 금방 열린 듯 작은 고추만한 꽃봉오리들도 올망졸망 달려있다.
원추리를 훤화萱花라고 하는데 사내아이를 많이 낳은 부인을 상징하여 임신한 부인이 이 꽃을 몸에 지니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의남초宜男草라 한다. 훤화를 그린 그림은 아들을 많이 낳으라는 축복의 그림이다.
새댁이 많이 살고 있는 아파트라 임신한 부인도 있겠지만, 남녀차별도 없고 자녀도 한둘 밖에 낳지 않는 세대라 조선시대의 부귀다남富貴多男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통하지도 않는다. 단지 첫딸을 둔 집은 아들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소박한 바람이 있을 뿐이다.
며느리가 금요일에 퇴근한 후 3살 된 손녀를 데리고 승용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아들 집에 와서 주말을 보내고 다시 아이와 함께 돌아간다. 군인가족의 특성상 잦은 이동 때문에 주말부부로 살아가는 집이 많이 있다. 우리 부부도 그런 세월을 보냈으니 그들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작년 겨울 초입, 아들이 대대장 취임식을 할 때 손녀가 너무 어려 데리고 오지 못했는데 올해는 코로나19 전염병 때문에 방문과 면회가 통제 되어 만나 볼 수가 없었다. 카톡으로 보내오는 사진으로나마 위안 삼았다.
서울에서 아들네 관사까지 5시간 넘게 걸려 바닷가 동네에 도착했다. 아들은 밤 11시에 해안 순찰을 나가고, 며느리는 사관학교에서 무슨 프로젝트를 맡아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며 갔다. 나를 데려다준 남편도 행사가 있다며 가고 오롯이 손녀와 둘이 남았다. 재작년 손녀 돌잔치 때 보고 두 번째 만남인데 낯설어 하지는 않았으나 아빠만 찾으며 길게 울다 지쳤는지 엎드려 잠을 잔다. 머리숱이 적어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머리의 끈을 조심스레 풀어주고 이불을 덮고 토닥거려 주었다. 손녀의 얼굴에서 내 어머니가 보이고, 어머니의 얼굴에서 내가 보인다. 혈연이란 이렇게 닮아 있으니 더 애틋하고 사랑하나 보다.
내년 봄에 원추리의 어린 순이 돋아나고 꽃봉오리에서 노랑꽃이 피어나면 며느리가 허리춤에 훤화를 매달고 있기를 소망한다.

파도소리 들려오는 바닷가의 집
해가 드는 양지 바른 창가에
피어 있는 노오란 원추리
무궁화나무에 앉아 있던 희작喜鵲이 날아든다
망우초忘憂草가 근심을 덜어주리
훤초萱草 꽃봉오리 허리춤에 달아 매고
호건虎巾 쓰고 전복戰服입은 사내아이 떠올린다


최천숙ㅣ작가

(사)한국미술협회 민화분과 이사, (사)한국민화협회 해외조직팀 이사,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사)한국문인협회, 국제pen한국본부 회원이다.
저서로 수필집 《내가 행복할 때 그대는》이 있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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