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대중미술, 민간연화民間年畵 ② – 연화, 시대의 모습을 담다

중국의 대중미술, 민간연화民間年畵 ②
연화, 시대의 모습을 담다

동아시아에서 민간회화가 번성하고 유행하던 시기는 나라마다 고유의 특색과 시기적인 차이가 있지만, 중세 시민사회에서 출발하여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공통적으로 찾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중에서도 중국의 민간연화는 명말-청초明末-淸初시기에 연례적인 문화 행사로 자리 잡으며 전역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청왕조의 안정기였던 ‘강건성세康乾盛世’ 기간(1661-1795)에는 사회환경과 경제적인 번영에 힘입어 예술성이 뛰어난 연화의 제작이 이루어졌으며, 생활미술품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민간연화는 한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의 여러지역에 영향을 끼쳤다.


명대 연화

명대에는 길상적인 내용을 지닌 세화로서의 궁중회화, 귀족들의 회화, 일반 대중의 벽사용 연화사용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명대, 경제력을 가진 시민계층의 확대는 새로운 문화의 향유계층을 탄생시켰다. 수공업과 상업 등으로 부를 축척한 시민들은 대중문화에 관심을 가졌는데, 그중의 하나가 쉽게 보고 즐길 수 있는 소설, 희곡 등의 목판 인쇄물이었다. 통속소설의 보급과 서적 삽도의 발달은 회화의 대중화를 이루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명대후기에 이르면 큰 판을 분할하여 몇 가지 색으로 인쇄하거나, 몇 개의 판으로 한 세트를 만들어 다색인쇄를 하는 투색판화套色版畵가 출현했다. 명말 금릉(현 남경)에서 인쇄된 오발상吳發祥(1578-?)의 <나헌변고전보蘿軒變古箋譜>와 호정언胡正言(1582-1673)이 여러 개의 판으로 채색 인쇄한 <십죽재전보十竹齋箋譜>, <십죽재화보十竹齋畵譜> 등은 채색투인彩色套印기술의 도약을 보여준다.(도1) 이러한 채색인쇄기술의 발달은 목판민간연화 제작기술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채색 인쇄한 민간연화의 제작과 사용이 일반대중에게 확산된다.
명대 서적용의 삽도판화에 비하여 목판연화가 많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지만, 현전하는 명대 서적과 민간판화로 인쇄된 다양한 통속소설의 삽도에서 당시의 인쇄기술과 판화의 풍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현전하는 명대의 연화 작품으로는 홍치원년弘治元年(1487)에 제작된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 융경원년隆慶元年(1567)에 만들어진 <수성도壽星圖>, 만력萬曆25년(1596) 제작된 <팔선축수도八仙祝壽圖·수자길상도>, 명 말에 각인된 <효행도孝行圖> 등이 전해질 뿐이다. 그 중에서도 장수를 기원하는 <수성도壽星圖>는 몇 폭이 전해 내려오는데, 같은 분본粉本에 채색한 것으로 절파浙派화가 장삼송蔣三松(생졸년 미상)의 작품을 공방에서 의뢰받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중의 하나인 원주의 고판화박물관 소장품은 장식성이 강한 화려한 의복 문양과 채색으로 볼 때 붓 그림의 묘미를 살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대형의 작품은 경제력이 있는 집에서 사용한 것임이 분명하다.(도2) <팔선축수도>는 인물을 중심에 배치하고, 주위에 다양한 수자壽字 문양을 그려 넣어 장식성을 극대화하였다. 도석화와 문자가 결합하여 길상을 표현한 대표적인 명대 연화로 볼 수 있다.(도3)


명대 궁정과 일반 대중의 연화 사용

명대 신년에 연화를 걸던 풍습에 관한 자료는 궁중과 관련된 사료에 등장하고 있다. 궁정화가들은 반드시 명절에 연화를 그려서 진상하였는데, 유약우劉若愚(1584-?)의 『명궁사明宮史』에 동지 때 궁중의 실내 여기저기에 <양을 끄는 동자도(綿羊太子)>와 사례감司禮監에서 인쇄한 <구구소한시도九九消寒詩圖>를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는 동지冬至로부터 봄까지 81일 동안 그림이나 표를 붙여놓고, 한 해의 농사 시작을 준비하는 역화曆畵 역할을 하던 그림을 말한다. 중앙에 매화 81송이를 그려놓고, 주위에는 81일에 해당하는 그림을 그려 넣는데, 신년축하, 관등觀燈, 밭 갈기, 봄맞이 활동 및 양羊, 취보분聚寶盆 등 길상적인 희망을 표현하였다. <구구소한도>는 민간미술과 노래(民歌)가 결합한 형식으로 민간에서 왕실에 전해졌던 연화 형식의 그림이었다.(도4)
일반대중이 사용하던 연화는 대부분 판화로 제작되었는데 궁정의 구속도 받지 않았고 문인화가의 요구에 부합할 필요도 없었기에, 표현이 자유롭고 활발하였다. 민간에서의 연화사용에 관련하여 유동劉侗(1593-1636)의 『제경경물약帝京景物略』 춘장春場조에 명대 백성들의 사계풍습 중에서 목판으로 인쇄한 연화에 관련된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북경에서는…비가 오지 않는 절기가 되면 집에 용왕신상을, 문에는 부적그림을 붙인다. 5월 1일에서 5일까지는 각 가정마다 오독五毒(전갈, 뱀, 지네, 거미, 두꺼비 등의 독을 가진 해충과 동물을 의미한다. 단오절을 시작으로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질병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벽사의 의미로 사용하였다)을 제거하는 부적을 붙였는데 모두 작은 종이로 만든 자잘한 것들이었다. 8월 15일 제사를 지내는 달에는 종이 파는 가게에서 월광부적을 샀는데, 월상을 가득 차게 그린 그림은 연꽃을 들고 무릎을 꿇은 모습, 월광이 가득하게 보살을 비추는 모습의 그림이다…작은 종이는 3촌, 큰 것은 사람 키만 한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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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연화는 형식의 다양성, 풍부하고 다채로운 내용으로 당시의 사회풍속을 표현하고 있다.
명대의 연화는 길상적인 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림의 제목과 소재는 이미 송대부터 있어온 것들과 명대 새로이 나타난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명절에 길상과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궁정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인 풍습이었던 것이다.


청대 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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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청초 시기 봉건사회의 혼란과 왕조의 교체는 일반 대중의 길상적인 염원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청 왕조 건국 초기에는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애정소설을 탄압하였고, 그 결과 소설의 삽도판화 대신에 새해에 귀신을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길상화인 민간연화가 크게 유행했다. 특히 잦은 전쟁 중에 죽은 인구의 증가를 기원하고, 다산을 비는 길상화가 크게 유행하였다.
청 왕조는 변발辯髮과 복장과 관련된 부분 이외에는 한족의 문화와 풍속습관을 크게 탈바꿈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명대의 대중문화와 만주족 문화가 융합하여 민속활동은 더욱 다양해졌다. 인구의 증가 및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은 시민계층의 확대를 가져왔으며, 미술의 상품화가 심화되었다. 농업과 가내수공업의 발전으로 농민들이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고, 농촌지역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민중들의 문화적인 욕구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세속적인 미술과 문학의 소비계층이 농촌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연화, 초상화, 공예품 등의 수요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갔다. 왕실에서부터 사대부 문인, 일반대중, 농민에 이르기까지 연화를 사용하는 풍습은 농촌사회 구석구석까지 전파되어 필수불가결한 생활용품인 동시에 민간 미술품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명말-청초 시기를 지나며 민간연화는 여러 가지 폭넓은 주제와 형식, 풍부한 제재와 다양한 소비계층의 수요에 힘입어 궁정에서부터 대도시, 농촌지역 등 전국 각지에서 연화의 제작과 사용이 최고의 황금기를 이룩한다.
청대 연화는 왕조의 정치, 경제, 외교, 군사 등의 요인에 따라 발전하고 변화하는 특색을 보여준다. 건국 후 청의 통치자들은 새로운 정권의 세력을 키우는 동시에 한족漢族의 정서를 완화하고, 새로운 사회생산과 통치사상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건국 초기 제작된 연화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십분 반영했다. 부모에 효도하고, 연장자를 존경하고, 이웃과 화목하며 자손을 잘 가르치고 훈육하는 것과 같은 유교이념을 생활의 이상으로 삼은 민간연화는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 오랜 기간 일반 민중의 도덕관념으로 뿌리내렸던 유교이념으로 대중을 교화하는 소재, 발재발복發財發福, 길상을 기원하는 제재가 많이 채택되었다. 또한 새로운 왕조 건설 중에 희생된 인구의 증가를 비는 길상 연화인 <영희도>, <동자도>가 많이 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다.(도5)
강희연간(1662-1772)의 연화는 대중의 사상을 교육하고 통치하는 당시의 법령과 깊은 관계가 있다. 청 왕조는 전국을 통일한 후 경제정책을 장려하고, 유민을 모으고, 부역을 경감하는 등의 경제정책으로 농업생산력을 향상시키려 하였다. 강희연간에는 <경직도耕織圖>가 그림본, 인쇄본으로도 출간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자기와 묵보 중에도 <경직도>가 그려졌다. 농업생산 증가를 위한 정책이 연화에도 반영되어 농업, 어업, 양잠업과 관련한 다양한 작품이 제작되었다.(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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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강남의 소주蘇州지역에서는 세화용의 화첩형식으로 다양한 화조 및 화훼연화를 인쇄하였다. 당시 제작된 민간연화는 다양한 과일, 꽃, 기명 등의 상징적인 의미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새해를 송축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이들 작품은 세밀하고 섬세한 선묘線描로 중국회화의 사실적인 공필工筆기법을 보여주며, 전통회화의 조형과 구도를 따르고 있는 것이 많다.(도7)
옹정擁正-건륭乾隆(1723-1795)의 치세기간에는 사회의 안정과 경제발전, 상공업의 발달과 도시의 번영을 이룬다. 이러한 사회 환경은 민간연화의 사용과 제작이 황금기에 도달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즉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여 집 안팎을 장식하는 미술품의 기능과 길상과 벽사라는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한 다양한 종류의 민간연화가 제작되기에 이른 것이다.(도8)(도9)
이 시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제작된 다양한 종류의 연화가 국내뿐만 아니라 러시아, 일본, 동남아 까지 팔려나간다. 중국 전역에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각자의 경제력과 기호에 따라 연화를 구입하고 사용하는 것은 중국 민족 고유의 문화가 된 것이다.
가·경嘉慶 -도광道光연간(1795-1850)은 청 왕조의 통치력이 쇠락하는 시기이다. 청 왕조의 국운은 쇠락하고, 열강들의 업신여김을 감수해야만 하였으며, 내부적으로 ‘태평천국의 난’같은 농민봉기가 생겨났으며, 청 왕조의 운명이 내리막길을 걷는다.
청대 말기 연화는 정치와 시사문제에 대중의 관심이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요한 정치적 사건과 불량한 사회모습을 풍자하는 연화가 등장하는데, 이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연화에 표현되던 아름다운 풍경은 사라지고, 국가와 민족의 운명에 대한 관심과 부패한 정권에 대한 불만이 연화에 나타난다. 청말에 제작된 풍자·유머류 연화, 신문물新文物을 소개하고 대중을 계몽하는 연화가 다수 제작된 것도 당시 사회 환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도10)
한편 청말에 해파화가였던 전혜안錢慧安(1833-1911)은 북방지역 민간연화의 중심지였던 천진天津- 양류청楊柳靑 연화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는 많은 풍속화와 역사 및 고사화를 연화의 밑그림으로 창작하였고, 문인화가의 고상한 멋과 온화함을 양류청연화에 스며들게 하였다. 북경의 궁정에서부터 민간수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를 제작한 양류청지역 연화공방에서 제작된 연화는 궁정문화와 향촌문화를 융합한 연화의 예술적 가치를 잘 보여준다. (도11)
이처럼 문인화가들이 민간연화의 밑그림을 직접 그린 것은 근대적인 의식을 가진 문인화가의 출현이라는 측면보다, 시민계층이 선호하던 고가의 민간연화 수요가 적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농촌사회와 민중들은 공방이나 화점에서 제작한 저렴한 연화를 구매하여 매년 절기마다 집 안팎을 장식하고 바꾸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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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다

민간의 미술형상은 각 민족의 사상과 의식을 반영하였을뿐더러, 사람이 태어나서 생활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삶의 과정에 동반하는 모든 종교적 의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 민족의 특성은 민간연화 작품에 그대로 드러난다. 민간연화에는 원시농경사회의 인간의 삶과 신앙생활, 봉건사회의 농업생산, 그리고 문명이 발전하여 사회가 비교적 수평적이고 균형을 이루던 시기의 모습까지 묘사하며 오늘에 이른다. 심지어 건축, 의약, 위생 등 모든 인간생활을 설명하고 교화하는 역할까지도 서슴지 않고 해낸다. 그리하여 민간연화의 길상과 풍속이라는 양대 주제는 도상화, 회화화되어 민중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하고 대변하는 생활예술품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생활예술로서의 민간연화는 시대와 지역별로 다양하게 불리었다. ‘연화’라고 칭한 것은 청대 도광道光 30년(1850) 이광정李光庭이 지은 『향언해이鄕言解頤』에 처음으로 언급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은 전성기 민간연화의 개괄적인 면모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대중미술인 민간연화의 예술적인 형상미, 상징성의 표현방법에 대한 소개는 다음호에 게재할 것이다.

글 우영숙(미술사 박사, 민화작가)

저자에 관하여

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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