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층(紙層) 속에 남겨진 그림 문배도(門排圖)

도 1. <화훼괴석도 花卉怪石圖>, 19세기 말~20세기 초, 지본채색, 123.0×46.0㎝,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도 1. <화훼괴석도 花卉怪石圖>, 19세기 말~20세기 초, 지본채색, 123.0×46.0㎝,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대문이나 방문, 혹은 벽장문에 붙인 문배門排 그림은 민화를 소비하는 대표적인 한 방식이다. 한번 붙이면, 그 위에 다른 그림이나 도배지가 다시 붙을 때까지 문이나 벽장문을 장식하였다. 새로운 그림에 자리를 내어준 뒤에도 결코 사멸되지 않고, 그 뒷면에 붙여져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온 그림이 바로 문배도이다. 궁가와 민간 상류층, 그리고 중산층에 이르는 대표적인 문배 그림의 사례를 살펴본다.

그림에 옷을 입히듯 표장하는 것을 장황裝潢이라 한다. 일제강점기 때 사용된 표구表具를 대체한 용어인 장황은 족자簇子와 두루마리, 첩帖, 그리고 병풍屛風 등의 유형으로 나뉜다. 벽에 걸어두고 수시로 감상하기에는 족자가 좋고, 보관하기에는 두루마리와 첩이 용이하다. 또한, 공간을 가리거나 장식하는 데에는 병풍만한 것이 없다. 이러한 장황의 범위를 벗어난 또 다른 형태가 문배門排 그림이다. 문에 도배하듯 풀을 먹여 붙인 그림을 말한다. 대문이나 방문, 그리고 실내의 벽장문에 붙인 경우도 문배 그림이라 할 만큼 상당한 민화가 이 문배 그림으로 유행하였다.
그런데 문이나 벽에 한 번 붙인 그림은 다시 떼 내어 활용할 수가 없다. 그림을 바꾸려면 새로운 그림을 그 위에 붙이는 방법 밖에 없었다. 이전에 있던 그림은 그 위에 붙인 새 그림에 의해 가려지게 된다. 물론 값나가는 귀한 서화書畵라면 이렇게 할 수 없었다. 오늘날 도배지 속에서 종종 발견되는 옛 그림들은 화격에 관계없이 귀한 대접을 받는다. 뜯겨서 사라질지도 모를 그림들이 도배지에 온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독특한 지층紙層의 세계가 존재하는 문배 그림은 주로 중산층의 가옥에서 뜯어낸 도배지에서 많이 나왔다고 하지만, 궁가宮家를 비롯한 상류층에서도 그 사례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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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락당老樂堂의 도배지에서 나온 화훼·화조도

문배 그림이 나온 궁가로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1820~1898)이 살던 운현궁雲峴宮의 노락당老樂堂을 들 수 있다. 노락당은 정면 10칸, 측면 3칸으로 운현궁의 가장 중심 건물이다. 이곳의 벽장문에 붙여진 도배지에서 <화훼괴석도> 대련對聯 1점, 화조도·죽조도竹鳥圖·송학도松鶴圖 등 11점의 그림이 발견되었다.
먼저 살펴볼 <화훼괴석도>(도 1)는 화면 좌우에 손잡이가 있던 부분이 있어 벽장문에 붙여진 그림임을 알 수 있다. 호방한 필치로 구사한 바위 주변에 2~3종류의 꽃을 빽빽이 배치하여 그렸다. 배경은 그리지 않고, 괴석은 거칠게 묘사했지만, 꽃과 잎사귀, 줄기 등은 화가의 꼼꼼한 필치를 자랑한다. 채색은 담채淡彩나 수채화풍의 분위기에 가까워 산뜻함을 더해준다. 실내를 고상한 분위기로 장식하기에 좋은 화제의 그림이다.
이 그림 외에도 11점의 화조화가 전한다. 이 그림들은 2~3명의 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붙인 것으로 보이는 그림 한 폭에는 ‘명재산림처사가名在山林處士家’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도 2) 이름은 산림에 은둔해 사는 처사處士의 집에 있다는 뜻이다. 그 아래에 ‘양곡楊谷’ ‘김완종金完鍾’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화가의 실명實名을 밝힌 그림이지만, 김완종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그림의 전반적인 화풍으로 보아 민화풍民畵風의 화조화 보다 화격이 높다.(도 3) 한 번 붙여놓으면, 그 위에 다른 그림이나 도배지가 붙을 때까지 벽이나 벽장문을 장식한 일회성 그림이다. 그렇지만, 그림을 바꿀 때에도 떼어내지 않았던 문배 그림이기에 뒷면의 그림들 또한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문배 그림의 묘미란 이러한 보존의 미덕에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윤증尹拯 고택 안채의 문배 그림

이번에는 민간 상류층의 가옥에서 나온 문배 그림의 사례를 살펴보자.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윤증尹拯(1629~1714)이 살았던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의 고택에 문배 그림 하나가 전한다. 이 고택 안채의 안방 문에 붙어 있던 도배지 사이에서 그림 2폭이 나왔다고 한다.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를 그린 그림이다. 곽분양은 본명이 곽자의郭子儀(697~781)이며, 안녹산安祿山의 난(755~763) 때 장안과 낙양의 반란군을 토벌하여 756년에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진 실제 인물이다. 곽분양행락도란 곽분양이 입신출세한 많은 자녀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이 2폭의 그림 가운데 한 폭은 화면 위쪽에 ‘분양좌분양전조제신도汾陽坐汾陽殿朝諸臣圖’(이하 ‘제신도’로 표기)라 적혀 있다. 곽분양이 전각에 앉아 여러 신하들의 조문을 받는 장면임을 알게 된다. 나머지 한 폭은 후손들이 문안하는 장면으로 ‘분양제손수십인문안도汾陽諸孫數十人問安圖’(이하 ‘문안도’로 표기)라고 적혀 있다. 한 나라의 제후이자 한 집안의 어른으로서의 곽자의의 모습을 각각 분리하여 그린 듯하다. 권력과 다자손多子孫을 누리는 길상吉祥을 주제로 한 그림이다. 그런데 이 두 그림은 분폭分幅으로 나누어진 것이어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한 장면으로 구성된 병풍 형식의 곽분양행락도와는 구성이 다르다.
<제신도>(도 4)에는 곽자의가 전각殿閣의 중앙에 앉아 있다. 그 좌우에 부채를 든 내관이 서 있고, 왼편에는 종鍾을 치는 신하가 보인다. 앞쪽의 계단 아래에는 관모를 쓰고 관대冠帶를 맨 신하들이 홀笏을 들고 3열로 서거나 앉아서 허리를 굽히고 있다. 계단 오른쪽에는 호위 병사가 의장물儀仗物을 들고 있다. 공식적인 조회 장면이다. 화면 왼쪽에는 떨어져 나간 그림에 붙어 있던 낱장의 고서들이 보인다. <제신도>는 기존의 곽분양행락도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분양왕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려는 곽자의의 모습이 강조되어 있다.
<문안도>(도 5)에는 비스듬히 그린 건물 중앙에 곽자의가 앉아 있다. 그 앞으로는 아들과 사위 등 자녀 15명이 등장한다. 그런데 자손들의 모습이 특이하다. 곽자의를 향해 서 있지 않고, 그림의 왼쪽 아래 방향을 응시하며, 움직이는 모습이다. 마치 문안을 마치고 돌아가는 듯한 장면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문안도가 그려진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기 짝이 없다. 왜 이런 모습으로 그려졌을까? 기존의 곽분양행락도에는 자손들의 문안 장면이 없다. 대신 곽자의와 자손들이 연회를 감상하는 장면이 들어있다. 이 장면에는 자손들 대부분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곽분양행락도에서 연회를 구경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문안 장면으로 재구성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해 본다. 즉, <문안도>에는 곽자의를 건물의 중심에 그린 뒤, 다른 곽분양행락도에서 공연을 구경하는 자손들의 모습을 옮겨와 그린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기존의 도상을 조합하여 그리는 과정에서 매우 불합리한 모양으로 재구성된 그림인 것으로 보인다.
궁중 화원이 그린 <곽분양행락도>는 대부분 병풍형식이다. 삼성미술관 Leeum 소장의 <곽분양행락도>에는 곽자의가 자손들이 둘러선 공간의 용상龍床에 앉아 무용수들이 춤추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도 6) 좌우의 조복을 입은 아들과 사위를 신하보다 약간 크게 그렸다. 이외에도 처첩妻妾, 신하, 궁녀 등이 양쪽으로 둘러 서 있다.
<문안도>에 그려진 인물들의 모습과 비교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도배지 속에 남아 있던 곽분양행락도 2점은 아래 위쪽에 푸른색 비단이 붙여져 있다. 병풍으로 장황할 때 붙인 회장回裝 비단으로 추측된다. 이 그림이 원래 여러 점으로 구성된 병풍의 한 폭임을 추측하게 하는 단서이다. 병풍이 망실되거나 해체되자 그 가운데 남은 것을 한동안 벽장이나 문짝에 붙여 두었고, 이후 이를 바꾸기 위해 그 위에 도배지를 발랐던 것으로 추측된다. 작품의 운명도 이 정도면 정말 기구하다. 원래 병풍에 그려진 그림이 뜯겨 벽장문에 붙여졌으며, 그 위에 다시 바른 도배지 아래에 묻혀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이 곽분양행락도 2점은 민간화가의 솜씨가 아니라 인물 묘사에 경험이 있는 화가의 필치로 짐작된다. 이 그림의 범본範本이 되는 그림이 있었고, 이를 근거로 하여 채색을 더해 그린 것이다. 약간 붉은 색감에 익숙한 듯한 분위기는 혹시 불화를 그린 화승畵僧의 그림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조선시대의 사람들에게 곽자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주인공이었다. 곽자의처럼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소망이었다. 장수長壽하고, 높은 관직에 올랐으며, 자손들이 번성했으니 이보다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들라면 주저 없이 곽자의를 꼽았을 것이다. 그러한 소망은 벽장문 속에 감추어져 있던 이 <곽분양행락도> 2점에서도 읽을 수 있다.

민간의 벽장문에 붙인 그림

중산층 주택의 경우는 어떤 문배 그림을 선호했을까? 조선 말기에 유행한 「한양가」(1848)에는 “다락벽에 계견사호鷄犬獅虎”라는 가사가 있다. 즉 다락의 벽장문에는 닭·개·사자·호랑이 등의 그림을 붙인다는 대목이다. 모두 복을 구하고 사악함을 물리친다는 의미를 담은 그림일 것이다. 1888년 프랑스의 인류학자 샤를 바라(1842~1893)가 구입한 민화 가운데 ‘계견사호’ 그림이 소개된 바 있다.(도 7) 아마도 「한양가」에 기록된 세화歲畵가 바로 이런 그림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샤를 바라가 구입한 이 그림들은 당시의 기준작이라 해도 손색이 없고, 생활장식화의 좋은 본보기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정사각형의 화면에 그린 4점의 그림은 간략한 형태감에 조형적으로 변용시킨 부분들이 꽤나 다채롭다. 화염문火焰門을 띠고 있는 사자의 모양은 이전 시기 무관武官들의 흉배에 그려진 사자의 도상과 같은 계통이다. 호랑이 그림 또한 디자인적인 요소가 잘 부각되어 있다. 문에 붙인 그림이 아니라 시장에 나온 그림을 구입한 것이라 12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그림의 상태가 매우 좋다.
서울 궁가宮家의 문배 그림에 그려진 화조와 화훼, 명문가 고택의 문에 붙였던 곽분양행락도, 서민들의 문배용 그림인 ‘계견사호’까지 다양한 주제의 그림들이 문 위에 붙여지고 또 사라져 갔다. 새로 붙인 그림이더라도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붙어 있을 수는 없다. 때가 되면 새 그림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고, 박락이나 변색이 진행되면, 예외 없이 새로운 그림의 뒷면에 한 겹의 종이로 남게 될 뿐이다.
문배 그림에 붙어 있던 그림과 글씨를 해체해 보면, 어떤 그림과 종이가 차례로 붙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뜯어진 고서 한 장, 고문서 한 장일지라도 그 사연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작은 문 위에 만들어진 지층紙層에는 그림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림에 담긴 소망과 사연, 그리고 겹겹이 쌓인 시간의 단층들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며 함께 남아 있는 것이다.

 

글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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