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궁성의 장식 미술(4), 경복궁 광화문의 해치상

그림1 현재의 광화문 해치상(동편)

▲그림1 현재의 광화문 해치상(동편)

경복궁 광화문의 해치상

근대 일제강점기 이후로 한낱 장식용 동물상 정도로 취급돼 오던 광화문 해치가 2008년 5월 서울특별시 상징 동물로 선정되면서 본래 의미를 되찾는 계기를 맞이했다. 그런데 당시 일부 개신교 목사들은 하잘 것 없는 금수禽獸를 서울의 상징으로 삼는 것은 우상 숭배적 발상이라면서 딴지를 건 바 있다. 그러나 금수도 금수 나름이다. 고대 동양인에게 있어 인간과 금수를 구별하는 기준은 몸의 형상이 아니라 정신에 있었다. 광화문 해치상은 자신을 보는 사람의 안목과 견식의 높이만큼만 실체를 드러낸다.

1. 광화문을 지키는 해치상

방울 달린 목걸이를 목에 걸고 궁궐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광화문 해치상은 몸 전체가 비늘로 덮여 있으며, 다리에는 화염무늬 갈기와 나선형 털이 나있다. 두 눈은 부리부리하고 코는 주먹코이며, 약간 벌린 입 사이로 어금니와 송곳니가 드러난다.
근대 월간잡지 ≪별건곤≫에 광화문과 이 해치상에 대한 기사가 보인다.
“광화문이란 세 글자의 문액은 정학교의 필이오, 상량문은 이유원이 찬하고 신석희가 썼으며, 문전의 쌍해치雙獬豸(치豸는 신양이오, 음은 해치이니 속칭 해타이다)는 근세 미술대가 이세욱(혹은 태욱泰旭)의 작이다.” (문내한, 〈경성 팔대문과 오대궁문의 유래〉, 《별건곤》 제23호, 1929년 9월 27일) 광화문 해치상이 이세욱李世旭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근거 기록이다. 이세욱의 정식 직함은 당시 수도방위군인 훈련도감의 기패관旗牌官(종9품 군관)이었다.(김민규, 《별간역 연구》)
광화문 해치상을 두고 어떤 민속학자는 정수리에 뿔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해치가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고, 또 어떤 학자는 경복궁을 수호하는 동물 정도로 가볍게 보았다. 그런가하면 일부 풍수가들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는 동물로 해석하고 있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견해는 사실과 다르다.
1870년 2월 12일 대한제국의 고종은 왕의 수레를 타고 광화문 밖으로 행차할 때 사람과 말이 시위대 안으로 난입하는 일이 없게 하라면서 다음과 같이 명한다. “지금 이후로 동가動駕할 때 시위대 속으로 인마가 난입하는 일이 있으면 승정원과 병조는 엄한 질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승정원은 병조를 엄히 신칙하고, 해치獬豸이내에서는 백관이 말을 타지 못하도록 함께 엄히 신칙하라”(《승정원일기》) 백관들이 말을 해치상 안쪽 공간에서는 타지 못하게 한 것이니 이로써 그 동물상이 바로 광화문 앞 해치상임이 재확인된다.

2. 해치상의 수난의 역사
그림 2 원래 자리에 있을 때의 해치상 모습

▲그림 2 원래 자리에 있을 때의 해치상 모습

일제강점기인 1923년 10월 어느 날 저녁, 광화문 앞 해치상은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그 즈음 일본 사람들은 부업공진회(1923년 10월)를 개최한다고 부산을 떨었고, 또 한편에서는 총독부(1916년 6월 기공, 1926년 완성) 건물이 외형을 거의 갖추어 가고 있었다. 총독부 공사로 인해 경복궁 담이 헐리고 궁궐터에 길이 뚫리는 등 모든 것이 만신창이가 되는 판국에 해치라고 해서 제 자리를 지킬 수 있겠는가. 당시 해치상의 수난을 지켜 본 동아일보 기자는 이런 기사를 썼다.
“성이 헐린 터에 길이 되고, 임금이 있던 대궐 터에 총독부가 들어서는데, 너만이 편안히 살 수 있겠느냐, 그러나 춘풍추우 지키던 그 자리를 떠날 때에 네가 마음이 있다면 방울 같은 눈매에도 응당 눈물이 흘렀으리라. 긴
세월 동안 위엄 있고 유순하게 경복궁을 지키고 섰던 네가 무슨 죄가 있어서 무지한 사람들이 다리를 동이고 허리를 매어 끌어갔으랴. 말 못하는 너는 시키는 대로 끌려갔을 뿐이었다.”(동아일보, 1923.10.23)
처음에는 해치상이 어디로 옮겨 갔는지 몰랐다. 얼마 후 총독부 청사 서편 담장 밑에 방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기자는 그곳을 찾았다. 해치상은 조금의 배려도 받지 못하고 거적을 쓴 채 버려져 있었다. 이 모습을 본 기자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또 이런 기사를 썼다.
“너의 꼴을 보러 대궐 안에 들어가니 너는 한편 모퉁이에 참혹히 들어 누워 있더라. 그것을 본 흰옷 입은 사람의 가슴이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느냐. 끝없이 일어나는 감회를 무엇이라 표현하겠느냐. 무슨 하늘도 못 볼 큰 죄나 지은 것처럼 거적자리를 둘러쓰고, 고개를 돌이켜 우는 듯, 악을 쓰는 듯 반기는 듯 원망하는 듯한 해치를 발견하고 가슴이 뜨끔하였다. 옛 주인이 경복궁 뒤로 밀려 나가고 낯선 사람들이 지어 놓은 총독부 새집 앞에서 모든 학대와 갖은 구박을 다 받는 해치의 신상을 염려하는 조선 사람들이 많은 것을 그가 안다면 피나는 설움이라도 참을 듯 할 것이다.”(동아일보, 1925, 9.15)
수모를 당하고 있던 해치는 총독부 건물이 완성되자 청사 앞으로 옮겨졌다. 조선왕조의 정궁을 지키던 해치가 일제의 아성을 지키는 꼴이 된 것이다. 그렇게 있다가 해방 후 제3공화국 때 콘크리트로 광화문을 복원하면서 해치상을 문 좌우 궁벽 가까이에 옮겨놓았다. 그리고 2010년에는 광화문을 목조로 다시 지은 후에는 약 5m 남쪽으로 이전했다. 원위치는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앞쪽 근처였으니 이 자리 역시 원래 자리가 아님은 말할 필요가 없다.

3. 해치라는 존재의 의미
그림3 해치상의 위치 변화

▲그림3 해치상의 위치 변화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금수禽獸는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등 동물을 의미한다. 그래서 “금수만도 못한 놈”이라는 말은 가장 치욕적인 말이 된다. 고대 동양인에게 있어 인간과 금수를 구별하는 기준은 몸의 형상이 아니라 정신에 있었다. 복희씨伏羲氏(삼황三皇의 첫째로 꼽히는 중국 전설상의 제왕)는 사람 머리에 뱀의 몸을 가지고 있고, 신농씨神農氏(삼황 중 두 번째 황제. 정식 이름은 염제)는 소머리에 사람의 몸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사람 형상은 아니지만 성인聖人의 덕을 가지고 있어 숭배할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금수이고 금수가 아닌 것은 몸의 형상이 아니라 정신과 행동에 있다고 그들은 보았던 것이다.
고대인들은 기린·봉황·거북·용을 사령四靈이라 불렀다. 그만큼 이들 동물은 인간 이상으로 존귀하고 신령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해치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문헌에 나타나는 해치의 이름은 해치解廌·신양神羊·식죄識罪·해타獬駝·해호觟護 등 다양하다. 해치獬豸라는 명칭은 중국의 여러 고전에 자주 등장하고 있지만, 외형적 특징에 관해서는 설명이 서로 엇갈린다. 《사기집해史記集解》나 《후한서》에서는 해치를 사슴의 일종으로 설명하고 있고, 《설문해자》에서는 소를 닮았다고 말하고 있다. 왕충의 《논형論衡》에서는 뿔이 하나 달린 일각수一角獸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물지異物志》에서는 “동북지방의 거친 곳에 사는 짐승을 해치라고 한다. 뿔이 하나에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올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고, 사람이 논란을 벌이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물어뜯는다” 라고 했다.
최근 중국 고고학자와 서예가들의 해치에 관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해치는 진나라 이전부터 봉니封泥, 화상석, 인장 등에 자주 나타났고, 그 형태는 양羊과 비슷하다고 한다. 산서성 혼원渾源의 이욕촌李峪村에서 출토된 전국시대 청동기 파편에서 해치상이 발견되었는데, 짧은 꼬리에 양의 발굽을 가지고 있었고, 뿔이 하나 달린 것이 확인되었다. 연구의 결론은 해치는 한 종류의 구체적인 동물로 보기 어려우며, 처음에는 양의 형상으로 묘사되다가 동한東漢 시대 이후부터는 소의 형상을 닮은 동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4. 해치와 고요皐陶
그림4 《순종효황제산릉주감의궤》에 수록된 해치

▲그림4 《순종효황제산릉주감의궤》에 수록된 해치

《고종실록》 1870년 10월 7일에 해치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전교하기를, ‘대궐 문에 해치獬豸를 세워 한계를 정하니, 이것이 곧 상위象魏이다. 조정 신하들은 그 안에서는 말을 탈 수가 없는데, 이것은 노마路馬(왕이 타는 수레를 끄는 말)에 공경을 표하는 뜻에서이다. 조금 전에 출궁할 때 보니 종승인從陞人이 그 안에서 말을 타고 있던데 이것이 어찌 사체事體(일의 이치와 정황)와 도리에 맞겠는가? 전후에 걸쳐 신칙한 하교를 엄중히 했는데도 한갓 형식이 돼버렸으니 이같이 하고서 어떻게 기강이 서겠는가? 지금부터는 사헌부에서 규찰하여 계문啓聞하라.”

고종이 해치를 두고 상위象魏라고 했다. ‘상象’은 ‘법法’, ‘위魏’는 ‘고高’를 뜻한다. ‘상위’는 고대에 법률을 높은 성문 밖에 게시한 데서 나온 말로 궁궐문의 의미로도 사용되었고, 전轉하여 법률제도 또는 법의 엄정한 적용을 의미하는 말로도 쓰였다.
해치가 법과 정의의 상징 동물임은 ‘법法’의 고자古字인 ‘법灋’자 모양만 봐도 알 수가 있다. ‘법灋’은 ‘법法’과 ‘치廌’를 결합하여 만든 글자로, 여기서 ‘수氵’는 물이 항상 수평을 유지하듯이 법의 평등함을 의미하고 ‘치廌’는 해치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해치에 대한 ≪논형論衡≫ 시응편是應篇의 기록을 보자.
“해호觟護라는 짐승이 있는데, 이 짐승은 뿔이 하나밖에 없으며, 죄를 지은 사람을 찾아내는 신통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한다. 고요皐陶라는 사람이 순임금 때 법관으로 있었는데, 죄가 있는지 없는지 의심스러울 때 이 동물로 하여금 그 사람을 받게 하였다. 죄가 있는 사람이면 뿔로 받고, 죄가 없는 사람이면 받지 않았다.”
고요皐陶라는 사람은 나라 안팎에 횡행하는 오랑캐 무리를 물리쳐 백성의 피해를 줄였고, 형벌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어지러운 풍기를 바로잡은 순舜의 현신이었다. 《맹자孟子》 〈진심盡心 상上〉에, “도응桃應이라는 사람이 순 임금의 천자가 되고 고요가 법관이 되었는데, 순 임금의 아버지 고수瞽瞍가 만약 사람을 죽였다면 고요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법을 집행하여 살인자인 고수를 붙잡을 뿐이다” 라고 대답한 내용이 보인다. 이처럼 고요는 철두철미 법과 정의를 공평하게 집행하는 법관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림5 ‘法’의 고자古字

▲그림5 ‘法’의 고자古字

법과 정의의 수호자로서 해치는 사헌부 관원의 모자나 공복의 흉배에 수놓아지기도 했다. 사헌부 법관과 관원들이 특별히 해치관獬豸冠을 쓴 것은 시비곡직을 정확히 분별하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경국대전≫ 규정에 의하면, 조복 사량관 앞에 해치를 붙인다고 돼 있고, 집의執義(사헌부 종3품) 이하도 같다고 규정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어사御使가 해치관을 썼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도京都 사헌부 조에, “무릇 관부의 제명題名(관리의 공적과 과오를 기록하는 것)이란 옛날부터 있던 것이니, 헌부憲府에 있어서는 관계가 더욱 중한 것이다. 지금부터 계속하여 해치관(冠)을 높이 쓰고 백필白筆(사관이 사용하는 붓으로 항상 사모에 비녀처럼 꽂았다)을 꽂고 앉아 아무는 어질었고, 아무는 충성했고 아무는 아첨했고 아무는 간사했다고 평하여, 착한 것은 법 삼고 악한 것을 경계한다면 나라는 맑게 될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고대인들의 마음 속에 해치가 항상 법의 수호자로서 살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해치는 선악을 구별하여 정의를 수호하는 동물이다. 그렇지만 광화문 앞에 해치상을 세운 뜻은 단순히 이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보다 깊은 곳에는 조선왕조의 덕치주의에 대한 염원과 포부가 자리 잡고 있다. 해치와 짝을 이룬 고요가 말한 것처럼 유가儒家의 정치이상은 덕치주의다. 왕이 된 자는 정치적 수완을 기르기에 앞서 성심으로 덕행에 노력하고 정의로써 정사를 운영하면 천하의 선량한 인재들이 모여 국사 계획을 돈독히 할 것이고, 따라서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편안하여 임금의 감화가 온 천지에 미치게 된다. 이것이 곧 ‘광피사표화급만방光被四表化及萬邦’이고 이 뜻을 축약한 것이 ‘광화문光化門’이라는 궐문 이름이다. 광화문과 해치상, 이들 양자는 서로 모양은 달라도 왕도정치를 이 땅에 펴려는 조선 군신들의 정치적 이상과 포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

그림6 조경趙儆묘 출토 해치흉배(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뿔이 한 개다

▲그림6 조경趙儆묘 출토 해치흉배(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뿔이 한 개다

 

글 : 허균(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저자에 관하여

월간 민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