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재 김윤겸 필 《영남기행화첩嶺南紀行畫帖》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은 18세기 화단을 휩쓸었고 진재 김윤겸 역시 그가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진재는 겸재를 뛰어넘진 못했으나 그의 화풍을 탈피하려는 시도를 통해 종래엔 독자적인 화법을 형성했으며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를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진재가 소촌도 찰방으로 재임하며 남긴 화첩 《영남기행화첩嶺南紀行畫帖》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영남 북부지방(주로 경북지방)의 명승지를 그린 화첩으로 겸재 정선(謙齋 鄭歚, 1676-1759)이 그린 《영남첩》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그 일부의 그림이라고 보이는 작품들이 알려지고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한편, 영남 남부지방(주로 현재의 경남)의 절경과 명승지를 그린 화첩이 있는데 이 화첩이 진재 김윤겸 필 《영남기행화첩》이다. 이 화첩은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2004년 10월 4일 부산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다가 2017년 3월 8일 보물 제1929호로 승격된 작품이다.
진재 김윤겸(眞宰 金允謙, 1711-1775)의 《영남기행화첩》에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겸재와 진재의 인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즉 진재의 부친이 노가재 김창업(老傢齋 金昌業, 1658-1721)인데 노가재 김창업은 그 부친이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다. 안동 김씨인 김수항은 인조때 병자호란에서 척화대신斥和大臣으로 알려진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동 김씨인 이 집안은 청음 이후로 뛰어난 학자와 명신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러나 노가재는 벼슬을 마다하고 시와 사냥 등을 낙으로 삼다가 1712년 연행정사燕行正使인 형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을 따라 북경에 다녀와서는 중국이라는 새로운 세계의 문물과 풍속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노가재연행록》으로 엮었다.
진재 김윤겸은 자유로운 노가재의 서자로 태어났지만 겸재의 진경산수화 이론을 제공한 백부인 김창흡, 김창집 등을 스승으로 둔 겸재와 밀접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집안의 진경문화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진재의 아버지인 노가재는 젊어서부터 그림을 좋아했으며 그림의 필격이 청진淸眞하고 고고高古하다고 전해지는데 노가재의 그림에 대한 취향이 서자인 김윤겸에게 이어져서 그의 화풍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화첩의 구성

화첩에서는 영남 남부지역의 14곳의 명승지가 그려졌다. 화첩에 있는 작품의 순서는 <몰운대沒雲臺>, <영가대永嘉臺>, <홍류동紅流衕>, <해인사海印寺>, <태종대太宗臺>, <송대松臺>, <가섭암迦葉菴>, <가섭동폭迦葉衕瀑>, <월연月淵>, <순암蓴巖>, <사담蛇潭>, <환아정煥鵝亭>, <하룡유담下龍遊潭>, <극락암極樂庵>이다. 이 화첩에 있는 14점 중에서 <몰운대>, <홍류동>, <해인사>, <송대>, <가섭동폭>, <사담>, <환아정>, <극락암> 여덟 점은 각 실경의 명칭에 추가하여 ‘眞宰’라는 주문방인朱文方印의 관지가 찍혀있다. 이들 그림을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구분해 보면 부산지역을 그린 그림이 <몰운대>, <영가대>, <태종대>인데 모두 육지끝에서 바닷가로 튀어나온 곳의 절경을 그린 것이다. 이들 명승지는 당시 시인묵객들에게는 명소로 이름을 날린 곳이다. 다음이 합천일대를 그린 <홍류동>과 <해인사>로 홍류동은 해인사로 올라가는 옆 계곡이다. 거창을 그린 작품은 <송대>, <가섭암>, <가섭동폭>, <순암>인데 송대는 북상면 월성계곡의 ‘사선대’를 가리키고, 순암은 월성계곡의 장군바위를 그린 것이다. 가섭암은 금원산에 있고 가섭동폭은 금원산 인근의 유안청 계곡을 그린 것이다. 산청에는 <환아정>을 그렸고, 함양은 화림계곡의 <월연>, 연화산 주변의 <사담>, 휴전면 용유담의 아랫부분인 <하룡유담>이 있고, 화첩의 마지막 그림인 <극락암>은 서상면 옥산리 백운산에 있던 절로 전해온다.

진재가 소촌도 찰방 재임 시절 그려

이상 화첩에 있는 14점의 명승지는 진재가 소촌도召村道 찰방察訪으로 재임할 당시(1770년 추정)인근 관할지역을 포함한 주변 경승지를 화첩에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소촌도 찰방은 지금으로 보면 경상남도 진주 지역의 역참驛站을 관리하는 종6품의 외관직이다. 찰방은 중앙에서 직접 임명하는 자리로서 낮은 직급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교통 통신망과 정보를 관할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김윤겸이 서얼庶孽이지만 찰방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임명된 것은 당시 명문 안동 김씨 집안의 서자이기 때문에 집안의 후원이 있었을 것이고, 시대적으로는 조선후기에는 서얼소통(庶孽疏通, 첩의 자손이 과거 응시 자격을 얻거나 관직에 임명되던 일)이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후 화원으로서 찰방에 임명된 대표적인 사람은 지금 안동의 안기 찰방에 임명된 단원 김홍도(재임기간 :1784.1-1786.5), 지금 영천 신령의 장수도 찰방에 근무하였던 화산관 이명기(근무기간 : 1793.5-1795.8)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정조 임금으로부터 그림으로 인정받아 찰방이라는 외관직에 제수除授된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뤄보아 화원이 찰방에 근무하면서 화첩을 그렸던 일은 국가적 차원에서 필요한 사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겸재의 진경산수화에 큰 영향 받아

진재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겸재 정선의 화풍을 따른 겸재파의 화가로서 겸재가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겸재는 진경산수화를 그릴 때 남종화에 바탕을 두고 실경을 재해석하여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구축했고 18세기 화단을 자극하며 이를 크게 유행시켰다. 당시 화단은 겸재와 그 일파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김윤겸을 비롯하여 강희언(姜熙彦, 1710~?), 최북, 김응환, 김석신, 김홍도, 이인문 등 18세기의 유명한 화가들이 전부 겸재의 화풍에 영향을 받은 겸재파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겸재파 가운데도 강희언, 김윤겸, 김응환 등은 겸재를 탈피하려는 시도로써 자신들의 화법을 형성했다. 이들은 겸재를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겸재를 계승하여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를 발전시킨 주역들이다.
김윤겸은 진경산수화를 그릴 때 실경을 압축하여 화면을 구성했고 채색에 있어서는 담채법을 사용했다. 김윤겸은 겸재의 화격畫格이나 강세황의 문기文氣에는 다소 못 미치나 자의에 의한 기행紀行과 사경寫景으로 진경산수화에몰두한 화가이다. 그리고 더욱 사실적인 표현에 역점을 두었으며 그의 실경작품은 겸재 이후 동국진경산수화의 정착에 큰 역할을 했다.
이 화첩의 작품 중에서 진재의 주문방인이 있는 <몰운대>, <해인사>, <송대>, <순암>, <극락암>, <태종대>를 감상해 보기로 한다.

① <몰운대>
이 화첩에 맨 먼저 나오는 그림이 <몰운대>(도1)이다. 몰운대는 낙동강 하구와 바다가 맞닿는 부산시 다대동에 있다. 몰운대는 조선시대 국방의 요충지로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의 선봉장이었던 정운이 순국한 바다이기도 하다. 16세기까지는 몰운도沒雲島라는 섬이었으나 그 뒤 낙동강의 토사 퇴적으로 인해 다대포와 연결되어 육지가 되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몰운대는 소나무 숲이 우거진 기암괴석의 바위섬으로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와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한 명승지로 이름나 있고, 몰운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다대 8경’을 가지고 있다.
<몰운대> 작품의 화면에서 몰운대는 좌하에서 사선으로 뻗어나간 형태로 묘사되었고 몰운대와 수평선 사이의 암석으로 된 섬들은 지금의 명칭으로 쥐섬, 동섬, 모자섬이다. 그림에서는 실경을 최대한 압축하여 많이 보여주고자 했다. 몰운대의 소나무 숲은 간략화하여 그 특징을 드러내고 바위섬을 최대한 돌출시켰으며 채색은 푸른 계통으로 담채를 했다. 파도는 그 머리 부분을 둥글게 하여 끊임없이 밀려오는 듯하고 뒷부분의 실 같이 표현된 파도는 파도가 넘실대는 듯하다. 화면의 좌우에 암석으로 된 섬을 배치하고 화면의 상단에 산맥이 드러누운 듯하게 표현한 이러한 구도의 그림은 겸재의 《신묘년풍악도첩》 <고성문암관일출>과 유사하다. (도2)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와 넘실대는 실같은 물결은 겸재의 <옹천>, <천불암>, 《해악전신첩》의 <문암> 등에서 흔히 보이고 있다. 그러나 겸재 그림 속 파도에 힘이 넘치는 기운에는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②<해인사>
《영남기행화첩》의 <해인사>(도3)는 겸재의 화풍이 비교적 강하게 남아있는 그림이다. 해인사는 화엄종의 근본도량이며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사찰로 경남 합천에 있는 법보사찰法寶寺刹이다. 절은 명산인 가야산伽倻山 자락에 위치하여 송림이 우거지고 계곡이 깊고 맑은 명승지로 유명하다. 겸재 정선도 해인사를 그렸는데 선면扇面으로 된 그림(도4)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의 구도는 좌우의 산능선 사이에 사찰이 위치하고, 좌측의 능선과 사찰사이에 계곡이 형성되어 있는 실경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림 속에 표현됐다. 그림의 시점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으로 산골짜기에 위치한 절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림 속의 해인사는 1817년에 불에 탄 후 1층으로 다시 지어지기 전의 건물인 2층의 대적광전이 있어 확실히 1817년 이전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진재의 <해인사>는 겸재 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아 수목의 표현과 미점은 남방의 묵법을 사용하여 습윤하게 하는 등 겸재의 <해인사>와 유사하고, 그림의 구도도 겸재의 <해인사>와 닮은 점이 강하다. 또한 진재의 <해인사>와 비교되는 그림으로 겸재가 그린 금강산 <장안사>(도5)가 있는데 수목을 묵법으로 그린 것과 사찰의 전각과 누각을 그린 방법과 형태가 지극히 유사하다. 단지 <해인사>는 화면 전체의 구성에 전각이 그림의 중앙에 배치되어 있는 모습으로 그리면서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많은 반면, 겸재의 <장안사>는 전각을 좌측으로 밀어두고 주변의 금강산 경관의 표현에 포인트를 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진재의 화풍이 실경산수화에 가까운데서 나타난 것이다. <해인사>에서는 사찰 중심의 실경을 구하고자 했고 <장안사>에서는 금강산 계곡들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③ <송대>
송대는 지금의 거창군 북상면 월성계곡의 사선대四仙臺를 일컫는다. 사선대를 송대라고 한 것은 동춘당 송준길 선생(同春堂 宋浚吉, 1606-1672)이 병자호란을 피해 은거한 곳이어서 송대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왕실의 선원을 기린다는 뜻이 담긴 사선대思璿臺라고 불렀고, 또한 큰 바위가 4개 포개어져 있어 마치 탑처럼 보이는 데 여기에서 4명의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있어 사선대라 한다. 이것은 아마 상산사호商山四皓의 고사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이상향으로 여긴 명승지이면서 경상도를 대표하는 곳으로 안의삼동安義三洞이 있는데 안의삼동은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이다. 그 중에서 원학동은 영호남에서 가장 빼어난 명승지이며 가섭암, 감섭동폭, 순암, 송대가 있어 당대의 수많은 문인묵객들이 탐방하던 곳으로 송대(사선대)를 ‘안음송대安陰松臺’라고 했다. 지명은 1415년부터 1767년까지 안음安陰으로 사용했고 1767년 이후부터 안의安義로 지명이 바뀌었다.
그림(도6)은 화강암의 흰색 암석에 특별한 준법을 사용하지 않고 구륵으로 그린 다음 약간의 미점을 사용했고, 위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계곡을 따라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모습을 한 폭의 수채화같이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화면의 우측에 4층으로 포개어진 바위가 사선대이다. 마치 기단 위의 3층탑을 방불케 하는 사선대의 맨 위 바위는 마치 거북 같기도 하고 봉황새 모양 같기도 하다. 사선대 아래 너럭바위에 진재 일행이라고 짐작되는 3명이 계곡물 흘러가는 풍광을 즐기고 있다. 18세기에는 도화서 화원 김후신의 아버지이면서 역시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희겸이 그린 <안음송대> 그림(도7)이 전해지고 있다. 진재의 <송대>와 김희겸의 <안음송대>를 비교해 보면 진재는 원학동 송대의 주변경관을 세세하게 표현하려고 했고 담채로 푸른 빛깔을 사용하였지만 김희겸의 작품은 송대를 올려다보는 앙시仰視를 강조하면서 이를 집중적으로 묘사했으며, 암석의 표현에 준법 대신 음영과 설채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화제 옆에는 표암 강세황이 ‘亦奇甚’(역기심)이라고 쓰고 있는데 그 뜻은 ‘또한 매우 기이하다’라는 뜻으로 사선대의 모양과 전설에 관한 평가인 듯하다.

④ <순암>
순암은 월성계곡의 장군바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장군바위는 거창 명소인 월성계곡에 있는 북상면 13경 중에 제6경에 해당하는 절경으로 송대(사선대)는 제9경이다. 안내판에는 ‘북상면 산수리의 물 나들이 맞은편의 산줄기에 위치하여 아래로는 순암을 두고 성천과 산수천을 굽어보면 마치 양날개로 병정들의 사열을 받고 있는 듯 당당한 위풍으로 서 있다’고 되어 있어 순암의 위용을 알 수 있다.
그림(도8)의 중앙에는 뾰족한 바위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화면의 하단에 그려진 선비가 넓은 바위에 앉아 계곡물의 세찬 소용돌이를 바라보는 모습이 고사인물도 속 한 장면처럼 이채롭다. 채색은 청, 갈색의 담채와 수묵을 사용했는데 그 느낌이 가볍다. 화면의 구도도 X자형의 대각선 구도로 되어 있어 진재 나름의 변각구도(邊角構圖, 그림의 한 쪽 부분에 중요한 경물을 근경近景으로 부각시켜 묘사하는 구도법)와 대각선 구도로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 바위는 짧은 선을 중복 사용하여 양감量感과 입체감을 돋우면서 경물은 특징적인 부분만 부각시키고 있다.

⑤ <극락암>
극락암은 함양군 서상면 옥산리 백운산에 있었던 암자로 알려지고 있다. 작품(도9)은 완벽한 변각구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깎아지른듯한 바위산 위에 극락암을 지극히 조명하고 다른 한쪽 면은 먼 산으로 희미하게 표현함으로써 광대한 자연의 경관을 모두 나타내지 않고 극락암 주변의 경관을 극대화하여 좌측에 포치시키는 일각구도를 사용한 것이다. 변각구도를 통해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극락암이라는 사찰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최대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구도는 정선의 <총석정>, <낙산사> 등 관동 바닷가의 경치를 그린 작품이 유사하다. 특히 《해악팔경海嶽八景》 <낙산사>(도10)의 변각구도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⑥ <태종대>
태종대는 부산광역시 영도구에 있는 국가 지정 명승지 제17호이다. 태종대라는 명칭은 《동래부지》(1740)에 따르며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전국을 순행하다 울창한 소나무 숲과 삼면의 바다로 둘러싸인 기암괴석 등 이곳의 빼어난 해안 절경에 심취해 활을 쏘면서 즐긴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태종대는 맑은 날에 대마도까지 볼 수 있는 해안 절경을 가진 곳으로 전국의 시인과 묵객들이 즐겨 찾았고 이들의 예술적 소재가 되었던 곳이다.
<태종대>(도11)에서는 신선바위, 망부석, 병풍바위 등 특색 있는 바위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의 하단에는 시종을 거느린 선비가 하염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서있고, 신선대 바위 망부석 앞에는 상념에 잠긴 듯한 선비가 자신이 망부석이 된 듯하다. 이 그림의 경우 오른편에 태종대의 해안절경을 위치시키고, 왼편과 상단은 수평선으로 여백을 주었으며 간략한 바위섬(주전자섬, 오륙도 추정)으로 망망대해를 강조하는 변각구도를 사용하고 있다.

새로운 실경산수화의 경지 선보여

진재의 《영남기행화첩》속의 그림은 김윤겸이 소촌도 찰방시절인 1770년 이후 만년에 그린 작품으로 원숙미가 깃들었다. 맑은 담채를 사용하여 그림을 맑게 그렸고 단순하면서도 표현하고자 하는 경물을 특징 있게 잘 표현했다. 겸재 정선의 영향하에 그린 그림이면서도 겸재의 진경산수화 양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실경산수화의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글 이상국 ((사)한국민화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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