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를 풍미한 정물화, 책거리

책거리는 책과 물건을 그린 정물화다. 영어로 ‘Books and Things’로 번역한다. 약간씩 뜻의 차이가 있지만 문방도, 책가도, 서가도, 기명절지 등이 책거리류의 그림이다. 책거리에는 조선후기에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두 아이템인 책과 물건이 등장한다. 문치국가인 조선에서 존중받는 책이 중심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억제했던 물건이 책과 공존하는 현상은 의미심장하게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조선후기 대표 화목인 책거리를 통해 당시 급변했던 시대상황을 살펴보도록 한다.


조선후기에 급부상한 정물화

제목을 보고, 갸우뚱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정물화라면 으레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 프랑스의 샤르댕(Jean-Siméon Chardin, 1699~1779), 세잔(Paul Cézanne, 1839-1906) 등 서양의 근대 화가들을 떠올린다. 과연 조선시대에 정물화가 있었을까? 책거리라는 존재는 알지만, 책거리를 정물화로 인식하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조선 후기인 18, 19세기에 정물화가 다채롭게 발달했다. 바로 책의 정물화인 책거리다. 문치국가 조선시대를 상징하는 절대적인 물건이 책이란 점을 생각해 보면, 조선시대에 책의 문화, 책의 예술이 발달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책거리의 정물화적인 특성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회화사 책 어디에도 정물화 운운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책거리는 조선을 대표하는 ‘한국적인 정물화’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점은 단순히 조선시대에 정물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책거리를 비롯한 정물화가 조선후기 화단을 풍미한, 아니 대표하는 장르였다는 점을 설파하는 것이다. 조선후기에 새롭게 떠오른 장르는 실경산수화, 풍속화다. 이들 장르는 조선전기만 하더라도 거의 존재감이 없었지만, 조선후기에 급부상했고 아울러 시대를 이끌었다. 그런데 이들 그림 못지않게 주목할 장르가 바로 책거리다. 금강산도를 비롯한 진경산수는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고, 풍속화는 우리의 삶이 예술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모티브인지를 보여줬다. 책거리는 그동안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않았던 보석 같은 장르다. 서예박물관 이동국 부장은 2016년 <문자도책거리전>에서 “우리만 미처 몰랐던 우리의 보물”이라고 촌평한 것은 그런 인식의 소산이다.

선조들의 끔찍한 책사랑

책은 조선시대의 권력이다. 책을 통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배계층에 진입하며, 권력을 부릴 수 있게 된다. 과거장에 점점 응시생들이 들끓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익(李瀷, 1681~1763)의 글에 따르면, 매년 응시자가 늘어 과거장에 들어오면 발을 돌릴 땅이 없어서 밟혀 죽는 자가 점점 많아진다고 했다. 또한 응시하는 날에는 소 의원과 농사꾼도 다 용감하게 달려오고, 노예나 기타 미천한 무리들도 한 몫을 차지했다. 먼 시골 인사들이 과거에 한 번 응시하려면, 밭을 팔고 곡식을 털어내어 모두가 파산 지경에 이른다. 만일 헛걸음으로 집에 돌아가면, 베틀 북은 비어 있고 처자는 원망하게 된다고 했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이처럼 중요한 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의 책사랑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책을 대하면 하품도 하지 말고, 책을 대하면 기지개도 켜지 말고, 책을 대하면 침도 뱉지 말고, 만일 기침이 나면 고개를 돌리고 책을 피하라. 책장을 뒤집을 때 손가락에 침을 바르지 말며, 표시를 할 때는 손톱으로 하지 말라. … 책을 베개 삼아 베지도 말고, 책으로 그릇을 덮지도 말며, 권질卷帙을 어지럽히지 말라. 먼지를 털어 내고, 좀벌레를 없애며, 햇볕이 나는 즉시 책을 펴서 말려라. 남의 서적을 빌려 볼 때에는 글자가 그르친 데가 있으면 교정하여 쪽지를 붙여 주며, 종이가 찢어진 데가 있으면 때워 주며, 책을 맨 실이 끊어졌으면 다시 꿰매어 돌려주어야 한다.”

모두 16가지 조항으로 이뤄진 책을 다루는 방법에 관한 지침은 단순한 삶의 요령이라기보다는 세상에서 가장 존중해야할 아이템이 책이란 점을 강조한 것이다. 지금도 우리가 책을 접하면서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실수들을 열거했는데, 남의 책을 수리해서 돌려보내줘야 한다는 것은 지금과는 정서적으로 차이가 난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책에 미쳐서 스무 살 되던 해 겨울 초가가 너무 추워서 《한서 漢書》를 이불 위에 덮고 《논어》를 병풍처럼 세워 추위와 바람을 막았다고 한다. 유난히 조선후기 실학자들 사이에서 책에 관한 실질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물건에 대한 관념의 변화

그런데 물건에 대한 조선의 사대부들의 생각은 매우 부정적이다. 조선의 선비들이 늘 가슴에 새기며 도덕적 경구로 삼은 말인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완물상지玩物喪志’가 그런 인식을 대변한다. ‘격물치지’는 중국 사서의 하나인 《대학》에 나오는 말이다. 격물格物 · 치지致知 · 성의誠意 · 정심正心 ·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의 8조목 가운데 처음 두 조목을 가리킨다. 주자의 해석에 의하면,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면 앎에 이른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물건보다 그 물건의 이치에 방점이 있다. ‘완물상지’는 하찮은 물건에 집착하면 큰 뜻을 잃는다는 뜻이다. 은殷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紂가 성격이 포악하고 백성들에게 재화와 보물들을 거두어들여 호화로운 궁전을 세우고 유흥에 빠지는 바람에 나라가 망했고, 무왕이 주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무왕이 서방의 여旅나라 사신이 헌상한 큰 개 한 마리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소공召公이 무왕에게 “사람을 가지고 놀면 덕을 잃고[玩人喪德], 물건을 가지고 놀면 뜻을 잃습니다[玩物喪志].”고 간언했다. 물건을 조심해서 받아들이라는 의미다. 임금이 물건에 관심을 가지면, 신하들이 득달같이 나서서 ‘완물상지’의 논리로서 경계하는 장면을 《조선왕조실록》에서 가끔 목격하게 된다. 조선사회는 기본적으로 물건을 통한 현실적인 욕망보다는 유교적 이념이나 도덕적 가치로서 세상을 다스렸던 시기다.
그런데 이런 이념의 신화가 조선시대 허리쯤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까지 네 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현실적으로 바뀌었다. 이념보다 물질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격물치지’나 ‘완물상지’로는 현실적인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고, 공리공론에 파묻힐 가능성이 높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경험하듯이, 물건은 우리의 삶을 크게 증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런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그림이 바로 책거리다. 당시 보기 힘든 중국의 화려한 그릇과 물건들로 가득 찬 책거리가 유행하게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조선후기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물건 역시 새롭게 권력적인 존재로 부상한다. 물건을 통해서 기존질서를 흔들 수 있게 된다. 물건을 억압하는 시대에 화려한 물건들로 가득한 책거리가 유행했다는 사실은 물건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어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선후기에는 물건을 더 이상 억제할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책거리에 두 아이템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그런 변화를 실증한다. 책을 통해서 권력을 잡고, 물건을 통해서 물질의 풍요를 증진시키고자 하는 두 가지 현실적 욕망을 책거리를 통해서 풀고 있다. 이념의 사회에서 물건의 사회로 옮겨가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런 점에서 책거리는 조선후기의 변화된 사회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렇다면 왜 물건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났을까? 17세기 초반 중국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일본을 물리치려다 국력이 쇠잔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청나라가 중원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했다. 문제는 조선의 선택이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일본을 물리치다가 몰락하게 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명나라를 이어 중화세계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중원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한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오랑캐라고 야만시하면서 갈등을 빚고 두 차례에 걸쳐 청나라의 침범을 당했다. 자연 청과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신진 문물이 들어오는 중국의 창구가 원활치 못한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됐다.

욕망의 시대가 도래하다

18세기 후반 정조 때에 이르러서 청나라와 무역거래가 보다 활발하게 이뤄졌다. 북경을 다녀온 사신들과 ‘북학파’라 불리는 실용적인 주자학자들은 청나라를 현실적인 관점에서 세계 강국이자 중화문화를 발전시킨 나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이처럼 바뀐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정조 때 비로소 청나라와 교류가 활발해졌다. 당시 조선의 상류계층에서는 중국에 골동을 감상하는 취미가 일어나면서 상당량의 청나라 도자기들이 조선에 유입됐다. 대항해시대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전해진 서양물건들도 함께 들어왔다.
청나라와 교류는 물건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격물치지’나 ‘완물상지’의 이념적 가치관이 물건을 중시하는 현실적인 가치관으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중국을 통해서 중국 및 서양의 문물이 물밀 듯이 들어와 보석처럼 박힌 것이 바로 책거리다. 이 그림은 당시 조선과 중국의 활발한 문화교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인 동시에 물질문화의 풍요로움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도를 널리 알리는 프로퍼갠더 역할을 한다.
어렵사리 수입한 청나라 물건들은 다시 사치풍조의 지탄대상이 됐다. 정조 때 사치풍조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게 된 발단은 여인들의 가채와 같은 복식에서 시작되었다. 정조는 단호하게 가채의 풍습을 막는 금령을 거듭 내렸지만, 사치풍조는 그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사치스러운 저택과 의복, 화려한 거마車馬와 기용器用, 경쟁하듯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잔치와 분수를 넘는 관혼상제까지 생활 전반에 확대됐다. 급기야 중국 황실의 화려한 도자기나 청동기도 사회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경계했던 물건들이 됐다. 결국 계속되는 상소에 정조는 사치풍조를 금하는 지시를 내렸다. 정조가 사치를 금하는 지시를 내렸지만, 사치풍조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 뒤에도 사치를 금해달라는 상소는 계속 이어졌다. 원리원칙을 강조하는 사대부들은 계속 문제를 제기했지만, 정조는 공감하는 정도에 그치고 강력하게 대처한 흔적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물질문화를 도덕적으로 강압하기에 역부족인 욕망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새로운 물건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청나라의 문물과 근대 서양의 과학문명이 조선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실용적인 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조선에서는 청나라와 서양의 물건들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했다. 성리학의 원리주의적인 이념만을 내세우기에 세상이 간단치 않다. 물질에 대한 욕망이 조선시대 삶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책거리는 책과 물건을 통해 조선 후기에 일어난 획기적인 변화상이 극명하게 드러난 상징적인 은유인 것이다.


글 정병모 (미술사가,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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