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평민들에게 민화는 무엇이었나?

고사인물도, 지본채색, 69×28cm×10, 20세기

*고사인물도, 지본채색, 69×28cm×10, 20세기

조선 후기 평민들에게 민화는 무엇이었나?

민화는 몇 가지 성격과 기능을 가지고 있다. 길상과 상서의 유지와 벽사 수단으로서, 무화巫畵처럼 신앙 대상으로서, 장식본능 충족 방편으로서의 민화도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 평민들 사이에서 민화가 특별히 유행한 이유를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뿐 아니라 시대적 특징과 연관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조선 후기에 민화가 특별히 유행한 이유. 그 시대의 민화가 평민들에게 갖는 사회적 의미와 상징성.

잘 알려진 대로 민화는 몇 가지 성격과 기능을 가지고 있다. 길상과 상서의 유지와 벽사 수단으로서의 민화가 있고, 무화巫畵처럼 신앙 대상으로서의 민화가 있는가 하면 장식본능 충족 방편으로서의 민화도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평민들 사이에서 민화가 특별히 유행한 이유는 이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벽사진경을 꾀하고 행운을 비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일 뿐 시대적 특징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 후기에 민화가 특별히 유행한 이유는 ‘그 시대의 민화가 평민들에게 어떤 사회적 의미와 상징성을 가졌는가’라는 데서 찾아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아쉽게도 현재 이 방면에 대한 직접 정보를 제공해 주는 자료가 거의 없다. 고전소설, 판소리계 소설, 민요 등 측면자료가 전해오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 작품들은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엮어진 이야기라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당대의 시대정신과 평민들의 사회적 욕구 등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들 자료를 바탕으로 민화가 조선 후기 평민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고 또 어떤 수단으로 활용되었는가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려 한다.

부富의 과시 수단으로서의 민화

임진·병자 양란 후의 급격한 사회·경제적 환경의 변화는 조선 후기 사회에 신분 질서의 와해라는 예상치 못한 혼란을 불러왔다. 몰락하는 양반들이 늘어나고 반대로 평민계급의 신분상승이 현저히 증가했다. 양반의 허와 실을 문제 삼은 박지원의 『양반전兩班傳』이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부를 축적한 평민들은 혈연이나 지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신분 상승을 꾀하거나 능력 과시를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했는데, 그림도 그런 방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 후기의 시대적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고전 국문소설이다. 그 중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서동지전』이라는 것이 있다. 당시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이 소설은 간악한 다람쥐가 어질고 후덕한 주인공 서대주(쥐)에게 은혜를 입고도 배은망덕하게 그를 모함했다가 판관 호랑이(백호산군白虎山君)의 지혜로운 판단으로 벌을 받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이 널리 읽혔던 당시 사회 상황과 관련지어 보면, 다람쥐는 몰락한 양반 계층을, 쥐는 새롭게 부상한 상공인 계층을 표상한다.
주인공 서대주가 하루는 늙은 쥐, 어린 쥐 등 전국의 모든 쥐 종족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푼다. 집과 연석宴席 주변을 묘사한 대목에 주란화각朱欄畫閣, 용루봉정龍樓鳳亭, 분벽사창粉壁紗窓 등 부富를 과시하는 상징어들이 총동원된다, 그리고 정자, 화계花階, 기화이초가 있는 정원이 묘사되고, 네 벽을 장식한 허유세이도, 삼고초려도, 취과양주귤만거도醉過揚洲橘滿車圖 등 수많은 고사인물화가 한참 소개된다.
같은 국문소설 계열인 『옹고집전』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다. 주인공 옹고집임을 주장하는 가짜 옹고집이 진짜 옹고집의 풍족·부유한 세간살이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어간대청 삼층 난간, 세살창 들장지, 쌍룡 손잡이 등을 언급하고, 은가락지, 금반지, 청·홍·자색 비단, 명주옷 등을 들먹이면서 화려한 고대광실에서의 부귀, 영화로운 생활을 과시한다. 여기서도 산수병풍, 연꽃병풍, 모란병풍 등 집 안팎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의 소개가 빠지지 않는다.
고전소설에서는 이와 같이 웅장하고 화려한 주택과 호화찬란한 장식을 통한 부富의 과시 속에 으레 민화가 등장한다. 이것은 민화가 부유한 집의 장식품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일반 대중들이 생각했던 부잣집의 구체적인 모습 속에는 민화로 도배된 방이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반드시 동일한 예라고 하기는 어려워도 민화로 장식된 집이 부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던 것은 요즘 세태에서 외제차를 실제와는 상관없이 부의 상징처럼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선도, 지본채색, 37x28.5cmx2, 19세기,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신선도, 지본채색, 37x28.5cmx2, 19세기,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신선도, 지본채색, 54.5x29.5cmx2, 19세기,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엘리자베스 키이스, 한옥내부
 
고상한 절조와 교양 상징으로서의 민화

종전까지 서화를 즐기는 문화생활은 사대부들이 독점해 왔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그림을 생활 속에 향유하는 평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지만, 내용과 수준면에서는 사대부의 경우와 차이가 있었다. 그 근본적 이유는 사대부들과 다른 취향과 감상안, 그리고 지적 한계 때문이었다. 그러나 평민들은 외형적인 모습과 실제 내용이 다른 부조화 속에서도 그림과 함께하는 생활 자체만으로도 신분 상승에 대한 심리적 만족과 위안을 얻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이본異本 춘향전 『옥중화獄中花』 중 이몽룡이 춘향의 방에서 춘향을 기다리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에 유의해 보자.
“춘향모 담배 붙여 도령님께 올리나니, 도령님 입에 물고 방안을 잠간 보니 별로 사치 없을망정 명화 두어 장 붙였는데, 이상하던가 보더라. 동벽을 바라보니…”라고 하면서 동서남북 네 벽에 붙은 탕임금도, 상산사호도, 요지연도 등의 그림을 하나하나 설명해 나간다. 여기서 ‘이상하던가 보더라’는 대목을 주목해 보자.
혈연과 세습을 특징으로 하는 기존의 신분제도 아래서는 춘향은 퇴기退妓 월매의 딸이므로 당연히 기생이다. 조선시대의 기생은 백정이나 사당패, 광대와 함께 천민에 속한다. 그러나 변학도의 수청 요구를 거부하거나 이몽룡에 대해 지조를 지킨 것을 보면 오히려 요조숙녀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춘향은 기생이면서 기생이 아니고, 기생이 아니면서 기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몽룡과 춘향이 살던 시대는 이미 기생이라는 명名과 실實이 부합되지 않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눈앞에 전개된 춘향 방 풍경을 보고 이몽룡이 이상히 여긴 것은 기생방에서 고사인물화와 같은 고상한 내용의 그림을 보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춘향 방에 장식된 많은 그림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 가졌던 기생에 대한 선입견이 깨지면서 잠시 혼란을 느낀 것이다. 춘향 방 벽에 걸린 그림을 상세히 설명하는 이 대목에서 판소리 창자唱者가 의도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춘향이 천기賤妓가 아니라 교양을 갖춘 고상한 절조의 여인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동시대의 국문 애정 소설인 『옥단춘전玉丹春傳』에도 기생 방 그림 치장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주인공 이혈룡이 출세한 그의 죽마고우였던 김진희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진희의 애기愛妓 옥단춘이 그를 몰래 구해 그녀의 방에 모시는 대목에, 위수조어도, 이백급월도, 상산사호도, 산중처사도 등 양반들이 선호했던 고사인물화, 인물산수화 등 네 벽에 가득한 그림에 관한 묘사가 이어진다. 그 의도 역시 춘향전에서 춘향 방 풍경을 설명한 대목과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지체 높고 교양 깊은 사대부 계층 사람이라면 이렇게 방안 가득 그림을 요란하게 붙여 놓을 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평민들의 의식 속에는 예술적 감수성, 고상한 정취, 교양을 갖춘 사람의 구체적 모습 속에 이런 등속의 그림으로 도배된 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사대부 취향 공유 장場으로서의 민화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림의 교화적 기능을 인정하여 모범이 될 만한 선대 중국의 정치가나 성현들의 고사를 그린 그림을 생활 가까이 두고 수신修身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들은 성현들 가운데서 특히 속세를 초월한 재야 인물들을 선호했는데, 상산사호, 도연명, 엄자릉, 강태공, 허유·소부, 죽림칠현, 백이·숙제, 이태백 등이 인기 있는 소재였다.
민중들과 호흡을 같이했던 판소리계 소설이나 민요 등에서도 중국의 역사상 인물과 그에 얽힌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인물의 성격을 분류해 보면 은현隱賢, 시성詩聖, 선인仙人, 충신 등 다분히 사대부적 정서가 반영된 인물들로, 종전까지 일반 평민들에게는 직접 관련이 없는 인물들이었다. 조선 후기의 판소리나 민요에 이들 인물이나 고사가 자주 인용되었던 것은 그것이 비록 상투적인 것일지라도 어느덧 평민들이 사대부적 취향과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음을 시사示唆해주는 것이다.
민요와 민화는 그 표현의 방법은 달라도 일반 서민들의 취향과 정서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것이다. 민요가 노래하는 내용이 민화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고사인물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일반 평민들이 방 장식그림으로 고사인물화를 애호하고, 감상의 대상으로 삼은 자체는 그림을 통해 사대부적 문화를 공유한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민화가 가진 내포와 외연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주된 수요자 겸 공급자였던 평민들과 인식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화의 대유행을 낳은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이 선행돼야 한다.
조선 후기의 민화 성행 배경에는 양반 사대부 생활문화의 보편화 과정과 맞물린 평민들의 신분상승 의욕과 자기 과시욕이 숨어 있었다. 이런 시대적·문화적 토양 속에서 민화는 부의 과시 수단이자 품위와 교양 암시의 방편이 되기도 했고,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접하는 통로이자 사대부 취향을 공유하는 장場이 되기도 했다.

 

글 : 허균(한국민예미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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