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의 흉배와 구한말 사진 속의 모란도

도 1. 이충원李忠元 호성공신도상 흉배, 1604년

현존하는 궁중과 민간의 모란도는 대부분 19세기 작이며, 그 앞 시기로 올라가는 그림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19세기 모란도에 관하여 품게 되는 의문도 여전하다. 궁중모란도는 어떤 단계를 거치며 변화해 왔고, 또 19세기 이후로는 어떻게 민간화를 전개해 갔을까? 이 과정은 아직도 명쾌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여기에 초상화의 흉배와 구한말 사진 속의 모란도를 통해 실증적인 단서 하나를 살펴본다.

궁중모란도의 선행 양식

궁중과 민간의 모란도 연구는 여러 성과가 있었지만, 현재는 답보 상태에 있다. 시기적으로는 여전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머물러 있다. 전하는 그림이 없거나 사료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부분적이고 미시적인 자료를 통해 조금씩 연구의 범위를 넓혀나가는 다양한 접근이 필요하다. 19세기 이전 모란도 양식에 대하여 문헌과 도상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17세기 전반기의 모란도에 관한 기록으로 박미朴彌(1592~1645)의 『분서집 汾西集』에 실린 「병자란후집구장병장기 丙子亂後集舊藏屛障記」라는 글이 있다. 박미는 1603년(선조 36) 선조의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한 인물이다. 그가 소장했던 10첩 모란도 병풍은 혼례 때 해당 관서에서 옛 제도에 따라 제작해 준 것이라고 했다. 이 모란도는 1603년에 화원들이 그린 궁중양식의 그림으로 추측된다. 내용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모란을 육색六色으로 그렸다는 대목이다. 육색은 짙은 홍색, 옅은 홍색, 짙은 청색, 옅은 청색, 황색, 백색이라고 한다. 청색은 모란의 잎을 나타낸 색으로 본다면, 꽃은 적어도 홍색, 황색, 백색의 세 종류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603년 당시의 궁중모란도는 어떤 양식이었을까? 19세기의 궁중모란도와는 어떻게 달랐을까? 필자는 모란도의 특징을 짐작할 수 있는 17세기 초의 기년작紀年作으로 공신초상화의 흉배胸背를 주목하였다. 공신도상은 대부분 제작연도가 파악되므로 흉배에 모란을 그린 시점도 명확하다. 1604년의 호성공신扈聖功臣, 1613년의 형난공신亨難功臣, 1623년의 정사공신靖社功臣의 도상에 당시에 그린 모란이 등장한다. 흉배에 그린 것이지만, 이를 검토의 대상으로 삼은 데에는 19세기 화원 양식의 모란도와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꼽을 것은 흉배를 직업화가인 화원이 그렸다는 점이다. 공신도상을 그린 화원과 같은 화가들이 흉배를 그렸고, 또한 궁중 소용의 장식화도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따라서 공신도상의 흉배에 그려진 모란도는 17세기 전반기 모란도의 수준과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공신도상의 흉배에 그려진 모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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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년(선조 37)에 녹훈된 이충원李忠元 호성공신도상의 흉배에는 모란 두 송이가 그려져 있다.(도 1) 분홍색 꽃잎 한 겹마다 색감의 농도에 변화를 주어 입체감을 높였다. 그러나 한 송이의 전체 형태는 평면적인 특색을 벗어나지 못했다. 줄기에 붙은 잎사귀 또한 꽃 주변을 돌아가며 배치하였으나 변화가 약한 동일한 패턴이다. 이러한 특징은 1613년(광해 5)에 녹훈된 유숙柳潚의 형난공신도상 흉배에 그려진 모란에서도 볼 수 있다.(도 2) 특히 이 흉배에는 모두 일곱 송이의 모란이 그려졌는데, 분홍색감의 짙고 옅은 변화와 함께 꽃잎의 가장자리는 호분을 써서 들쭉날쭉한 모양새를 처리하였다. 또한, 여기에 그려진 붉은 모란 세 송이는 흉배의 바탕색과 같아서 언뜻 눈에 띄지 않지만, 꽃잎은 입체감 없이 먹선과 황색선으로 간략히 묘사하였다. 꽃의 크기와 줄기, 그리고 잎의 묘사 등에서 자연스러운 구성미를 엿볼 수 있다.
1613년 윤효전尹孝全 익사공신도상 흉배의 모란에는 도식적이기보다 다소 회화적繪畵的이고 자연스러운 묘사가 드러나 있다.(도 3) 꽃의 크기도 큰 것과 측면을 그린 조금 작은 것, 그리고 아주 작은 꽃송이 등이 들어가 있다. 한 폭의 모란도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그림이다. 1625년(인조 3) 박유명朴惟明의 정사공신도상 흉배에 그려진 모란도 앞서 살핀 특징과 큰 차이가 없다.(도 4) 이러한 공신도상들은 17세기 전반기 모란도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는 단폭의 그림이다. 특히 현재 전하고 있는 그림 가운데 참고할 수 있는 요긴한 자료이다. 17세기 화원들이 채색의 공필화工筆畵로 그린 모란도는 19세기 양식과 공통점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궁중 모란도의 민간화民間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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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소재로 한 궁중장식화 가운데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이 모란도이다. 궁중의 모란도는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침전寢殿뿐 아니라 화려하고 장엄한 조형성을 지녔기에 길례吉禮·흉례凶禮·가례嘉禮 등의 궁중의례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궁중모란도는 크게 두 종류이다. 하나는 모란이 뿌리를 내린 땅을 곡선으로 그린 도상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리에 괴석怪石을 그린 사례인데, 수적으로는 괴석을 그린 것이 더 많다. 이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일제강점기 때 어진御眞을 봉안한 신선원전新璿源殿의 감실 안쪽에 걸린 <모란도>를 꼽는다.(도 5) 4~5그루의 줄기로부터 화사하게 만개한 12송이의 꽃을 좌우로 배치한 그림이다. 바닥은 곡선 모양의 땅으로 표현하였고, 가지와 꽃잎은 음영을 주어 입체감을 살렸다. 이와 함께 비교할 사례가 국립고궁박물관의 <모란도> 8폭 병풍이다.(도 6) 화면의 구성과 세부 묘사, 색감 등이 신선원전 감실의 모란도와 유사하다. 여기에 한 가지 첨가된 새로운 요소가 괴석怪石이다. 단순화된 형태의 괴석이 아래쪽 지면 위에 놓였다. 비슷한 사례를 삼성미술관 Leeum과 서울역사박물관의 <모란도> 10첩 병풍에서도 볼 수 있다. 같은 밑그림을 두고 본을 떠 그린 듯 색감과 채색의 표현에도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지면地面과 괴석을 그린 이 두 양식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 그려졌을까? 땅을 노출시킨 것이 괴석을 그린 것보다 제작 시기가 앞설 것으로 추측된다. 민화 모란도에 괴석이 등장한 사례가 많은 점을 고려해 보면, 궁중양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마지막 궁중 모란도와 민화로 그려진 모란도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바로 괴석이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궁중 모란도는 민화 모란도의 원형을 추정하는 단서가 된다. 개인소장의 <모란괴석도>(도 7)는 앞서 본 궁중양식과 달리 꽃과 잎의 묘사가 단순화되고, 형식화된 특색을 보인다. 이와 같은 괴석과 모란의 변용은 사실적인 묘사의 부족을 도식화를 통해 보완하려 한 결과로 이해된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민간화가 진전된 양식이 개인소장의 <모란도>이다.(도 8) 좌우대칭을 이룬 괴석과 모란의 줄기는 궁중양식을 따랐지만, 더욱 단조로운 표현이 많아진 것이 특징이다. 이런 요소가 바로 궁중양식의 민간화가 진행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범본은 궁중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모란도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이라는 의미와 화려한 장식성으로 인해 민간에서 인기가 높았다. 또한, 양반가에서는 혼례 때 제용감濟用監에서 모란 병풍을 빌려다 썼다는 기록도 보인다.

구한말 사진 속의 모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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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도는 구한말에 촬영한 사진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궁중모란도의 민간화 과정을 설명해 주는 요긴한 단서가 된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의 모란도는 혼례 때 이러한 모란도 병풍이 실제로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려준다. 여기에 소개하는 세 점의 사진은 모두 구한말의 혼례식 사진이고, 병풍을 배경에 펼쳐놓은 공통점이 있으나 모란도의 화풍에는 모두 차이를 보인다.
첫 번째는 상류층 자제의 혼례식으로 보이는 사진이다.(도 9) 신랑과 신부의 뒤편으로 모란도 병풍의 일부가 보인다. 신랑의 오른편으로는 지면과 괴석이 약간 보이고, 모란꽃과 잎의 구성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어 궁중양식에 가깝다. 궁중의 모란도가 궁중양식을 유지하면서 민간의 상류층으로 전래되었음을 알려준다.
두 번째 사진의 신랑·신부 뒤편으로 모란도 병풍이 등장한다.(도 10) 병풍의 상하 길이가 짧은 단병短屛이다. 아래에 괴석이 있고, 꽃과 꽃잎이 여백 없이 화면에 가득 채워져 있다. 꽃의 수가 줄어들어 궁중양식보다 간략해졌지만, 줄기와 잎으로 화면을 빽빽하게 구성한 것은 민간화의 특징으로 보인다. 민간양식의 모란도 병풍이 실제로 놓여 있던 공간을 확인할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는 사진이다.
세 번째 사진에도 모란 병풍이 들어가 있는데, 이 경우는 앞서 본 궁중양식과는 그림이 전혀 다르다.(도 11) 꽃을 배치한 화면 구성이 파격적일 만큼 특이하고, 화조花鳥가 함께 등장한다. 이런 도상은 민간의 모란도가 반드시 궁중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해 준다. 양식의 계통을 알 수 없는 이러한 모란도도 19세기 말에 하나의 층을 이루었음을 알려주는 사진이다.
모란도는 전하는 그림이 많아 궁중양식에서 민간으로 저변화되는 과정을 다양하게 살필 수 있다. 평민층에서 소유한 모란도는 다양한 변용과 간결하고 소략한 형태로 그린 사례가 많다. 모란도가 지닌 부귀영화富貴榮華라는 보편적인 상징성이 그림의 대중적 수요와 확산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17세기 공신도상의 흉배에 그려진 모란과 구한말 혼례사진 속에 등장한 모란도의 사이에는 약 3백 년의 시차가 있다. 그만큼 많은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 공백을 채울 실증적인 자료가 많지 않다는데 연구상의 어려움이 있다. 부분적이고 미시적微視的인 자료의 보완이 이루어질 때, 궁중과 민간의 모란도에 관한 좀 더 적극적이고 새로운 이야기가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글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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