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최기영 – 소나무에 깃드는 천년 건축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최기영
소나무에 깃드는 천년 건축

최기영 대목장大木匠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건축 장인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이자 유네스코 지정 인류무형문화유산이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국보 제15호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정읍 내장사, 영주 부석사, 경주 월정교 등 수많은 사찰과 고택이 그의 손을 거쳐 새 생명을 얻었다. ‘이음새 하나가 천년 간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는 오늘도 전통건축 현장을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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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한 청년이 건축 도면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 중이다.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집을 뛰쳐나온 그는 어느새 궁궐의 담벼락을 타넘고 있다. 달빛을 따라 궁궐의 모든 모양새를 도면과 비교해본다. 추녀를 올려다보는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번진다. 그 청년은 훗날 전통건축 기문技門(기술을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만들어진 가문)의 맥을 잇는 대목장大木匠이 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최기영의 젊은 시절은 그렇게 치열하고 간절했다.

오밤중 궁궐 담을 넘던 청년

목수는 나무를 깎고 다듬어 건물을 세우는 사람이다. 대목장은 그 목수 가운데 으뜸이자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으며, 도편수라고도 불린다. 대목장은 전통건축물의 설계부터 마름질, 건설, 감리 등의 모든 과정을 총괄하고 감독한다. 기와장, 단청장, 석장 등을 통솔하기에 전통건축 전 분야에 대해 꿰뚫고 있어야 한다. 세종 때는 정5품의 고위 관직으로 대우받았다.
대목장에 이르는 최 대목장의 길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다. 돈이 되는 일이면 가리지 않고 했다. 건축 일도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1961년 어느날, 때마침 고향 충남 예산 근처 수덕사의 일주문一柱門 공사가 있었다. 그는 공사를 지휘하던 당대 제일의 대목장 김덕희 선생 밑에서 일을 시작했다. 김덕희, 김중희를 지나 최기영으로 전통건축 기문의 맥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그렇게 스승 일행을 따라 방방곡곡을 누비며 수덕사, 서울 관음사, 창경궁, 덕수궁, 원주 상원사 등의 해체와 복원을 함께 했다. 잔심부름 하나 건성으로 하지 않았고 곁눈질로 스승의 비법을 익혀갔다. 선배의 연장을 틈틈이 빌려 도구의 성질을 홀로 깨우쳤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임했다.
“오밤중에는 모르는 것이 있어도 물어볼 사람이 없는 거여. 그럴 때는 궁궐 담벼락을 뛰어넘는 것밖에 길이 없는 노릇이지. 구석구석 살펴보다 추녀 밑에 쭈그려 쪽잠을 잤어. 그러다 아침에 궁궐 문이 열리면 숙소로 돌아왔지.”
스승을 따른 지 7년이 되어갈 무렵, 그는 자신의 길을 찾아 독립했다. 이후 고택 수백 채, 남한산성, 양평 용문사, 대구 대견사, 안동 봉정사, 영주 부석사 등 굵직한 건축물들과 국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복원 사업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사찰을 매만져왔다. 2010년에는 17년에 걸친 187동의 백제문화단지 공사를 완공했다. 까맣던 머리카락은 그동안 백발이 다 되었다.
궁궐 담을 넘던 청년은 이제 대학교육기관과 전승교육관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전통건축의 거장이 되었다.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지정, 2004년 옥관문화훈장 수상, 2010년 은관문화훈장 수상 및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지정 등의 영예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뒤를 따랐다.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최 대목장은 국보 1호 숭례문을 축조했던 죽정竹亭 최유경(1343년~1413년)이 후손이다.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 역시 목수일을 했다. 최 대목장의 몸에 흐르는 목수의 피가 천 년 세월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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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요무형문화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과 같은 명예로운 수식어만으로는 최 대목장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대목장은 정승감이 돼야 한다’는 옛말은 어쩌면 그를 두고 하는 말일지 모른다. 그는 자신을 ‘한낱 목수’라 낮추어 가리킨다. 한 거장의 겸양쯤으로 여길 법한 말에, 그의 높은 기술과 인품을 이루는 인생철학이 녹아 있다.
“나는 배우지도 잘나지도 못한, 더는 내려갈 곳이 없는 목수일 뿐이야. 그런 내가 부모의 은덕이 큰 사람, 최고 교육기관을 나온 사람과 삶이 같아서는 안 돼. 놀 때 똑같이 놀고, 잘 때 똑같이 자면 언제까지나 제자리인 것이지. 내 분수에 맞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기에 조금이나마 이룰 수 있었던 게야. 분수를 알아야 해, 분수를!”
열변을 토하며 손바닥으로 탁상을 연신 내려치는 소리가 대목장의 묵직한 망치질처럼 울려 퍼졌다. 그의 ‘분수론’은 자신이 타고난 분수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는 운명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운명을 끝까지 밀어붙이라는 투사의 선언에 가깝다. 그리고 그는 그 선언대로 살아왔다.
집을 다 짓고도 기둥이나 서까래가 각각의 분수에 맞지 않으면, 그대로 뽑아버리고 다시 지었다. 체계적으로 알려줄 사람이 없었기에 설계, 제도 등 고등건축지식을 잠을 아껴가며 독학했다. 1400년 전 백제 능사 5층 목탑의 ‘하앙식 공법’을 터득하기 위해, 일본과 중국을 수차례 오가며 백제 시대 선조의 흔적을 좇았다.
최 대목장의 인생철학은 건축을 넘어 삶에 다다른다. 그가 “나는 57년 만근”이라며 슬며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노력하고 베푼 만큼 받는 거여. 이건 건축이 아니라 인간사 모든 것에 똑같아. 인과응보의 원리지. 요행을 찾아서는 안 돼.” 일흔을 넘은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만근 중이다. 몸 편히 쉰 날이 언제였던지 까마득하다. 최근에는 경주 월정교, 남원 예촌 2차 공사, 공주 오등선원 등을 오가며 그의 모든 역량을 쉴 틈 없이
쏟아 붓고 있다.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그는 이제 세계가 인정하는 대목장의 반열에 올랐다.
“부처와 예수는 날 때 가진 마음을 죽을 때까지 지켰기 때문에 성인이 된 거여. 구도자의 마음으로 앞만 보고 가야지. 뒤돌아보거나 후회할 여유도 없어”. 꼿꼿이 앉아있는 그에게서 용맹전진하는 선승의 기운이 고요히 피어올랐다.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소나무

전통건축은 소나무, 흙, 화강암, 창호지가 바탕이 된다. 소나무와 화강암으로 뼈대를 쌓아 올려 흙과 창호지로 살을 더 한다. 살이 곪아도 문제지만 뼈대인 소나무가 어설프면 집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최 대목장은 좋은 소나무는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국산 소나무에 대한 그의 애착은 매우 크다. 소나무 중에 으뜸인 좋은 황장목을 구하기 위해 첩첩산중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르내렸다. 대구 대견사 복원 당시에는 강원도 양양의 800m 야산에서 황장목을 구해왔다. 십 여 년 전에는 정선과 강릉 일대 소나무 임야를 사들이기까지 했다. 그곳의 소나무들은 생전에 베지 않을 생각이다. 그는 국산 소나무의 우수함에 관해 자식 자랑하듯 한참을 풀어놓았다.
“우리 소나무는 흰색, 노란색, 청색, 붉은색으로 4색을 발산해. 뚜렷한 사계절이 고르게 담겨 있기 때문이여. 그 수려한 색채는 외산 고급 소나무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지. 강도나 신축성도 비할 바가 못돼. 송진도 훨씬 끈끈하고 강해. 그래서 좋은 소나무를 보면 ‘야 이놈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거야.”
그와 마주앉은 전승교육관 사무실도 5m가 족히 넘는 육중한 소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연일 최고 기온을 갈아 치우는 8월의 무더위에도 더위를 느끼기 힘들었으며, 인접한 도로의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소나무는 천 년을 살고, 목수 손을 빌어 또 다시 천 년을 살지. 사람의 피와 같은 송진이 흐르며 죽어서도 살아 숨 쉬는 거여. 집안의 습도, 온도, 소음이 알아서 관리되는 것이지. 좋은 소나무로 지어진 한옥이 육신과 정신을 정화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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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한 장인의 꿈

일평생 전통건축과 복원에 몸 바쳐 온 그이지만, 아직까지 이루지 못한 간절한 꿈이 있다. 경주 황룡사지 9층 목탑 복원이 그중 하나다. 황룡사지 9층 목탑은 약 80m로 추정되는 신라 시대 목탑으로 조선 시대까지도 이보다 높은 단일 건물은 지어지지 않았다. 현존하는 가장 높은 목탑인 중국 불궁사 5층 목탑보다도 약 10m 이상 더 높다.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지어졌으나 13세기 무렵 몽골의 침입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최 대목장은 복원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호히 말했다. “황룡사지 9층 목탑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우리 선조의 역작이여. 무슨 이유가 있겠어. 내 욕심이 아니야. 서둘러 복원해야만 해.”
그에게 한글 건축 용어 사전 편찬은 또 하나의 숙원이다. 건축 용어에 일제의 잔재와 왜곡이 심각하여 우리말로 착각할 지경이기 때문이다. 사전 편찬을 위해 자비를 출연하고 예산안을 정부에 제출하였으나, 10여 년 넘게 표류 중이다. 그는 지지부진한 정부의 태도를 강력히 규탄했다. “입으로 제사만 지내면 다음 날 후손에게 물려줄 것이 하나도 없어. 하루빨리 바로잡지 않으면 안 돼. 우리 것을 짓는데 언제까지 일본말을 쓸 텐가.”
‘우리 것’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과 자부심은 최 대목장의 오늘과 내일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전통건축의 미래를 떠받치는 그의 사명감은 천년 세월의 소나무처럼 곧고 강건하다.
 

글 김세현 기자 사진 박성일 기자
자료제공 중요무형문화재74호 대목장
최기영 전수교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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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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