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궁성의 장식 미술(7), 인간 보편의 소망을 담다 화훼·초목 장식

인간 보편의 소망을 담다
화훼·초목 장식

궁궐은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왕이라는 최고 권위자가 통치하는 권력기관이자 정치 현장으로서의 궁궐이고, 또 하나는 왕족의 생활공간으로서의 궁궐이다. 이 두 성격 중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장식의 위치와 내용이 달라진다. 사생활 공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화훼·초목·문자 등의 길상 장식 문양은 정치나 왕권의 위엄과는 상관없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결부된 상징형들이다. 이것은 궁궐 장식을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차원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두 측면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 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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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 못지않은 굴뚝 장식

궁궐에서 침전은 왕과 왕비의 사생활 공간이다. 당연히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온돌이 필요하고 따라서 굴뚝도 필요하다. 이 굴뚝에 여러 가지 상징문양들이 베풀어지는데, 대표적 유례가 경복궁 자경전 굴뚝과 교태적 후원의 화초굴뚝이다.
자경전은 경복궁의 동조東朝로서 조선 말기 고종의 양모養母 조대비의 거처다. 십장생 문양이 장식돼 있다 해서 십장생 굴뚝으로 불리는 이 굴뚝은 전각 북쪽 담장에 약 1자 두께로 돌출된 평면 형태로 남아 있다. 보통의 굴뚝과 모양이 다른 것은 자경전의 각방에 연결된 연도煙道들을 모아 담장에 가지런히 붙여 세우고 벽돌담 쌓기로 마감했기 때문이다. 벽면에 마련된 장방형 화면 속에 해, 산, 바위, 물,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이, 사슴, 학 등 십장생을 비롯해서 연꽃, 대나무, 포도 등의 식물 문양이 베풀어져 있다. 화면 위쪽 중앙에 귀면상이, 그 좌우에 영지를 입에 문 학이 장식돼 있다. 그리고 화면 아래쪽에는 불가사리로 알려진 동물이 사각 틀 속에 감입되어 있다. 다양한 문양으로 장식된 십장생 굴뚝은 하나의 훌륭한 환경 미술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침전 후원을 아름답고 매력적인 공간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자연물의 속성을 인간 중심적으로 해석했던 고대인들은 하늘 높은 곳에서 항상 비추는 해, 한 곳에 있으면서 움직이거나 변함이 없는 산, 또한 만고에 쉼 없이 흐르는 물에서 불변의 영원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간사와 결부시켜 장생의 상징형으로 삼았다. 또한 높은 하늘에 한가히 떠서 행적에 구애받지 않는 구름에서 무한 장구의 의미를 찾았고,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의 속성을 장생의 의미로 해석했다. 실제에 있어서는 수명이 한정된 영지, 거북이, 사슴, 학 등이 장수의 상징이 된 것은 설화 전설 등을 통한 인간 중심적 해석에 기인한 것이다. 경복궁 교태전 뒤 아미산에 있는 네 개의 굴뚝에도 다양한 장식이 베풀어져 있다. 육모기둥에 기와지붕을 올려놓은 모습을 한 굴뚝 각 면마다 길상 문양을 새긴 소성전燒成塼이 장식돼 있다. 문양의 내용은 크게 동물과 식물문양으로 나누어지는데, 식물문양은 사군자 계열의 국화, 세한삼우 계열의 소나무·대나무·매화 등이고, 동물문양은 학, 봉황, 불가사리 등이다. 봉황은 이곳 굴뚝에만 나타나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교태전이 왕비 침전이라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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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담장 장식

화초 장식은 자경전 담장에서도 볼 수 있다. 북쪽과 서편 담장 안팎에 문양이 베풀어져 있는데, 문자 문양이 위주인 북쪽 담장과 달리 서쪽 담장에는 안쪽에 문자문양, 바깥쪽에 꽃, 나무, 문자문양이 집중 시문돼 있다. 각 문양은 여러 조각의 소성전을 짜 맞추어 완성한 것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문양 내용은 매화·국화·모란·대나무·석류 등 다양하다. 매화문양에서 보름달을 배경으로 새가 매화꽃 가지 위에 앉은 모습이 낭만적이고, 국화와 모란꽃 문양에서 나비가 분주히 나는 모습이 정겹다. 정형화되고 상투적인 것이지만 이런 문양이야말로 한국인이 꽃을 사랑하되 다른 자연과 어떻게 조화된 것을 아름답게 느끼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새, 달, 매화라고 하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세계, 이것이 한국인이 사랑했던 자연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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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미의식과 성정 보여주는 벽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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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과 운치를 사랑하는 한국인의 성정은 궁궐 전각 깊숙한 곳에서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창덕궁 낙선재 동쪽의 석복헌과 수강재 사이에 일각문이 나있는데, 키가 큰 사람은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규모가 작은 문이다. 이 문 좌우에 접한 아래로 길고 좁은 벽체에 매력적인 벽화가 장식돼 있다.
문 왼쪽에는 포도덩굴 그림이, 그 반대쪽에는 매화그림이 그려져 있다. 얼른 보면 벽화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벽면에서 소성 타일을 조립한 후 여백을 회로 마감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포도덩굴은 아래로 처진 형태로, 매화나무는 위쪽을 향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식물학적 지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장인의 몸에 밴 자연계에 대한 정서가 무의식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문 바깥 쪽 벽에 있는 매화그림은 매화꽃이 고목나무 가지에 성글게 핀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꽃의 색깔은 봉숭아꽃 색이고, 꽃 모양 역시 복숭아꽃 비슷하다. 매화꽃을 그렸을 것이 분명하지만, 실제로 보기에는 매화꽃 같지가 않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것을 문제 삼지 않았기에 지금처럼 이 모습 그대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포도와 매화 그림은 잘 그린 그림이라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못 그린 그림이라고도 말하기도 어렵다. ‘잘 그렸다’고 하기에는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하고 ‘못그렸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소박하다.
원초적 순정을 머금은 꽃장식판을 왕세자의 독서와 휴식 공간인 창덕궁 삼삼와와 승화루(옛 이름은 소주합루)를 잇는 월랑 한 구석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승화루 가까운 쪽에 띠살문이 있는데, 여기에 투각 기법으로 새긴 모란꽃 장식판이 붙어있다. 강한 대비를 이루는 붉은 모란꽃과 짙은 녹색 잎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보색 관계의 색은 자칫 야하게 보이기 쉬우나 이 모란꽃 장식판의 현란한 보색은 다르면서 조화를 이루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미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상의 모든 장식 문양들은 자세히 뜯어보면 완벽하지 못하거나 어딘가 빈틈이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술 수준이나 정성의 문제라기보다 그런 것을 태연히 수용하는 한국인의 미의식과 성정에 관한 문제다.
한편, 경복궁 집옥재는 고종황제가 서재로 사용한 곳이다. 다양하고 화려한 화훼 장식문양들이 동·남·북쪽 벽면에 가득 차 있는데 여기서도 모나지 않은 한국적 심성을 느껴볼 수 있다.
장식판의 아래로 뻗은 하늘 기둥에는 모란 당초문이 아름다운 운각雲閣이 장식돼 있고, 그 사이 판벽에는 기룡문夔龍紋이 새겨져 있다. 벽돌쌓기 식으로 분할된 장식판의 격간 안에는 석류, 불수감, 복숭아 문양이 각되어 있다. 그리고 남쪽에는 모란 당초문이 투각된 장식판으로 꾸며져 있다. 북쪽은 창호지 문위에 교창交窓을 설치하고, 그 위에 장식판을 부착했는데, 투각기법을 사용했다. 각 문양을 살펴보면, 기룡은 용의 일종으로 몸 푸르고 다리와 꼬리가
감긴 것이 특징이다. 모란은 부귀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고, 석류는 ‘불수佛手’, 복숭아는 ‘삼다三多’로 불리는 것으로 각기 다남자多男子·다복多福·다수多壽를 상징한다.불수감은 부처님 손처럼 생긴 열대 과일인데, ‘佛’[ ]이 ‘福’[ ]과 중국식 발음이 유사한 데 연유하여 복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복숭아는 수도壽桃라고 하는 것으로, 서왕모 전설에서 먹으면 삼천년을 산다는 바로 그 복숭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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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길상의 의미 품은 신실 장식

궁궐 정전이 왕이 살아생전에 정치를 행하던 곳이라면 선원전과 능침은 왕의 사후 신령의 거처다. 선원전은 지금 창덕궁 내에 있으며, 구선원전, 신선원전으로 불리는 두 건물이 남아 있다. 신선원전 내부에는 11개의 신실이 마련되어 있는데, 신실마다 열성조列聖朝의 신주를 모신 의자가 놓여있고, 북·동·서 벽 3면에 걸쳐 일월오악이 펼쳐져 있으며, 그 위쪽에 화려한 화훼문양이 베풀어져 있다. 북쪽 벽에는 석류, 복숭아, 불수감, 연화당초, 작약, 모란 등 갖은 길상 식물문양이 투각돼 있다. 또한 동·서 벽면에는 영지, 괴석, 서일상운문瑞日祥雲紋으로 구성된 문양판이 있는데, 연화당초문을 투각한 운각雲閣이 이를 둘러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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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마루의 오얏꽃 장식

창덕궁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 볼 수 없는 꽃 장식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정전 용마루와 인정문에서 볼 수 있는 오얏꽃 장식이다. 이 작은 꽃문양에 일제에 의해 국권을 잃은 대한제국 황실의 슬픔이 서려있다. 이 오얏꽃 문양을 궁궐의 정전, 그것도 가장 높은 용마루에 새겨 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나라가 상하의 혈연관계와 선원계보를 중시하여 족보 문화를 발달시킨 것과 달리 일본은 소속된 집단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강조하는 전통이 있다. 이것이 일본의 웬만한 집안이면 나름의 독자적인 문장紋章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가문家紋 문화가 발달한 이유다.
1910년, 대한제국이 강제로 일본에 합병됨과 동시에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가로 위상이 격하되었고, 그에 따라 기존의 황실업무를 담당하던 궁내부宮內府가 일본 궁내성宮內省 소속 이왕직으로 개편되었다. 일본은 왕실봉작제에 의거 고종과 순종에게 왕의 작위를 수여하고 고종을 덕수궁 이태왕으로, 순종을 창덕궁이왕으로 칭했다. 그리고 이강李堈(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희李熹(흥선대원군의 후손) 등과 같은 왕족에게는 공公의 작위를 수여했다. 이것은 조선 왕실이 일본 천황가의 하부 단위로 편입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라가 망함에 따라 태극기는 장롱 깊숙이 숨었지만 조선황실이 써오던 오얏꽃 문양은 여전히 사용되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조선 황실을 일본 천황가에 편입된 일개 가문家紋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한 까닭이다. 인정전을 비롯한 궁궐의 중요 건물에 새겨진 오얏꽃 문양은 예컨대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가문의 건물에 접시꽃 문장을 새겨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정전에 오얏꽃 문양을 새긴 것은 조선왕조가 일본 천황 하부 가문에 편입되었음을 천하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일제는 이 작은 오얏꽃 문양을 가지고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외형을 갖추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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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허균(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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