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도반회전으로 떠나는 추억 여행

성큼 다가선 가을이 상쾌한 바람과 파란 하늘을 선물로 보낸다. 나는 나날이 그 선물을 펼쳐 행복함을 받아본다. 지난 여름날 너무나 힘들었지만, 봄날의 기쁨으로 행복할 수 있었다. 지난봄, ‘그리운 민화, 새로운 옷을 입다’라는 부제로 열었던 첫 개인전. 많은 지인의 성원으로 나는 영원히 소진되지 않을 에너지를 받을 수 있었다. 봄의 끝자락에 연 첫 개인전은 지금까지의 회원전과는 달리 설렘과 부담감이 배가 되었다. 새로이 준비한 작품을 다 완성한 후 도록에 실을 자료를 정리하면서 나의 첫 전시회를 회상하는 추억여행을 떠났다.

어린 딸의 머리맡 지켜준 처녀작, 화조도 병풍

20년 전, 후배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후배. 자신을 위해 살아온 시간이 너무 없었다는 생각에 후배의 삶이 무척 안타까웠다. 그 후 나는 삶의 방식을 전환하여 나의 삶을 즐길 수 있고 남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은행을 그만두고 바로 다음 날, 불교방송국에 있는 민화교실에서 민화와 연을 맺었다. 지금이야 민화교실이 많이 있지만, 그 당시는 민화를 배우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곳에서 민화를 가르치고 있던 이영자 선생님을 만났고, ‘도반회’라는 이름으로 민화를 함께 그리는 사람들이 생겼다. 대망의 21세기가 시작된 2000년 6월 8일, 종로구 관훈동의 백악예원에서 제4회 도반회 전시회가 열렸다. 입문한 지 3년밖에 안 되었지만, 화조도 병풍을 그려 회원전에 참여했다. 그때까지 붓글씨를 십여 년 써서 서예 전시회는 몇 차례 하였으나, 외부에서 하는 전시회는 처음이라 무척 기대되었다. 직장 동료들과 동창들 그리고 도반들이 축하하기 위해 전시장을 찾아줬을 때 나는 계속 민화를 그리겠다는 약속을 하고 지금까지 그 약속을 충실히 지켜왔다. 나의 처녀작인 화조도 병풍은 어린 딸아이의 머리맡을 지켜 주었던 작품이라 애정이 남다르다. 지금 보면 부끄러운 작품이지만 그 당시에는 최선을 다한 작품이어서 올해 개인전 때 다시 세상 빛을 보여 주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만두었다. 그때 같이 전시했던 황룡도는 작품의 순수함을 높이 산 미국인에게 시집가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아 아쉽다. 하지만 그분이 작품을 찾아가면서 기뻐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작품을 그릴 때 큰 힘이 된다.

 

민화 그리는 도반이 된 싱가포르 이웃

그림과 함께 인생의 2막을 즐기던 시절. 같은 빌라에 살던 이웃이 그림 그리는 것을 보고 함께 민화를 배우길 원해 동행하게 되었다. 싱가포르에서 시집온 그녀는 비록 한국말은 서툴렀으나 그림을 열심히 그리며 함께 어울렸다. 민화는 같은 초를 그리고 주로 오방색을 사용해도 그리는 이의 심성과 취향마다 다른 그림으로 탄생한다. 그러한 연유로 그녀의 그림은 싱가포르의 민족색이 나타난다고 이영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싱가포르는 바다와 물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까워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남색을 선호하는 취향이 있으며 색에서도 우리가 그리는 남색과는 조금 다른 색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개개인의 성향뿐만 아니라 민족성에 따른 색상의 취향이 그림에 나타난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렇듯 도반회 활동을 통해 나 자신의 성장은 물론, 여러 회원과 서로 교감하고 응원하며 상호발전의 계기로 삼은 것이 지금까지 민화를 이어오게 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고비 고비 넘어 어느덧 작가로서 개인전까지

어느덧 세월은 흘러 2003년 봄, 이영자 선생님의 권유로 가회민화박물관에서 개인 교습을 시작하시던 송규태 선생님의 문하생이 되었다. 민화의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 더욱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회원들의 영향으로 공모전에 출품하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2006년 전승공예대전에서 십장생 병풍으로 입선한 후 약 1년 동안 평생도를 그려 자신 있게 2008년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했으나 아쉽게 낙선했다. 입상권에 들지 못한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렇듯 그림 그리며 삶을 즐겼는데, 누가 시샘이라도 하듯 2009년 갑자기 시련이 찾아왔다. 암이란 이름으로. 평생도가 유작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던 내가 2010년 파인회 전시회에 호작도를 그려 참여할 수 있었다. 호작도는 스스로를 위해 그린 첫 작품으로 나에게 부족한 불기운을 보완할 수 있는 작품이라 선택하였다. 암 환자였던 나는 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2012년 가을 경주 엑스포 전시장에 평생도 병풍을 내었는데 넓은 전시장에 전시된 것을 보니 채색이 약해 작품의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비단옷이라는 것만 생각하고 안료를 너무 얇게 칠해서 좁은 곳에서 볼 때와는 느낌이 너무나 달랐다. 그 전시를 통해 나는 스스로 전승공예대전에서 낙선한 이유를 깨닫고 작품이 돌아왔다. 내가 새 삶을 사는 것 같이 나의 평생도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기로 하였다. 거실에 병풍을 펼쳐놓고 색을 하나씩 다시 올리면서 살아나는 그림을 보고 그 순간 가지고 있던 자만심을 질책했다. 새로이 완성한 그림은 2013년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하여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 수상작이 된 평생도가 국립민속박물관에 전시되었을 때 나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다. 문화상품관에는 나의 작품 이미지를 이용한 상품이 진열되어있을 뿐 아니라 전시관에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으니 더 큰 시너지 효과로 기쁨을 주었다. 그리고 지난 5월의 첫 개인전에서 많은 격려와 응원을 받았다. 작가는 작품을 그리는 매 순간 행복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니, 이렇듯 결과에 연연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다.
나에게 민화는 인생 2막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통해 더불어 가는 길도 찾을 수 있었다. 나의 재능이 남에게 기쁨을 준다면 그 또한 큰 복이다. 민화는 생활 속 수행의 방편이 아닐까 생각한다. 많은 인연과 함께 민화인으로 길을 걷고 있는 오늘날. 민화로 많은 분이 행복해한다는 전언을 들으며 이렇듯 멋진 삶의 기회를 준 여러 지인께 감사드리며 초심을 잃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