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 향기

조여영 3월 시화
참외 향기

늙으신 어머니가 깎아 온 참외 한 접시
늙으신 어머니 참외 한 쪽 들어 내미네
맑은 속살 흰 눈썹 받아 들고 머뭇거리자
늙으신 어머니 어서 먹으라 하네
늙으신 어머니 이제 잊었나
아주 오래전 더위가 뼛속까지 번지던 날
장맛비 쓸고 간 인간사 이후
나 참외를 먹지 못하네
그때 그랬지
논길을 걸어 들길을 걸어
가다가다 쉬던 곳 땡볕 속의 푸른 참외밭
이별을 앞둔 두 사람
낮은 원두막에 앉아 참외 옷을 벗겼지
더위를 끌고 코끝에 번지던 참외 향
사랑은 훗날 달콤한 향기로 남고
나는 더 이상 참외를 먹지 못하네
오늘도 다시 풋풋하게 살아오는 사람
며느리 삼으면 좋겠다던 그 여자를
늙으신 어머니는 벌써 잊으신 모양이네
어서 한 점 들어봐라
늙으신 어머니 고운 손으로
그 여자 잊으라 참외 한 쪽 코끝에 디미네
언젠가 내 가슴속을 떠나는 날
어머니도 늙고 나도 늙고 그 여자도 늙어
세상은 달콤한 참외 향만 남겠네

 

시. 박철
시인 박철은 서울에서 태어나, 『창비 1987』에 「김포1」외 14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김포행 막차』, 『밤거리의 갑과 을』, 『새의 전부』, 『너무 멀리 걸어왔다』,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험준한 사랑』, 『사랑을 쓰다』, 『불을 지펴야겠다』 등이 있다. 2009년 천상병시상, 2010년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림. 조여영
이화여자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디자인매니지먼트과를 졸업하고 민화디자인연구소 ‘그랑’의 디자인 실장을 맡고 있다. 2014년에 첫 개인전을 가졌으며, 헤럴드미술대전, 한국공예문화진흥원 기획공모전, 서울우수관광기념품 공모전, 대한민국관광기념품공모전, 서울상징관광기념품공모전, 국가상징디자인 공모전, 대갈문화축제 전국민화공모전 등에서 수상하고, 수차례 단체전을 치렀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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