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도료 ‘옻의 힘’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호 생옻칠장 신중현

생옻칠장 신중현
무형문화재 제1호 생옻칠장 신중현

옻은 곰팡이와 습기에 강하고 방충 효과가 있는 등 보존성이 높기에 재료의 겉을 썩지 않게 보존해주는 도료로 사용된다. 최근에는 민화 등 각종 회화에서 안료로 쓰는 등 활용폭이 넓어졌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호 생옻칠장 기능 보유자 신중현 장인을 만나 옻칠 인생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나무액을 목기에 칠한 것을 칠기漆器라고 한다. 이 칠기를 만드는 기술, 그리고 기술을 보유한 사람을 통틀어 칠장漆匠이라고 부른다. 옻칠은 아무것도 섞지 않은 옻나무 진액인 생칠과 불순물을 제거하고 가열, 정제한 정제칠로 나뉜다. 목가구에 옻을 칠하고 건조한 후 사포로 문지르고, 다시 옻을 칠하고 건조해서 조금 부드러운 사포로 또 문지르고. 일고여덟 번 정도 반복을 하고 나야 칠기가 완성된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습도와 온도가 맞아야 마르기 때문에 쉽지 않은 작업이다.
서울시 지정 무형문화재의 칠장으로는 생옻칠장(제1-1호), 황칠장(제1-2호), 나전칠장(제1-3호), 채화칠장(제1-4호)가 있다. 신중현 장인은 정제하지 않은 생옻을 사용하여 목공예품에 칠을 하는 생옻칠장으로, 스승이자 매형인 홍순태 선생의 뒤를 이어 1989년 3월 17일에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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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으로 피난 내려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옻칠 인생

굴곡 많은 세월이었다. 일제강점기,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난 신중현 장인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서울의 결혼한 누이 집에 맡겨졌다. 매형은 옻칠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월사금 마련도 어려운 시기, 기술을 배워서 밥이라도 먹고 살라는 매형 홍순태의 권유에 어깨너머로 옻칠을 익히고 도왔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부산까지 피난을 내려갔다. 서울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모여 만든 대한공예원(대표 장승환)에서 칠기공으로 본격적으로 칠을 시작했다. 미군들이 권총 자루나 라이터에 옻을 입힌 제품을 선호했던 시절이었다. 경무대(현 청와대)에 제품이 들어갈 정도로 옻 공예는 인기를 끌며 발전했다. 부산에서 생업을 이어가면서 큰 위기도 있었다. 그가 몸담고 있던 공장에서 불이 났던 것. 생나무를 말리는 건조실에서 과열 때문에 니스 통이 폭발했다. 불은 공장과 이웃 주택까지 전소시키며 동산과 부동산을 합쳐 총 1억 원어치의 피해를 냈다. 입을 옷마저 모두 앗아간 화재로 좌절하기도 했지만, 주변의 도움 덕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변하지 않게 하는 보존력이 옻의 매력

60여 년 동안 옻칠 작업에 매진해온 장인이 생각하는 옻의 매력은 무엇일까? 신중현 칠장은 변하지 않는 옻의 매력에 대해 중국에서 발견된 미라를 예로 들었다.
“옻칠을 하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끄떡없어요. 중국에서 2500년 된 미라가 나왔을 때 그 비결은 옻칠을 한 관이었습니다. 격관으로 된 두 개의 옻칠관이 시신이 썩는 것을 방지했죠. 옻의 보존력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실제 옻의 특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이 보존성이다. 옻은 한 번 건조된 후에는 다른 이물질과 섞이지 않고 쉽게 벗겨지지 않으므로 목가구가 변색되거나 부패하는 것을 막는다. 또한 벌레가 접근하는 것도 막기 때문에 살충 효과도 있는 셈이다. 신중현 장인도 ‘칠해두면 천 년을 그대로 간다’는 천연도료 옻의 보존력에 매료되어 옻칠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업으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매력적인 만큼 까다롭고 귀한 옻

물론 매력적인 도료인 만큼 다루기 쉽지 않은 면도 있다. 옻에는 우루시올이라는 알레르기 성분이 들어있어 칠이 몸에 뭍은 후 바로 닦아내지 않으면 가려움이 번지고 사람에 따라 피부가 부어오르기도 한다.
“나도 칠 시작하고 몇 번이나 올랐어. 그때는 약도 없고 고생이 많았지. 지금은 면역이 됐지만 천성적으로 면역력이 없는 사람도 있어요. 다루기 쉽지 않으니 더욱 가치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재료인 옻의 수급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좋은 옻으로 유명한 곳은 북한에는 평안북도 태천, 남한에는 원주, 옥천, 영동 등이 있었다. 하지만 옥천에서는 20년 전에 마지막으로 옻이 나오고 그 후 생산되지 않고, 지금은 원주 정도가 안정적으로 옻을 수급할 수 있는 지역이란다.
“예전보다도 옻을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지. 옻닭을 먹기 시작하면서 더 귀해지는 것 같아요. 7~8년 돼야 옻칠에 쓸 수 있는 옻을 딸 수 있는데, 옻닭용으로는 그보다 빨리 따니까. 원주시에서 묘목을 가꾸고 지원을 해주는데, 충분히 자라기 전에 밤에 몰래 와서 베어가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니 문제에요.”
중국산 옻도 좋은 품질이지만, 그 중에서도 1등품은 일본인들이 몇 년 치를 예약하고 모두 가져가기 때문에 구입하기가 쉽지 않다. 신중현 장인은 그 아래 등급의 중국산 옻과 원주산 옻을 섞어 쓰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말한다. 칠을 위한 도구 또한 아무 것이나 쓸 수 없다. 신중현 장인이 옻칠을 할 때 사용하는 붓은 태어나서 처음 자른 머리카락으로 만든 붓이다. 닳으면 깎아서 쓰고, 잡지 못할 정도로 짧게 깎은 후에는 몽당연필처럼 손잡이를 덧대서 쓴다.

문화재 보수, 제자 양성에 보람 느껴

생옻칠신중현 장인은 수많은 사찰에 머무르며 옻칠로 문화재를 보수, 보존하는 작업을 해왔다. 1988년에 신림동 난곡사 오존불 생칠 조성과 해인사 대적광전 칠존불을 보수한 것을 시작으로, 1992년에는 경북 문경군 가은면 봉암사 봉암존불 및 후불목탱화 생칠을 완성했다. 1993년에는 충남 공주군 마곡사 천불상을, 1995년에는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국보 제221호 문수보살상을 생칠 보수하기도 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문화재를 보수, 보존하는 일뿐 아니라 후학 양성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7호 이돈호 생칠장을 비롯해 짧게는 수년에서 수십 년간 가르친 제자들이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옻칠을 배우는 젊은 후학이 많이 없는 것은 신중현 장인의 아쉬움 중 하나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중 조선장 기능보유자가 타계하고 현재는 후계자가 없습니다. 현대 기술 발전 때문에 수요가 없어진 것도 이유지만 무형문화재 보존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해요.”
최근 민화나 불화 등에서 옻칠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옻칠 제품 또한 예전보다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아직 옻칠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하지만 정작 젊은 후계자가 없다는 점은 그만큼 무형문화재에 대한 지원과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정성스러운 옻칠이 목제품을 천 년 넘게 보존해주듯, 무형문화재 보존과 계승을 위해 여러 제도적,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글 : 박인혁 기자
사진 : 박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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