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민화그리기 실전 – unique style! 나만의 화풍 만들기

창작민화그리기 실전
unique style! 나만의 화풍 만들기

작품기법 등 다른 화가의 장점을 따다가 자기 작업에 적용함으로써 자신의 예술가적 의지가 허약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경우를 흔히 본다. 요즘 민화계에 번지는 두텁게 바른 호분에 요철 및 얼룩 효과를 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법도 그중 한 가지 예일 것이며, 공필화 분위기로 표현의 치밀함을 드러내려 하는 유행 좇기도 그와 비슷한 유형일것이다. 대개 특징이 크게 드러나는 방법일수록 그 방법 차용으로 인하여 본인 미술역량의 허약성 노출은 더 극명해지는데도 왠지 민화 화단의 풍경은 그 허약함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은 나만의 독특함을 찾는 길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는데도 정작 그 방법들이 오늘도 제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이번에는 필자가 가진 방법적 철학을 밝힘으로써 한 화가가 어떻게 자신의 작업 스타일을 만들어가는지 힌트를 주고자 한다. 나만의 노하우를 노출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힌트를 통해 여러분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방법들을 찾아내고 본인만의 화풍을 꽃피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민화 창작, 인간 원초미를 담아라

종종 하는 이야기지만 현대미술은 절대로 테크닉적인 우열을 가리고자 경쟁하는 미술이 아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러한 면에서 우리 민화는 더더욱 그렇다. 민화는 이미 그 태동기 때부터 테크닉보다는 흔히 스토리텔링이라고 부르는 동시대적 공감대에 따른 철학 입히기에 주안점을 두고 작업했던 회화였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그 당시 민화를 그렸던 분들이 전문적 미술 수업을 받지 않은 분들이어서 그런 것일 거라는 추론 따위는 마땅치 않다. 배움 없는 것이 오히려 민화 특유의 원초적 특성이 되어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는 걸 이미 제자들을 통해 여러 차례 확인했던 바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선조들의 민화 작품의 그 현상학적인 면이 당시로부터 오늘까지 변함없이 대중과 교감되는 영향력과 그에 대한 사회의 반향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갈 길을 모색해 볼 일이다. 그런 의미망網 안에서 그분들의 그림을 관찰하면 신기하게도 모든 그림이 별 고민 없이 참으로 손쉽게 그려진 것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또 그런 그림일수록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이 드러나고, 서민 취향의 스토리텔링 목적 또한 잘 드러난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책거리와 같이 제작 시간이 오래 걸리는 그림들조차도 즉흥에 의한 발상을 화면 구성의 축으로 하고 그 위에 수공의 품을 들인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우리가 감탄하는 수작秀作들에 속한다는 점은 현대 화가로서의 각오를 새롭게 만든다. 도화서원을 통해 그려졌던 궁궐용 그림들의 엄격한 화풍이나 격식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창작이라는 의미의 근본은 ‘새로움’일진대 사실 ‘미술적 새로움’ 차원에서는 궁중회화보다 서민 민화들이 제각각마다 새롭다는 느낌이 더 크고, 변화무쌍한 쾌감도 상대적으로 훨씬 많이 느껴진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만 간추려도 우리는 ‘나만의 새로운 화풍 마련’을 위한 큰 팁을 얻을 수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일정 규범 안에서 갈고 닦은 기술을 바탕으로 정신 을 똑바로 차리고 집중하여 그리는 그림들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기보다는 그저 아무 거리낌 없이 낙서하듯 그린 그림이 더 독특하고, 인간 원초미原初美를 분출한다는 것, 그래서 그러한 그림들이 민화에 가까운 화풍이 되고, 관람자의 긴장감을 덜어주고, 또 부담 없이 편하게 해주더라는 사실에 창작민화가들이 주의를 기울여 볼 만하다는 것이다.

낙서는 창작의 보물창고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새로움’은 이미 우리가 경험한 것들 속에는 존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새로움의 속성은 ‘과거’가 아닌 ‘미래’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미 경험한 것들은 이치로 생각해 봐도 모두 이미 사용된 헌것들뿐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다 경험해본 일이겠지만, 이미 축적된 지식을 이용하여 새로움을 찾아내기는 너무나도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가 마구잡이식의 낙서를 이용하려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낙서는 대개 상당 부분을 자신의 무의식이 작용하여 그려지는 메모이다. 그것은 자신만의 독특한 습관 속에서, 자신에게 누적되어 있던 의지 중의 최소량이, 최소의 의도만으로, 어떻게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합되어 만들어지는 것들이다. 즉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지만 자신도 모르고 있던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장 많이 열려 있는 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있어서의 새로움의 가능성은 그 대부분이 아직도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 속에 있다는 점을 향해 분석적 안목을 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거리낌 없이 낙서하듯 그리는 그림의 세계는 바로 창작의 보물창고다! 신기하게도 그 낙서는 백이면 백, 모든 사람의 것이 다 다르고 또 할 때마다 다르다. 필자는 거기에서 하나씩 꺼내어 메모에 따라 많거나 또는 적게 민화 요인을 섞어가면서 작품으로 만들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낙서식 메모를 십분 이용하는 창작 방법이다. (그림 1-1, 1-2, 2-1, 2-2 참조) 실례로 필자의 연구팀에서 같이 창작 민화를 연구하는 분들의 작품을 보면, 열이면 열 사람이 모두 다 각자 다른 특징을 가진 채 전혀 다른 화풍으로 자기 세계를 확장해 나가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예술 형성의 기반, 유교 그리고 자연주의


위에서 말한 것들은 예로부터 동양 미술 전통에서 그 속성적 특성을 살펴 가며 일필휘지一筆揮之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활발하게 연구됐었다. 일필휘지 방법은 비단 수묵화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알고 보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그 철학은 채색화에서도 몇 가지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는 있으나, 오늘은 그중 수묵과 채색의 융합이라는 차원에서 그 대략을 살핀다.
동양화가들의 전람회장을 돌다 보면 요즘도 아주 가끔 눈에 띄지만, 과거의 동양화단에 수묵화水墨畵가 유행할 때에는 작품 내용이 불분명한 채 수묵水墨의 번짐과 얼룩으로만 화면을 구성한 추상화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초보관람자 중 더러는 작품 속에서 아무 내용도 찾아낼 수 없는 당혹감에 황당해하다가 불편한 마음으로 돌아서는 일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 번짐과 얼룩은 왜 그려졌고, 무엇을 믿고 그렇게 당당하게 미술관에 전시했던 것일까? 그 이유를 알려면 조선 시대 초기의 우리 선조들이 했던 고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혁명 세력은 우리나라의 국호를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꾼다. 이 시기를 역사학적으로 평가하는 몇 가지의 해석이 있지만, 화가에게 그러한 것들이 그다지 중요할 것 같지 않아 피하고 여기서는 다만, 역사 흐름의 표면적 현상을 통한 판단에만 따라 설명하려 한다.
당시의 혁명을 주도했던 국가 통치자들에게는 새로 시작하는 나라를 번성시킬 통치 철학이 필요했다. 새 통치자들로서는 명분 때문에라도 고려와 함께했던 불교 철학을 계속 사용할 수는 없었고, 그보다 한층 더 강력하고 멋있는 지배 철학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조선이라는 새 시대에서 유교 철학은 불교를 밀어내고 우리나라의 큰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게 되었고 그로부터 오백여 년을 우리 민족과 함께 동고동락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선 초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이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을 감격케 하는 고려시대의 고도로 섬세한 테크닉적 예술문화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가고, ‘자연스러움’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무위사상을 앞세우고 들어온 유교식 철학 개념이 문화·예술 전 분야에서 최고 가치 기준으로 받들어졌다. 그 변혁기의 한 단면을 쉽게 읽을 수 있는 예술적 변화로는 도자 공예가 있다. 비췻빛 아름다움의 섬세하고 높은 예술적 찬란함을 드러내는 상감청자 예술은 혁명 시기를 지나면서 조선백자의 순수와 겸손을 상징하는 수더분한 백색으로 급하게 바뀌어 갔다. 청자에서 백자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에 만들어지던 것이 바로 분청사기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그동안 사용했던 청자토靑磁土 위에 억지로라도 희게 보이려고 백토白土를 덧입혀 구운 도자기를 말하는 것이다. 즉 분粉 칠한 청자 자기라는 뜻이다. 그러나 분청자기는 얼마 못되어 완전한 백자로 바뀌고 그마저도 역사에서 급히 사라져 버린다. 이 부분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 당시 통치 철학 형성을 위한 시대적 고민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충분히 감지하게 하고 싶어서이다. 또한, 이것은 필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 문화가 유교를 주축으로 하면서 형성된 것은 사실이나 상당 부분 도교 의식도 녹아들어 있다.)

속성을 거스르거나 제한하지 않는 것, 자연주의 예술의 핵심


어쨌든 조선이 선택한 자연주의自然主義 예술혼의 대략을 짚어보자. 사군자 등등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난蘭을 친다’, ‘죽竹을 친다’라는 식으로 ‘친다’고 하지 ‘그린다’라고 하지는 않는다. 동물을 기르는 과정도 어떤 경우는 마찬가지인데 특히 양 같은 경우는 ‘친다’고 말하고, 돼지 같은 것은 반대로 ‘기른다’거나 ‘먹인다’고 한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재미있다. 양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목자는 매일 아침에 우리 안에 있던 양 떼를 불러내어 미리 만들어 놓은 넓은 목장에 풀어놓고 마음대로 그 안에서 뛰어놀고 풀을 뜯어 먹으며 자라도록 놔두고 목자(목동)는 그저 돌연한 환경 악화나 늑대 같은 적의 위험 등으로부터 지켜주기만 하면서 최대한의 자유를 줬다가 저녁에는 불러들여 다시 안전한 우리 안에 들어가 쉬게 해 하루의 작업 일과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것이 치는 것이다. 그러나 비좁은 우리 틀 안에 자유 없이 가둬 놓고 먹이만 줘서 살을 찌우는 돼지는 그저 먹이는 것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동양 미술에서의 ‘친다’라는 개념은 ‘목양牧羊’ 개념과 거의 일치한다. 사군자 치기 등의 경우도 역시 양 치는 것과 그 방법적 특성이 같다. 화가는 양치기의 목장과 같이 미리 크기와 형태 그리고 목적하는 작업 결과의 범위를 정한 화선지 위에서 붓과 기타 매재媒材들이 적정한 만큼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유도만 할뿐 직접 재료들의 속성(자연)을 거스르거나 제한하지 않는다. 화가는 어디까지나 작업의 기본 의도만 품은 채, 자신의 능력을 상당 부분 억제하고, 재료 스스로 일으키는 변화와 시간을 활용하여 자신이 본래 목적했던 창작의 결실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치는것’이다. 때로는 본래의 계획과 다소 달라지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 또한 감수하고, 더 나아가 작업 도중에 자신의 실수가 생기더라도 그 실수를 아끼며 응용 또는 이용하면서, 자연 현상과 화가 자신이 협력하여 하나로 어우르
는 작품을 얻어낸다. 그러고 보면 저 위에서 말했던 형상 없는 수묵 추상화는 다름 아닌, 인간보다 우위優位에 있는 우주 법칙의 원리를 드러낸 우주의 일부 즉 ‘소우주小宇宙’라는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림 3 참조)

인위人爲와 무위無爲가 한데 어우러지는 우연의 미美

여기서 바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물이 묻기만하면 제멋대로 번지는 화선지와, 먹물(물)과, 수용성(물) 채색과, 서양화 붓보다 사용하기가 더없이 불편한 길고 부드러운 털 붓 등은 인위人爲를 억제하는 자연 중심의 표현 작업에 적합하게 고안된 재료들이라는 것이다. 동양인이 서양인보다 기술력이 부족해서, 번지지 않는 재료들을 만들 수가 없어서 불편한 채로 사용하는 게 아니었다. 다시 말해 화가(인간)가 중심이 아닌, 그보다 상위上位의 가치인 자연이 중심이 되어 자연이 만들어내는 번짐이나 얼룩을 마치 화가가 ‘목양牧羊’하듯 하면서 얻어내는 회화적 표현에 편리한 도구들이었다. 조선 통치자들은 이러한 것을 무엇보다 고차원적이고 매력적인 이치인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물과, 먹과, 색이자연적 효과로, 제멋대로 자신들의 속성을 발휘하면서, 때로는 번지고, 때로는 얼룩지면서 서로 어우러지는 모습은 그 작업 행위의 대부분이 인위보다는 무위, 더 정확한 말로는 우주(자연)의 섭리를 인간이 관리하여 얻는 것이니 고려조의 인위적 테크닉 예술론보다 더없이 우월했고, 그 그림은 우주의 섭리로 태어난 것이므로 ‘소우주’이며, 이것은 어떠한 인간 기술도 견줄 수 없는 절대가치라는 결론이었다. 이 생각이 바로 조선이 기술문화를 선비문화보다 지차之次의 것으로 대우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그림에서도 역시 적채법積彩法의 채색화 등 인간의 재주를 중심으로 하는 것들의 격을 낮추어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되도록 겸허하게 해주던 소우주론 따위는 완전히 잊힌 채 이기적利己的 기능 위주의 후기 산업사회로 치달리는 21세기에 와서 보니 그것은 너무나도 아쉬운 가치였음을 깨닫게 된다. 물론 자연보다 인간을 천시하는 풍조를 뺀 나머지 부분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이 필자의 그림에 약간의 번짐과 얼룩을 끌어들이는 이유이다. 어차피 전래민화는 오방색 중심의 색 사용과 동양 정신 표현 재료의 중추였던 수묵이 동행하는 작업이었다. 그렇다면 화가 중 누군가는 재료의 개별적 습성을 무시하거나 억제하는 것보다 대거 활용하는 작업으로 이 시대 화단의 한쪽을 지킬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종이에 아교포수는 하지 않는다. 필자는 과거의 소우주론적 의미에서 더 진보하여 오늘의 시대적 트렌드인 총체적 융복합 및 콜라보 방법론에 맞추어, 선조들이 겪었던 그 고민과 즐거움의 가치를 공유하며, 인위人爲와 무위無爲가 한 마당에서 같이 어우러지거나 교차하는 형식이 되도록 유도하면서 매 작업을 즐긴다. 그러한 사유가 오늘을 사는 이들의 가슴에 회복되어야 할 귀중한 동양적 가치라고 믿기 때문이다.(그림 4, 5, 6 참조)

서양 사람들은 이런 것을 동양적 우연주의라고 한다. 서양의 예술가들도 현대에 들어와서는 서양 문화의 최고 가치였던 인본적 과학주의에 한계를 느끼고 동양 우연주의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 등을 중심으로 하는 화가군群은 캔버스 위에 각종 색채를 흘리고, 끼얹고, 튀기고, 쏟아붓거나 마구 뿌리고, 던져대는 실험의 우연偶然의 미美로 세계의 화단을 장악하기도 했었다.
필자 같은 역사적 의미론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을 살펴보면 평소 자기 삶의 철학과 일치하는 방법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것들을 깊이 연구 활용하여 자신의 작업이 이 시대에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는 길을 찾으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 가지 방법이 정해지면 한동안 일관되게 그 방법을 유지하면서 세상을 설득해 나갈 일이다. 단, 한 화가가 두 가지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그의 작업 철학이 확고하지 못하다는 증거가 된다. 화가가 그 방법에 깊은 애착을 느낀다면 그것 때문에라도 혹 내 그림이 다른 이의 그림보다 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일이 있다 해도 내 그림의 분명한 존재 가치를 확신하면서 작업해 나가는 배짱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끝>

글 정하정

저자에 관하여

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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